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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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635회 작성일 2013-08-1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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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13-16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멜깁슨이라는 유명한 영화배우 및 감독을 아실 것입니다. 멜깁슨은 1995년 작인 브레이브 하트라는 아주 감동적인 영화를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이렇게 번 돈으로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서 2500만 불(280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패션 오브 클라이스트라는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계획을 발표했을 때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는 내용을 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우리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멜깁슨의 유명한 대답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은 제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제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예수님이 유대인 때문에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이 때문에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하여 내 죄를 대신하여 값을 치루기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유대인 제사장 혹은 바리새인 혹은 장로 로마군인 로마의 헤롯왕 그 누구라고 생각을 하고 의로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다른 이들을 수 없이 이들을 정죄하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도 많은 이들을 정죄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진작 내가 받아야 할 구원은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사랑, 주의 생명, 주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정죄하기만 했지 진작 자기 자신은 구원을 받지 못한 자와 같이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아직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작 정죄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사람들의 돌팔매질로 죽을 것만 같은 그 경험을 한 그 여인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직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바로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에 때하여 전혀 몰랐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보니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눅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그 분이 누구인지 몰랐다가 그 분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던 고기가 이번에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아 그 고기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두 배가 물에 잠길 정도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에 나오는 온전함이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숙함을 나타내는 온전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사람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2가지 요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유명한 화가였던 피카소가 어는 시골 농가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숙소를 허락한 그 집 아이들과 어울려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다 마음이 즐거워진 피카소가 귀엽게 재롱을 부리던 딸아이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손수건에다 그림을 그려줄까? 하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겁을 먹은 이 딸아이는 엄마 뒤에 숨어서는 저 아저씨가 내 예쁜 손수건을 망치려고 해 하면서 훌쩍이더랍니다. 무안해진 피카소는 다음날 그 아이에게 그림을 그려주지 못하고 농가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때 손수건에다 그림을 받았더라면 이후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 수백만 불 이상이나 되는 명화를 한 점 얻게 되었을 겁니다.
물론 피카소가 화가라는 점은 믿었습니다.
그런데 딸아이나 그 어머니나 피카소가 얼마나 유명한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믿는 것은 많아집니다.
그런데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 되시면 그에게 나의 인생이 있고 나의 생명이 있고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다.
알지 않는다는 것은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 드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안다는 것은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알아서 실천하는 단계까지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안다 여자가 남자를 안다는 것은 그냥 신체의 구조와 생리가 다르다는 것으로 저 사람은 여자로 남자로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부부가 되어 성적인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 아는 것입니다.
시34:6-8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공부하여 교리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제를 통하여 체험함으로서 아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입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성숙한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즉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입니다.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이 어렸을 때에 공개적으로 한참 형님뻘인 베드로를 책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갈2:20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물론 베드로가 이방인과 밥 먹다가 유대인들이 왔을 때 같이 밥 먹지 않은 체 하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것도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훗날 믿음이 장성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하, 내 은사가 상당히 날카롭게 잘못을 바로잡는 은사였는데,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다 어린아이와 같았구나. 족집게 은사, 쪼개는 은사는 있었으나 성숙한 사랑이 빠져버렸구나.
그래서 믿음이 장성한 후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이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지요.
바울의 믿음이 어렸을 때에 전도의 열정에 사로잡혀 나가다가 마가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마가의 연약함을 붙들어주는 바나바에게까지 열이 뻗쳐서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지난번에도 주의 일하다가 도망을 가더니 이번에도 또 갈 거지 그러니 함께 할 수 없어, 라고 정죄하고 화를 내었습니다.
우리 차라리 찢어지자. 갈라서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너는 저 바다로, 나는 이 바다로 건너갔습니다.
행15:36-39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이 훗날 믿음이 장성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하, 내 은사가 너무 칼 같아서 하나여야만 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둘이 되었구나.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다 어린아이와 같았구나. 송곳 같은 은사는 있었으나 사랑이 빠져버렸구나. 그래서 오랫동안 내 마음이 이렇게 아팠구나.
그래서 장성한 후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장성한 그리스도인은 사랑으로 행합니다.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아무리 올바른 의견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빠져버리면 어린아이같이 말하고 어린아이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 싸우고 잘 다투고 분쟁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중심적입니다.
아무리 바른 것이라도 옳은 것 같지만 사랑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정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사랑으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이 녹아서 사랑을 만들어 낼 때, 비로소 그 사랑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모든 성도와의 바른 교제 즉 주고받고를 잘 해야 합니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구(Life Way Research)에서 미국 교회 외형 확장을 통한 부흥 실패라는 결론을 내 놓았습니다.
한 교회가 대형화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많은 중소규모의 교회들이 위축이 된다면 전체적인 성장은 실패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을 잘 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도와주기는 커녕 교회 부흥이라는 핑계로 다 빼앗아 온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한때는 성도수 1200만을 자랑해 왔습니다.
이제는 얼마입니까? 대형교회는 엄청나게 많아 졌으니 성도수가 늘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많게는 700만 적게는 600만 이라고 합니다.
반이 줄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지금부터 10년 후에 2023년에는 440만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 통계가 나왔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고 너무나도 슬펐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가 줄어든다는 슬픔보다도 저는 그냥 그냥 은혜로 나아 갈 수있지만 장차 한국 교회의 어려움 더 나아가서 한국 사회가 당 할 어려움을 생각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집니다.
그래도 교회가 빛이 되고 길이 되어 주었는데 말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니라 더불어서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원윈 작전을 펼쳐야 합니다.
살아감으로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15-16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전12:14-27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마틴 루터 (M.Luther)는 교회의 관습이나 교리를 잘 알면서 실천이 없는 신앙은 고혈압 환자라고 했고, 실천은 있으나 교리에 대하여 잘 모르는 신앙은 빈혈증 신자라고 했습니다.
5만 번이나 기도의 응답을 받은 조지뮐러는 실천 없는 신자는 입술신자이고, 실천하는 신앙을 손끝신자라고 말하면서 신앙은 손끝에서 성장한다. 고 했습니다.
즉, 교회를 위하여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 섬기고 봉사할 때 우리의 신앙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1943년 영국의 한 청년이 등반대원 몇 명을 데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진 에베레스트 산 정복에 나셨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오면서 산아, 너는 더 이상 자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돌아온다. 그래서 기어이 네 정상에 설 것이라는 말을 하였답니다. 약 10년 뒤인 1953년 5월 29일, 그는 다른 등반대원 두 명과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에드먼드 힐러리 경입니다.
산아, 너는 더 이상 자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랄 것이다. 참으로 감동을 주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각 지체들과 연결되어서 마디와 마디를 통해서 서로를 신뢰하며 함께 나누는 사랑을 먹고 성장합니다. 가장 믿어주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지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체가 지체를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그 몸이 얼마나 힘들고 아프겠습니까?
교회가 가장 힘들고 아픈 것은 돈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부흥이 더디 되어서도 아닙니다. 계획한 일들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가장 힘들고 아프게 하는 것은 지체가 지체를 믿어주지 못하고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녹음이 무르익은 계절이 왔습니다.
성도들의 신앙도 무르익은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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