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혜사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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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60회 작성일 2013-08-1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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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25-31 보혜사 성령
21세기에도 여전히 믿지 못할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에 아무리 지진이 많이 일어났어도 규모 9.0의 강진이 일본을 덮친 것은 기록이 남아 있는 한 처음이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만 1만5,200여명. 행방을 알 수 없는 이도 8,600명이 넘습니다. 더군다나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폭발 사고로 막대한 양의 방사성 물질이 방출되며 그 피해는 수백 년 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12년 전 미국 뉴욕 맨해튼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건물을 무너뜨린 9ㆍ11 테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 초강대국의 심장부를 공격한 이는 소련도 아닌, 외계인도 아닌 이슬람 테러 조직 알 카에다였습니다.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세계무역센터 사무실에서 근무하다 비행기가 건물을 들이받는 바람에 비명횡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당시 희생자는 무려 5,000명이 넘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의 삶과 세상의 모습을 바꿔 놓은 역사적 사건은 대부분 기존 경험으론 예측하기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확률로 따지면 발생 가능성 0.1%에 불과하나, 일단 일어나면 세상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이런 사건ㆍ사고들에 검은 백조, 블랙스완(Black Swan)이란 표현이 붙여졌습니다.
이 이론은 18세기 호주에서 검은 백조가 발견되기 전까지 백조는 모두 흰색이란 믿음이 의심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블랙스완의 발견은 이러한 고정 관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수백만 마리의 흰 백조를 보면서 견고히 다져진 이론이 검은 백조 한 마리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블랙스완 이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칠면조 우화가 있습니다. 푸줏간 주인이 1,000일 동안 매일 맛있는 먹이를 주면서 정성껏 돌보자 칠면조는 주인이 자신을 끔찍이 사랑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1,001일째 되던 날 칠면조는 먹이가 아닌 식칼을 받습니다. 그 날이 추수감사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예측 가능한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모릅니다. 내일 일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과 함께 일하세요.
예수님이 떠나셔도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어 늘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으로 말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샬롬을 평안을 주십니다.
실제적으로 이 사건은 일어났습니다. 이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지 50일이 되는 날, 즉 부활 후 7번째 되는 주일은 성령께서 직접 우리에게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령강림 주일 이다.
이날은 부활 후 50일째가 되기 때문에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한다.
이 성령이 사실적으로 임재 하심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행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에 불같은 성령이 무리에게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알지도 못하는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하였고, 모든 외국 사람들이 언어의 장벽을 깨고 서로 대화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쌓을 때 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은 통일된 언어를 사용 하였었다.
바벨탑에서 한 나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었던 언어의 통일이 인간들의 교만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여러 방언으로 갈라졌었는데, 오순절에 처음으로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인 예수의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을 각기 제 나라 말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언어의 재통일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기독교가 세계를 향하여 선교를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이다.
따라서 이날을 교회의 시작으로 보고 또한 선교의 시작으로 본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후에 역사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기원전 기원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로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임재 하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은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성령 받기 전의 삶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은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제한적인 존재였던 그리스도가 승천으로 인하여 초 공간적으로 실존하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존재로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시고, 말씀으로 나를 가르치시고 그 말씀에 착념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마침내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신다.
성령은 진정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한다
로마서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기독인이란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가르침의 의미를 담은 διδαξει(디닼세이)은 원형 (διδασκω)디다스코의 미래시제동사로서 미래에 계속해서 성도들을 가르치시겠다는 그 분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위 단어의 히브리 상응어로는 dMel(라마드)로서 알게 하다, 가르치다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4:1-2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가르치시는 모든 것이란 제자, 곧 우리가 예수로부터 들은 말씀 만큼이라는 것이지 듣지도 않았던 말씀들에 대하여도 갑자기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공부하고 듣는 것이 없이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과정이 없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려고 하는데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롬10:14-15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영국의 마라톤 대회에서 5000명이 실격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영국 언론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영국 북부의 한 지방에서 열린 마라톤 경기에서 1등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가 모두 실격 처리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 웃지 못 할 사고는 주최 측의 진행 미숙으로 인해 벌어졌다.
경로표시가 제대로 되지 않아 2등 선수와 그를 뒤쫓던 나머지 인원이 모두 코스를 이탈한 것이다
그러니 항상 그 분의 말씀하심에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듣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는 순종인 것입니다
삼상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제자들 각자의 안으로 오신 보혜사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회상케 하신다 함은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들었던 말씀만큼이 모든 것이 되는 것이지 듣지도 않은 말씀들에 대해서도 가르치신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말씀을 듣는 일, 즉 예배나 성경 공부나 이런 일에 게을리 하면 성령의 역사도 그 만큼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
즉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계속 회상하게 하시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회상의 의미를 담은 ὺ̀πομνησει(휘폼네세이)은 원래 원형 ὺ̀πομιμησκω(휘포밈네스코)의 미래시제로서 계속해서 회상시킬 것이다, 계속해서 깨우칠 것이다 의미입니다.
회상이라는 것은 기존에 인식하고 있던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것, 곧 되새김질을 말하며 엄밀하게 들여다보면 성령과 보혜사의 미세한 구별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항상 그 말씀에 취해 있는 자입니다.
시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찰스 프라이스가 쓴 진정한 그리스도인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가 방문하고자 하는 도시로 가는 버스의 출발 시간을 기록한 시간표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 시간표는 진실이며 정확하긴 하지만, 그것이 나를 그 도시로 데려다 주지는 않습니다. 시간표가 진실이며 내가 거기서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직 내가 그 시간표에서 알아낸 시간에 버스를 타서 그 도시로 감으로써 시간표에 나오는 정보가 나의 경험이 될 때라야 그 시간표가 진정으로 가치가 있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경험하는 것보다는 진리를 믿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마땅히 성경에서 보여주는 진리에 견고한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며 진리의 말씀을 삶에서 경험함으로써 성경의 진리가 삶에서 역사하는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내주에 대한 첫 번째 증거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새로운 열망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지 않거나 소멸하고 있거나 근심하는 상태일 것입니다.
성령은 믿음의 확신을 준다
성령은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롬8:14-16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러므로 성령은 알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고 만나게 하고 믿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이것은 네가 안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영감의 책입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영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임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 성장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읽을 때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성령만 받으면 되었지 왜 성경을 또 봅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잘 못된 일입니다.
성령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데보라 켄드릭은 시각장애인이지만 언제나 무대장치나 무대 위 주인공들의 움직임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즐겨 관람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그녀는 무대의 시각적 요소를 조그만 FM 수신기로 전달하는 최신기술(디스크립티브)을 사용한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그것은 무대의 조명과 음향보드에 따라 미리 해설을 녹음했다가 공연 때 무대 세트와 연기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데보라는 콜럼버스 디스패치라는 신문에 만약 당신이 저에게 지난 주 뉴욕에서 정말 그 연극을 봤냐고 물으신다면 제 대답은 네입니다. … 저는 분명히 그 연극을 보았으니까요. 라고 썼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였지만 마음으로 이미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경험은 성경말씀을 이해하는데 성령님께서 하시는 역할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1735년 10월 18일 미국을 향하여 시몬즈 호라는 배를 타고 출발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평화롭게 출발한 배가 넓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가던 중 엄청난 태풍을 만나게 됩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아비규환(阿鼻叫喚)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거센 파도소리를 뚫고 비명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이 관경을 지켜보던 웨슬리도 어느새 부들부들 떨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은은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찬송을 듣던 웨슬리는 놀라며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당시 경건주의 운동을 하던 모라비안(Moravian) 복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아비규환의 상황, 지옥이 따로 없는 그런 상황에서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하셔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요?
평안은 성령의 가르침으로 발견되고 경험된다.
내 인생에서 겪게 되는 고난과 어려움과 짜증나고 속상한 일이 올 때에 우리 안에 평강이 사라집니다.
이때에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면 성령께서 가르침을 통해 생각을 통해 우리가 잠잠히 찬송하고 평안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포도나무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요15:3-6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주 안에 살아가면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지만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불안과 불평과 한숨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풍성한 열매에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삶이 괴롭게 느껴지고 불안하고 한숨이 나올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분명한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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