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달려 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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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91회 작성일 2013-11-1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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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0:22-24 내가 달려 갈 길
지난 2000년 미국 코넬대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바로 사랑의 유효기간에 관한 연구입니다. 2년간 남녀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남녀가 가슴 뛰는 사랑을 나누는 기간은 대체로 18-30개월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이며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사랑의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사랑을 단순히 뇌 속의 화학작용의 결과로 설명한다는 것인 지나친 감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사랑은 영원히 계속하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외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의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리새인 사도 바울은 태어나기 전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받았던 유수한 가문의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바리새파 사람으로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을 박해하고 옥에 가두며 죽이는데 찬성하였고,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현장에서 증인으로 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다메섹으로 향하던 도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후로는 유대인 뿐 아니라 여러 이방나라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그의 인생의 진로가 바꿔 버렸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뒤에 정말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머리, 가슴, 온 몸에는 온통 주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사랑에 매여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랑에 매여 사는 것이 온통 주님을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주의 사랑에 매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제 나는 더 내 이름으로는 살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으로만 살겠습니다.
본문에서는 주의 사랑에 매여 사는 바울의 삶의 절정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주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갈을 가고 있습니다.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가면 잡힐 것이고, 견디기 힘든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고, 죽을 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알려주셔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물로 그 앞길을 막아섭니다.
오히려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 , 달려서라도 가야 할 길이라고 말합니다.
20-30개월 만에 끝나는 화학적인 생물학적인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랑이 더 깊어 갑니다.
이제 주를 위해 죽으려 길을 나섭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변함없이 누군가의 사랑에 매여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사랑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요?
동물적이요 육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22-23절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이 지속적으로 주의 사랑에 매여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께서 바울을 잡아주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매여라는 말은 원어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묶여 있다. 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을 향해 갔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오히려 자기가 성령님께 묶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 성령께 묶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메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메여 내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삶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속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면 성령에 매임을 받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주님을 사랑하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부모 형제간의 육적인 관계만이 온전한 관계가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인천에서는 어머니와 형을 돈 문제로 살해 하는 비 인륜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적인 것은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달라집니다.
성령에 붙잡힘을 받아 자신의 갈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성령에 매임을 당한 자는 어떤 상황도 극복합니다.
주님을 섬김에는 항상 시험이 따릅니다.
사탄이 싫어해서 시험이 오고, 내 게으름 때문에 시험이 오고,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험이 오고, 힘들어서 시험이 오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시험이 오고, 육신적인 의지에는 시험에 따르기 마련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어떤 것입니까?
갈5:16-21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바울사도도 시험을 감당하는 과정은 곧 바로 성령에 매여서 시험을 참아내는 과정들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주님의 일을 하는 과정 자체가 시험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고후11:23-27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육신적으로 이런 일을 당하는 바울을 볼 때에 이렇게까지 당하며 살아야 하나를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 왜 그래셨을까?
그냥 바리새인으로 지내면 편하셨을 텐데요. 로마시민권도 있겠다. 돈도 있겠다. 명성과 지위와 지식도 모자람이 없는 분이 왜 자처하여 그 고생을 하셨습니까?
그는 말합니다.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장 귀한 것을 얻었는데 그 외에 것에 더 이상 메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는 잃어버리고 배설물과 같이 여길 뿐입니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게 내가 나아 갈 길의 해답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심에 없다는 말이요
한편으로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목숨을 걸고도 감당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이 없는 광야의 길을 어떻게 갈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홍해의 바닷길을 마른 땅같이 갈 수 있었습니까?
이끄시는 대로 갔기에 그게 길이었습니다.
출13:21-22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이 길이시고 그의 말씀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요14:4-6절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성령에 매여 사는 것은 세상적인 그 어떤 일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게 관심사가 아니고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관심입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가는 도중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갑니다.
성령께서 다 잘 아시고 나를 위해 최선의 길로 이끄실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역시 그가 길을 떠날 때에 모르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갈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따라야 할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11:8-10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정 중심적 삶이 있고, 다른 하나는 결과 중심적 삶이 있습니다.
과정 중심적 인생은 오늘 하루하루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그 하루하루가 모여서 후일에 위대한 결과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과 중심적 인생은 후일의 위대한 결과를 꿈꾸며 오늘 하루하루 주님의 인도하심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과정에 성실치 못합니다.
목적을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결국 위대한 결과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매임을 받은 삶은 존재의 의미가 있는 길입니다.
본문은 밀레도에서 만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바울이 전하는 사명자의 길에 관한 내용입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약 32km나 되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일행들과 함께 배를 타지 않고 홀로 육로를 택해 그곳으로 갔는지 본문에 그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전날 밤 그는 철야강의를 한 상태였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혼자 위험한 육지 길을 간 사유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 말대로 뱃멀미 때문이 아니고 그 때는 4월의 아름다운 화창한 봄이었다고 합니다. 육로를 통해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을 통해 자신의 나아가는 길을 택하였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존재의 의미기 무엇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영혼의 문제, 신의 존재, 선과 악, 삶과 죽음을 두고 고민한다. 이야기할 상대가 없거나,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꺼내지 않지만 누구나 고민한다.
가수 박진영 씨. SBS 힐링캠프에 이어 MBC 라디오 스타에서도 자신의 구도 여정을 소개했다
사람들은 하나님 얘기를 싫어한다. 질렸다는 표정을 보이거나,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며 무시하거나, 너나 잘하세요하며 피한다. 이성은 하나님 자리에 인간의 현실을 세웠다
왜 사는지, 죽음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을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에서 고 이병철 삼성 그룹 회장도 이런 고민을 안고 살았던 것 같다.
1987년 죽기 직전 네 쪽짜리 질문지를 보낸다.
쪽지에는 이병철 회장이 궁금하게 여긴 24가지 질문이 적혀 있었다. 철학자들이 수천 년 답을 찾으려고 고민한 내용이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이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나?, …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나?,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이거 세상 사람들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다 풀은 숙제들입니다.
그러기에 단순히 자기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삶과 죽음의 의미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유일한 목적은 주께 받은 사명,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거기에 내 전부를 드려도 가장 귀한 길
그러한 삶을 위하여 그는 알고 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고 계속 갖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그 길로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길은 포기하지 않으면 갈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거 갖고 있었던 것, 그리고 현재 향유하고 있는 것, 또한 미래에 보장된 것들을 모두를 포기하고 그의 달려갈 길로 갔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을 포기하였습니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인데 그는 그것조차 배설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바울은 촉망되는 미래도 포기했습니다. 그는 맡아 놓고 출세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행복도 포기했다는 점입니다.
딱 한번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사람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낭비할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벗어났다면 오늘 바로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달려 갈 길을 가기 위함입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하여 꼭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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