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의 생활을 받으시는 하나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88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사도행전 10: 1-8 범사의 생활을 받으시는 하나님
간혹 우리 가운데 내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이 얼마나 알아 주실까?
혹은 하나님은 간여하지 않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무심하거나 무정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사 40: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시 121: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행하는 일거수 일투족을 알고 계시고 그리고 그기에 합당하게 은혜를 주시고 오히려 더 나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이와같은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의 생활이 무엇인가 복을 받을 만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 115:13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인종 차별이 심한 남아공화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남아공화국에는 흑인, 백인이 따로 따로 예배를 드리는데 흑인의 Holy Church of Zion, 시온성교회라고 하는 교회에서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성만찬을 하기 전에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세족예가 있는 날 올리브라고 하는 백인이면서 대법원장이 흑인 교회에 찾아 와서는 마르다라고 하는 여성을 불러서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서 발을 씻어 주는 모습을 보고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백인이, 그것도 귀족이, 어떻게 흑인 여자의 발을 씻기느냐? 그 때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 집에 노예로 있는 사람입니다. 한평생 우리 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 씻겨 주었습니다. 그걸 내가 늘 보면서 마음이 송구스러웠는데 오늘 내가 이 거룩한 날 우리 아이들을 씻어준 바로 이 여인의 발을 씻겨 주어야만 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오늘 그의 발을 한번 씻겼는데 이게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대법원장은 이것 때문에 파면이 되었지만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제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생활의 모습이 그가 평소에 어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는가를 잘 보여 주지 않습니까?
우리말에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여러분을 변화를 시키시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했고 어떠한 세상적인 능력을 가졌다가 아닙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은 변화를 시켜서 복되게 하실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스스로가 믿음을 가지고 자원하여 만들어져 가야 할 것입니다.
딤후 2:20-21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본문에서도 역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준비된 삶을 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인물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행 10: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 10: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행 10: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그의 범사의 생활을 하나님이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받으셨다는 말이 있음은 받지 아니한 생활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 58: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애 3:44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저가 성도들을 바라 볼 때에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의 신앙 생활과 범사의 생활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안으시니 축복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증스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참으로 복되게 하시기를 원하시고 범사의 생활을 받으시고 축복해 주실 자로 다 만드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우리를 어떠한 사람으로 만드십니까?
하나님은 범사의 우리의 어떠한 생활을 받으십니까?
범사에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적인 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믿음이 들어가고 은혜를 깨닫게 될 때에 헌신이라는 단어가 호감이 가게 되는 것이요 헌신이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헌신은 나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바꿔져버렸다는 좋은 예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내러져도 내가 그릇이 바뀌어지지 않는 한은 절대로 은혜가 축복이 되지 않습니다.
함부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 모두가 내 것이라는 개념이 빠져나가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나를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바꿔져 버립니다.
지난 철야 기도 시간에 한 성도를 위하여 기도를 하는데 내 것은 다 주의 것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을 하시기를 그러면 내 것은 다 너의 것이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사상은 아무나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을 받을 자가 아니 복을 받은 자가 가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사실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는 생각에 가득차 있으니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아가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싫어하고 사람들에게 헌신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고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헌신이 되어진 사람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헌신이 되는 사람입니다.
가장 가까이로는 남편에게 헌신하는 아내, 아내에게 헌신하는 남편이 되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 이웃을 위한 헌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첫째가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온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한 그 이웃을 이같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사랑은 곧 모든 이들에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제 2차 대전시 나치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고 있을 때 독일 사람들이 이 유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유대 사람은 가슴에 노란 별을 붙이게 해서 하나씩 잡아가서는 처형을 하는 거예요. 이 때 덴마크에는 크리스천 10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은 온 국민에게 노란 별을 붙이게 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어떤 불이익이 온다하더라도 우리는 유대 사람들이 죄 없이 죽어 가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쉬운 일입니까?
우리가 남을 구제한다 할 때는 벌써 그 사람의 처지와 나와 동일시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불이익도 따르고 비난도 따릅니다. 헌신은 악세사리가 아니요. 훈장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희생입니다. 그것이 아니고는 참 구제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둔군 장교임에도 군림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까지 관심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유대인들로부터도 환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에게까지 상달되고 응답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사가 그 가정에 좋은 소식을 들고 방문을 했던 것입니다.
확실히 베푸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습니다. 여러분, 메아리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메아리는 내가 말하는 대로 곧바로 되돌아옵니다. “사랑해”하고 큰소리로 외치면 곧 이어서 그 말이 내게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나쁜 놈“하고 외치면 그 말도 곧바로 ”놈놈놈..“하고 되돌아옵니다. 참 희한한 일입니다. 마치 부메랑과 같습니다.
어느 날 로마의 황제 시이저는 친구들과 귀족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준비했다. 그런데 잔치를 베풀기로 한 날짜에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그만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몹시 화가 난 시이저는 활 가진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섬기는 신인 “주피터”를 향해 활을 쏘도록 했습니다. 나쁜 날씨를 준데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명령대로 하늘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조금 있으니 하늘에서부터 화살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금 전에 병사들이 쏘았던 화살이었습니다. 그 화살들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활 쏜 자들의 머리에 도로 떨어지고 다치게 하고 죽이게 하는 화살이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람은 이웃과 관계를 맺고 관계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이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나누고 베풀며 살아가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이웃과 함께 관계하면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이 정신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만한 관계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으나 유대인과 노예들과 부하들이 그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까지도 그를 사랑하셔서 천사를 그 집으로 보내서 은혜 받는 길을 안내하도록 하셨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또 우리의 어떠한 생활을 받으십니까?
경건한 신앙의 생활입니다.
“그는 경건했다”고 했습니다. 우선 가정은 경건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어떤 가정은 어딘지 모르게 집안 분위기가 경건합니다. 꾸밈과 장식들이 모두 경건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경건합니다. 가족들이 그런 경건한 분위기에서 살면 정신과 마음에 영향을 받아 그들의 살이 경건해집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반면에 다분히 세속적인 가정들도 있습니다. 우선 분위기가 세속적입니다. 꾸밈과 장식들이 세속적입니다. 그리고 결려 있는 그림들이 세속적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살아가게 되면 가족들이 세속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불행한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것으로 들어난 모습들은 그 사람의 마음의 분위기를 말 해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집은 경건했습니다. 신앙으로 중심을 이루고 살아가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집에 천사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방문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래서 가정은 우선 경건해야 합니다.
참다운 신앙인은 범사의 생활이 신앙에 합당하게 행하며 또한 신앙적인 생활이 범사에 아름다운 헌신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 경건의 출발은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제9시에 기도했으니 오후 3시라는 말입니다. 오후 3시에 고넬료도 기도했고 욥바에 있는 베드로도 기도했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하나님은 가이사랴의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 말씀하시기를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해다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고 욥바의 베드로에게는 고넬료의 집에 가라고 계시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서 고넬료의 집에 가 보니 온 식구가 모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배를 드릴 때 그 집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던 것입니다. 이미 준비된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준비된 곳에 임합니다.
저는 때때로 성령님이 저에게 성도들에게 축복을 하도록 명하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미 그 성도가 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딤후 2: 준비된 그릇을 사용하시니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도들 가운데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도 열심을 내는데 축복을 왜 안 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불만해 하는데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주실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도울 자는 도와주시고 얼마나 잘 알아서 하시는 분이신데 자신들이 받을 그릇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함부로 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함께한 성도들을 하나님은 축복을 받을 그릇으로 만들고 계심을 믿으시고 만들어져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철야 기도 시간에 기도하는데 어떤 성도는 하나님 저도 정결케 되기를 원합니다. 깨끗케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을 드리는 자가 있었는데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 자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깨끗케 되기만 해 보십시오 그냥 축복이 될 것입니다.
복을 달라고만 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죠오지 뮬러는 조용한 아침시간에 기도함으로 성경을 연구하였다. 아침에 옷을 입은 후에 그의 일은 자신을 기도에 몰두시키는 일 뿐이었다. 그런 후에야 그의 계획은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ꡒ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들 중의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게 되고 그러므로 나의 마음은 안정되고, 용기를 얻고, 조심하게 되며, 내 마음을 견책하고, 훈계를 받곤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나의 마음은 주님과의 체험적인 교통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처음에는 말씀을 묵상하게 되나 곧 나 자신은 기도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연구와 고아원 사역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 물질적 필요와 개인적 삶의 필요를 단지 하나님 한분께 아뢰고 응답 받음으로써 하나님은 ꡒ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분ꡓ임을 눈으로 보여주었다. 뮬러는 이러한 그의 믿음과 기도로 63년 동안 750 만달러(한화로 약 100억원)이상을 주님의 일에 쓸수 있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그가 처음 고아원 사역을 시작할 때 준비된 것이라곤 선물받은 접시 3개, 쟁반 스물여덟게, 물병하나 , 컵 한 개 ,소금병 받침 세개, 칼 네개와 포크 네개, 채소를 깍는 강판 한 개뿐이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면서 어린아이 와 같은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간구했으며 참으로 주님의 청빈한 청지기로써 모든 것을 필요에 따라 하늘 창고에서 꺼내 쓸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ꡒ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바르게 기도하는 것도 얼마동안 기도를 계속한다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끝까지 기도를 계속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대 부분의 경우 우리는 축복을 받을 때 까지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축복을 쉬지 안고 기대하지도 않는다.ꡓ
간혹 우리 가운데 내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이 얼마나 알아 주실까?
혹은 하나님은 간여하지 않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무심하거나 무정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사 40: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시 121: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행하는 일거수 일투족을 알고 계시고 그리고 그기에 합당하게 은혜를 주시고 오히려 더 나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이와같은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의 생활이 무엇인가 복을 받을 만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 115:13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인종 차별이 심한 남아공화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남아공화국에는 흑인, 백인이 따로 따로 예배를 드리는데 흑인의 Holy Church of Zion, 시온성교회라고 하는 교회에서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성만찬을 하기 전에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세족예가 있는 날 올리브라고 하는 백인이면서 대법원장이 흑인 교회에 찾아 와서는 마르다라고 하는 여성을 불러서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서 발을 씻어 주는 모습을 보고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백인이, 그것도 귀족이, 어떻게 흑인 여자의 발을 씻기느냐? 그 때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 집에 노예로 있는 사람입니다. 한평생 우리 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 씻겨 주었습니다. 그걸 내가 늘 보면서 마음이 송구스러웠는데 오늘 내가 이 거룩한 날 우리 아이들을 씻어준 바로 이 여인의 발을 씻겨 주어야만 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오늘 그의 발을 한번 씻겼는데 이게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대법원장은 이것 때문에 파면이 되었지만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제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생활의 모습이 그가 평소에 어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는가를 잘 보여 주지 않습니까?
우리말에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여러분을 변화를 시키시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했고 어떠한 세상적인 능력을 가졌다가 아닙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은 변화를 시켜서 복되게 하실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스스로가 믿음을 가지고 자원하여 만들어져 가야 할 것입니다.
딤후 2:20-21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본문에서도 역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준비된 삶을 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인물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행 10: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 10: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행 10: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그의 범사의 생활을 하나님이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받으셨다는 말이 있음은 받지 아니한 생활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 58: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애 3:44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저가 성도들을 바라 볼 때에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의 신앙 생활과 범사의 생활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안으시니 축복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증스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참으로 복되게 하시기를 원하시고 범사의 생활을 받으시고 축복해 주실 자로 다 만드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우리를 어떠한 사람으로 만드십니까?
하나님은 범사의 우리의 어떠한 생활을 받으십니까?
범사에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적인 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믿음이 들어가고 은혜를 깨닫게 될 때에 헌신이라는 단어가 호감이 가게 되는 것이요 헌신이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헌신은 나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바꿔져버렸다는 좋은 예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내러져도 내가 그릇이 바뀌어지지 않는 한은 절대로 은혜가 축복이 되지 않습니다.
함부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 모두가 내 것이라는 개념이 빠져나가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나를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바꿔져 버립니다.
지난 철야 기도 시간에 한 성도를 위하여 기도를 하는데 내 것은 다 주의 것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을 하시기를 그러면 내 것은 다 너의 것이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사상은 아무나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을 받을 자가 아니 복을 받은 자가 가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사실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는 생각에 가득차 있으니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아가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싫어하고 사람들에게 헌신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고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헌신이 되어진 사람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헌신이 되는 사람입니다.
가장 가까이로는 남편에게 헌신하는 아내, 아내에게 헌신하는 남편이 되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 이웃을 위한 헌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첫째가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온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한 그 이웃을 이같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사랑은 곧 모든 이들에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제 2차 대전시 나치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고 있을 때 독일 사람들이 이 유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유대 사람은 가슴에 노란 별을 붙이게 해서 하나씩 잡아가서는 처형을 하는 거예요. 이 때 덴마크에는 크리스천 10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은 온 국민에게 노란 별을 붙이게 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어떤 불이익이 온다하더라도 우리는 유대 사람들이 죄 없이 죽어 가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쉬운 일입니까?
우리가 남을 구제한다 할 때는 벌써 그 사람의 처지와 나와 동일시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불이익도 따르고 비난도 따릅니다. 헌신은 악세사리가 아니요. 훈장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희생입니다. 그것이 아니고는 참 구제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둔군 장교임에도 군림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까지 관심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유대인들로부터도 환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에게까지 상달되고 응답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사가 그 가정에 좋은 소식을 들고 방문을 했던 것입니다.
확실히 베푸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습니다. 여러분, 메아리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메아리는 내가 말하는 대로 곧바로 되돌아옵니다. “사랑해”하고 큰소리로 외치면 곧 이어서 그 말이 내게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나쁜 놈“하고 외치면 그 말도 곧바로 ”놈놈놈..“하고 되돌아옵니다. 참 희한한 일입니다. 마치 부메랑과 같습니다.
어느 날 로마의 황제 시이저는 친구들과 귀족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준비했다. 그런데 잔치를 베풀기로 한 날짜에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그만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몹시 화가 난 시이저는 활 가진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섬기는 신인 “주피터”를 향해 활을 쏘도록 했습니다. 나쁜 날씨를 준데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명령대로 하늘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조금 있으니 하늘에서부터 화살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금 전에 병사들이 쏘았던 화살이었습니다. 그 화살들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활 쏜 자들의 머리에 도로 떨어지고 다치게 하고 죽이게 하는 화살이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람은 이웃과 관계를 맺고 관계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이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나누고 베풀며 살아가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이웃과 함께 관계하면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이 정신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만한 관계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으나 유대인과 노예들과 부하들이 그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까지도 그를 사랑하셔서 천사를 그 집으로 보내서 은혜 받는 길을 안내하도록 하셨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또 우리의 어떠한 생활을 받으십니까?
경건한 신앙의 생활입니다.
“그는 경건했다”고 했습니다. 우선 가정은 경건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어떤 가정은 어딘지 모르게 집안 분위기가 경건합니다. 꾸밈과 장식들이 모두 경건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경건합니다. 가족들이 그런 경건한 분위기에서 살면 정신과 마음에 영향을 받아 그들의 살이 경건해집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반면에 다분히 세속적인 가정들도 있습니다. 우선 분위기가 세속적입니다. 꾸밈과 장식들이 세속적입니다. 그리고 결려 있는 그림들이 세속적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살아가게 되면 가족들이 세속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불행한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것으로 들어난 모습들은 그 사람의 마음의 분위기를 말 해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집은 경건했습니다. 신앙으로 중심을 이루고 살아가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집에 천사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방문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래서 가정은 우선 경건해야 합니다.
참다운 신앙인은 범사의 생활이 신앙에 합당하게 행하며 또한 신앙적인 생활이 범사에 아름다운 헌신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 경건의 출발은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제9시에 기도했으니 오후 3시라는 말입니다. 오후 3시에 고넬료도 기도했고 욥바에 있는 베드로도 기도했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하나님은 가이사랴의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 말씀하시기를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해다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고 욥바의 베드로에게는 고넬료의 집에 가라고 계시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서 고넬료의 집에 가 보니 온 식구가 모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배를 드릴 때 그 집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던 것입니다. 이미 준비된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준비된 곳에 임합니다.
저는 때때로 성령님이 저에게 성도들에게 축복을 하도록 명하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미 그 성도가 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딤후 2: 준비된 그릇을 사용하시니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도들 가운데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도 열심을 내는데 축복을 왜 안 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불만해 하는데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주실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도울 자는 도와주시고 얼마나 잘 알아서 하시는 분이신데 자신들이 받을 그릇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함부로 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함께한 성도들을 하나님은 축복을 받을 그릇으로 만들고 계심을 믿으시고 만들어져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철야 기도 시간에 기도하는데 어떤 성도는 하나님 저도 정결케 되기를 원합니다. 깨끗케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을 드리는 자가 있었는데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 자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깨끗케 되기만 해 보십시오 그냥 축복이 될 것입니다.
복을 달라고만 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죠오지 뮬러는 조용한 아침시간에 기도함으로 성경을 연구하였다. 아침에 옷을 입은 후에 그의 일은 자신을 기도에 몰두시키는 일 뿐이었다. 그런 후에야 그의 계획은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ꡒ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들 중의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게 되고 그러므로 나의 마음은 안정되고, 용기를 얻고, 조심하게 되며, 내 마음을 견책하고, 훈계를 받곤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나의 마음은 주님과의 체험적인 교통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처음에는 말씀을 묵상하게 되나 곧 나 자신은 기도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연구와 고아원 사역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 물질적 필요와 개인적 삶의 필요를 단지 하나님 한분께 아뢰고 응답 받음으로써 하나님은 ꡒ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분ꡓ임을 눈으로 보여주었다. 뮬러는 이러한 그의 믿음과 기도로 63년 동안 750 만달러(한화로 약 100억원)이상을 주님의 일에 쓸수 있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그가 처음 고아원 사역을 시작할 때 준비된 것이라곤 선물받은 접시 3개, 쟁반 스물여덟게, 물병하나 , 컵 한 개 ,소금병 받침 세개, 칼 네개와 포크 네개, 채소를 깍는 강판 한 개뿐이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면서 어린아이 와 같은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간구했으며 참으로 주님의 청빈한 청지기로써 모든 것을 필요에 따라 하늘 창고에서 꺼내 쓸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ꡒ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바르게 기도하는 것도 얼마동안 기도를 계속한다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끝까지 기도를 계속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대 부분의 경우 우리는 축복을 받을 때 까지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축복을 쉬지 안고 기대하지도 않는다.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