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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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55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
지금 정치계에서는 누가 대통령 후보 감이 되느냐? 에 관심이 쏠려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이 요구가 되겠지만 그 중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보는 조건은 누가 깨끗한 가입니다. 아니 누가 죄를 지었느냐? 입니다. 정죄의 눈으로 모두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야당의 모 후보 감은 빌라 사건이 터져 인기가 하락하고 있습니다.
여당의 모 대통령 후보는 경선에 나왔다가 부정 뇌물이 문제가 되어 대통령 경선 후보를 사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구속 수감 중에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도 죄는 결코 눈을 감아 줄 수가 없고 그리고 누구든지 그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원칙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탄은 눈을 부릅뜨고 정죄 하기에 혈안이 되고 있으니 아무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지은 죄도 그냥 넘어 가는 법이 없는데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는 죄는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죄인은 정녕 죽을 찌니라고 하셨습니다.
곧 죄의 값은 죽음으로 그 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가 사망을 가져온다는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왜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왜? 예수를 그렇게 열심히 믿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대개의 사람들은 왜 자신이 죄인인 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은 명백한 증거에 의하여 자신이 불의하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전에는 자신은 항상 선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텔레비전 같은 곳을 통해서 보면은 죄의 증거가 드러나기 전에는 한사코 자신의 죄성을 부인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그 죄의 증거를 드러내면 그 때에 고개를 숙이고 죽을 죄인이니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까? 스스로를 속이며 의인인체 하며 외식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사실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이 사실을 한사코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거룩성에 우리의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형편이 없는 것인데 비참하다 못해 거의 죽을 것만 같음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 뵙고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사6:5) 하나님을 볼 때 자신이 망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누가 나를 이 가운데서 구원하실 자가 누구인가를 요구하게 되지만 그 누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악에서 그 값을 대신 치르고 사람을 살 릴 수가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의 죄로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에 대한 형벌로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죄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죽으심에 내어놓으신 것을 믿으면 구원함을 받을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이 속죄 사실을 믿지 아니하면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셔야만 하는가?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농부에게 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만 했는가에 대한 참뜻을 설명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농부가 목사님에게 닭장으로 함께 가보자고 했는데 둥지에 암탉 한 마리가 앉아있었는데 그 머리에는 상처가 나 축 쳐져 죽어 있고 그 암탉 날개 밑에서 새끼병아리들이 주둥이를 내밀고 밖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농부가 말했습니다. 저 머리에 난 상처를 좀 보십시오. 간밤에 족제비가 피를 몽땅 빨아먹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새끼들이 족제비에게 다칠까봐 꼼짝도 않고 다 당하고 가만히 있었던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선생님 이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의 모습과 꼭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움직일 수도 있었고 거기에서 내려와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움직였더라면 그가 내려 왔다 면은 선생님과 나는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농장 주인은 목사님의 말뜻을 깨닫고는 얼마 되지 않아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영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하심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믿어지십니까? 그러면 너와 너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이번에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임을 깊이 생각해 보며 경건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경배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영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죄악은 부모와 자식간을 갈라놓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하
고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죄의 잔을 마시지 않아 인류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제 뜻은 개의치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거부하시면 온 인류는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당신이 죽으시기 위해 그 잔을 마셨습니다. 그 잔은 아주 아주 쓴잔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아버지에게 처절하게 버림을 당하시게 되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예수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한번도 혼자 두시지 않았는데 그러나 우리의 죄악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누가 당해야 할 것을 당하고 있습니까?
에수님이 당하지 않으면 내가 당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쓴잔이 우리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심적으로 당한 고난이 있습니다.
사람이 원수에게 배신당하는 일이야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 사랑하고 돌봐준 사람이 배신할 때,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믿고 사랑했던 제자가 은 30냥에 팔아 넘긴 것입니다. 소위 인신 매매를 당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제자들은 비겁하게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감옥이나 죽는 곳까지라도 가겠다고 말하며 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의 뜰로 끌려가셔서 밤새도록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주먹으로 맞아서 얼굴이 너무나도 퉁퉁히 부어 올랐고 피투성이가 되고 수염이 뽑히어 생살이 묻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어서 얼굴과 몸이 침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누가 당해야 할 것을 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지 않으면 내가 당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날 위하여 날 위하여 예수 간구하시네 형님같이 대신하여 중한 고통 당했네
이같은 고통을 당하실 때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보시는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하는 것도 부족해서 나중에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의 언덕으로 걸어가실 때 평소에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병고 침을 받고 은혜를 받은 군중들이 그 받은 사랑과 은혜를 원수로 같았습니다.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이것보다 더 처참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누가 당해야 할 것을 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지 않으면 내가 당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도 극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성경에 이르신 그 창조주, 만 왕의 왕이 일개 지역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신 후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께서 죄수가 입은 홍포를 입히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채찍으로 소 돼지를 몰 듯이 등을 때렸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인 고난으로 밤새도록 한숨도 못 주무시고 아무 것도 잡숫지 못하신 예수님을 또 나무에 묶고 40에 1 감한 매를 때립니다.
그 당시 로마 군인이 사용한 채찍은 다섯 개의 가지가 있는데 가지마다 그 끝에 쇠고리가 붙어있습니다. 한번 채찍으로 때리면 다섯 가지가 몸에 파고 들어가고 채찍을 당기면 등이 그대로 푹푹 살이 파헤쳐집니다.
이것을 39차례나 맞았습니다. 예수님의 등은 다 찢어져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이것이 누가 당해야 할 것을 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지 않으면 내가 당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난 후 주님께서는 그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갈보리 산을 향해서 걸어가는데 수도 없이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갈보리 언덕에서 발가벗겨진 채 십자가에 양손과 발을 대못으로 박히신 후 하늘과 땅 사이에 높이 매달렸습니다.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6시간만인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통상 해가 지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데 예수님은 기진 맥진하여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예수님 좌우에 못 박힌 강도는 아직 죽지 않아서 해지기 전 그들을 십자가에서 내려놓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그들의 무릎을 잘랐습니다. 그래서 피를 흘리게 해서 죽게 됐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운명했기 때문에 그들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창이 심장을 꿰뚫자 물과 피가 흘러 내렸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보통 인간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잘리 우지 않았다 함은 그의 죽으신 이유는 심장이 안에서 터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버림받은 극한 고통과 정신적으로 배신당한 괴로움, 고독 그리고 육체의 고통이 예수님을 짓눌러 더 이상 감당하실 수가 없어서 예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고 하는 순간에 그의 심장이 터져버린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은 심장이 터질 듯한 것이 아닌 터져 버린 고통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러한 고난을 하나도 남긴 없이 다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참으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시기에 그 위대한 사랑의 힘에 잡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당하신 것입니다. 억지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은 그를 향하여 네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고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고 조롱했습니다.
그 말은 참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구원하였되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혼자서 그 모진 고통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로 아니면 영영 형벌 받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할렐루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질병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4.5)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절래 절래 고개를 흔들지 말고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채하지 말고 나의 더럽고 추악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악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타는 쓰레기장이나 혹은 분뇨 처리장 옆을 지날 때면 그 악취 때문에 코를 막고 도망을 가지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것들이 다 내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럴 때 우리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참혹한 십자가가 벌주고 있는 죄악에 대해 눈을 돌려야 하며 동시에 그것들이 다 내게서 나온 것들임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강도들 사이에 서 있는 예수의 십자가는 날카롭게 내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내 죄가 얼마나 무섭고 중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한번도 전율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감사한 것으로 받아 드리려면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움과 깊은 자각이 앞서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강도와 함께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거기서 불타고 있는 내 죄를 바라봅시다. 내 죄를 깊이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을 것이요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세상 끝날 까지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며 날마다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금 정치계에서는 누가 대통령 후보 감이 되느냐? 에 관심이 쏠려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이 요구가 되겠지만 그 중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보는 조건은 누가 깨끗한 가입니다. 아니 누가 죄를 지었느냐? 입니다. 정죄의 눈으로 모두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야당의 모 후보 감은 빌라 사건이 터져 인기가 하락하고 있습니다.
여당의 모 대통령 후보는 경선에 나왔다가 부정 뇌물이 문제가 되어 대통령 경선 후보를 사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구속 수감 중에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도 죄는 결코 눈을 감아 줄 수가 없고 그리고 누구든지 그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원칙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탄은 눈을 부릅뜨고 정죄 하기에 혈안이 되고 있으니 아무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지은 죄도 그냥 넘어 가는 법이 없는데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는 죄는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죄인은 정녕 죽을 찌니라고 하셨습니다.
곧 죄의 값은 죽음으로 그 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가 사망을 가져온다는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왜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왜? 예수를 그렇게 열심히 믿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대개의 사람들은 왜 자신이 죄인인 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은 명백한 증거에 의하여 자신이 불의하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전에는 자신은 항상 선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텔레비전 같은 곳을 통해서 보면은 죄의 증거가 드러나기 전에는 한사코 자신의 죄성을 부인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그 죄의 증거를 드러내면 그 때에 고개를 숙이고 죽을 죄인이니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까? 스스로를 속이며 의인인체 하며 외식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사실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이 사실을 한사코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거룩성에 우리의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형편이 없는 것인데 비참하다 못해 거의 죽을 것만 같음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 뵙고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사6:5) 하나님을 볼 때 자신이 망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누가 나를 이 가운데서 구원하실 자가 누구인가를 요구하게 되지만 그 누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악에서 그 값을 대신 치르고 사람을 살 릴 수가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의 죄로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에 대한 형벌로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죄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죽으심에 내어놓으신 것을 믿으면 구원함을 받을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이 속죄 사실을 믿지 아니하면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셔야만 하는가?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농부에게 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만 했는가에 대한 참뜻을 설명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농부가 목사님에게 닭장으로 함께 가보자고 했는데 둥지에 암탉 한 마리가 앉아있었는데 그 머리에는 상처가 나 축 쳐져 죽어 있고 그 암탉 날개 밑에서 새끼병아리들이 주둥이를 내밀고 밖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농부가 말했습니다. 저 머리에 난 상처를 좀 보십시오. 간밤에 족제비가 피를 몽땅 빨아먹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새끼들이 족제비에게 다칠까봐 꼼짝도 않고 다 당하고 가만히 있었던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선생님 이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의 모습과 꼭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움직일 수도 있었고 거기에서 내려와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움직였더라면 그가 내려 왔다 면은 선생님과 나는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농장 주인은 목사님의 말뜻을 깨닫고는 얼마 되지 않아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영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하심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믿어지십니까? 그러면 너와 너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이번에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임을 깊이 생각해 보며 경건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경배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영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죄악은 부모와 자식간을 갈라놓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하
고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죄의 잔을 마시지 않아 인류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제 뜻은 개의치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거부하시면 온 인류는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당신이 죽으시기 위해 그 잔을 마셨습니다. 그 잔은 아주 아주 쓴잔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아버지에게 처절하게 버림을 당하시게 되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예수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한번도 혼자 두시지 않았는데 그러나 우리의 죄악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누가 당해야 할 것을 당하고 있습니까?
에수님이 당하지 않으면 내가 당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쓴잔이 우리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심적으로 당한 고난이 있습니다.
사람이 원수에게 배신당하는 일이야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 사랑하고 돌봐준 사람이 배신할 때,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믿고 사랑했던 제자가 은 30냥에 팔아 넘긴 것입니다. 소위 인신 매매를 당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제자들은 비겁하게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감옥이나 죽는 곳까지라도 가겠다고 말하며 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의 뜰로 끌려가셔서 밤새도록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주먹으로 맞아서 얼굴이 너무나도 퉁퉁히 부어 올랐고 피투성이가 되고 수염이 뽑히어 생살이 묻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어서 얼굴과 몸이 침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누가 당해야 할 것을 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지 않으면 내가 당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날 위하여 날 위하여 예수 간구하시네 형님같이 대신하여 중한 고통 당했네
이같은 고통을 당하실 때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보시는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하는 것도 부족해서 나중에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의 언덕으로 걸어가실 때 평소에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병고 침을 받고 은혜를 받은 군중들이 그 받은 사랑과 은혜를 원수로 같았습니다.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이것보다 더 처참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누가 당해야 할 것을 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지 않으면 내가 당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도 극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성경에 이르신 그 창조주, 만 왕의 왕이 일개 지역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신 후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께서 죄수가 입은 홍포를 입히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채찍으로 소 돼지를 몰 듯이 등을 때렸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인 고난으로 밤새도록 한숨도 못 주무시고 아무 것도 잡숫지 못하신 예수님을 또 나무에 묶고 40에 1 감한 매를 때립니다.
그 당시 로마 군인이 사용한 채찍은 다섯 개의 가지가 있는데 가지마다 그 끝에 쇠고리가 붙어있습니다. 한번 채찍으로 때리면 다섯 가지가 몸에 파고 들어가고 채찍을 당기면 등이 그대로 푹푹 살이 파헤쳐집니다.
이것을 39차례나 맞았습니다. 예수님의 등은 다 찢어져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이것이 누가 당해야 할 것을 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지 않으면 내가 당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난 후 주님께서는 그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갈보리 산을 향해서 걸어가는데 수도 없이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갈보리 언덕에서 발가벗겨진 채 십자가에 양손과 발을 대못으로 박히신 후 하늘과 땅 사이에 높이 매달렸습니다.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6시간만인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통상 해가 지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데 예수님은 기진 맥진하여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예수님 좌우에 못 박힌 강도는 아직 죽지 않아서 해지기 전 그들을 십자가에서 내려놓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그들의 무릎을 잘랐습니다. 그래서 피를 흘리게 해서 죽게 됐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운명했기 때문에 그들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창이 심장을 꿰뚫자 물과 피가 흘러 내렸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보통 인간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잘리 우지 않았다 함은 그의 죽으신 이유는 심장이 안에서 터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버림받은 극한 고통과 정신적으로 배신당한 괴로움, 고독 그리고 육체의 고통이 예수님을 짓눌러 더 이상 감당하실 수가 없어서 예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고 하는 순간에 그의 심장이 터져버린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은 심장이 터질 듯한 것이 아닌 터져 버린 고통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러한 고난을 하나도 남긴 없이 다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참으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시기에 그 위대한 사랑의 힘에 잡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당하신 것입니다. 억지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은 그를 향하여 네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고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고 조롱했습니다.
그 말은 참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구원하였되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혼자서 그 모진 고통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로 아니면 영영 형벌 받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할렐루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질병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4.5)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절래 절래 고개를 흔들지 말고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채하지 말고 나의 더럽고 추악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악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타는 쓰레기장이나 혹은 분뇨 처리장 옆을 지날 때면 그 악취 때문에 코를 막고 도망을 가지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것들이 다 내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럴 때 우리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참혹한 십자가가 벌주고 있는 죄악에 대해 눈을 돌려야 하며 동시에 그것들이 다 내게서 나온 것들임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강도들 사이에 서 있는 예수의 십자가는 날카롭게 내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내 죄가 얼마나 무섭고 중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한번도 전율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감사한 것으로 받아 드리려면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움과 깊은 자각이 앞서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강도와 함께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거기서 불타고 있는 내 죄를 바라봅시다. 내 죄를 깊이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을 것이요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세상 끝날 까지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며 날마다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