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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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66회 작성일 2012-09-16 08:58본문
요한복음 8:31-36 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올해는 광복 66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일제 강점기 36년의 치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 이 민족이 당한 핍박과 고통은 실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일본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존의 터전인 영토와 주권국토를 빼앗겼고 소중한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아직도 그 때의 상처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위안부라는 이름 앞에 강제 징용된 당시 10대의 꽃다운 처녀들의 아픔이 아직까지 남아 있음을 보지 않습니까?아직도 사과를 받겠다고 주한 대사관을 향하여 앳된 단발머리 소녀가 계속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은 헬기를 타고 독도까지 가서 위기를 무릅쓰고 한국령 독도를 확인해야 했고 축구 3, 4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이긴 한국은 세계를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만끽하고 즐거운 나머지 박종우 선수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피켓을 들고 환호하다가 동메달 수여 보류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의 만행은 미국의 핵폭탄 공격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에서 개발한 원자폭탄이 히로시마[廣島]에 떨어졌고, 3일 후인 8월 9일 다시 나가사키[長崎]에 2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져 약 11만 명이 사망하자 약 1주일 후인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하자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진정한 해방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탁통치라는 미명하에 남북이 분열이 되었고, 해방 후 5년 만에 한민족끼리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20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고, 한반도는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굴곡이 많은 근대사를 보내면서 자유를 얻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지금도 자유 함을 찾아 이슬람 국가는 많은 대가를 치루고 있지 않습니까? 리비아 카타피 정권은 무너지고 자유로운 투표로 국민에 의한 새로운 정권 창출을 하고 있지만 시리아는 지금도 내전을 겪으며 많은 피를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한 핏줄인 북한은 자유 함을 얻기 위하여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할지 감히 누구하나 예측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대가를 지불하였다고 해서 진정한 자유 함을 누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것에도 자유하십니까?세상에 그 무엇으로 인하여 삶의 즐거움도 없고 심지어 살고 싶지 않는 아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억압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저께는 중견 탤런트 아내가 아들 세 명을 모텔방에서 베게로 코와 입을 막아 죽게 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자신의 삶이 자유로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까지 죽음에 몰아넣어야 하는 압박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세상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하지 않습니까?
부부가 자유롭지 못하고 부모 자식 간에 그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우 간에도 그러함을 보지 않습니까?
탈출구를 찾아라
1775년 미국의 독립 전쟁 당시 페르릭 헨리가 버지니아 하원에서 외친 말이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의 그렇게 갈망하는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32절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 고 하십니다.
36절 아들이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자유로워지리라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지역을 총 관할하는 총독으로 파송을 받아 부임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한다.
진리가 무엇이냐? 사실은 모든 인류가 진리 앞에 서야 하고, 진리를 찾아야 인생의 진정한 삶의 자유 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자유인가?
국어사전에는 자유란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속받거나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 자유의 정의가 정당할까요?
자유를 이해할 때 무엇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가 자유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유는 항상 법이나 질서와 같은 어떤 권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유도 법이나 질서와 같은 권위를 벗어나면 그 순간부터 자유하기는 커녕 방종과 타락이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가 신호등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달린다든지, 또는 차를 주차할 때 장소를 불문하고 아무데서나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또한 언론이나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영사전에는 하나만의 자유를 말하지 않고 또 하나의 자유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억압되거나 종이 되지 아니하는 상태라고 하였지만 다음으로 지켜야 할 책임을 포함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의 개념, 곧 예수님은 진정한 자유를 어떻게 설명해 주셨을까요?
죄에 대한 자유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속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에 대한 자유를 자유라 하지 않고 자신의 소욕을 위해서 행하는 일들과 그 결과를 자유라고 속고 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들을 부립니다. 사실 내 자신을 봅시다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자신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욕심이 지나치게 강한 자의지에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어떤 무엇에 순종하여 지배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거기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아직도 내 욕심과 의지에 메여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자라고 하는 것은 죄에서 자유로운 자를 말합니다.
이 죄가 우리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인간의 창조시의 형편과 인간이 범죄한 후의 형편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창조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26-27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in God's image)라고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람을 위하여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이 에덴동산에는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곳에 두시고 에덴동산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이 에덴동산의 환경은 무엇이 부족하거나 흠이 전혀 없는 완전한 상태였습니다.
역시 사람도 완전하고, 인격적인 존재였습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이곳에서 하나님과 완전하게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의미와 참된 자유와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한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창2:15-18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면 그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인격이라는 그 자체가 자기 욕심에 더 이끌리다보니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억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여자는 잉태의 고통과 함께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남편에게서 자유를 외치고 뛰쳐나가지만 또 다른 남자가 나를 억압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5명을 바꾸고 지금 있는 남편도 만족하지 못해 바꿀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도 이런 계획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해결이 안 돼
남자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고,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벌어주어도 벌어 주어도 죽을힘을 다해 벌어 주어도 욕 안 얻어먹으면 다행입니다.
돈 못 버는 남자는 사람도 아닙니다. 집에 못 들어오고 집나갑니다
노숙이 편합니다. 돈 벌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제아무리 큰 소리 떵떵 치면 뭐합니까? 죽는데
제 죽을 줄 모르고 큰소리치는 그 자체가 웃기는 일 아닙니까?
스스로 자유를 떠나 구속의 자리에 들어 간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자유를 얻는 것은 자기 쟁취를 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없는 행복과 자유감에 속지 말고 언제 나를 배신 때리게 될지 모릅니다.
부부도 부자도 교우 간에도 어떤 인간관계도 그러합니다. 배신 많이 맞습니다.
땅의 환경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불편스럽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세속을 떠나가는 곳이 있지요 산 속으로 이민을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마찬가집니다.
나의 변화가 없이는 똑같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어떤 법과 질서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법과 질서 안에 머물 때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인생이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곧 말씀을 따름에 있습니다. 더 이상 고생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행26:14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렘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그 예수님 자신이 자유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32절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 고 하십니다.
36절 아들이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자유로워지리라
아직도 유대인들이 이 말씀에서 말하는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33절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참된 자유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3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죄의 지배를 받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자유개념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유는 죄에서의 자유입니다.
예수 안에서의 자유 즉 진리가 자유롭게 하는 삶은 어떤 삶을 말할까요?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주님의 제자로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진리를 알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데이비드 왓슨(D. Watson)의 제자도(두란노, 1990)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들의 삶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바치는 사람들,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이 세상을 위하여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산 제물을 드릴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민족을 구한 에스더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왕후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말씀 앞에 드림에 있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죽어도 자 유함이 그를 지배한 것입니다.
이 자유함이라면 죽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자신 마음대로 행하는 하만은 자신이 진정한 자유자로 생각하였지만 결국 그는 죄의 종으로 절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말씀이 내 생활의 지배원리가 되어 그 말씀의 지배를 온전히 받아 모든 삶의 영역을 그리스도의 지배아래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직업과 결혼생활과 레저 활동, 교회 활동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 자신의 의지와 다를 수 있고, 부모님이나 직장의 상사의 뜻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때에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주님의 제자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서도 인간적인 의지로 하는 것이지 자유 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믿고 자기의 삶을 위탁하기보다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 자기의 감정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위치로 전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자유롭게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실상은 죄에 속박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건강을 잃을까 보아서 새벽에 기도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체면 때문에 큰 소리로 기도하지 못하고, 체면 때문에 정직하지 못하고, 체면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전도하지 못하고, 체면과 명예와 돈 때문에 비신앙적인 요소나 불신앙적인 요소를 버리지 못합니다. 술자리에 가서 술자리를 피하지 못하고, 부도덕한 자리를 과감하게 버리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과 지위 때문에 불신앙적인 요소를 버리지 못하여 복잡하고 불편한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복잡하게 계산하지 말고 단순하게 믿고 순종해 보기를 바랍니다. 새벽에 기도해 보기를 바랍니다. 명예와 체면과 지위와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순종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를 누려보기를 바랍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살며,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제자가 될 때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합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나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는 세계도 있다는 것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광복 66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일제 강점기 36년의 치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 이 민족이 당한 핍박과 고통은 실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일본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존의 터전인 영토와 주권국토를 빼앗겼고 소중한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아직도 그 때의 상처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위안부라는 이름 앞에 강제 징용된 당시 10대의 꽃다운 처녀들의 아픔이 아직까지 남아 있음을 보지 않습니까?아직도 사과를 받겠다고 주한 대사관을 향하여 앳된 단발머리 소녀가 계속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은 헬기를 타고 독도까지 가서 위기를 무릅쓰고 한국령 독도를 확인해야 했고 축구 3, 4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이긴 한국은 세계를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만끽하고 즐거운 나머지 박종우 선수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피켓을 들고 환호하다가 동메달 수여 보류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의 만행은 미국의 핵폭탄 공격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에서 개발한 원자폭탄이 히로시마[廣島]에 떨어졌고, 3일 후인 8월 9일 다시 나가사키[長崎]에 2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져 약 11만 명이 사망하자 약 1주일 후인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하자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진정한 해방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탁통치라는 미명하에 남북이 분열이 되었고, 해방 후 5년 만에 한민족끼리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20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고, 한반도는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굴곡이 많은 근대사를 보내면서 자유를 얻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지금도 자유 함을 찾아 이슬람 국가는 많은 대가를 치루고 있지 않습니까? 리비아 카타피 정권은 무너지고 자유로운 투표로 국민에 의한 새로운 정권 창출을 하고 있지만 시리아는 지금도 내전을 겪으며 많은 피를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한 핏줄인 북한은 자유 함을 얻기 위하여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할지 감히 누구하나 예측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대가를 지불하였다고 해서 진정한 자유 함을 누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것에도 자유하십니까?세상에 그 무엇으로 인하여 삶의 즐거움도 없고 심지어 살고 싶지 않는 아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억압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저께는 중견 탤런트 아내가 아들 세 명을 모텔방에서 베게로 코와 입을 막아 죽게 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자신의 삶이 자유로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까지 죽음에 몰아넣어야 하는 압박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세상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하지 않습니까?
부부가 자유롭지 못하고 부모 자식 간에 그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우 간에도 그러함을 보지 않습니까?
탈출구를 찾아라
1775년 미국의 독립 전쟁 당시 페르릭 헨리가 버지니아 하원에서 외친 말이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의 그렇게 갈망하는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32절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 고 하십니다.
36절 아들이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자유로워지리라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지역을 총 관할하는 총독으로 파송을 받아 부임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한다.
진리가 무엇이냐? 사실은 모든 인류가 진리 앞에 서야 하고, 진리를 찾아야 인생의 진정한 삶의 자유 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자유인가?
국어사전에는 자유란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속받거나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 자유의 정의가 정당할까요?
자유를 이해할 때 무엇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가 자유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유는 항상 법이나 질서와 같은 어떤 권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유도 법이나 질서와 같은 권위를 벗어나면 그 순간부터 자유하기는 커녕 방종과 타락이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가 신호등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달린다든지, 또는 차를 주차할 때 장소를 불문하고 아무데서나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또한 언론이나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영사전에는 하나만의 자유를 말하지 않고 또 하나의 자유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억압되거나 종이 되지 아니하는 상태라고 하였지만 다음으로 지켜야 할 책임을 포함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의 개념, 곧 예수님은 진정한 자유를 어떻게 설명해 주셨을까요?
죄에 대한 자유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속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에 대한 자유를 자유라 하지 않고 자신의 소욕을 위해서 행하는 일들과 그 결과를 자유라고 속고 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들을 부립니다. 사실 내 자신을 봅시다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자신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욕심이 지나치게 강한 자의지에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어떤 무엇에 순종하여 지배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거기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아직도 내 욕심과 의지에 메여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자라고 하는 것은 죄에서 자유로운 자를 말합니다.
이 죄가 우리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인간의 창조시의 형편과 인간이 범죄한 후의 형편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창조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26-27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in God's image)라고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람을 위하여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이 에덴동산에는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곳에 두시고 에덴동산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이 에덴동산의 환경은 무엇이 부족하거나 흠이 전혀 없는 완전한 상태였습니다.
역시 사람도 완전하고, 인격적인 존재였습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이곳에서 하나님과 완전하게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의미와 참된 자유와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한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창2:15-18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면 그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인격이라는 그 자체가 자기 욕심에 더 이끌리다보니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억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여자는 잉태의 고통과 함께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남편에게서 자유를 외치고 뛰쳐나가지만 또 다른 남자가 나를 억압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5명을 바꾸고 지금 있는 남편도 만족하지 못해 바꿀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도 이런 계획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해결이 안 돼
남자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고,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벌어주어도 벌어 주어도 죽을힘을 다해 벌어 주어도 욕 안 얻어먹으면 다행입니다.
돈 못 버는 남자는 사람도 아닙니다. 집에 못 들어오고 집나갑니다
노숙이 편합니다. 돈 벌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제아무리 큰 소리 떵떵 치면 뭐합니까? 죽는데
제 죽을 줄 모르고 큰소리치는 그 자체가 웃기는 일 아닙니까?
스스로 자유를 떠나 구속의 자리에 들어 간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자유를 얻는 것은 자기 쟁취를 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없는 행복과 자유감에 속지 말고 언제 나를 배신 때리게 될지 모릅니다.
부부도 부자도 교우 간에도 어떤 인간관계도 그러합니다. 배신 많이 맞습니다.
땅의 환경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불편스럽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세속을 떠나가는 곳이 있지요 산 속으로 이민을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마찬가집니다.
나의 변화가 없이는 똑같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어떤 법과 질서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법과 질서 안에 머물 때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인생이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곧 말씀을 따름에 있습니다. 더 이상 고생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행26:14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렘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그 예수님 자신이 자유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32절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 고 하십니다.
36절 아들이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자유로워지리라
아직도 유대인들이 이 말씀에서 말하는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33절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참된 자유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3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죄의 지배를 받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자유개념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유는 죄에서의 자유입니다.
예수 안에서의 자유 즉 진리가 자유롭게 하는 삶은 어떤 삶을 말할까요?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주님의 제자로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진리를 알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데이비드 왓슨(D. Watson)의 제자도(두란노, 1990)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들의 삶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바치는 사람들,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이 세상을 위하여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산 제물을 드릴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민족을 구한 에스더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왕후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말씀 앞에 드림에 있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죽어도 자 유함이 그를 지배한 것입니다.
이 자유함이라면 죽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자신 마음대로 행하는 하만은 자신이 진정한 자유자로 생각하였지만 결국 그는 죄의 종으로 절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말씀이 내 생활의 지배원리가 되어 그 말씀의 지배를 온전히 받아 모든 삶의 영역을 그리스도의 지배아래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직업과 결혼생활과 레저 활동, 교회 활동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 자신의 의지와 다를 수 있고, 부모님이나 직장의 상사의 뜻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때에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주님의 제자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서도 인간적인 의지로 하는 것이지 자유 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믿고 자기의 삶을 위탁하기보다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 자기의 감정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위치로 전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자유롭게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실상은 죄에 속박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건강을 잃을까 보아서 새벽에 기도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체면 때문에 큰 소리로 기도하지 못하고, 체면 때문에 정직하지 못하고, 체면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전도하지 못하고, 체면과 명예와 돈 때문에 비신앙적인 요소나 불신앙적인 요소를 버리지 못합니다. 술자리에 가서 술자리를 피하지 못하고, 부도덕한 자리를 과감하게 버리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과 지위 때문에 불신앙적인 요소를 버리지 못하여 복잡하고 불편한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복잡하게 계산하지 말고 단순하게 믿고 순종해 보기를 바랍니다. 새벽에 기도해 보기를 바랍니다. 명예와 체면과 지위와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순종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를 누려보기를 바랍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살며,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제자가 될 때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합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나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는 세계도 있다는 것을 배우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