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자족하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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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48회 작성일 2012-11-26 09:52본문
빌립보서 4:10-13 예수님은 자족하는 비결입니다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어디일까? 아프리카의 우간다, 중앙아메리카의 코스타리카, 인도네시아의 북동부에 있는 방글라데시, 뉴질랜드와 솔로몬군도 사이 호주 옆에 있는 나라 바누아투, 북유럽의 덴마크, 네덜란드,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꼽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북한이 조사한 바로는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중국이고 그 다음이 북한, 한국은 152위, 미국은 203위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하여튼 행복지수를 산출하는 근거와 요인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순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연 행복하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일까? 참 궁금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이나, 동남아에서 아주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다고 하는데,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 불편 없이 잘 적응이 되어있고, 그들에게 스트레스와 심적이 고통을 주는 일이 없거나 적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아무리 잘 사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기들은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행복의 기준은 아프리카 사람들과 다르지요.
그러면 한국인은 얼마나 만족한가? 최근 미국의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한국인의 생활 만족도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81%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극히 주관적입니다.
본문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자랑하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그의 삶의 형태를 성경에서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보통 사람들의 생활보다 낫지 않는 행복이라기보다는 불행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통상 보통 사람들이 보는 시각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고후 11:23-28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본문에서도 그의 삶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삶을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11-12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은 바울은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을 누렸다는 말입니까?
먼저 자족하는 비결이 있는데 그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여기 자족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우타르게스(αυταρχηs)라는 말로 철학자들이 주로 쓰던 윤리적인 용어였다고 합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형편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서 초조해 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서 그 가운데서도 만족하기를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슬람에서 사용하는 아랍어 인샬라는 알라가 뜻하는 대로라는 뜻으로, 아랍인의 일상용어로 사용됩니다.
본문을 쓴 곳은 어디인가 하면 로마의 옥중에서 감금된 상황에서 썼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로마 감옥의 벽은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 너무나 높은 벽이었습니다.
체념하고 원망이나 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형편을 받아 드리고 스스로 만족하기 까지 했다는 것은
내 상황을 하나님의 뜻이겠지 하고 받아드리고만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삶을 만족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는 말이 아니다.
행복이란 체념, 포기, 받아드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든지 눈이 오든지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내 자리를 지켜야지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요사이는 통하지 않지만 유교 사상이 강한 시대에 시집가면 석삼년 동안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봉사 삼년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이거 거의 체념하는 수준이지요 마치 짐승을 길들이듯이 하는 것 아닙니다.
바울의 자족은 내가 희생이 되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하고 복음을 위하는 일에 기꺼이 내 자신을 어떠한 환경에도 내어 놓을 수 있고 오히려 그 환경이 복음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면 오히려 만족하기까지 하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위한 성도를 위한 일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고후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자족은 자신에 대해서 이만하면 만족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자신이 지금 비록 자신에 대해서 만족한다면 인생은 거기에서 멈추어 버리고 맙니다.
제아무리 유명한 교수라 할지라도 연구 실적을 내지 않으면 더 이상 교수직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일에 만족을 해버리면 그는 더 이상 자라거나 커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불만이 생길 것입니다.
자족은 지금의 삶에 만족을 느끼면서도 복음에 부족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참으로 귀한 밀을 하지 않았습니까?
대상17:1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자신의 만족함이 만족이 아니라 복음에 위한 자신을 부단히 드림으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자족은 자기의 운명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일에 착수를 한다. 그러나 그 일이 잘 진전 되지 않을 때 포기하고 만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열 명의 정탐꾼은 그 땅이 비옥하고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포기를 했다.
그들에게는 가만히 있어도 그 아름다운 땅이 운명적으로 자기 것이 되기만을 바랐다.
결코 가만히 있는데 만족은 행복은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스스로 행복을 포기하고 절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노력 없이 가나안은 주어지지 않으니 스스로 포기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열 명의 정탐꾼들은 자기들만의 실패만 그치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끌어 들였습니다.
약점은 내가 생각한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서 그것을 굳히려고 하는데 있다. 동조 세력들을 규합 하려고 하는 것이다.
소인은 운명에 자신을 맡겨 버린다. 대인은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운명을 개척하는 힘을 하나님으로 부터 공급을 받기를 원한다.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은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선한 뜻에 자신을 드리는 믿음은 결실을 가져 오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일찍이 포기해 버린다.
믿음을 포기해 버린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 줄 모릅니다.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자족은 외적인 것을 배제하고 내적인 것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바울의 삶은 외적인 것에 구애 받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힘이 그를 다스리게 했다.
이 말씀은 진정한 행복지수의 근거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나를 부하게 하고, 나를 건강하게 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나를 부요케 하려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주님이 나를 주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993년에 200억 원대의 거액복권에 당첨됐던 재미교포 이옥자씨가 8년 만에 파산했다는 뉴스를 얼마 전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거주하는 이 씨는 당시 약 234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돼 거액을 손에 쥐었으나 과도한 기부와 도박, 투자 실패 등으로 이를 모두 탕진하고 지난 7월초 미연방 미주리 동부지방파산법원에서 파산절차를 밟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복권이 당첨된 후 남편과 이혼하고 가정도 파탄이 났다고 합니다. 결국 복권 당첨이 그의 가정과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원하나 그것은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비극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이런 꿈을 꾸지 마십시오
여기에 행복과 만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부요함도 관리할 능력이 있어야 복인 것입니다.
어릴 적에 가정부의 실스로 소경이 된 J.크로스비라는 앞 못 보는 소경으로서 9,000여 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쓴 사람입니다. 그가 쓴 찬송가가 우리나라 찬송가에 23편이나 수록돼 불리고 있습니다. 337장, 14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434장,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204, 등 은혜로운 찬송시를 많이 쓴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비천한 환경에 절망치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신령한 노래가사를 많이 썼습니다. 그가 아홉 살 때 기도하기를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 해도, 나는 안 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터인데,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게 본문에 말하는 바울의 자족의 비결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12-13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인 샬라를 외치는 이슬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고 율법으로 만족하려다가 보니 지금 죄 없는 무슬림이라는 영화 한편으로 온 중동은 이슬람을 모독함에 보복하는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파키스탄에서는 이 영화를 제작한 자를 죽이면 10만 불을 주겠다고 국가적으로 공포를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게 뭡니까?
바울은 복음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자족은 학습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감정에 이성에만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입니다.
11절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족은 만족이 아니라 부단히 자족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의 스토아파 사람들은 자족을 얻으려면 욕심을 제거하는데서 얻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과 남에게 일어나는 일체의 일에 무감각하도록 감정을 제어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의지력(意志力)으로 자족하기를 실천하라고 하였습니다.
불교에서도 사체(四諦) 팔정도(八正道)를 말하면서 자아(自我)에 붙은 욕심을 버릴 때 가능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제어할 만한 힘이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수양(修養)을 쌓고 의지력으로 자신을 다스려 보려 해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족은 의지력이 아닙니다. 의지는 무너져 내리면 감당이 안 됩니다.
자족은 자족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그 분 안에서 가능합니다.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 힘은 나의 의지력(意志力)이 아니라 내게 그러한 힘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얻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통하여 자족은 배워지게 됩니다.
어떤 곳에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많은 재산을 죽기 전에 좋은 일을 해 보기로 하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무더운 여름, 무엇인가 애써 구하지만 얻지 못하고 생에 지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측은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소원을 물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셋방이라도 얻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강을 회복하였으면 하는 사람, 교육이나 여행을 해보았으면 하는 사람, 그리고 남의 빚을 청산했으면 하는 사람, 더 좋은 직업을 가졌으면 하는 사람 등등...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소원을 말했습니다.
이 부자는 그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 후 얼마를 지났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만족해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도 만족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더 큰 욕심만 생긴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에게는 자족이 없습니다.
자족은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에서도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동행함을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참된 자족의 비결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히12:1-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어디일까? 아프리카의 우간다, 중앙아메리카의 코스타리카, 인도네시아의 북동부에 있는 방글라데시, 뉴질랜드와 솔로몬군도 사이 호주 옆에 있는 나라 바누아투, 북유럽의 덴마크, 네덜란드,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꼽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북한이 조사한 바로는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중국이고 그 다음이 북한, 한국은 152위, 미국은 203위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하여튼 행복지수를 산출하는 근거와 요인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순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연 행복하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일까? 참 궁금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이나, 동남아에서 아주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다고 하는데,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 불편 없이 잘 적응이 되어있고, 그들에게 스트레스와 심적이 고통을 주는 일이 없거나 적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아무리 잘 사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기들은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행복의 기준은 아프리카 사람들과 다르지요.
그러면 한국인은 얼마나 만족한가? 최근 미국의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한국인의 생활 만족도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81%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극히 주관적입니다.
본문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자랑하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그의 삶의 형태를 성경에서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보통 사람들의 생활보다 낫지 않는 행복이라기보다는 불행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통상 보통 사람들이 보는 시각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고후 11:23-28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본문에서도 그의 삶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삶을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11-12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은 바울은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을 누렸다는 말입니까?
먼저 자족하는 비결이 있는데 그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여기 자족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우타르게스(αυταρχηs)라는 말로 철학자들이 주로 쓰던 윤리적인 용어였다고 합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형편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서 초조해 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서 그 가운데서도 만족하기를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슬람에서 사용하는 아랍어 인샬라는 알라가 뜻하는 대로라는 뜻으로, 아랍인의 일상용어로 사용됩니다.
본문을 쓴 곳은 어디인가 하면 로마의 옥중에서 감금된 상황에서 썼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로마 감옥의 벽은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 너무나 높은 벽이었습니다.
체념하고 원망이나 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형편을 받아 드리고 스스로 만족하기 까지 했다는 것은
내 상황을 하나님의 뜻이겠지 하고 받아드리고만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삶을 만족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는 말이 아니다.
행복이란 체념, 포기, 받아드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든지 눈이 오든지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내 자리를 지켜야지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요사이는 통하지 않지만 유교 사상이 강한 시대에 시집가면 석삼년 동안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봉사 삼년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이거 거의 체념하는 수준이지요 마치 짐승을 길들이듯이 하는 것 아닙니다.
바울의 자족은 내가 희생이 되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하고 복음을 위하는 일에 기꺼이 내 자신을 어떠한 환경에도 내어 놓을 수 있고 오히려 그 환경이 복음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면 오히려 만족하기까지 하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위한 성도를 위한 일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고후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자족은 자신에 대해서 이만하면 만족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자신이 지금 비록 자신에 대해서 만족한다면 인생은 거기에서 멈추어 버리고 맙니다.
제아무리 유명한 교수라 할지라도 연구 실적을 내지 않으면 더 이상 교수직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일에 만족을 해버리면 그는 더 이상 자라거나 커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불만이 생길 것입니다.
자족은 지금의 삶에 만족을 느끼면서도 복음에 부족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참으로 귀한 밀을 하지 않았습니까?
대상17:1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자신의 만족함이 만족이 아니라 복음에 위한 자신을 부단히 드림으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자족은 자기의 운명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일에 착수를 한다. 그러나 그 일이 잘 진전 되지 않을 때 포기하고 만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열 명의 정탐꾼은 그 땅이 비옥하고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포기를 했다.
그들에게는 가만히 있어도 그 아름다운 땅이 운명적으로 자기 것이 되기만을 바랐다.
결코 가만히 있는데 만족은 행복은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스스로 행복을 포기하고 절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노력 없이 가나안은 주어지지 않으니 스스로 포기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열 명의 정탐꾼들은 자기들만의 실패만 그치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끌어 들였습니다.
약점은 내가 생각한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서 그것을 굳히려고 하는데 있다. 동조 세력들을 규합 하려고 하는 것이다.
소인은 운명에 자신을 맡겨 버린다. 대인은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운명을 개척하는 힘을 하나님으로 부터 공급을 받기를 원한다.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은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선한 뜻에 자신을 드리는 믿음은 결실을 가져 오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일찍이 포기해 버린다.
믿음을 포기해 버린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 줄 모릅니다.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자족은 외적인 것을 배제하고 내적인 것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바울의 삶은 외적인 것에 구애 받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힘이 그를 다스리게 했다.
이 말씀은 진정한 행복지수의 근거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나를 부하게 하고, 나를 건강하게 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나를 부요케 하려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주님이 나를 주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993년에 200억 원대의 거액복권에 당첨됐던 재미교포 이옥자씨가 8년 만에 파산했다는 뉴스를 얼마 전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거주하는 이 씨는 당시 약 234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돼 거액을 손에 쥐었으나 과도한 기부와 도박, 투자 실패 등으로 이를 모두 탕진하고 지난 7월초 미연방 미주리 동부지방파산법원에서 파산절차를 밟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복권이 당첨된 후 남편과 이혼하고 가정도 파탄이 났다고 합니다. 결국 복권 당첨이 그의 가정과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원하나 그것은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비극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이런 꿈을 꾸지 마십시오
여기에 행복과 만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부요함도 관리할 능력이 있어야 복인 것입니다.
어릴 적에 가정부의 실스로 소경이 된 J.크로스비라는 앞 못 보는 소경으로서 9,000여 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쓴 사람입니다. 그가 쓴 찬송가가 우리나라 찬송가에 23편이나 수록돼 불리고 있습니다. 337장, 14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434장,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204, 등 은혜로운 찬송시를 많이 쓴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비천한 환경에 절망치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신령한 노래가사를 많이 썼습니다. 그가 아홉 살 때 기도하기를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 해도, 나는 안 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터인데,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게 본문에 말하는 바울의 자족의 비결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12-13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인 샬라를 외치는 이슬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고 율법으로 만족하려다가 보니 지금 죄 없는 무슬림이라는 영화 한편으로 온 중동은 이슬람을 모독함에 보복하는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파키스탄에서는 이 영화를 제작한 자를 죽이면 10만 불을 주겠다고 국가적으로 공포를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게 뭡니까?
바울은 복음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자족은 학습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감정에 이성에만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입니다.
11절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족은 만족이 아니라 부단히 자족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의 스토아파 사람들은 자족을 얻으려면 욕심을 제거하는데서 얻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과 남에게 일어나는 일체의 일에 무감각하도록 감정을 제어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의지력(意志力)으로 자족하기를 실천하라고 하였습니다.
불교에서도 사체(四諦) 팔정도(八正道)를 말하면서 자아(自我)에 붙은 욕심을 버릴 때 가능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제어할 만한 힘이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수양(修養)을 쌓고 의지력으로 자신을 다스려 보려 해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족은 의지력이 아닙니다. 의지는 무너져 내리면 감당이 안 됩니다.
자족은 자족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그 분 안에서 가능합니다.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 힘은 나의 의지력(意志力)이 아니라 내게 그러한 힘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얻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통하여 자족은 배워지게 됩니다.
어떤 곳에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많은 재산을 죽기 전에 좋은 일을 해 보기로 하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무더운 여름, 무엇인가 애써 구하지만 얻지 못하고 생에 지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측은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소원을 물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셋방이라도 얻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강을 회복하였으면 하는 사람, 교육이나 여행을 해보았으면 하는 사람, 그리고 남의 빚을 청산했으면 하는 사람, 더 좋은 직업을 가졌으면 하는 사람 등등...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소원을 말했습니다.
이 부자는 그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 후 얼마를 지났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만족해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도 만족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더 큰 욕심만 생긴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에게는 자족이 없습니다.
자족은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에서도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동행함을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참된 자족의 비결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히12:1-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