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기도는 바른 축복이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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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37회 작성일 2012-11-2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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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3:5-13 바른 기도는 바른 축복이 임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골 작은 교회의 목사님께 아침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전화를 받아보니 교회에 언제나 충성스런 김 집사였습니다. 집사님, 아침부터 전화를 다하시고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예, 목사님, 아주 좋은 일이 있습니다. 아니, 무슨 좋은 일입니까? 얼른 이야기해 보세요. 예, 목사님, 제가 암에 걸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은 김 집사의 장난이 지나치다 생각했습니다. 에이, 집사님, 아침부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당황스럽습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저 정말로 암에 걸렸습니다. 목사님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색을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집사님, 정말 암에 걸렸습니까 예, 목사님 제가 암에 걸렸답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좋은 일십니까 예, 목사님, 제가 암 보험을 들었거든요. 목사님은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집사님, 암에 걸리지 않아야 좋은 것이지 암에 걸렸는데 암 보험에 들어서 좋다고 하시니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예, 목사님, 제가 주일마다 차량봉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 차가 오래 되어서 오래 전부터 교인들을 모시고 오다가 몇 번이나 고장이 나서 예배 시간에 늦을까봐 속을 태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제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만일 저에게 어떻게 돈이 생기면 그 돈으로 제일 먼저 교회 차를 사서 헌물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는데 제가 암에 걸렸고, 암에 걸렸으니 이전에 들어놓은 암보험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 할 수없이 기쁩니다. 김 집사의 이 말을 듣는 목사님은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집사님의 신앙의 자세에 감동을 받아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후 정말로 김 집사는 암 보험금을 수령했고, 그의 기도대로 새 차를 사서 교회에 헌물 했습니다.
여러분도 어이가 없어지시오 그러나 이해가 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 분이 평상시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를 잘 알 수가 있었습니다.
본문에도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분이 있습니다.
일천 번제라는 엄청난 제사를 드려 놓고도 자기를 위하여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백성들을 공의롭게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감동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번제란 소나 양을 불에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이 그 향을 흠향하시는 제사입니다.
먼저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고 내장을 다 긁어내고 불로 완전히 태워 죄를 만들어 드리는 제사이고 온전히 헌신한다는 뜻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그읆의 검은 연기가 옹기집의 연기같이 올랐을 것입니다.
한꺼번에 번제를 드려도 엄청난 냄새와 광경을 볼 것이요 천 번에 걸쳐 하드라도 그 냄새는 지속적으로 났을 것입니다. 동네방네 다 소문이 나는 것이지요
천 번이라는 말은 한꺼번에 1,000마리를 잡아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1,000번으로 드렸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만 은 이 엄청난 정성의 제사를 드렸으니 틀림없이 그의 제사의 의미가 충분히 드려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의지의 다짐이요 그리고 삶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의지와 삶에 항상 응답하십니다.
5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참 잘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평상시에 바른 의지와 삶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데 대체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보다 그렇지 못한 삶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
또 초등학생 성폭행이 벌어졌는데 참으로 23세 그 청년 안타까운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장차 얼마든지 사회에 공헌하는 귀한 인물도 될 수도 있는데 지금은 그 기회를 놓친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상시의 매일 매일 반복되는 그의 삶의 형태입니다.
술집과 피시방 돈 벌어 거기에 다 쓰고 그 결과 그에게는 본능을 충족시키고 싶은 마음을 억제 할 그 무엇의 대안이 나오지 않으니 본능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가 평상시에 품었던 생각을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마음을 장악하거나 생각을 바뀌게 하거나 하는 그 어떤 요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바뀔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이런 환경에 살면 그렇게 되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닙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모델로 그린 삶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배신한 가륫유다를 그리기 위하여 찾다가 가장 흡사한 인물을 찾아서 그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예수님의 모델을 한자와 배신자 가륫유다의 모델을 한자가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멘토가 되어 주든지 아니면 교회 나와서 청년에 모임에 참여해서 그 무엇인가 자신을 재발견하고 생각을 다스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라도 했다면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여튼 안타까운 인생 그 자를 향해 모두들 엄청난 돌을 던지기를 시작했지 그런 자를 찾아 바로 인도 해 주는 책임과 사명은 가지지 않았음을 이 시회가 교회가 자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의 증거가 바로 이런 이유요 그리고 성도들의 바른 신앙생활도 다 나 잘 되도록 하기 위함인 줄 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른 신앙생활을 하라 하면 거의 자신들을 죽이는 일인 줄로 압니다.
저는 오늘도 새벽에 기도하면서 성도의 마지막까지 그 입에서 기 죽지 말고 해야 할 말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이게 인생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여튼 내 의지와 내 기도와 생활의 삶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 할 때마다 들어 주어도 그 결과는 좋지 않는 것입니다.
세 가지 소원이라는 이솝 우화에 힘들게 사는 노부부에게 숲의 요정이 안타까워서 3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는데 그 순간 할머니가 배가 너무 고픈 생각에 구운 소세지를 구하니깐 한 가지 소원을 낭비한 것으로 여긴 화가 난 할아버지가 그 본래 성질 그 순간에 절제가 되지 않아 그 소세지 할망구 코에나 붙어라 하니 얼마나 소원을 잘 들어 주는지 금방 할머니 코에 붙었으니 이제 큰일입니다 그만 아차 후회하고 소세지 떨어져라 하고 보니 구하기는 많이 구하였는데 그 소원은 다 들어 주었는데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가 일천 번의 제사에서 그의 의지와 생활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7-10절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나는 천방지축을 알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듣게 하옵소서 듣는 마음은 열린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닫혀 있지 않고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열린 예배 열린 예배라고 하는데 세상을 향하여 열린 것보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야 할 것입니다.
사실 솔로몬은 그의 글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극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100% 열린 글을 쓰지 않았습니까? 세권의 구약 성경 잠언, 전도서, 아가서입니다.
이 세권의 책에는 현세를 가장 복되게 사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의 삶은 인간적인 것을 구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일천의 숫자가 제사를 드린 횟수인지 짐승의 숫자인지 분명치는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엄청난 규모고 정성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은 예배 생활 신앙생활이 있었느냐? 는 자신의 소욕을 위함이 아니었음을 그가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에서 알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었을 것입니다.
통상 이들의 기도는 소세지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도였습니다.
모든 이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자기를 위하는 기도가 일색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이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11절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자기를 위한 장수, 자기를 위한 부, 자기에게 해가 된다고 여기면 은 원수를 만들어 죽어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게 하나님이 늘상 들으시는 기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렇지 아니한다는데 감동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통상 번제는 희생제물을 통째로 제단 위에서 불사르는 제사로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 정립을 원할 때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기를 원할 때 누구든지 자발적으로 드릴 수 있는 자원제입니다.
왜 드렸을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드리는 모든 헌신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것이지 나의 의지를 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꼭 헌신 끝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하나님의 의지 보다 자신의 의지가 그 헌신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엄청 감동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어떤 것입니까?
통상 자기의 도를 넘는 희생이나 헌신에 대해서 이성적인 견지에서 이런 말 저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이나 객관적인 판단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은 없이 모양만 갖추려고 하는 헌신, 또 헌신을 통하여 자신의 소욕을 챙기려고 하는 그런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고 계십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감동이 되지 않지요
하나님의 감동은 인간의 소욕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예상하시는 것을 뛰어넘는 솔로몬의 반응을 너무도 좋아하십니다.
지혜를 간구하는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바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이런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자 그 만큼 자기 자신이 대단한 것으로 여깁니다.
지금도 생활을 드리지 못함은 아직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기도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뜻이 내 뜻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것, 즉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하고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태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태도가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을 받는 동기가 됩니다
바르지 않는 기도는 소세지기도 아무런 유익이 없고 바른 기도는 솔로몬의 천 번의 기도 그에게 엄청난 축복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삶의 태도와 헌신 주의 마음에 든지라는 히브리어 아타브는 기쁘게 하다, 즐겁게 하다입니다.
솔로몬의 대답은 하나님을 즐겁게 했으며 기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그가 구한 것과 함께 전무후무한 복이 된 것입니다.
복 받을 행동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12-13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솔로몬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하나님께 번제와 감사의 재물을 드렸습니다.
아멘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는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자는 모든 것을 받는 자입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복되고 존귀케 해 주십시다.
시23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고후 5:9절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사도바울은 이땅에 살든지 아니면 주님의 나라로 가든지 여하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애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의해야 할 단어는 힘쓰노라는 헬라어 필로티메오마이는 애쓰다, 열망하다, 갈망하다입니다.
바울의 갈망과 열망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고 또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는 노력하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엡5:10절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시험하여 보라는 것은 행하여 보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은 무엇이든 행하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즉 나의 삶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3:16-17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요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창조주가 피조물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을 보시며 기뻐하신 것입니다.
마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가 사는 날 동안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열망하고 구해야할 기도의 제목, 애타게 부르짖고 갈구해야할 가장 큰 제목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 알아야 합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귀중하고 위대한 발견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다면, 나의 간절한 기도는 명예도, 돈도, 성공도, 행복도 아닌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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