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더 큰 구원을 가져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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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73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누가복음 17: 11-19 감사는 더 큰 구원을 가져오고
어떤 아주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놀러을 갔더니 이웃집 아주머니가 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는데 아이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도 없이 얼른 받았습니다.
아이의 어머니가 그 아이를 불렀습니다. ꡒ얘야 다른 분이 사과를 줄 때는 뭐라고 말해야 되지?ꡓ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ꡒ껍질을 벗겨주세요ꡓ라고 말하더랍니다.
타인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서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이 아이가 아니라 바로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타인이 베풀어준 친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침묵한 채 좀 더 많은 친절을 베풀어주기만을 바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지 않을 때는 원망하고 돌아섭니다.
사과 껍질을 벗겨주지 않으면 사과를 준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감사하지 않고, 받은 것에 대하여는 당연히 여기고 더 잘 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편만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한 달 동안 아주 특이한 실험을 하였는데 어떤 마을의 일정한 구역에 있는 각 집에 매일 100달러씩 아무런 조건 없이 나누어 준 다음 그 결과를 관찰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날 집집마다 들러서 현관에 100달러를 놓고 나오는 그를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인지 의아해 하면서도 멈칫멈칫 나와서 그 돈을 집어 갔습니다.
둘째 날에도 거의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셋째날, 넷째 날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돈을 직접 사용해 본 결과 진짜 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 동네는 날마다 100달러씩 선물로 주고 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두 번째 주쯤 되었을 때는 동네 사람들은 현관입구에까지 직접 나와 돈을 나눠주는 사람이 언제쯤 올 것인가 하고 평소에 그가 오던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또 이웃 마을에까지 신기해하며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세 번째 주쯤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이상한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지 않게 되었습니다.
넷째 주가 되었을 때쯤은 매일 100달러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끼 밥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 같은 일상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드디어 실험기한이 끝나는 한 달의 맨 마지막 날에 그 실험을 계획했던 사람은 평소와는 달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지 않고 그냥 그 골목을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러자 이상한 반응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문을 거칠게 열고 현관까지 나와서 성난 목소리로 우리 돈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왜 오늘은 내 돈 100달러를 안 주는 겁니까?라고 따져 묻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지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자연적인 혜택을 받고 또한 가정의 기쁨을 가지고 직장과 생업에서 수고의 대가를 얻고 몸에 건강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아주 당연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도 해도 뜨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요
오늘도 내가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 감사하지도 않지요 아주 당연하지요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러다가 조그만 잘 못되어 지면 왜 이렇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갔느냐? 어디 하나님이 제 몸종이나 되는 줄 알아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하며 핏대를 세워 원망하고 입에 거품을 품고 저주를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받은 것에 대해서는 감사 할 줄 모르고 더 안 주고 더 잘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만을 하는 자가 아닙니까?
제가 가만히 보니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불평하다가 오늘 오셨죠 아니라고요 우리 가운데는 무엇인가 그렇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밀런 (Miilan)이 낳은 에디슨(Edison, Thomas Alva)은 무선전신기, 활동사진기, 축음기, 백열전구 외에도 수많은 분명 기계를 발명하여 인류 세계에 크게 공헌한 발명의 왕이라 불리 우지 않습니까?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그는 이 모든 것을 발명하기 전 그가 젊은 시절에 귀머거리가 되는 그러한 불행에 처하게 되었지만 조금도 낙심치 않고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분발 분투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문화에 크게 공헌한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 줄로 아십니까?
이 불행을 불행으로 생각지 않고 이 불행을 도리어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귀머거리가 됨을 감사하는 것은 연구에 몰두할 때 잡음이 들리지 않아서 많은 도움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감사 할 것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감사히 받으려는 사람에게는 감사치 않을 것이 없는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는 또한 모든 것이 감사할 것으로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감사에서 시작이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감사하는데 바로 이 감사가 예배의 동기가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감사라는 말은 동사 [야다](감사를 드리다)와 명사[토데](감사를 드림)로 표현되고 있는데 구약성서에서 쓰이고 있는 이 [야댜]와 [토데]는 마음의 샘 줄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음에서 감사의 샘 줄기가 흐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유 카리스 테오스](감사한 마음을 가지다. 감사를 드리다), [카리스](감사)라는 말이 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감사라는 말은 또 영어로는 THANKS인데 이 말은 생각한다란 뜻을 지닌 THINK에서 나온 말인데 다시 말해서 감사는 깊이 생각하는 것으로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저절로 나오는 행동이 감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좀 생각을 해 보십시오 감사 할 일들뿐입니다.
독일 역사에 마티 바덴이라는 재무상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유주의적 사상이 있다고 해서 극보수파에 밀려나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한 정치가 이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느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없어 값싼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구두가 없어졌음에 화가 잔뜩 나서 욕을 하면서 자신처럼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가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을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친구 하나가 헌 신발을 빌려주며 주일이니 교회에 가자고 해서 마지못해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 중에서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하고 기도드릴 때에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 때 그 젊은 정치가 마티 바덴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고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가 없구나. 나는 신발만 잃어버렸으니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지만 이렇게 남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으니......
그 불구자의 감화가 마티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주어 그 후부터 그는 언제나 감사의 생활을 하며 그는 항상 감사할 조건들을 찾았고 독일의 재무장관이 되어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여 국민에게 존경을 받고 국가를 위해 크게 일하는 정치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소록도에 한번 가보니 감사가 나아요
그러므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요 이 감사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 뜻인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8- )
그러므로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십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편50:14-15)
감사는 믿음입니다.
그 반면에 원망 불평하는 일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불 신앙입니다.
백성들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 하사(민수기 11 : 1)
여러분 언제나 불평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다 빼앗겨 버립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고 원망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받아야 할 축복을 빼앗기고 말았지 않습니까?
감사를 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기적이 따릅니다.
어느 교회의 한 성도가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고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미음도 입에 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창 나이에 이 지경이 된 것은 남편 잘 못 만나 가난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극심한 고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남편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싹터 올랐습니다.
이 형편을 들은 목사님은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ꡒ노트를 한권 사다가 아내에게 주세요. 그 노트에 감사할 일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라고 해보세요.ꡓ
남편은 즉시 노트와 볼펜을 사들고 아내에게 갔는데 하는 말이 ꡒ이 마당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ꡓ그런데 그 아내가 한두 줄씩이나마 노트에 감사할 일을 써 내려갔는데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부터 적어 가다가 이제는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러자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다리에는 웬일인지 힘이 생기고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독한 마음을 품어 보세요 사람의 속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이 나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가지면 그 속에서 악하고 더러운 균을 죽이는 세포가 생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루 게리그병(근육 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이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의사로부터 이 병에 걸렸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2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1985년에는 또 다시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가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보자. 그 불행과 고통을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합니까?
당사자인 호킹(Howking,1942 - )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 하에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호킹은 만인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불행의 요건을 남달리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삶의 자세로 살 수 있음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사의 정신적인 자세가 아니라면 그가 어찌 그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 나라까지 와서 세계 곳곳을 다니며 강연을 하겠다는 엄두인들 내겠는가?
건강, 지위, 재산, 가문, 학벌, 건전한 가족 등 남이 부러워할 만한 여건들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서도 불평 불만에 사로잡혀 찌들고 비뚤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람은 천당에 옮겨다 놓아도 거기에서도 불평거리를 찾을 것이고 천국에서도 지옥의 삶을 살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서 멀쩡한 사람들이 지옥과 같은 삶을 살고 인생을 망쳐 버리고 그리고 스스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감사는 기적을 가져오고 지옥 같은 삶도 천국 같은 삶으로 바꿔버릴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랍비 한 사람이 나귀등에 닭 한 마리와 천막 그리고 등불을 싣고 길을 가다가 날이 어두워 길가에서 유숙해야 할 처지가 되었는데 커다란 나무 밑에 천막을 치고서 자리를 잡고 기도를 하고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천막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에 눈이 부셔 잠을 깬 랍비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날마다 꼬끼오 소리로 나를 깨워 주던 닭이 어찌 오늘은?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간 랍비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나무에 묶어 두었던 닭과 나귀는 맹수에 찢겨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행중이라 지치고 피곤한 자신에게 왜 이런 변고가 생겼는지, 은근히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 생각하니 이젠 화까지 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닭과 나귀가 참혹하게 찢겨 죽는 그때에 자신은 곤히 잠을 잤으며,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내가 살아 있구나 내가 살아 있어 하나님은 내게서 닭과 나귀를 앗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날 살려 주신 것이었구나! 하마터면 난 감사해야할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고 불평을 할 뻔했구나. 난 잃은 것이 아니라 얻은 게야. 할렐루야!
바울에게 찔림을 주는 가시도 불평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와 은혜였음을 알지 않았습니까?
감사는 오직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짐승은 그런 것 없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한 농부가 지방의 유명인사들과 향께 초청을 받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는 으례하던 대로 음식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한 유명인사가 하는 말이 허허, 구식이군요, 요즈음 교육받은 사람은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농부는 저는 기도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늘 감사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 농장에도 식사에 기도 드리지 않는 이들이 있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유명 인사는 아, 그래요, 그것 참 지각 있고 품위 있는 사람이군요. 하자, 농부는 우리 집에서 기르는 돼지들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도 감사치 않는 자들은 마치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멸망입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놀러을 갔더니 이웃집 아주머니가 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는데 아이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도 없이 얼른 받았습니다.
아이의 어머니가 그 아이를 불렀습니다. ꡒ얘야 다른 분이 사과를 줄 때는 뭐라고 말해야 되지?ꡓ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ꡒ껍질을 벗겨주세요ꡓ라고 말하더랍니다.
타인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서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이 아이가 아니라 바로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타인이 베풀어준 친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침묵한 채 좀 더 많은 친절을 베풀어주기만을 바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지 않을 때는 원망하고 돌아섭니다.
사과 껍질을 벗겨주지 않으면 사과를 준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감사하지 않고, 받은 것에 대하여는 당연히 여기고 더 잘 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편만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한 달 동안 아주 특이한 실험을 하였는데 어떤 마을의 일정한 구역에 있는 각 집에 매일 100달러씩 아무런 조건 없이 나누어 준 다음 그 결과를 관찰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날 집집마다 들러서 현관에 100달러를 놓고 나오는 그를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인지 의아해 하면서도 멈칫멈칫 나와서 그 돈을 집어 갔습니다.
둘째 날에도 거의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셋째날, 넷째 날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돈을 직접 사용해 본 결과 진짜 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 동네는 날마다 100달러씩 선물로 주고 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두 번째 주쯤 되었을 때는 동네 사람들은 현관입구에까지 직접 나와 돈을 나눠주는 사람이 언제쯤 올 것인가 하고 평소에 그가 오던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또 이웃 마을에까지 신기해하며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세 번째 주쯤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이상한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지 않게 되었습니다.
넷째 주가 되었을 때쯤은 매일 100달러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끼 밥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 같은 일상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드디어 실험기한이 끝나는 한 달의 맨 마지막 날에 그 실험을 계획했던 사람은 평소와는 달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지 않고 그냥 그 골목을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러자 이상한 반응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문을 거칠게 열고 현관까지 나와서 성난 목소리로 우리 돈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왜 오늘은 내 돈 100달러를 안 주는 겁니까?라고 따져 묻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지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자연적인 혜택을 받고 또한 가정의 기쁨을 가지고 직장과 생업에서 수고의 대가를 얻고 몸에 건강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아주 당연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도 해도 뜨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요
오늘도 내가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 감사하지도 않지요 아주 당연하지요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러다가 조그만 잘 못되어 지면 왜 이렇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갔느냐? 어디 하나님이 제 몸종이나 되는 줄 알아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하며 핏대를 세워 원망하고 입에 거품을 품고 저주를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받은 것에 대해서는 감사 할 줄 모르고 더 안 주고 더 잘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만을 하는 자가 아닙니까?
제가 가만히 보니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불평하다가 오늘 오셨죠 아니라고요 우리 가운데는 무엇인가 그렇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밀런 (Miilan)이 낳은 에디슨(Edison, Thomas Alva)은 무선전신기, 활동사진기, 축음기, 백열전구 외에도 수많은 분명 기계를 발명하여 인류 세계에 크게 공헌한 발명의 왕이라 불리 우지 않습니까?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그는 이 모든 것을 발명하기 전 그가 젊은 시절에 귀머거리가 되는 그러한 불행에 처하게 되었지만 조금도 낙심치 않고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분발 분투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문화에 크게 공헌한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 줄로 아십니까?
이 불행을 불행으로 생각지 않고 이 불행을 도리어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귀머거리가 됨을 감사하는 것은 연구에 몰두할 때 잡음이 들리지 않아서 많은 도움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감사 할 것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감사히 받으려는 사람에게는 감사치 않을 것이 없는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는 또한 모든 것이 감사할 것으로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감사에서 시작이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감사하는데 바로 이 감사가 예배의 동기가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감사라는 말은 동사 [야다](감사를 드리다)와 명사[토데](감사를 드림)로 표현되고 있는데 구약성서에서 쓰이고 있는 이 [야댜]와 [토데]는 마음의 샘 줄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음에서 감사의 샘 줄기가 흐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유 카리스 테오스](감사한 마음을 가지다. 감사를 드리다), [카리스](감사)라는 말이 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감사라는 말은 또 영어로는 THANKS인데 이 말은 생각한다란 뜻을 지닌 THINK에서 나온 말인데 다시 말해서 감사는 깊이 생각하는 것으로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저절로 나오는 행동이 감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좀 생각을 해 보십시오 감사 할 일들뿐입니다.
독일 역사에 마티 바덴이라는 재무상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유주의적 사상이 있다고 해서 극보수파에 밀려나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한 정치가 이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느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없어 값싼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구두가 없어졌음에 화가 잔뜩 나서 욕을 하면서 자신처럼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가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을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친구 하나가 헌 신발을 빌려주며 주일이니 교회에 가자고 해서 마지못해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 중에서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하고 기도드릴 때에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 때 그 젊은 정치가 마티 바덴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고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가 없구나. 나는 신발만 잃어버렸으니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지만 이렇게 남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으니......
그 불구자의 감화가 마티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주어 그 후부터 그는 언제나 감사의 생활을 하며 그는 항상 감사할 조건들을 찾았고 독일의 재무장관이 되어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여 국민에게 존경을 받고 국가를 위해 크게 일하는 정치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소록도에 한번 가보니 감사가 나아요
그러므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요 이 감사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 뜻인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8- )
그러므로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십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편50:14-15)
감사는 믿음입니다.
그 반면에 원망 불평하는 일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불 신앙입니다.
백성들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 하사(민수기 11 : 1)
여러분 언제나 불평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다 빼앗겨 버립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고 원망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받아야 할 축복을 빼앗기고 말았지 않습니까?
감사를 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기적이 따릅니다.
어느 교회의 한 성도가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고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미음도 입에 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창 나이에 이 지경이 된 것은 남편 잘 못 만나 가난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극심한 고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남편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싹터 올랐습니다.
이 형편을 들은 목사님은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ꡒ노트를 한권 사다가 아내에게 주세요. 그 노트에 감사할 일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라고 해보세요.ꡓ
남편은 즉시 노트와 볼펜을 사들고 아내에게 갔는데 하는 말이 ꡒ이 마당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ꡓ그런데 그 아내가 한두 줄씩이나마 노트에 감사할 일을 써 내려갔는데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부터 적어 가다가 이제는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러자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다리에는 웬일인지 힘이 생기고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독한 마음을 품어 보세요 사람의 속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이 나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가지면 그 속에서 악하고 더러운 균을 죽이는 세포가 생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루 게리그병(근육 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이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의사로부터 이 병에 걸렸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2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1985년에는 또 다시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가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보자. 그 불행과 고통을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합니까?
당사자인 호킹(Howking,1942 - )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 하에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호킹은 만인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불행의 요건을 남달리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삶의 자세로 살 수 있음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사의 정신적인 자세가 아니라면 그가 어찌 그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 나라까지 와서 세계 곳곳을 다니며 강연을 하겠다는 엄두인들 내겠는가?
건강, 지위, 재산, 가문, 학벌, 건전한 가족 등 남이 부러워할 만한 여건들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서도 불평 불만에 사로잡혀 찌들고 비뚤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람은 천당에 옮겨다 놓아도 거기에서도 불평거리를 찾을 것이고 천국에서도 지옥의 삶을 살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서 멀쩡한 사람들이 지옥과 같은 삶을 살고 인생을 망쳐 버리고 그리고 스스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감사는 기적을 가져오고 지옥 같은 삶도 천국 같은 삶으로 바꿔버릴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랍비 한 사람이 나귀등에 닭 한 마리와 천막 그리고 등불을 싣고 길을 가다가 날이 어두워 길가에서 유숙해야 할 처지가 되었는데 커다란 나무 밑에 천막을 치고서 자리를 잡고 기도를 하고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천막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에 눈이 부셔 잠을 깬 랍비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날마다 꼬끼오 소리로 나를 깨워 주던 닭이 어찌 오늘은?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간 랍비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나무에 묶어 두었던 닭과 나귀는 맹수에 찢겨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행중이라 지치고 피곤한 자신에게 왜 이런 변고가 생겼는지, 은근히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 생각하니 이젠 화까지 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닭과 나귀가 참혹하게 찢겨 죽는 그때에 자신은 곤히 잠을 잤으며,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내가 살아 있구나 내가 살아 있어 하나님은 내게서 닭과 나귀를 앗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날 살려 주신 것이었구나! 하마터면 난 감사해야할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고 불평을 할 뻔했구나. 난 잃은 것이 아니라 얻은 게야. 할렐루야!
바울에게 찔림을 주는 가시도 불평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와 은혜였음을 알지 않았습니까?
감사는 오직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짐승은 그런 것 없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한 농부가 지방의 유명인사들과 향께 초청을 받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는 으례하던 대로 음식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한 유명인사가 하는 말이 허허, 구식이군요, 요즈음 교육받은 사람은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농부는 저는 기도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늘 감사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 농장에도 식사에 기도 드리지 않는 이들이 있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유명 인사는 아, 그래요, 그것 참 지각 있고 품위 있는 사람이군요. 하자, 농부는 우리 집에서 기르는 돼지들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도 감사치 않는 자들은 마치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멸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