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현장에서 살아 역사 하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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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1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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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1-10 삶의 현장에서 살아 역사 하시는 예수님
여러분들은 춘삼월 이 계절에 수많은 생명의 환희를 만끽하고 있지 않습니까?
겨우내 죽은 것만 같았던 삼라 만상이 생명의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매년 느끼는 계절이지만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계절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렇게도 아름다운 생명의 색깔들을 토해 놓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창조주의 능력을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거의 순식간이라고 할 정도로 요 며칠 사이에 온갖 꽃들이 느더러지게 피어 우리의 시각을 황홀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자꾸만 마음은 누군가가 부를 것 같아 밖으로 뛰쳐나가고 치닫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찌 목련은 그렇게도 하얀빛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목련에다가 그렇게 하얀 색을 페인트칠을 했습니까?
노랑 색은 이런 것이냐 하고 확실히 우리의 인상에 지울 수 없도록 피어나는 개나리는 어떻고요 그리고 두보의 시인이 이런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두견새가 노래하며 피를 토하여 내는 곳마다 붉디붉게 피어 나는 진달래는 내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앵두나무 우물가에 처녀 총각 바람이 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안 나는 것이 이상하지요 그러면 생명이 없는 목석이지요 나도 살아 있어 나도 생명이야 하며 생명의 존재를 인식하며 충동질되는 때가 아닙니까?
제 나이 벌써 반백이 되었는데 이 좋은 시절에는 누가 약간만 바람을 집어넣으면 눈이 라도 한번 깜짝하면 바람이 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이유겠지요
여러분 겨우 내에 죽은 줄로만 안 나무에서 이렇게도 아름다운 생명이 도약 할 줄을 어찌 알았습니까?
바짝 말라 버린 땅 속에서 각종 식물들이 푸르름의 삯을 쏘옥 내어 미는 것이 어찌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나 죽은 줄로만 안 그 나무와 식물 속에는 따스한 봄을 기다리는 생명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양대로 생명의 싹을 틔우고 꽃이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까?
이와 같은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 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닙니까?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는 자연들도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여건이 조성이 되기만 하면 그 생명이 살아 꽃이 피고 싹을 피우듯이 오늘 우리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생명의 근원이 있으면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아무리 멀쩡히 생긴 큰 나무도 겨우내 병이 든다던지 혹은 동사를 한다든지 말라 버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는 더 이상의 생명의 여력이 없기 때문에 따스한 봄의 기운이 다가와도 싹을 틔우기는커녕 생명적인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나무를 죽었다 하여 잘라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면 생명의 근원이 남아 있기에 여러분 새 봄이 될 때에 거기에는 새로운 순이 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은 그 속에는 다시 살아 날 수 있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살리는 생명의 근원인 그 속에 계심으로 사람들이 못을 박고 십자가에서 죽이고 무덤에다가 장사를 지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은 살리는 영인 성령입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 뿐만 아니라 예수를 살리신 생명의 근원이 되신 성령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우리 죽을 몸도 살아 난 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얼마나 엄청난 일이 기에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는 수용 할 수가 없는 하나님의 지식이다.
인간의 지식은 어떠합니까? 사망이 인간의 종착역입니다.
그 결국은 사망과 죽음 앞에서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가 살아 계실 때에 사랑을 많이 받은 마리아라는 여자는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죽은 지 삼일만에 장사가 잘 되었는가를 살펴보러 왔습니다.
요사이 우리 나라에서 하는 삼우제 정도로 여기면 되겠지요
그는 그 예수가 다시 살아 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무덤 가운데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보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보통 사람들의 예수를 향한 지식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우리 인간의 생활에는 생명적인 일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가 믿음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들이나 아니 가장 멍한 사람들조차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한심하게 여기고 어리석게 여기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도 예수와 친분이 있는 이 여인도 이 정도 밖에 아닌데 전혀 예수를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은 두말 할 나위도 없는 것이지요
야 예수를 믿으니 내 주먹을 믿어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언제까지나 부활의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고 무덤에 장사를 지냈지만 예수님은 삼일만에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이 오늘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에서 예수의 시신의 상태를 알아보려 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죽는 자 가운데서 만나려고 찾아 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런 역사를 하지 못하시는 분으로 알고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할렐루야!
그의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하루는 인도에서 선교사 스탬리 죤스가 설교를 하고 있는데 설교 도중에 한 이슬람 사람이 나서서 우리는 당신들이 못 가진 것을 가지고 있소.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마호멧의 시체가 담겨있는 관이 있고 또 무덤이 있소, 그래서 정말 마호멧이라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기독교도는 예루살렘에 가보시지요. 거기에는 빈 무덤밖에 없지 않소. 그때 스탬리 죤스 박사는 고맙습니다. 당신의 말이 진실인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빈 무덤밖에는 없는 것입니다.하고 답변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다시 살아났다는 종교는 없습니다.
모두가 죽음 앞에는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신이 아니다는 가장 좋은 증거가 되지 않습니까?
불교의 석가모니(BC 566-486)는 인도의 가비라 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29세에 세상을 버리고 그는 고(苦)를 통하여 자기극복과 자비와 인(仁)을 가르쳤지만 죽어서 무덤을 남겼습니다. 공자(BC 551-479)는 유교의 창시자로 정치에 마음을 두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나 제자를 양성하며 ꡔ논어ꡕ를 지어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죽어서 중국의 산동성에 무덤을 남겼습니다. 마호메트도 회교를 창설하고 많은 제자를 남겼으나 메디나에 무덤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남긴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기독교만이 생명의 종교요 죽음을 극복한 산 종교임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부인한다 할지라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다면 결코 부인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믿지 않을 수가 없고 또한 믿을 때가 예수을 살리시는 그 생명의 영이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를 진실로 믿는 사람은 살아 게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인 줄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이 지식은 인간의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고 그를 직접 만났을 때에 인간은 수용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어도 부인 할 수가 없는 일이지요
여기 여인들은 시신인 예수를 찾아갔다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또한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아직 예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못하던 분들이 예수님을 만나 팔자를 고치시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815년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해상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국민은 웰링턴 장군으로부터 보내 오는 전쟁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신호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신호는 “웰링턴이 패했다”는 비보였습니다. 그때 영국 국민들은 이 비보를 듣고 패배감과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다시금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그 신호의 내용은 “웰링턴 장군이 적을 패배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영국 국민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패 한 줄 알았는데 도리어 패배를 시켰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셨던 그 시간은 “예수님이 패했다”는 슬픈 소식이 입과 입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전 지역에 퍼졌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지 삼일만에 바로 오늘 새벽에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은 빈 무덤을 발견한 제자들과 여인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가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소식이 전파되면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새 역사의 아침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가 패했다”가 아니라 “예수가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승리의 축제의 날입니다. 인류의 최대 승리가 예수의 부활입니다.
‘이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할렐루야!
그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으로 인하여 망 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당신의 생명과 하늘의 구원과 축복을 받을 자리로 인도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 오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생전에 생활했던 삶의 현장인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에는 살아 계신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에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사람이 자신의 앞길에 죽음이 놓여 있는 사람과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와의 생활은 굉장한 차이가 날 것입니다.
바로 죽음과 생명의 차이입니다.
죽음에 놓여 있는 자는 그의 행하는 일들이 모두다 죽음과 관여 된 일이기 때문에 그에게서 나는 냄새는 사망의 냄새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자의 생활은 무엇을 하든지 모두가 생명적인 일이기 때문에 날마다 사는 맛이 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자가 행복 할 수 있고 더 잘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죽음을 향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생명을 얻는 삶이 되고 싶습니까?
생명을 잃어버린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생명이 위태로운 수술을 받아야 할 중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의사 선생님의 손을 붙들고 “나는 돈과 명예와 지위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습니다. 나의 생명만 살려 주신다면 얼마든지 돈을 드리겠습니다.” 라며 잘 고쳐 달라고 거듭거듭 간곡히 애원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의사 선생님은 그 환자에게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지위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당신이 건강이 없으므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인생의 삶에서 그 모든 것들의 기본이 됩니다. 재물의 부유함도 권력도 자신이 불치의 병으로 죽는다면 한낱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고 모든 것의 가치를 부정해 버리고 모든 것의 존재의 의미를 말소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싫어하고 슬퍼하고 죽음자체를 멀리하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20에 바울사도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했으니 예수를 믿는 자는 첫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둘째, 셋째, 열매, 수천 수만 가지의 열매가 맺게 되는 것과 같이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 모두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이 소식보다 더 복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데 왜 믿지 못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무얼 내어 노아라고 합니까? 무얼 하라고 합니까?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값없이 영원히 얻는데 이것이 무엇이 잘 못 되었다는 말입니까?
이제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여러분의 생활은 믿은 그 순간부터 축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는 역사가 일어 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성 괴테는 만일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까지는 당신은 무수한 슬픔의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기쁨의 순례자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요 무신론자인 볼테르는 50년 안에 자기가 기독교를 다 파괴시키겠다고 하고 100년 안에는 성경이 없어지고 만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죽음이 임박할 때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성의 시대」란 책을 쓴 무신론자 토마스 페인은 죽어가면서 “내가 쓴 이성의 시대란 책을 출판하지 않았더라면, 그 책을 모두 거두어들일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오 주님! 나를 도와주옵소서. 나를 구원하옵소서. 나 혼자 있으면 지옥같이 무섭습니다.”라고 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신론자요 죽음의 존재를 부정한 사람들도 이렇게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죽음을 긍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게 된 것은 세상의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생명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 앞에 죽게 된 일들이 많아도 괜찮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 순간에 사는 역사가 일어 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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