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로 결실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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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92회 작성일 2013-11-11 20:31본문
누가복음8:9-15 인내로 결실 하는 자
시중에 시판되는 약 한 알이 이 약효가 증명되고 부작용을 완화시키는 것이 증명되어 시중에 판매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간이 약 10년이 라고 합니다.
그 10년의 기간 안에는 수많은 연구원들과 연구대상자들이 동원이 되고 거기에 따르는 경비 또한 무시하지 못 할 것입니다.
결국은 기다림의 인내가 그 열매를 가져 온다는 말입니다. 비단 약 뿐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즐겨 먹는 꿀 한 숟가락의 양이 생기기까지는 한 마리의 꿀벌이 4200번이나 꽃을 왕복하며 얻은 것입니다. 작곡가 하이든은 유명한 천지창조라는 오라토리오는 800번이라는 작품을 써본 후 그의 나이 66세가 되서야 완성한 것입니다.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작품도 8년 동안 2000번이나 스케치를 반복한 결과로 그려진 명작입니다. 에디슨 전기 발명도 2000번의 도전 끝에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할 때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2000번이 아니라 2000번이라도 인내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루 한번 인내를 해도 일 년365일 제 경우를 생각한다면 60번을 곱하니 21900번을 참아야 하는데 어디 하루에 한 번 만 가지고 됩니까?
그러니 죽기까지 참아야 그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1년에 한 번씩 욤키푸르(대속죄일)를 지낸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날은 금식한다. 일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말하고 천천히 걷는다. 텔레비전을 켜도 기도합시다라는 정지 화면만 나온다고 한다. 환자, 노약자는 금식하지 않아도 되지만 최대한 적게 먹는다. 나치 수용소에서 욤키푸르를 지킨 유대인들이 있다. 나치가 욤키푸르라고 강제 노동을 쉬게 해 주지 않는데도, 하루 안 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가 아닌데도 금식했다. 땅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라도 감사하게 먹는 사람들이 왜 하루 종일 금식했을까?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자신들이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동안, 가족들이 가스실에서 죽는 동안 하나님이 무얼 하셨는지 묻고 또 묻다가 대속죄일에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 금식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수용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자신들의 의지와 충돌을 가져 오고 있습니다.
엘리 위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아이가 교수형을 당하는 모습을 더 나이트라 그 날 밤이라는 글에 적어 놓았다.
위젤은 루마니아 시게트 출생. 15세 때인 1944년 나치의 유대인 학살계획에 의해 아우슈비츠 및 부헨발트 수용소에 끌려가, 이곳에서 부모와 두 누나를 잃었으나 그는 연합군의 진격 때까지 살아남았다. 1945년 프랑스에 정착하여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948년 라 르슈지(紙) 기자가 되었으며, 1956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소년은 목에 밧줄을 걸고 교수형을 당했지만 너무 가벼워 단번에 죽지 않았다. 30분 넘게 몸부림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1만 명의 포로가 강제로 지켜보았다. 뒤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때 위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는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라는 대답이 자기 안에서 말하는 걸 들었다고 적었다.
내가 아파할 때, 고통당할 때, 죽을 수밖에 없을 때,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이다.
스테반 집사가 사람들에게 돌로 공개 처형 당 할 때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행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러니 그의 입술에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행7: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때로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해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거기에는 말씀의 인내가 요구되고 그 인내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그 결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인내라는 것이 꼭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런데 요즈음은 그 인내라는 것이 결코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때인 것 같습니다
현대는 인내라는 매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내를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의 기초로 삼으십니다.
약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철학자 플라토우스는 인내는 어떠한 괴로움에도 잘 듣는 명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내는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내를 가지고 참으며 하나님을 인내하며 계속해서 찾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인내가 무슨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자기에게 부당하게 다가오는 고난에 대처하는데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우리를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요1서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일 가까운 부모 형제간에도 친구와 이웃 사회 등에서 공평하게 대접하지 않는다고 늘 불평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불평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내가 필요함을 일러 주는 것입니다.
벧전2:19-21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고난이 있지만 인내로 아름답게 하라고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도 그 본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부당하게 정죄를 받고 억울하게 되는 일은 결국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인내가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들이다
결국 이 세상의 삶은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내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내함으로서 비로소 내 것이 됩니다.
내 것이 되어 능력이 되고 힘이 되고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힘든 세상에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천사가 밤중에 양을 지키는 목동들에게 들여 준 소식이 무엇입니까?
눅2:8-14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의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데 온 백성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안 주고가 아닙니다.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데 옥토 밭에만 뿌린 아니라 땅이라고 생긴 곳에는 어디든지 다 뿌렸다는 것입니다.
길바닥에도 돌짝밭에도 심지어는 가시덤불에도 옥토 밭과 같이 뿌려졌습니다.
요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주십니다 사람들은 똑같이 말씀을 듣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말씀을 듣는데 사람마다 받는 은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그 말씀의 열매가 맺혀지는 과정이나 결과는 큰 차이가 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에 은혜를 받아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말씀인데도 그것이 덜 한 경우도 있고, 아예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셨을 때 어떤 이들은 잘 받아들여 구원이라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복음을 듣기 싫어하고 주님을 배척하는 끔찍한 죄악을 범했고 파멸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눅2: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그와 같은 흥하고 패하는 일은 복음으로 인하여 계속됩니다.
베드로나 바울 등 이후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잘 들음으로 주님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게 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반대의 결과에 이르게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마음 밭의 상태, 즉 말씀을 듣는 마음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 밭이 그 결정적인 차이가 나도록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는 마음의 태도는 절대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어떤 분들은 가면 갈수록 그 신앙과 삶이 발전하고 성장하여 좋은 인격과 삶의 결실을 많이 맺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등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간직했던 것입니다. 곧 인내를 잘하였다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떠한 마음의 태도로 대하는가를 유심히 보십니다.
길바닥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있습니다.
이 마음은 아예 말씀을 받아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굳어져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게 여깁니다.
길가에 떨어지면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15절 말씀을 들었을 때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갔다는 것입니다.
씨앗을 땅이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일지라도 땅이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열매를 풍성하게 맺힐 수 없습니다.
혹시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무엇보다도 말씀을 마음에 받아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길가 같은 마음도 말씀을 받아 드려 옥토 같은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돌밭 같은 마음을 옥토 같은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환난과 핍박, 조금 어려움도 참아 견뎌야 합니다.
밑에는 암반이 있고 그 위에 흙이 살짝 덮인 밭입니다.
말씀을 받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그 말씀으로 오는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곧 넘어지는 신앙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 같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 메시아로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도 마음 속 깊이에서 내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주재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은 상당히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금방 달구어졌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으로 살면서 잘되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살다가 말씀 때문에 조그마한 어려움이 다가오면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원망합니다.
씨가 발아되어 깊이 뿌리를 박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봄여름 가을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때로는 폭풍우도 불어오고 때로는 눈도 내리고 때로는 가뭄이 들기고 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이것을 잘 견디며 극복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 가야만 맛있는 열매, 빛깔 좋은 열매, 영양가 있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옥토 같은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유혹 극복하기
왜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겠습니까?
땅도 좋습니다. 습도도 적당합니다. 뿌리도 잘 내렸습니다. 줄기도 나고 잘 자라납니다.
그런데 가시덤불이 있습니다. 가시에 찔려 신음하게 됩니다. 꽃을 피지 못하게 하고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이 가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가시덤불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의 욕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려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염려란 마음이 나뉘다, 분열되다. 는 말입니다. 생각을 복잡하게 합니다. 단순하게 갖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것은 성경 이야기이고 지금은 달라, 현실과 이상은 달라 라고 말합니다.
말씀의 세계와 현실 세상의 세계는 너무나 차이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생각이 복잡해지면 생각과 판단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물질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재리란 재물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재물의 유혹은 재물에 대한 필요 욕구라기보다는 재물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말씀을 막히게 합니다. 질식시킵니다. 숨 막히게 합니다 생명력을 잃게 합니다.
물질은 필요합니다. 부자로 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십니다.
이삭도 100배 의 수확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물질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하나님이 되고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잊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일락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쾌락 지상주의입니다.
딤전5: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깐이고 그 기쁨은 감정의 기쁨으로만 그칠 수 있습니다. 진정 행복하게 하는 기쁨은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큰 믿음은 큰 인내를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인내가 없이 약속을 받지 못합니다.
인내라는 말뜻은 whipo+mene, 즉 아래에 머문다 입니다.
아래 머무는 일은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가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고 말했듯이 인내의 과정은 고통이 따르고, 그 고통을 참고 견뎌 오래 참아내면 결국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현재의 내 삶을 잘 인내하여 백배나 결실하는 좋은 마음을 가지자
시중에 시판되는 약 한 알이 이 약효가 증명되고 부작용을 완화시키는 것이 증명되어 시중에 판매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간이 약 10년이 라고 합니다.
그 10년의 기간 안에는 수많은 연구원들과 연구대상자들이 동원이 되고 거기에 따르는 경비 또한 무시하지 못 할 것입니다.
결국은 기다림의 인내가 그 열매를 가져 온다는 말입니다. 비단 약 뿐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즐겨 먹는 꿀 한 숟가락의 양이 생기기까지는 한 마리의 꿀벌이 4200번이나 꽃을 왕복하며 얻은 것입니다. 작곡가 하이든은 유명한 천지창조라는 오라토리오는 800번이라는 작품을 써본 후 그의 나이 66세가 되서야 완성한 것입니다.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작품도 8년 동안 2000번이나 스케치를 반복한 결과로 그려진 명작입니다. 에디슨 전기 발명도 2000번의 도전 끝에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할 때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2000번이 아니라 2000번이라도 인내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루 한번 인내를 해도 일 년365일 제 경우를 생각한다면 60번을 곱하니 21900번을 참아야 하는데 어디 하루에 한 번 만 가지고 됩니까?
그러니 죽기까지 참아야 그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1년에 한 번씩 욤키푸르(대속죄일)를 지낸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날은 금식한다. 일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말하고 천천히 걷는다. 텔레비전을 켜도 기도합시다라는 정지 화면만 나온다고 한다. 환자, 노약자는 금식하지 않아도 되지만 최대한 적게 먹는다. 나치 수용소에서 욤키푸르를 지킨 유대인들이 있다. 나치가 욤키푸르라고 강제 노동을 쉬게 해 주지 않는데도, 하루 안 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가 아닌데도 금식했다. 땅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라도 감사하게 먹는 사람들이 왜 하루 종일 금식했을까?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자신들이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동안, 가족들이 가스실에서 죽는 동안 하나님이 무얼 하셨는지 묻고 또 묻다가 대속죄일에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 금식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수용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자신들의 의지와 충돌을 가져 오고 있습니다.
엘리 위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아이가 교수형을 당하는 모습을 더 나이트라 그 날 밤이라는 글에 적어 놓았다.
위젤은 루마니아 시게트 출생. 15세 때인 1944년 나치의 유대인 학살계획에 의해 아우슈비츠 및 부헨발트 수용소에 끌려가, 이곳에서 부모와 두 누나를 잃었으나 그는 연합군의 진격 때까지 살아남았다. 1945년 프랑스에 정착하여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948년 라 르슈지(紙) 기자가 되었으며, 1956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소년은 목에 밧줄을 걸고 교수형을 당했지만 너무 가벼워 단번에 죽지 않았다. 30분 넘게 몸부림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1만 명의 포로가 강제로 지켜보았다. 뒤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때 위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는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라는 대답이 자기 안에서 말하는 걸 들었다고 적었다.
내가 아파할 때, 고통당할 때, 죽을 수밖에 없을 때,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이다.
스테반 집사가 사람들에게 돌로 공개 처형 당 할 때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행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러니 그의 입술에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행7: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때로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해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거기에는 말씀의 인내가 요구되고 그 인내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그 결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인내라는 것이 꼭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런데 요즈음은 그 인내라는 것이 결코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때인 것 같습니다
현대는 인내라는 매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내를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의 기초로 삼으십니다.
약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철학자 플라토우스는 인내는 어떠한 괴로움에도 잘 듣는 명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내는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내를 가지고 참으며 하나님을 인내하며 계속해서 찾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인내가 무슨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자기에게 부당하게 다가오는 고난에 대처하는데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우리를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요1서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일 가까운 부모 형제간에도 친구와 이웃 사회 등에서 공평하게 대접하지 않는다고 늘 불평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불평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내가 필요함을 일러 주는 것입니다.
벧전2:19-21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고난이 있지만 인내로 아름답게 하라고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도 그 본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부당하게 정죄를 받고 억울하게 되는 일은 결국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인내가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들이다
결국 이 세상의 삶은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내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내함으로서 비로소 내 것이 됩니다.
내 것이 되어 능력이 되고 힘이 되고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힘든 세상에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천사가 밤중에 양을 지키는 목동들에게 들여 준 소식이 무엇입니까?
눅2:8-14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의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데 온 백성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안 주고가 아닙니다.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데 옥토 밭에만 뿌린 아니라 땅이라고 생긴 곳에는 어디든지 다 뿌렸다는 것입니다.
길바닥에도 돌짝밭에도 심지어는 가시덤불에도 옥토 밭과 같이 뿌려졌습니다.
요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주십니다 사람들은 똑같이 말씀을 듣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말씀을 듣는데 사람마다 받는 은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그 말씀의 열매가 맺혀지는 과정이나 결과는 큰 차이가 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에 은혜를 받아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말씀인데도 그것이 덜 한 경우도 있고, 아예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셨을 때 어떤 이들은 잘 받아들여 구원이라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복음을 듣기 싫어하고 주님을 배척하는 끔찍한 죄악을 범했고 파멸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눅2: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그와 같은 흥하고 패하는 일은 복음으로 인하여 계속됩니다.
베드로나 바울 등 이후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잘 들음으로 주님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게 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반대의 결과에 이르게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마음 밭의 상태, 즉 말씀을 듣는 마음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 밭이 그 결정적인 차이가 나도록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는 마음의 태도는 절대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어떤 분들은 가면 갈수록 그 신앙과 삶이 발전하고 성장하여 좋은 인격과 삶의 결실을 많이 맺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등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간직했던 것입니다. 곧 인내를 잘하였다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떠한 마음의 태도로 대하는가를 유심히 보십니다.
길바닥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있습니다.
이 마음은 아예 말씀을 받아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굳어져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게 여깁니다.
길가에 떨어지면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15절 말씀을 들었을 때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갔다는 것입니다.
씨앗을 땅이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일지라도 땅이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열매를 풍성하게 맺힐 수 없습니다.
혹시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무엇보다도 말씀을 마음에 받아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길가 같은 마음도 말씀을 받아 드려 옥토 같은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돌밭 같은 마음을 옥토 같은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환난과 핍박, 조금 어려움도 참아 견뎌야 합니다.
밑에는 암반이 있고 그 위에 흙이 살짝 덮인 밭입니다.
말씀을 받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그 말씀으로 오는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곧 넘어지는 신앙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 같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 메시아로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도 마음 속 깊이에서 내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주재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은 상당히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금방 달구어졌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으로 살면서 잘되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살다가 말씀 때문에 조그마한 어려움이 다가오면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원망합니다.
씨가 발아되어 깊이 뿌리를 박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봄여름 가을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때로는 폭풍우도 불어오고 때로는 눈도 내리고 때로는 가뭄이 들기고 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이것을 잘 견디며 극복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 가야만 맛있는 열매, 빛깔 좋은 열매, 영양가 있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옥토 같은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유혹 극복하기
왜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겠습니까?
땅도 좋습니다. 습도도 적당합니다. 뿌리도 잘 내렸습니다. 줄기도 나고 잘 자라납니다.
그런데 가시덤불이 있습니다. 가시에 찔려 신음하게 됩니다. 꽃을 피지 못하게 하고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이 가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가시덤불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의 욕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려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염려란 마음이 나뉘다, 분열되다. 는 말입니다. 생각을 복잡하게 합니다. 단순하게 갖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것은 성경 이야기이고 지금은 달라, 현실과 이상은 달라 라고 말합니다.
말씀의 세계와 현실 세상의 세계는 너무나 차이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생각이 복잡해지면 생각과 판단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물질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재리란 재물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재물의 유혹은 재물에 대한 필요 욕구라기보다는 재물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말씀을 막히게 합니다. 질식시킵니다. 숨 막히게 합니다 생명력을 잃게 합니다.
물질은 필요합니다. 부자로 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십니다.
이삭도 100배 의 수확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물질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하나님이 되고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잊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일락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쾌락 지상주의입니다.
딤전5: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깐이고 그 기쁨은 감정의 기쁨으로만 그칠 수 있습니다. 진정 행복하게 하는 기쁨은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큰 믿음은 큰 인내를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인내가 없이 약속을 받지 못합니다.
인내라는 말뜻은 whipo+mene, 즉 아래에 머문다 입니다.
아래 머무는 일은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가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고 말했듯이 인내의 과정은 고통이 따르고, 그 고통을 참고 견뎌 오래 참아내면 결국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현재의 내 삶을 잘 인내하여 백배나 결실하는 좋은 마음을 가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