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구원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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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299회 작성일 2013-05-1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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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6-17 복음은 구원의 능력
1912년 4월 14일, 세계 최대의 해난 사고가 발생하였다. 1만 6천 톤의 거대한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22노트의 속력으로 북대서양을 항해 중 빙산에 부딪친 것이다. 그 배에는 구명대가 승객수의 반 밖에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자는 무려 1,517명이나 되었다.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인 죠 하퍼씨는 시카고의 무디 교회에 설교하러 가던 중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사요, 부흥사요, 설교자였던 것이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수 분 동안을 바다 위에 떠서 전도하는 비장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물 위에 떠 있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면서 그는 같은 형편인 한 젊은이에게로 헤엄쳐 갔다.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아니요! 파도가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수 분 후에 다시 그들이 조금 가까워졌다. 하퍼씨가 좀 큰 소리로 또 물었다. 하나님과 화해하였나? 아직 못 했습니다.
이 때 큰 파도가 하퍼씨를 삼켜 버렸다. 그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 젊은이는 그러나 그의, 구원받았나? 하는 음성은 파도 소리에 실려 계속 젊은이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에, 그 젊은이는 뉴욕의 한 교회에서 신앙 체험담을 발표하고 있었다.
저는 죤 하퍼씨가 죽음 가운데서도 전하여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로 인한 마지막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본래 격리된 곳에서 하늘만 바라보는 곳에서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수도사였습니다.
수도사는 죄를 지으려고 해도 지을 수 없습니다.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수도원에는 여자가 없으니 간음죄를 지을 수 없고, 모든 재산은 공동이니 사유재산이 없으니 물질에 탐 할 필요가 없고 더욱이 명예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출세해야 할 필요도 없으니 인간적인 욕망의 노예가 될 리도 없습니다.
수도사는 오로지 하나님 앞에 기도와 말씀 명상을 하며 사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로 고민했습니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가 그를 괴롭혔습니다.
아무리 회개하고 기도하고 몸을 학대하는 고행을 해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죄를 자복하는 고해성사를 하루에 스무 번도 더했다고 합니다.
가서 죄를 고하고, 돌아와서 고민하다가 또 가서 고하고 그런 식으로 계속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담당 신부가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너무 귀찮아진 나머지, 루터야, 죄 좀 한꺼번에 모아서 오너라하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당시 수도사들은 믿음에 대해 잘 알지를 못했습니다.
속죄하여 구원을 얻을 근거를 어디에 둬야 할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매일 매일 죄에서 자유롭지를 못했습니다.
루터가 살던 때의 로마에는 스칼라 산타라는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 성당에는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으실 때 올라가셨다는 계단이 있는데,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뜯어서 그곳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 죄 사함을 받고, 심지어 그렇게 하면서 기도하면 연옥에 있는 죄인도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루터 역시 한 계단씩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계단에 입을 맞추고,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하지만 계단을 다 올랐는데도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마치 큰 불빛을 보는 것처럼 평소에 아무런 관심이 없이 읽었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무릎으로 계단을 기어오른다고 죄 사함을 받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곧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어떤 힘이 있기에 믿으면 살 길이 열리게 됩니까?
복음에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good news), 즉 단순한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눅2:10-11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며 기쁨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기쁜 소식,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인간에게 운명을 바꾸어 줄 수 있는 놀라운 요소가 있습니다.
요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같이 구원은 복음으로만 가능
율법, 인간의 행위는 믿음을 낼 수 없으나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을 낼 수 있다.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은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롬3:20-2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율법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옳은 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느냐에 있다.
율법을 아는 지식이 나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은 그 일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구원에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질 것이다.
롬8:31-35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세상에 그 어떠한 것도 우리를 끊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이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10:26-29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무도 내 손에서 저희를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절대로 확실하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나와 나의 신실함 곧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다.
만일 우리 자신의 신실함에 달려 있다면 우리 모두 다 구원 받지 못할 것이다.
시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90:5-6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약4:13-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사41: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구원의 근거는 아침저녁 조석 간에 변하는 나 인간에게 두지 못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복음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차별입니다.
국제 인권단체의 보고에 의하면 아직도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여성의 차별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법정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판사는 증언을 하지 못하게 하고, 남편의 허가증이 없다는 이유로 간단한 염증인데 의사는 진료를 거부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남자 허가증 없이 지방 여행이나 은행 계좌 개설은 상상도 못한다고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도 편견과 차별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차별과 편견이 있다면 2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 시대에는 차별이 심각하였습니다.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은 편견과 차별이 심했습니다.
이방인들과 여인들과 죄인들을 공개적으로 차별하는 시대였습니다.
요4:7-9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막7:27-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세상은 차별과 편견이 강한 시대에 살았지만 복음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차별이 없습니다.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0:11-13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 모든 믿는 자에게 라는 말은 복음의 구원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은 믿는 자에게 한정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아무리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무제한적으로, 또는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행위와 의로운 공로는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주시려는 것이기에 믿음이라는 조건만 있다면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라는 말은 믿는 자는 모두 다 라는 뜻으로, 이는 구원의 현재성과 함께 구원하는 역사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믿음이라는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언제라도 누구에게든지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거꾸러져 넘어지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막9:23-24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하나님께는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믿음으로만 나온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베풀어 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 하나입니다.
복음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모든 구원의 은총은 값없이 허락해 주시고 인간에게 필요한 구원의 능력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삶이란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현실에 근거한 판단에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일어줍니다.
히1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이들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그들이 죽은 그 순간에도 믿음을 지키고 믿음대로 행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가장 복된 사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볼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온 사람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다
너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
너는 복이다 -너의 후손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죽을 당시에 이 약속들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가 받은 약속은 자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아브라함 자신은 약속의 성취를 눈으로 다 보지 못했지만, 죽는 그 순간에도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켰다.
아브라함은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영적, 정서적 반응이 있다.
마음의 안식과 안정감이다.
주님의 약속은 현실화되기 전에도 현실보다 더 생생하기에 이미 모든 것을 받은 자의 안정감이 있는 것이다.
간절함이다.
약속의 말씀이 아직은 현실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화 되는 그 때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애가 타는 간절함으로 기다리고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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