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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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401회 작성일 2013-08-1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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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9:1-8 새로운 사역이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가 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빙점이란 소설에 이런 실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추운 지방 북해도의 삿포로 시의 키따이찌죠오(北一條)교회의 주일학교 유년부 부장 집사가 있었는데 나이 많은 총각 집사이었습니다.
이 총각 집사가 삿포로 철도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아사히가와라고 하는 곳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아사히가와는 북해도에서도 가장 끝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근무하다가 주일이 되면 꼭 돌아와 본 교회에서 봉사하고 다시 아사히가와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삿포로와 아사히가와 사이에는 시오카리라고 하는 큰 고개가 있습니다.
이 고개는 너무 높아 고개 밑에서 기관차 한 대를 더 붙이고 기관차 두 대가 끌어야만 넘을 수 있습니다.
이 총각 집사가 다음날이 자기의 결혼식 날이기에 삿포로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올라 가다가 마지막 끝에 객차 두 번째 세 번째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졌습니다. 뒤로 다시 밀려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이때 기관차 두 대는 그 사실도 모르고 나머지 객차들을 끌고 그냥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떨어진 객 차 두 대는 계속 후진하고 있었습니다.
기차에 대해서는 이 총각 집사만이 조금 아는지라 달려가서 브레이크를 당겼으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상태였습니다.
처음에는 서서히 후진하지만 가속도가 붙으면 높은 고개에서 벼랑에, 또는 골짜기에 떨어지게 되어 140명이 모두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이 때 이 총각 집사가 하나님 앞에 주님, 주님께서 만약에 이 기차에 타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간단히 기도합니다. 이 기도 후에 주여,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밖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돌을 주워 다가 막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 사이에 객차는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몸을 던져 기차를 막았습니다. 몸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연락이 되고 구조대가 달려왔습니다.
시신을 꺼냈더니 주머니에서 유서가 나왔습니다. 교회학교 부장을 하며, 독실하게 믿는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유서를 지녀야 한다고 하면서 지녔던 유서입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나는 비겁하게 살려고 하지 않겠다. 라는 줄거리였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던져 140명의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자신의 소명 그리고 사명에 기꺼이 자신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유서에는 이런 글도 있었습니다.
죽어야 할 이유 없는 곳에서는 결코 희생하지 않겠다는 글입니다.
본문에는 죽기를 갈망하고 있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시의 최고의 권력자인 왕이 자신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멀리 피하여 산 속에 숨어 들어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가 그의 주제입니다.
사실 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를 위하여 죽음을 드리기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갈멜산에서 우상의 선지자 850명과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하여 승리하여 그들의 목을 다 잘라 버리는 큰 공력을 가진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일에도 당당 해야 할 그였습니다.
심지어는 3년 6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았던 땅에 하나님을 감동시켜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가 해야 할 새로운 사명에 대한 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힘이 빠져 있는가?
내가 해야 할 새로운 사명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병 중 가장 크고 근원적인 병이라면 마음의 병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병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입니다.
키엘케골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대지의 저자인 펄벅은 희망이 없이 빵을 먹는 것은 천천히 굶어 죽는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상에서 절망은 인간에게 좌절을 가져오며, 좌절은 인간을 죽음의 자리로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선지자 엘리야의 절망은 죽음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4절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엄청난 위대한 일을 한 엘리사에게 찾아온 절망은 사람은 누구나 절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대단한 자가 절망을 늪에 빠지게 되었는가?
사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사정은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은 무엇을 보느냐의 산물입니다.
아합의 왕비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는 그 사실에만 온 마음이 집중이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고 도망을 가고 그리고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2-3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엘리야는 브엘세바 광야로 도망을 쳤고 방황을 하다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의 불리한 형편을 볼 때 절망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도 제목도 기가 찹니다.
이렇게 우울증이 걸리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 무능하다 가치 없다 의미 없다 등등입니다.
4절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에밀 카미엘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지만 사탄의 강력한 종인 절망의 악마가 먼저 찾아와 온갖 종류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생각을 불어 넣어주려고 애쓴다. 곧 그것은 자꾸만 현실을 보게 한다
절망은 언제나 아래로부터 오는 것을 명시하라 이에 반하여 격려는 언제나 위로부터 온다는 말을 했습니다. 절망은 세상 형편을 살펴 볼 때에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절망하는 이유는 모두 현실적인 생활여건을 바라보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약1:16-17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제 역시 현실을 들어 얼마나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지
우울함에 잡히면 절망이요 그리고 사망입니다.
환경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말씀에 사로 집혀야 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찾기 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고
내 생각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을 쫒는 것이며
육신의 소옥을 쫒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좇아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 오늘 이 시간이 좋은 시간이요 이 날이 좋은 날이요 내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절망은 무엇을 느끼는가의 산물입니다.
롬8:5-8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혹시 죽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반전을 하십시다
갈 길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짐승처럼 먹고 자다가 가는 삶이 아닙니다.
사명 때문에 못 먹고 마셔도 의지가 있고 자부심이 있습니다.
사명 때문에 살아야 하고 웃을 수가 있고 행복해 지기도 합니다
주어진 사명을 감당 할 때에 별과같이 빛납니다.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은 세상적인 것을 충족하기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 사명을 감당하기에 그렇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은 환경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면서 95개조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는데, 이것이 교황의 진노를 사게 되어 파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그 파문장을 공중 앞에서 불태워 버리자 황제로부터 국회에 소환되어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보름스입니다.
1521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가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루터는 그 자리에 가야합니다. 가면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때 가면서 한 말이 그는 그의 죽음의 공포 환경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의 개혁의 의지가 그를 붙잡고 있었기에 개혁자 루터가 된 것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종교 재판을 받기 위하여 스스로 가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보름스 회의장의 기왓장처럼, 집의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가리라. 그리고 모든 친구들의 권유와 만류를 뿌리치고 나는 갑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 갈 때의 비장한 각오와 같은 모습입니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루터 역시 사명에 비장한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황제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Oh, God. Here I st. help me 이것은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딱 한마디입니다.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섰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루터를 하나님께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당시 작센 지방의 영주 가운데 프레데릭 4세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루터를 몰래 납치해갑니다.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 납치하여 바르트부르그 성에 숨깁니다. 루터는 이 바르트부르그 성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대업을 완성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납니까?
사명입니다.
우울함에 걸려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울은 한가하기 때문에 생기는 병입니다.
우울은 내 주위의 형편만 보기 때문입니다.
우울은 나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될까? 말입니다.
사40:28-31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런 하나님은 바로 내 앞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 야만 합니다.
말씀으로 그리고 말씀의 양식으로 그리고 아주 은혜롭게 가까이 계십니다.
아니 내 마음에 계시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게 되면 죽음을 생각 하게 되고, 비굴해지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 야 하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그에게 소망의 새 사명을 주셨습니다.
15-17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이 사명 앞에 아니 나 혼자 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할 때에
18절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천사가 (5절), 여호와의 천사가(7절), 여호와의 말씀이(9절) 이 말씀들은 모두 같은 말로 구약시대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면 어디서 나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가 절망과 좌절에 빠져 로뎀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도, 호렙산 동굴에서 절망할 때에도 나타나 셨습니다.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7절) 그리고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우리가 낙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문제에 직면하면 다시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절망할 때에
우울증에 빠질 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나는 가치가 없다. 나는 희망이 없다. 그것은 완전히 거짓입니다. 그런 거짓에 속지 마십시오.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으면 그의 가치는 거의 무한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실한 성도는 위대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아직 우리 앞에 최상의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최고의 성공의 날보다 더 좋은 날이 우리 앞에 준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좌절하고 낙심하여 자포자기 할 때, 차라리 죽고 싶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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