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은 구원의 은혜를 받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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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58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고린도후서 6:1-2 지금 당신은 구원의 은혜를 받을 때입니다
전국의 마귀가 전부 소집되어 긴급 회의를 했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죽자살자 전도를 하니 자기의 영역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자꾸만 예수 믿고 마귀의 세력이 약화됨을 위기의식을 느껴 어떻게 하면 그들이 전도하지 못하고,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할까해서 모여 의논을 했습니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마귀가 다 모여 의논을 하면서, 좋은 의견들을 내 놓았습니다.
‘예수 믿는 것들에게 어려움을 많이 주어서 그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게 합시다’ 그러니 다른 마귀가 가만히 보니까 이 방법은 욥이라는 작자에게 이런 방법을 사용했더니, 욥이 하는 말이,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이도 여호와 시오니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소서’라고 합니다. 더 지독하게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것들이 교회가지 못하도록 모조리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 놓읍시다.’ 그런데 이 방법도 바울과 실라에게 사용했는데 오히려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해서 더 큰 일만 일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것들 다 잡아 죽여 버립시다’ 그런데 이 방법도 스데반에게 사용해 보니 죽으면서 오히려 더 영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중에 경험이 많은 아주 노련한 마귀가 하는 말이, ‘그들로 교회도 다니게 하고, 예수도 잘 믿게 하고, 전도도 하게 하고, 기도도 하게 하고, 열심을 내게 합시다. 그러나 내일부터 하게 합시다’
결국 이 안이 채택이 되어 마귀는 지금껏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단연, ‘내일부터’, ‘다음에’, ‘차차’, ‘나중에’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단어는 ‘오늘’, ‘지금’ 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이 강조하고 있는 핵심적인 말씀은 “지금”이라는 단어입니다.
지금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두 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의 개념은?
‘어제’라는 과거도 아닙니다. ‘내일’이라는 미래도 아닙니다. ‘오늘’이라는 현재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주신 시간은 오늘이요 지금입니다.
지금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과거의 믿음도 아니요 앞으로 잘 믿겠다는 미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오늘이라는 사람입니다.
은혜와 축복도 오늘이라는 이 시간에 내리워집니다.
그럼 오늘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은혜와 구원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시간, 때에 대한 기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때, 시기 시간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 은혜로 다가오시고 지금 이 시간에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심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주어진 삶이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그 상황에 빠져드는 자가 아니라 그 가운데 은혜와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들이 서 있는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으셔야합니다.
한번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온 은혜와 구원의 주가 되신다면 그 표적을 보이라고 시험을 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예수님을 쳐다보기만 해도 은혜 그 자체가 되었지만은 이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만 불러도 은혜가 되는데 그들은 은혜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제자 마태는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사도요한 역시 그의 글에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리고 성에서 지나가시던 예수님을 향하여 문둥병자가 소리를 쳤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눅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시험하며 예수가 구원자라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은혜롭고 구원을 베푸는 자인 증거를 대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없습니다.
우리의 일 생활이 하나님의 은헤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있으며 잠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생이 어찌 잠시라도 살 수가 있습니까?
이 때 예수님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을 답답해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한 줄 알면서 시대적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표적을 보이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받아 드리지 못하는 마음을 회개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회개하고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예수님이 은혜로우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분으로다가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하고 굳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영물이면서도 영적이지 못하고 육적인 사람으로만 살고 있지 않으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구원의 역사에 대한 뜻은 분별하지 못하면서 육적으로, 세상 적으로 취해 살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적으로 논하고 받아 드려야 하는데 그래야 은혜가 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지금 막 일어나는데 인간적인 믿음없는 소리로 끝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을 하니 은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날이 더우면 여름이구나!
비가 계속 내리면 장마철이구나!
피부로 느끼는 것은 아주 민감하게 느끼면서도 오늘도 우리 앞에 거대한 능력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무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은 여러분들에게 향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제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은혜의 때에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와주었다. 라고 말씀하시며 바로 지금이야말로 은혜를 받을 만한 때이며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없음도 아닙니다.
내 스스로가 은혜를 거부하고 구원의 역사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은혜를 인정하고 않고 하나님을 시인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도와주고 불쌍히 여기사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우주인들이 우주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우주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한 우주인들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한 우주인은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가 너무나도 아름답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우주인들은 우리가 이 우주에까지 날아와 봐도 여기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똑 같이 펼쳐지는 우주를 향하여 한 우주인은 하나님을 시인하며 그 은혜를 감탄하고 있었지만 한 우주인은 하나님 그 자체를 부정하니 구원은 고사하고 어찌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범사에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참으로 그를 시인하고 인정하고 있습니까?
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숨쉬는 것 하나라도, 마시는 물 한잔이라도, 아니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람이든지 사물이든지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현재 일이든지 장래 일이든지 다 나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들뿐이니 어찌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참으로 어떠하십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아예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은혜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은혜라고 여기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 도적의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들이 은혜가 아닙니까?
그냥 꾸역꾸역 맛있는 것만 찾아서 먹고 배만 불리고 있지 않습니까?
내 자녀, 내 아내, 내 남편, 사랑스럽고 귀여운 줄로만 알았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지는 아예 생각을 하지도 않지요
이제는 그런 잘 못되고 무지하고 무식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면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끝이 날 때에 여러분들은 크게 당황하게 될 것이요 그리고 낙담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면 그 은혜가 도리어 화가 되고 전혀 구원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만사를 은혜로 여길 때에 그 은혜로 여기는 것에는 반드시 거기에는 축복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잠 3: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요일 2: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면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시고 내게 주신 것이 모두가 은혜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괴롭히던 찌르는 가시도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의 대상임을 알게 될 때에 그는 오히려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자는 말입니다.
왜 내게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이 없다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구원하심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지난 94년도에는 유학 갔던 아들이 돌아와 돈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으로 온 세상에 충격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대학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버지를 살해함으로 더 큰 사회적 충격을 준 적도 있습니다. 일부 언론은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더 큰 충격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정말 기독교인이었다면 은혜를 은혜로 여긴 거듭난 신자였다면 그런 일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1,200만-1,500만이라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은혜를 모르고 교회만 들락거리는 사람들 속에는 도둑놈, 소매치기, 살인자, 불한당, 이중 생활하는 자, 그리고 어쩌면 살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은혜를 제대로 받기만 하면 거듭나고 새사람 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구원의 은혜를 받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은혜를 인정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육체의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 곧 성령의 인도하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내 자신을 맡겨야 할 것입니다.
잠 16: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한 신실한 목재소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40대 초반에 회사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극심한 불황으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게된 회사측에서 감량경영을 선언한 것입니다. 갑자기 실직자가 된 이 중년 남성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해고에 담긴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그는 건전한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여관을 시작하라는 음성을 듣고 전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사업망을 거느린 호텔 ‘홀리데인 인’을 창업하였던 ‘케몬스 윌슨’입니다. 그는 눈앞에 해고통지서를 놓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큰 구원하심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만약 케몬스 윌슨에게 해고통보가 날아들지 않았다면 그는 목재소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회는 자꾸만 온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청춘이 다가고 인생이 다가고 있음을 아셔야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크게 후회 할 일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는 은혜를 은혜로 여길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만이 후회를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내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 시인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여러분들에게 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편에서 모든 일을 생각하면 큰 은혜를 받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혤세 하고 찬송이라도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전국의 마귀가 전부 소집되어 긴급 회의를 했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죽자살자 전도를 하니 자기의 영역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자꾸만 예수 믿고 마귀의 세력이 약화됨을 위기의식을 느껴 어떻게 하면 그들이 전도하지 못하고,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할까해서 모여 의논을 했습니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마귀가 다 모여 의논을 하면서, 좋은 의견들을 내 놓았습니다.
‘예수 믿는 것들에게 어려움을 많이 주어서 그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게 합시다’ 그러니 다른 마귀가 가만히 보니까 이 방법은 욥이라는 작자에게 이런 방법을 사용했더니, 욥이 하는 말이,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이도 여호와 시오니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소서’라고 합니다. 더 지독하게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것들이 교회가지 못하도록 모조리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 놓읍시다.’ 그런데 이 방법도 바울과 실라에게 사용했는데 오히려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해서 더 큰 일만 일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것들 다 잡아 죽여 버립시다’ 그런데 이 방법도 스데반에게 사용해 보니 죽으면서 오히려 더 영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중에 경험이 많은 아주 노련한 마귀가 하는 말이, ‘그들로 교회도 다니게 하고, 예수도 잘 믿게 하고, 전도도 하게 하고, 기도도 하게 하고, 열심을 내게 합시다. 그러나 내일부터 하게 합시다’
결국 이 안이 채택이 되어 마귀는 지금껏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단연, ‘내일부터’, ‘다음에’, ‘차차’, ‘나중에’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단어는 ‘오늘’, ‘지금’ 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이 강조하고 있는 핵심적인 말씀은 “지금”이라는 단어입니다.
지금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두 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의 개념은?
‘어제’라는 과거도 아닙니다. ‘내일’이라는 미래도 아닙니다. ‘오늘’이라는 현재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주신 시간은 오늘이요 지금입니다.
지금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과거의 믿음도 아니요 앞으로 잘 믿겠다는 미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오늘이라는 사람입니다.
은혜와 축복도 오늘이라는 이 시간에 내리워집니다.
그럼 오늘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은혜와 구원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시간, 때에 대한 기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때, 시기 시간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 은혜로 다가오시고 지금 이 시간에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심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주어진 삶이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그 상황에 빠져드는 자가 아니라 그 가운데 은혜와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들이 서 있는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으셔야합니다.
한번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온 은혜와 구원의 주가 되신다면 그 표적을 보이라고 시험을 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예수님을 쳐다보기만 해도 은혜 그 자체가 되었지만은 이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만 불러도 은혜가 되는데 그들은 은혜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제자 마태는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사도요한 역시 그의 글에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리고 성에서 지나가시던 예수님을 향하여 문둥병자가 소리를 쳤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눅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시험하며 예수가 구원자라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은혜롭고 구원을 베푸는 자인 증거를 대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없습니다.
우리의 일 생활이 하나님의 은헤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있으며 잠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생이 어찌 잠시라도 살 수가 있습니까?
이 때 예수님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을 답답해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한 줄 알면서 시대적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표적을 보이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받아 드리지 못하는 마음을 회개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회개하고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예수님이 은혜로우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분으로다가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하고 굳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영물이면서도 영적이지 못하고 육적인 사람으로만 살고 있지 않으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구원의 역사에 대한 뜻은 분별하지 못하면서 육적으로, 세상 적으로 취해 살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적으로 논하고 받아 드려야 하는데 그래야 은혜가 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지금 막 일어나는데 인간적인 믿음없는 소리로 끝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을 하니 은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날이 더우면 여름이구나!
비가 계속 내리면 장마철이구나!
피부로 느끼는 것은 아주 민감하게 느끼면서도 오늘도 우리 앞에 거대한 능력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무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은 여러분들에게 향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제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은혜의 때에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와주었다. 라고 말씀하시며 바로 지금이야말로 은혜를 받을 만한 때이며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없음도 아닙니다.
내 스스로가 은혜를 거부하고 구원의 역사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은혜를 인정하고 않고 하나님을 시인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도와주고 불쌍히 여기사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우주인들이 우주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우주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한 우주인들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한 우주인은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가 너무나도 아름답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우주인들은 우리가 이 우주에까지 날아와 봐도 여기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똑 같이 펼쳐지는 우주를 향하여 한 우주인은 하나님을 시인하며 그 은혜를 감탄하고 있었지만 한 우주인은 하나님 그 자체를 부정하니 구원은 고사하고 어찌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범사에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참으로 그를 시인하고 인정하고 있습니까?
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숨쉬는 것 하나라도, 마시는 물 한잔이라도, 아니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람이든지 사물이든지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현재 일이든지 장래 일이든지 다 나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들뿐이니 어찌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참으로 어떠하십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아예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은혜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은혜라고 여기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 도적의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들이 은혜가 아닙니까?
그냥 꾸역꾸역 맛있는 것만 찾아서 먹고 배만 불리고 있지 않습니까?
내 자녀, 내 아내, 내 남편, 사랑스럽고 귀여운 줄로만 알았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지는 아예 생각을 하지도 않지요
이제는 그런 잘 못되고 무지하고 무식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면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끝이 날 때에 여러분들은 크게 당황하게 될 것이요 그리고 낙담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면 그 은혜가 도리어 화가 되고 전혀 구원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만사를 은혜로 여길 때에 그 은혜로 여기는 것에는 반드시 거기에는 축복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잠 3: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요일 2: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면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시고 내게 주신 것이 모두가 은혜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괴롭히던 찌르는 가시도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의 대상임을 알게 될 때에 그는 오히려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자는 말입니다.
왜 내게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이 없다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구원하심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지난 94년도에는 유학 갔던 아들이 돌아와 돈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으로 온 세상에 충격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대학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버지를 살해함으로 더 큰 사회적 충격을 준 적도 있습니다. 일부 언론은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더 큰 충격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정말 기독교인이었다면 은혜를 은혜로 여긴 거듭난 신자였다면 그런 일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1,200만-1,500만이라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은혜를 모르고 교회만 들락거리는 사람들 속에는 도둑놈, 소매치기, 살인자, 불한당, 이중 생활하는 자, 그리고 어쩌면 살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은혜를 제대로 받기만 하면 거듭나고 새사람 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구원의 은혜를 받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은혜를 인정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육체의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 곧 성령의 인도하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내 자신을 맡겨야 할 것입니다.
잠 16: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한 신실한 목재소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40대 초반에 회사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극심한 불황으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게된 회사측에서 감량경영을 선언한 것입니다. 갑자기 실직자가 된 이 중년 남성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해고에 담긴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그는 건전한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여관을 시작하라는 음성을 듣고 전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사업망을 거느린 호텔 ‘홀리데인 인’을 창업하였던 ‘케몬스 윌슨’입니다. 그는 눈앞에 해고통지서를 놓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큰 구원하심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만약 케몬스 윌슨에게 해고통보가 날아들지 않았다면 그는 목재소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회는 자꾸만 온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청춘이 다가고 인생이 다가고 있음을 아셔야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크게 후회 할 일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는 은혜를 은혜로 여길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만이 후회를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내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 시인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여러분들에게 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편에서 모든 일을 생각하면 큰 은혜를 받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혤세 하고 찬송이라도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