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 응답하는 여호와 하나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62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열왕기상 18: 20-14 불로 응답하는 여호와 하나님
여러분 기억 하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년 6월 9일 동아 일보에서 최악의 가뭄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기상 관측 이후 최악의 가뭄, 하늘도 마르고 땅도 말랐다. 올 봄 들어 계속된 가뭄이 3개월을 넘기면서 전국의 들녘이 불타고 있다. 마른하늘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가슴에 피 멍이 든다. 갈가리 찢어진 논바닥 밭 두렁은 차라리 황무지를 연상케 한다. 뿌연 먼지에 휩싸인 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퍼석퍼석 무너져 내린다. 하천은 시뻘건 바닥을 드러내며 돌아 누었다... 근간의 우리 나라의 가뭄은 근 90년만의 대 한재(大旱災)로 보도되고 있다. 이 가뭄은 단지 농업분야의 생산물의 피해뿐만 아니라 공업용수, 생활용수의 고갈을 초래하여 우리 산업전반에 큰 타격을 주고, 나아가 국민의 식생활(생존)도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기우제라도 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세종 8년(1426년)에 심한 가뭄이 온 나라를 태웠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18일간이나 앉아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그리고 원구단(圓丘壇, 고려 때부터 천지를 제사하는 단. 현재의 조선호텔의 구내)에서 다음과 같은 제문(祭文)을 올리며 기우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아 ! 무더움이 극심하여 두려움이 내 마음을 태우노라. 나의 덕(德)이 바르지 못해 상제(上帝)께서 크게 노하셔서 엄한 경고를 내리시는 것이니 스스로 반성하고 꾸짖노라. 혹 형벌(刑罰)과 옥송(獄訟), 부역(賦役)에서 백성의 원한은 없었는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본다. 아 두렵도다! 밤마다 염려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니 어찌 할 바를 모르겠도다. 과실과 죄를 용서해 주시고, 비가 세차게 퍼붓도록 해 주소서. 그리하여 마른 초목(草木)을 소생케 하고 억조창생(億兆蒼生)이 모두 화목하게 될 수 있도록 하소서
성경의 역사에서 보면 다윗 시대(B. C.1000년경)에 가뭄으로 기근이 3년간 계속되었을 때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사람을 죽였음이니라.하니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할 때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그들과 화친해 기브온 사람을 살릴 것을 언약했는데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한 열심으로 기브온 사람을 죽였으므로 사울의 죄로 가뭄의 저주가 온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사울의 속죄를 위하여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사울의 자손 일곱을 죽이도록 기브온인들에게 넘겨주고 기브온 사람들은 이들을 사울의 고향 기브아에서 목베어 죽임으로 그 죄가 사함을 받음으로 비로소 비가 쏟아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이스라엘은 3개월이 아니라 3년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인하여 상당한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말이 3년이지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견딜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이 가뭄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안에서는 상당한 갈등을 겪게 되고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를 아합 왕은 모든 핑계를 엘리야가 믿는 하나님 때문에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아 너 때문에 이스라엘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 집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우상을 좇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소히 종교적인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보면 누가 집안에서 혹시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으면 잘되면은 모두가 자기의 공으로 여기다가 안되면은 한결같이 하는 말이 누가 교회 다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때에 엘리야는 분명히 말을 합니다 과연 누가 참신이지 한번 대결을 해보자
바알인지 여호와 하나님인지?
갈멜산에서 대결해 보자 서로 논쟁을 벌이던 가뭄의 원인이 진정 누구에게 있는지 대결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합이 아주 순순히 응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멜산은 홈 그라운드입니다. 모든 산에서는 다 바알에게 숭배하는 신상이 있었고 그리고 숫자적으로 현저하게 우세했습니다. 적어도 850:1 이었고 그리고 이기면 아합왕의 인기가 치솟고, 가뭄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과 정치적인 불안도 해소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승패의 갈림은 자신들의 제단에 불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시다 라고 대결을 했는데 당연히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할렐루야!
그 결과 우상 숭배하는 선지자들을 다 목베어 죽이고 그 죄악을 제하고 나니 하나님이 더디어 3년여간에 닫쳤던 하늘 문을 여시고 비를 내리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가로 막혔던 문제들이 해결이 되고 축복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세상으로 인하여 겁을 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담대해져야 합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의 눈치를 살피라 환경을 보고 머뭇머뭇 거리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4세기 동방의 명설교가였던 요한 크리소스톰이 사회악을 꾸짖고 황후 유독시아의 사치를 나무라다가 위협을 당하여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을 때 그는 태연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할까? 죽음인가? 아니다.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께 감추어져 있다. 내가 사는 땅에서 쫓겨나는 것인가? 아니다.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 나의 소유를 잃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은 없고 떠날 때도 가지고 갈 것은 없다. 나의 보화는 하늘에 감추어져 있다. 저들이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처럼 될 것이고 저들이나를 구덩이에 던져 넣으면 나는 예레미야처럼 될 것이고 굴에 던져 넣으면 다니엘처럼 될 것이고, 돌로 친다면 나는 스데반처럼 될 것이고 목을 벤다면 세례 요한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매질한다면 나는 사도 바울처럼 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편 56편 4,11절)
저는 성도들에게서 조그마한 시험과 어려움이 생기면 믿음을 핑계되고 또는 믿음에서 멀어져 가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이들이 과연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그렇게도 믿을 수 없는 분인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마치 배 머리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죽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찾지 않는 그들의 모습 말입니다.
아직 주께 내 모든 인생을 걸고 있지 않구나? 하나님을 믿기는 무얼 믿는다 말인가? 작은 것 하나 맡기지 못하고 너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주님 책망하시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주께 내 모든 것이 다 있다고 여긴다면 어찌 믿음의 비겁자가 되겠습니까?
당연히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왕의 권력에 위축되지 않고 정면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으로 믿음 적인 것이라면 에스더와 같은 이는 죽음까지 불사하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바알 신을 섬김은 사실 하나님 보다 바알에게 기대를 더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알신은 농경 신으로 광야에서 맛없는 만나를 주는 하나님보다는 풍성한 곡식과 빵과 포도주를 준다고 믿었기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오늘날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말씀에 의하여 살기보다는 세상의 물질에 정신을 뺏기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바알은 남녀의 성관계를 종교의식에 포함시키고 있는 음란한 종교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여신 사이에 성관계를 유도하기 위해서 성관계하는 제사의식을 하게 되는데 그래야지 비가 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때에 당시 왕이 먼저 바알 성전 매춘부와 시범을 보이고 전국적으로 축제 형식으로 치러집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성적인 것과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힌두교나 불교도 최고의 경지에 들어가면 이런 문제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인도로 가는 길)---제전에 이러한 물란한 성적인 내용들이 많이 우상으로 만들어 있고 그림으로 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상당히 성적으로 유혹적이 되어 인간의 본성을 잘 자극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호와 종교는 이성문제에 대하여 아주 엄격하니 자연히 바알을 좇게 되는 것입니다.
음란물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차있서 우리 4명인데 만나자 라는 것입니다. 놀랬어요? 저도 나갈 뻔했어요
바알을 좇는 이유는 도덕적인 신앙생활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종교에는 신을 경외하고 그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것인데 반해 바알은 자신들의 축복을 위해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신이었기 때문에 아주 편리하였습니다.
부담 없이 즐기고 물질적인 보상까지 얻을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에 아주 인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무슨 매력이 있어서 여호와를 택하느냐? 말입니다.
사 53: 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별로 볼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안에서도 가만히 나 두면 세상적으로 돌아가 세상적인 모임을 만들어 버리지 않습니까?
믿음 생활하면서도 자꾸 세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시켜 놓았더니 자꾸 애굽에 있었던 이야기하는 것과 똑 같아요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이끌려 살고 믿음에는 응답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기회를 보고 있고 풍세를 따라서 이쪽 저쪽으로 가겠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은 사느냐? 죽느냐? 의 기로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인은 담대하게 믿음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 한 줄로 믿습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기독인에게는 중립지대가 없습니다.
확실한 믿음에 서서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그 믿음의 기도에는 능력이 나타나며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너진 믿음의 제단을 수축하고 기도드릴 때 성령의 불이 임하십니다.
몸과 마음을 헌신하고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때 성령의 불이 임하십니다.
성령의 불이 없는 교회나 개인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올라야 됩니다.
믿음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 가슴속에 성령의 불이 임하면 가슴속에 있는 나무나 돌이나 흙같은 죄악과 인본주의와 세속과 불순종이 다 타버립니다. 사람이 힘으로 태우지 못하지만 하늘의 불이 오면 모든 신앙의 불순물들을 태워버립니다.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임하니까 그곳에 모여있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을 섬기던 사람들이 일제히 엎드려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교회에 성도들에게 성령의 불이 임하면 불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고 회개운동이 일어납니다. 교회에 성령의 불이 떨어져야 세상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갖 죄악이 정결케 되고 마침내 가로 막혔던 문제들이 해결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악으로 가려졌던 축복이 들어 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캄캄한 사람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귀가 먹어심도 아니요 손이 짧아서 도와주지 못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악으로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38년이라는 중병을 앓은 사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해결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죄악의 문제가 해결되고 보니 축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 저기 보입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하려느냐?” 믿는 사람 같기도 하고 안 믿는 사람 같기도 하고, 하나님의 자녀 같기도 하고 마귀의 자식 같기도 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 같기도 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 같기도 하고 이 두사이에서 언제까지 머뭇머뭇하려느냐? 결단을 내려라. 어느 쪽이냐? 양자택일을 하라.
선택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내 상태는 믿음과 불신의 선택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절대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버이 날 사랑하지만 내대신 성공해 줄 수 없는 것이고 스승이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내 대신 공부해 줄 수 없듯이 목사가 아무리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권면하더라도 받아드리는 것은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선택을 왜 올바로 하지 못합니까?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바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타락한 근성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올바른 믿음의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 읽고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힙입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내 지식, 내 생각, 내 감정, 내 의지를 지배할 때 욕심이라는 것은 꼼짝 못하게 되는 것이요 타락한 근성은 성화 되어지고 무지는 지혜롭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대는 어떻게 욕심을 버릴 수 있었는가를?” 베드로에게 물어 보십시오.“그대는 어떻게 타락한 근성을 버릴 수 있었는가를?” 어거스틴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대는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는가를?” 그들 모두의 대답은 한결같을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라고.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죄악에 붙잡혀 후회스러운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에 서서 출발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비가 내립니다. 은혜의 비가 축복의 비가 내립니다.
여러분 기억 하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년 6월 9일 동아 일보에서 최악의 가뭄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기상 관측 이후 최악의 가뭄, 하늘도 마르고 땅도 말랐다. 올 봄 들어 계속된 가뭄이 3개월을 넘기면서 전국의 들녘이 불타고 있다. 마른하늘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가슴에 피 멍이 든다. 갈가리 찢어진 논바닥 밭 두렁은 차라리 황무지를 연상케 한다. 뿌연 먼지에 휩싸인 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퍼석퍼석 무너져 내린다. 하천은 시뻘건 바닥을 드러내며 돌아 누었다... 근간의 우리 나라의 가뭄은 근 90년만의 대 한재(大旱災)로 보도되고 있다. 이 가뭄은 단지 농업분야의 생산물의 피해뿐만 아니라 공업용수, 생활용수의 고갈을 초래하여 우리 산업전반에 큰 타격을 주고, 나아가 국민의 식생활(생존)도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기우제라도 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세종 8년(1426년)에 심한 가뭄이 온 나라를 태웠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18일간이나 앉아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그리고 원구단(圓丘壇, 고려 때부터 천지를 제사하는 단. 현재의 조선호텔의 구내)에서 다음과 같은 제문(祭文)을 올리며 기우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아 ! 무더움이 극심하여 두려움이 내 마음을 태우노라. 나의 덕(德)이 바르지 못해 상제(上帝)께서 크게 노하셔서 엄한 경고를 내리시는 것이니 스스로 반성하고 꾸짖노라. 혹 형벌(刑罰)과 옥송(獄訟), 부역(賦役)에서 백성의 원한은 없었는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본다. 아 두렵도다! 밤마다 염려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니 어찌 할 바를 모르겠도다. 과실과 죄를 용서해 주시고, 비가 세차게 퍼붓도록 해 주소서. 그리하여 마른 초목(草木)을 소생케 하고 억조창생(億兆蒼生)이 모두 화목하게 될 수 있도록 하소서
성경의 역사에서 보면 다윗 시대(B. C.1000년경)에 가뭄으로 기근이 3년간 계속되었을 때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사람을 죽였음이니라.하니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할 때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그들과 화친해 기브온 사람을 살릴 것을 언약했는데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한 열심으로 기브온 사람을 죽였으므로 사울의 죄로 가뭄의 저주가 온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사울의 속죄를 위하여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사울의 자손 일곱을 죽이도록 기브온인들에게 넘겨주고 기브온 사람들은 이들을 사울의 고향 기브아에서 목베어 죽임으로 그 죄가 사함을 받음으로 비로소 비가 쏟아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이스라엘은 3개월이 아니라 3년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인하여 상당한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말이 3년이지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견딜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이 가뭄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안에서는 상당한 갈등을 겪게 되고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를 아합 왕은 모든 핑계를 엘리야가 믿는 하나님 때문에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아 너 때문에 이스라엘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 집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우상을 좇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소히 종교적인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보면 누가 집안에서 혹시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으면 잘되면은 모두가 자기의 공으로 여기다가 안되면은 한결같이 하는 말이 누가 교회 다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때에 엘리야는 분명히 말을 합니다 과연 누가 참신이지 한번 대결을 해보자
바알인지 여호와 하나님인지?
갈멜산에서 대결해 보자 서로 논쟁을 벌이던 가뭄의 원인이 진정 누구에게 있는지 대결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합이 아주 순순히 응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멜산은 홈 그라운드입니다. 모든 산에서는 다 바알에게 숭배하는 신상이 있었고 그리고 숫자적으로 현저하게 우세했습니다. 적어도 850:1 이었고 그리고 이기면 아합왕의 인기가 치솟고, 가뭄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과 정치적인 불안도 해소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승패의 갈림은 자신들의 제단에 불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시다 라고 대결을 했는데 당연히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할렐루야!
그 결과 우상 숭배하는 선지자들을 다 목베어 죽이고 그 죄악을 제하고 나니 하나님이 더디어 3년여간에 닫쳤던 하늘 문을 여시고 비를 내리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가로 막혔던 문제들이 해결이 되고 축복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세상으로 인하여 겁을 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담대해져야 합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의 눈치를 살피라 환경을 보고 머뭇머뭇 거리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4세기 동방의 명설교가였던 요한 크리소스톰이 사회악을 꾸짖고 황후 유독시아의 사치를 나무라다가 위협을 당하여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을 때 그는 태연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할까? 죽음인가? 아니다.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께 감추어져 있다. 내가 사는 땅에서 쫓겨나는 것인가? 아니다.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 나의 소유를 잃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은 없고 떠날 때도 가지고 갈 것은 없다. 나의 보화는 하늘에 감추어져 있다. 저들이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처럼 될 것이고 저들이나를 구덩이에 던져 넣으면 나는 예레미야처럼 될 것이고 굴에 던져 넣으면 다니엘처럼 될 것이고, 돌로 친다면 나는 스데반처럼 될 것이고 목을 벤다면 세례 요한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매질한다면 나는 사도 바울처럼 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편 56편 4,11절)
저는 성도들에게서 조그마한 시험과 어려움이 생기면 믿음을 핑계되고 또는 믿음에서 멀어져 가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이들이 과연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그렇게도 믿을 수 없는 분인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마치 배 머리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죽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찾지 않는 그들의 모습 말입니다.
아직 주께 내 모든 인생을 걸고 있지 않구나? 하나님을 믿기는 무얼 믿는다 말인가? 작은 것 하나 맡기지 못하고 너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주님 책망하시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주께 내 모든 것이 다 있다고 여긴다면 어찌 믿음의 비겁자가 되겠습니까?
당연히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왕의 권력에 위축되지 않고 정면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으로 믿음 적인 것이라면 에스더와 같은 이는 죽음까지 불사하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바알 신을 섬김은 사실 하나님 보다 바알에게 기대를 더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알신은 농경 신으로 광야에서 맛없는 만나를 주는 하나님보다는 풍성한 곡식과 빵과 포도주를 준다고 믿었기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오늘날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말씀에 의하여 살기보다는 세상의 물질에 정신을 뺏기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바알은 남녀의 성관계를 종교의식에 포함시키고 있는 음란한 종교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여신 사이에 성관계를 유도하기 위해서 성관계하는 제사의식을 하게 되는데 그래야지 비가 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때에 당시 왕이 먼저 바알 성전 매춘부와 시범을 보이고 전국적으로 축제 형식으로 치러집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성적인 것과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힌두교나 불교도 최고의 경지에 들어가면 이런 문제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인도로 가는 길)---제전에 이러한 물란한 성적인 내용들이 많이 우상으로 만들어 있고 그림으로 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상당히 성적으로 유혹적이 되어 인간의 본성을 잘 자극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호와 종교는 이성문제에 대하여 아주 엄격하니 자연히 바알을 좇게 되는 것입니다.
음란물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차있서 우리 4명인데 만나자 라는 것입니다. 놀랬어요? 저도 나갈 뻔했어요
바알을 좇는 이유는 도덕적인 신앙생활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종교에는 신을 경외하고 그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것인데 반해 바알은 자신들의 축복을 위해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신이었기 때문에 아주 편리하였습니다.
부담 없이 즐기고 물질적인 보상까지 얻을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에 아주 인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무슨 매력이 있어서 여호와를 택하느냐? 말입니다.
사 53: 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별로 볼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안에서도 가만히 나 두면 세상적으로 돌아가 세상적인 모임을 만들어 버리지 않습니까?
믿음 생활하면서도 자꾸 세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시켜 놓았더니 자꾸 애굽에 있었던 이야기하는 것과 똑 같아요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이끌려 살고 믿음에는 응답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기회를 보고 있고 풍세를 따라서 이쪽 저쪽으로 가겠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은 사느냐? 죽느냐? 의 기로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인은 담대하게 믿음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 한 줄로 믿습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기독인에게는 중립지대가 없습니다.
확실한 믿음에 서서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그 믿음의 기도에는 능력이 나타나며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너진 믿음의 제단을 수축하고 기도드릴 때 성령의 불이 임하십니다.
몸과 마음을 헌신하고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때 성령의 불이 임하십니다.
성령의 불이 없는 교회나 개인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올라야 됩니다.
믿음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 가슴속에 성령의 불이 임하면 가슴속에 있는 나무나 돌이나 흙같은 죄악과 인본주의와 세속과 불순종이 다 타버립니다. 사람이 힘으로 태우지 못하지만 하늘의 불이 오면 모든 신앙의 불순물들을 태워버립니다.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임하니까 그곳에 모여있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을 섬기던 사람들이 일제히 엎드려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교회에 성도들에게 성령의 불이 임하면 불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고 회개운동이 일어납니다. 교회에 성령의 불이 떨어져야 세상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갖 죄악이 정결케 되고 마침내 가로 막혔던 문제들이 해결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악으로 가려졌던 축복이 들어 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캄캄한 사람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귀가 먹어심도 아니요 손이 짧아서 도와주지 못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악으로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38년이라는 중병을 앓은 사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해결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죄악의 문제가 해결되고 보니 축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 저기 보입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하려느냐?” 믿는 사람 같기도 하고 안 믿는 사람 같기도 하고, 하나님의 자녀 같기도 하고 마귀의 자식 같기도 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 같기도 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 같기도 하고 이 두사이에서 언제까지 머뭇머뭇하려느냐? 결단을 내려라. 어느 쪽이냐? 양자택일을 하라.
선택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내 상태는 믿음과 불신의 선택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절대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버이 날 사랑하지만 내대신 성공해 줄 수 없는 것이고 스승이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내 대신 공부해 줄 수 없듯이 목사가 아무리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권면하더라도 받아드리는 것은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선택을 왜 올바로 하지 못합니까?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바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타락한 근성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올바른 믿음의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 읽고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힙입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내 지식, 내 생각, 내 감정, 내 의지를 지배할 때 욕심이라는 것은 꼼짝 못하게 되는 것이요 타락한 근성은 성화 되어지고 무지는 지혜롭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대는 어떻게 욕심을 버릴 수 있었는가를?” 베드로에게 물어 보십시오.“그대는 어떻게 타락한 근성을 버릴 수 있었는가를?” 어거스틴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대는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는가를?” 그들 모두의 대답은 한결같을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라고.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죄악에 붙잡혀 후회스러운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에 서서 출발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비가 내립니다. 은혜의 비가 축복의 비가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