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주의 뜻을 구하여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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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17회 작성일 2012-11-26 09:49본문
마태복음 26:36-46 이제는 주의 뜻을 구하여야 할 때입니다.
스페인 남쪽 72km 지점에 알까자르(Alcazar) 성이 있습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좌파민주주의를 추구하던 공화파와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민족파 간의 최대 격전지였습니다. 병력과 무기 등에서 월등한 공화파가 당연히 모든 면에서 우세했습니다. 그리하여 알까자르 성 안에 완전히 포위당한 민족파는 전원 옥쇄(玉碎) 할 각오를 가지고 모스까르도(Moscardo) 대령의 일사 분란한 지휘 아래 항복은커녕 무려 70일 동안을 이 성안에서 하루 한 끼로 버티며 결사항전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렇게 죽기를 무릎 쓰고 대항하자 성의 함락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공화파의 지휘관은 마침 성 밖에 살고 있는 모스까르도 대령의 아들 루이스를 인질로 잡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모스까르도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는 최후통첩과 동시에 아들 루이스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당시 모스까르도 대령이 성 안에서 지휘본부로 사용하던 방에는 지금도 모든 집기가 그때 그대로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스까르도 대령이 공화파 대장과 아들 루이스와 나누었던 통화 내용이 문자로 벽에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녹음기의 스피커를 통해서 음성으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화파대장: 지금 발생하고 있는 학살과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은 바로 당신들에게 있소. 명령하건대 10분 이내에 항복하시오. 만약 거부할 경우, 지금 나의 수중에 잡 혀 있는 당신의 아들 루이스를 총살하겠소. 모스까르도 : 알고 있소. 공화파대장: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지금 당장 당신의 아들에게 전화를 바꾸어 주겠소. 루 이 스 : 아버지! 모스까르도 : 그래 얘야! 어떠니? 루 이 스 : 괜찮아요. 그런데 만약 아버지께서 투항하지 않으면 저를 총살 시키겠대요. 모스까르도 : 그럼 너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거라. 그리고 스페인 만세를 힘차게 외치고 애국자답게 죽거라. 루 이 스 : 아버지! 저의 마지막 힘찬 키스를 아버지께 드립니다. 모스까르도 : 루이스야! 나도 이별의 키스를 너에게 보낸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이들 부자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아들 루이스는 아버지의 말을 좇아 하나님께 기도드린 다음 당당하게 스페인 만세를 부르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의연한 루이스의 죽음을 계기로 전세는 역전되어 성 안에 갇혀 있던 민족파가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본문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실 때에 죄인을 위하여 죽게 하심이었습니다.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예수님은 3번씩이나 고백하기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일로 사탄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게 되고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무엇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인가? 가 나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구하여야 할 것인가를 정하지 못하고 그냥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고 말씀하셨으니 무엇을 기도한다고 다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으니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까지 이것 주시오, 저것 주시오가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주시는 것이니 가장 근본 되는 것을 기도하라고 했으니 무엇을 구하여야 할까?
이 질문에 대답이 본문에 있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 소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한 마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이같이 동일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드렸습니다.
내 기뻐하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했습니다.
내가 왜 존재하는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존재의 의미 상실은 상당한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을 이루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셨습니까?
37-38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에는 육신적인 여러 가지의 일들을 거슬러야 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슬퍼하고 그리고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한 고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마음에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얻기까지 반복적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단을 내리십니다.
46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름에 자신을 드리기에 주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일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요12:27-28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이 땅에 오심의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병자를 치유 하실 때보다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실 때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나타내실 때보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내어 놓은 그 일이 가장 영광된 일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은해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은혜를 그냥 주시는데 아직도 나의 소욕을 구하는 은혜만을 내 기도의 제목을 삼고 있으니 데에서 머물러 있기에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내 인생이 배부르다 만족스럽다 행복하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참으로 영광스럽다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영광을 받고 영광을 돌리시기를 원해서 나를 두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찾아 헤매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하니 아버지의 뜻이 내게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인데, 이는 곧 인생을 사는 의미가 됩니다.
인간은 저마다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원 성취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소원성취가 사람을 만족하게 합니까? 빨리 중단하고 여기에서 만족 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해 집니다.
그런데 사람은 현 수준에서 만족을 하지 못합니다. 소원대로 된다 하여 거기서 만족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크면 클수록 빈곤 의식과 궁핍증과 갈급함을 더욱 증대시키게 됩니다.
사람은 자족하는 은혜가 없기 때문에 불평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왕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놀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많은 곳을 여행하지만 그렇게 만족을 못하고 있습니다.
고후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유대인들의 교훈집인 탈무드에는 부자가 되는 비결이 있는데 부자는 가진 것을 족하게 여기는 자가 부자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어진 축복, 주어진 은혜, 주어진 선물로 생각하고 감사하고 이것도 없는 것보다는 만족하라는 생각을 가져야 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가진 것을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처한 자리와 입장, 이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소원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자족감,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하는 신앙이 인생을 기쁘고 만족하게 사는 지혜요, 기도라는 점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게 주어진 것들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믿음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보다 더 행복감을 누리고 아니 더 존귀한 삶이 될 수 있음은 주신 은혜 만족합니다 에서 한 것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는 신앙의 궁극적 성취를 요약하는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나 순종하고 고향과 부모와 친척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갔다
히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신앙은 이성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은 합리적 논리와 과학적 확증에 의존하는데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인도하심에만 의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 지식과 합리성은 실패하나 신앙이 실패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실패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하고의 수준을 넘어 나에게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삶의 모든 것도 아버지의 뜻을 구하다가 살고 인간의 마지막 이 목숨까지도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과 같이 사나 죽으나 아버지의 것이니 살아도 은혜요 죽어도 은혜입니다.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신앙의 고백이지만 사실은 나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인생살이가 아쉬워서 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구하지만 하나님께도 이것저것을 그때마다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고 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간구하고 무엇이든지 구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준다 하여 그것이 과연 내 영혼을 살리고, 선을 이루고, 신앙을 살찌우는 것이 될 것인가?
이것만으로 안 됩니다.
사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광야의 이스라엘 육신적인 것이 부족하여 죽은 것 아닙니다.
옷도 낡지 않고 발도 부릅터지 않고 매일 양식이 내리고 고기도 먹고 아프지도 않고 매일 기적 가운데 살았습니다.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것은 아직도 욕심이 가득라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말씀이 생명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한 최초의 죄악이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여 내 뜻, 내 욕망을 채우려 했던 것처럼 신앙생활 속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거기에서도 내 뜻, 내 소원, 내 욕망이 하나님의 뜻과 대립되고 대결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 바로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 내 신앙, 내 경륜을 앞세우려는 무서운 죄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구하다가도 잘못하면 그 구하는 것이 내 욕망의 충족을 위한 것으로, 그리고 그 욕망의 충족 때문에 결국 내 영혼과 내 사명과 내 신앙을 잊어버리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기도는 결국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 외에 무슨 다른 기도가 있을까?
신앙의 종착역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뿐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 기도 없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숨쉬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보통사람은 숨 쉬는 것을 참을 수 있는 시간이 고작 수분에지나지 않고 숨을 쉬지 않으면 뇌에 손상을 입게 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숨을 쉬고 있는 동안만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다운 성도가 되는 것,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 기독교가 기독교답게 되는 것은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죽었고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죽었고 기도하지 하지 않는 기독교는 죽은 기독교입니다.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시험에 들었다는 것은 시험 받을 때에 믿음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택했을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문제 앞에서 밤새 고민하시면서 기도하시는 것은 시험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지요. 시험에 들지 않으신 겁니다.
차라리 시험에 드셨더라면 십자가도 피하고 더 이상의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지 않으시는 바람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신 거지요.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어려워지면 시험에 든 것이고 편안해지면 시험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에 편안한 쪽만을 택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기도가 필요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오늘 본문에서도 분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피곤함 때문이지요. 우리도 세상일에 피곤합니다. 돈 문제를 생각하다가 피곤하고, 내 소원과 욕망을 이루지 못한 것에 실망하다가 피곤하고, 내 욕심을 챙기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분주하다가 피곤하고, 세상의 여흥과 놀이에 빠져 지내다가 피곤하고, 어떻게 하든 내 것을 불리기 위해서 무슨 수라든지 쓰려는 생각에 머리 굴리다가 피곤하고, 이런 저런 세상일들 앞에서 피곤한 바람에 기도할 시간을 놓치고, 그러다가 결국은 시험에 들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고 주의 뜻을 이루기를 기도하므로 내 인생이 영광을 돌리고 영광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스페인 남쪽 72km 지점에 알까자르(Alcazar) 성이 있습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좌파민주주의를 추구하던 공화파와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민족파 간의 최대 격전지였습니다. 병력과 무기 등에서 월등한 공화파가 당연히 모든 면에서 우세했습니다. 그리하여 알까자르 성 안에 완전히 포위당한 민족파는 전원 옥쇄(玉碎) 할 각오를 가지고 모스까르도(Moscardo) 대령의 일사 분란한 지휘 아래 항복은커녕 무려 70일 동안을 이 성안에서 하루 한 끼로 버티며 결사항전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렇게 죽기를 무릎 쓰고 대항하자 성의 함락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공화파의 지휘관은 마침 성 밖에 살고 있는 모스까르도 대령의 아들 루이스를 인질로 잡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모스까르도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는 최후통첩과 동시에 아들 루이스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당시 모스까르도 대령이 성 안에서 지휘본부로 사용하던 방에는 지금도 모든 집기가 그때 그대로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스까르도 대령이 공화파 대장과 아들 루이스와 나누었던 통화 내용이 문자로 벽에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녹음기의 스피커를 통해서 음성으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화파대장: 지금 발생하고 있는 학살과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은 바로 당신들에게 있소. 명령하건대 10분 이내에 항복하시오. 만약 거부할 경우, 지금 나의 수중에 잡 혀 있는 당신의 아들 루이스를 총살하겠소. 모스까르도 : 알고 있소. 공화파대장: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지금 당장 당신의 아들에게 전화를 바꾸어 주겠소. 루 이 스 : 아버지! 모스까르도 : 그래 얘야! 어떠니? 루 이 스 : 괜찮아요. 그런데 만약 아버지께서 투항하지 않으면 저를 총살 시키겠대요. 모스까르도 : 그럼 너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거라. 그리고 스페인 만세를 힘차게 외치고 애국자답게 죽거라. 루 이 스 : 아버지! 저의 마지막 힘찬 키스를 아버지께 드립니다. 모스까르도 : 루이스야! 나도 이별의 키스를 너에게 보낸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이들 부자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아들 루이스는 아버지의 말을 좇아 하나님께 기도드린 다음 당당하게 스페인 만세를 부르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의연한 루이스의 죽음을 계기로 전세는 역전되어 성 안에 갇혀 있던 민족파가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본문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실 때에 죄인을 위하여 죽게 하심이었습니다.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예수님은 3번씩이나 고백하기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일로 사탄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게 되고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무엇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인가? 가 나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구하여야 할 것인가를 정하지 못하고 그냥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고 말씀하셨으니 무엇을 기도한다고 다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으니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까지 이것 주시오, 저것 주시오가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주시는 것이니 가장 근본 되는 것을 기도하라고 했으니 무엇을 구하여야 할까?
이 질문에 대답이 본문에 있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 소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한 마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이같이 동일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드렸습니다.
내 기뻐하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했습니다.
내가 왜 존재하는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존재의 의미 상실은 상당한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을 이루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셨습니까?
37-38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에는 육신적인 여러 가지의 일들을 거슬러야 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슬퍼하고 그리고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한 고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마음에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얻기까지 반복적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단을 내리십니다.
46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름에 자신을 드리기에 주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일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요12:27-28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이 땅에 오심의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병자를 치유 하실 때보다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실 때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나타내실 때보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내어 놓은 그 일이 가장 영광된 일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은해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은혜를 그냥 주시는데 아직도 나의 소욕을 구하는 은혜만을 내 기도의 제목을 삼고 있으니 데에서 머물러 있기에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내 인생이 배부르다 만족스럽다 행복하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참으로 영광스럽다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영광을 받고 영광을 돌리시기를 원해서 나를 두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찾아 헤매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하니 아버지의 뜻이 내게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인데, 이는 곧 인생을 사는 의미가 됩니다.
인간은 저마다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원 성취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소원성취가 사람을 만족하게 합니까? 빨리 중단하고 여기에서 만족 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해 집니다.
그런데 사람은 현 수준에서 만족을 하지 못합니다. 소원대로 된다 하여 거기서 만족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크면 클수록 빈곤 의식과 궁핍증과 갈급함을 더욱 증대시키게 됩니다.
사람은 자족하는 은혜가 없기 때문에 불평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왕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놀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많은 곳을 여행하지만 그렇게 만족을 못하고 있습니다.
고후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유대인들의 교훈집인 탈무드에는 부자가 되는 비결이 있는데 부자는 가진 것을 족하게 여기는 자가 부자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어진 축복, 주어진 은혜, 주어진 선물로 생각하고 감사하고 이것도 없는 것보다는 만족하라는 생각을 가져야 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가진 것을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처한 자리와 입장, 이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소원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자족감,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하는 신앙이 인생을 기쁘고 만족하게 사는 지혜요, 기도라는 점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게 주어진 것들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믿음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보다 더 행복감을 누리고 아니 더 존귀한 삶이 될 수 있음은 주신 은혜 만족합니다 에서 한 것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는 신앙의 궁극적 성취를 요약하는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나 순종하고 고향과 부모와 친척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갔다
히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신앙은 이성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은 합리적 논리와 과학적 확증에 의존하는데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인도하심에만 의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 지식과 합리성은 실패하나 신앙이 실패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실패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하고의 수준을 넘어 나에게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삶의 모든 것도 아버지의 뜻을 구하다가 살고 인간의 마지막 이 목숨까지도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과 같이 사나 죽으나 아버지의 것이니 살아도 은혜요 죽어도 은혜입니다.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신앙의 고백이지만 사실은 나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인생살이가 아쉬워서 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구하지만 하나님께도 이것저것을 그때마다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고 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간구하고 무엇이든지 구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준다 하여 그것이 과연 내 영혼을 살리고, 선을 이루고, 신앙을 살찌우는 것이 될 것인가?
이것만으로 안 됩니다.
사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광야의 이스라엘 육신적인 것이 부족하여 죽은 것 아닙니다.
옷도 낡지 않고 발도 부릅터지 않고 매일 양식이 내리고 고기도 먹고 아프지도 않고 매일 기적 가운데 살았습니다.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것은 아직도 욕심이 가득라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말씀이 생명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한 최초의 죄악이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여 내 뜻, 내 욕망을 채우려 했던 것처럼 신앙생활 속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거기에서도 내 뜻, 내 소원, 내 욕망이 하나님의 뜻과 대립되고 대결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 바로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 내 신앙, 내 경륜을 앞세우려는 무서운 죄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구하다가도 잘못하면 그 구하는 것이 내 욕망의 충족을 위한 것으로, 그리고 그 욕망의 충족 때문에 결국 내 영혼과 내 사명과 내 신앙을 잊어버리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기도는 결국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 외에 무슨 다른 기도가 있을까?
신앙의 종착역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뿐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 기도 없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숨쉬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보통사람은 숨 쉬는 것을 참을 수 있는 시간이 고작 수분에지나지 않고 숨을 쉬지 않으면 뇌에 손상을 입게 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숨을 쉬고 있는 동안만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다운 성도가 되는 것,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 기독교가 기독교답게 되는 것은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죽었고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죽었고 기도하지 하지 않는 기독교는 죽은 기독교입니다.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시험에 들었다는 것은 시험 받을 때에 믿음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택했을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문제 앞에서 밤새 고민하시면서 기도하시는 것은 시험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지요. 시험에 들지 않으신 겁니다.
차라리 시험에 드셨더라면 십자가도 피하고 더 이상의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지 않으시는 바람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신 거지요.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어려워지면 시험에 든 것이고 편안해지면 시험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에 편안한 쪽만을 택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기도가 필요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오늘 본문에서도 분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피곤함 때문이지요. 우리도 세상일에 피곤합니다. 돈 문제를 생각하다가 피곤하고, 내 소원과 욕망을 이루지 못한 것에 실망하다가 피곤하고, 내 욕심을 챙기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분주하다가 피곤하고, 세상의 여흥과 놀이에 빠져 지내다가 피곤하고, 어떻게 하든 내 것을 불리기 위해서 무슨 수라든지 쓰려는 생각에 머리 굴리다가 피곤하고, 이런 저런 세상일들 앞에서 피곤한 바람에 기도할 시간을 놓치고, 그러다가 결국은 시험에 들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고 주의 뜻을 이루기를 기도하므로 내 인생이 영광을 돌리고 영광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