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십니까? 그러면 들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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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66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누가복음 18:35-43 원하십니까? 그러면 들어주십니다
성도들이 참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이루기를 원한다는 말씀들을 하지만은 그들의 생활의 모습과 신앙의 태도를 볼 때에는 실제적으로 그렇게도 원하고 않고 있다는 느낌을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원하지도 안으면서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과 불만의 말들을 합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랫말에도 보면 그런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통일의 노래를 보아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가사는 그렇게도 염원을 하는데 사실 통일을 원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 가사를 계속 보면 이 목숨 다 바쳐 통일하지 않습니까?
어디 누가 목숨 바쳐 통일하겠다고 하는 사람 얼마나 되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도 모두가 갈망을 한다면 통일되어도 벌써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통일을 원하지만 그렇게 목숨까지 바쳐가며 통일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냥 가자는 식입니다.
이제는 통일이 될까봐 겁을 내지 않습니까? 거지 떼들이 오면 어떡하나?
사실 김구 선생 같으신 분은 조국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그는 조국의 독립을 원했고 그 조국에 자신을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첫째 소원은 대한독립, 둘째 소원도 대한독립, 셋째도 소원도 대한의 독립이라고 했습니다. 해방된 조국의 문지기라도 좋다고 까지 했습니다. 이 정도로 통일을 원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적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려는 많지만 하나님을 향한 요구의 행위는 적다는 것입니다. 근심과 불안의 나날을 보내지만 정작 하나님을 찾기에는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제 자신도 사실 찬송을 부르면서 마음에 찔리는 가사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에 주로 헌금을 할 때 드리는 찬송가 71장 1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만 따라 가겠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아낌없이 바치네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라는 말들이 얼마나 제게 어울리지 않는지
만약에 참으로 그러한 삶이 되었다고 한다면 저는 더 큰 믿음의 사람으로 서 있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께 적극성을 띄고 나아가지 못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이렇게도 믿음이 없어서 여기까지 밖에 오지 못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듭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역시 믿음이 이것 박에 되지 않구나 하며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믿음을 가졌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 하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믿음이 없어서 문제이지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한 거지 소경이 예수님를 만나 그의 소경 됨이 해결되는 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여리고를 지날 때입니다.
유월절 순례 길에 오른 군중들이 예수님과 함께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는 여리고 성을 지나치는 그 도중에 한 거지 소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서는 그에게는 예수님을 갈망하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온 것이다. 내게 엄청난 축복이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웅성거리는 군중들의 향하여 급하게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침묵을 강요했지만 더 크게 소리쳤어요.
그러자 이 광경을 예수님이 보시고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소경을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리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네 보는 것입니다. 그래 그러면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즉시 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소경이 그의 소원을 이루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갈망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하여 갈망하는 것은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에 예수님의 능력이 역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먼 자의 눈을 띄게 하며 귀먹은 자의 귀를 열며 우리의 약함을 친히 감당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행 할 수 있는 분이시지만 아무러케나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구원이시지만 함부로 구원을 일으키시지 않고 오직 믿음을 가진 자에게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힘쓰고 애쓰는 자의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하셨지 나무에 앉자 조잘조잘 거리거나 졸고 있는 새를 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얼른 얼른 거리고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능력이 나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많은 군중 사이에 밀고 밀리는 사이에서 이 여인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어디 예수님의 몸에 부닥친 사람이 한 둘이겠습니까?
이 여인이 그 옷자락을 만졌다고 했는데 어찌 그 가운데에는 옷자락이 아니라 아마 예수님과 피부로 접촉을 하고 그 팔에 매달려 안기운 자 들도 있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여인뿐이었습니다.
막 5: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심으로 갈망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그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이 한번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자가 있었는데 그가 말씀을 전하는 중에 보니 이 사람에게 일어설 믿음이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목마른 사슴이 시내 물을 찾듯이 배고픈 아이가 어미의 젓을 사모하듯이 갈망하고 있으니 어찌 축복하지 안으며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그 때에 바울이 그 사람을 보고 일어나라 하니 그가 곧 일어 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런 믿음을 보이지 않고 막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코 은혜가 되지 않고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왔다 갔다 성전 뜰만 밟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나의 문제에 구원의 길을 베풀어주시고 구원의 기적을 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의 믿음에 있습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없음을 보지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어떻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그 사람의 믿음의 그릇대로 되는 것입니다.
집에 새는 쪽박들에 가면 안 샙니까? 예수님이 그 앞에 계셔도 믿음이 없으면 결코 안됩니다.
하나님에게 열망하는 그 문제를 가지고 애쓰고 힘쓰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이 소경이 되었다가 눈을 뜬 자와 같은 열망을 가지고 주께로 나아 온다면 주님은 반드시 참으로 놀라운 일을 여러분들의 삶에서 일으킬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 만큼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보이는 자세 만큼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닙니다.
일찍이 다윗 왕은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삼하 22:25-2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자신은 하나님에게 바로하지 안으면서 하나님께 순종도 아니하면서 헌신이 없으면서도 하나님에게는 요구 조건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에게 바로 해주시기 바라고 내 뜻을 들어주기를 원하고 축복해 주기를 원하니 결코 이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으심을 아셔야 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어리석음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보아서 너무나도 잘 압니다.
하나님은 제에게 참으로 행하는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심을 날마다 경험하게 됩니다.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습니다.
내가 은혜가 안되면 나는 하나님께 어떻게 하였는가를 한번 생각하고 회계하여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 하나 하나를 경솔히 할 수가 없고 바울의 심령과 같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심정을 금 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도들은 자신들의 모든 일들을 하나 하나 하나님에게 적극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일들이요 그리고 이런 일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는 기회를 삼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 소경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을 기다리는 모습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일념입니다.
시 123: 2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다른 길이 없다는 심정을 말합니다.
어떤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의 날만 기다리는데 살려준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을 정해 놓고 칠판에 기록한 문장을 틀리지 않고 다 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외웠을까요 못 외웠을까요 당연히 외웠습니다.
살기 위하여 외웠어요 이 길이 아니면 죽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 외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글을 외우는 동안 수많은 마병을 동원하여 그 주위를 달리게 하여 아주 소음이 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그 소리가 전혀 그 귀에 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찌 다른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 소경은 구원의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일념으로 예수를 향해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은 이 길이라고 정해졌으면 무엇에 마음이 빼앗길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못하지 않습니까?
내가 바라 볼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툭하면 사사로운 소리에 마음이 빼앗기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험에 들어버리는 자리에서 이제는 벗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하소서 불과 같은 성령이여 내 맘에 항상 계셔 천국 가는 그날까지 주여 지켜 주옵소서
원하는 것이란 온 몸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하여 주께 무엇을 헌신하였는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 무엇을 더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주실 것 다 주셨습니다. 그의 아들을 주시고 그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생명까지 주신 주님이 더 이상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것 주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보답 할 수 있을까? 하고 주님께 묻고 그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기도 제목이 좀 바꿔야 합니다.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문제에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면 좋겠습니까? 하여야 합니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예수님을 최고를 본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십자가를 지고 선한 뜻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최고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롬 9: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이 그랬듯이 모세가 그랬듯이 에스더가 그랬듯이 우리 자신을 주께 온전히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안일하게 적당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겨우 주일 낮 한 시간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만큼의 은혜 밖에 받지 못합니다.
그 은혜로 족하면 그 정도에서 그치십시오
더 큰 은혜를 받으려면 더욱 열심을 내면 더 큰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날마다 여러분을 위해 다 기도하지 못합니다.
오늘은 힘을 내어 모두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했습니다만 은 계속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 눈에 보이고 예배 시간에 만나는 자는 위하여 한번 더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게 됩니다.
자신은 하나도 노력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알아서 해 달라고 하며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다 돌리고 모든 영광은 자신들이 다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을 드리기는 싫어하고 무엇인가 자신을 위하여 해 달라고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내가 아들까지 다 줬는데 무엇을 더 달라고 하느냐?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는 내 자신을 드리면서 주를 위하여 그의 뜻을 구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은혜는 받으면서 안 받은 자 같이 행동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원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마음도 감동이 됩니다.
하나님이나를 감동시키지 않으시나 하고 아주 소극적인 자세로 하나님이나를 감동시키시면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습니다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당신이나를 감동시키십시오 한번 나를 위해 이것도 해주시고 저것도 해주시고 하시지요 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것보다 놀랍고 감동적인 것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나를 감동시킬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때입니다.
하나님은 달려오는 이 소경에게 감동을 받으시기에 충분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감동시킬까? 을 생각하십시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나드 향유를 드림으로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진실로 내가 갈망하는 그 모습을 주님 앞에 기도로 봉사로 헌신으로 열심히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놀라운 일이 일어 날 것입니다. (힘쓰니 하나님이 남편의 사업에 축복을 하고 등등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를 그렇게도 원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이 참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이루기를 원한다는 말씀들을 하지만은 그들의 생활의 모습과 신앙의 태도를 볼 때에는 실제적으로 그렇게도 원하고 않고 있다는 느낌을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원하지도 안으면서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과 불만의 말들을 합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랫말에도 보면 그런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통일의 노래를 보아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가사는 그렇게도 염원을 하는데 사실 통일을 원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 가사를 계속 보면 이 목숨 다 바쳐 통일하지 않습니까?
어디 누가 목숨 바쳐 통일하겠다고 하는 사람 얼마나 되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도 모두가 갈망을 한다면 통일되어도 벌써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통일을 원하지만 그렇게 목숨까지 바쳐가며 통일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냥 가자는 식입니다.
이제는 통일이 될까봐 겁을 내지 않습니까? 거지 떼들이 오면 어떡하나?
사실 김구 선생 같으신 분은 조국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그는 조국의 독립을 원했고 그 조국에 자신을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첫째 소원은 대한독립, 둘째 소원도 대한독립, 셋째도 소원도 대한의 독립이라고 했습니다. 해방된 조국의 문지기라도 좋다고 까지 했습니다. 이 정도로 통일을 원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적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려는 많지만 하나님을 향한 요구의 행위는 적다는 것입니다. 근심과 불안의 나날을 보내지만 정작 하나님을 찾기에는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제 자신도 사실 찬송을 부르면서 마음에 찔리는 가사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에 주로 헌금을 할 때 드리는 찬송가 71장 1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만 따라 가겠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아낌없이 바치네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라는 말들이 얼마나 제게 어울리지 않는지
만약에 참으로 그러한 삶이 되었다고 한다면 저는 더 큰 믿음의 사람으로 서 있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께 적극성을 띄고 나아가지 못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이렇게도 믿음이 없어서 여기까지 밖에 오지 못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듭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역시 믿음이 이것 박에 되지 않구나 하며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믿음을 가졌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 하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믿음이 없어서 문제이지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한 거지 소경이 예수님를 만나 그의 소경 됨이 해결되는 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여리고를 지날 때입니다.
유월절 순례 길에 오른 군중들이 예수님과 함께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는 여리고 성을 지나치는 그 도중에 한 거지 소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서는 그에게는 예수님을 갈망하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온 것이다. 내게 엄청난 축복이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웅성거리는 군중들의 향하여 급하게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침묵을 강요했지만 더 크게 소리쳤어요.
그러자 이 광경을 예수님이 보시고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소경을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리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네 보는 것입니다. 그래 그러면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즉시 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소경이 그의 소원을 이루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갈망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하여 갈망하는 것은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에 예수님의 능력이 역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먼 자의 눈을 띄게 하며 귀먹은 자의 귀를 열며 우리의 약함을 친히 감당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행 할 수 있는 분이시지만 아무러케나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구원이시지만 함부로 구원을 일으키시지 않고 오직 믿음을 가진 자에게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힘쓰고 애쓰는 자의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하셨지 나무에 앉자 조잘조잘 거리거나 졸고 있는 새를 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얼른 얼른 거리고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능력이 나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많은 군중 사이에 밀고 밀리는 사이에서 이 여인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어디 예수님의 몸에 부닥친 사람이 한 둘이겠습니까?
이 여인이 그 옷자락을 만졌다고 했는데 어찌 그 가운데에는 옷자락이 아니라 아마 예수님과 피부로 접촉을 하고 그 팔에 매달려 안기운 자 들도 있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여인뿐이었습니다.
막 5: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심으로 갈망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그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이 한번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자가 있었는데 그가 말씀을 전하는 중에 보니 이 사람에게 일어설 믿음이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목마른 사슴이 시내 물을 찾듯이 배고픈 아이가 어미의 젓을 사모하듯이 갈망하고 있으니 어찌 축복하지 안으며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그 때에 바울이 그 사람을 보고 일어나라 하니 그가 곧 일어 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런 믿음을 보이지 않고 막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코 은혜가 되지 않고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왔다 갔다 성전 뜰만 밟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나의 문제에 구원의 길을 베풀어주시고 구원의 기적을 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의 믿음에 있습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없음을 보지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어떻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그 사람의 믿음의 그릇대로 되는 것입니다.
집에 새는 쪽박들에 가면 안 샙니까? 예수님이 그 앞에 계셔도 믿음이 없으면 결코 안됩니다.
하나님에게 열망하는 그 문제를 가지고 애쓰고 힘쓰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이 소경이 되었다가 눈을 뜬 자와 같은 열망을 가지고 주께로 나아 온다면 주님은 반드시 참으로 놀라운 일을 여러분들의 삶에서 일으킬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 만큼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보이는 자세 만큼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닙니다.
일찍이 다윗 왕은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삼하 22:25-2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자신은 하나님에게 바로하지 안으면서 하나님께 순종도 아니하면서 헌신이 없으면서도 하나님에게는 요구 조건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에게 바로 해주시기 바라고 내 뜻을 들어주기를 원하고 축복해 주기를 원하니 결코 이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으심을 아셔야 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어리석음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보아서 너무나도 잘 압니다.
하나님은 제에게 참으로 행하는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심을 날마다 경험하게 됩니다.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습니다.
내가 은혜가 안되면 나는 하나님께 어떻게 하였는가를 한번 생각하고 회계하여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 하나 하나를 경솔히 할 수가 없고 바울의 심령과 같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심정을 금 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도들은 자신들의 모든 일들을 하나 하나 하나님에게 적극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일들이요 그리고 이런 일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는 기회를 삼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 소경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을 기다리는 모습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일념입니다.
시 123: 2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다른 길이 없다는 심정을 말합니다.
어떤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의 날만 기다리는데 살려준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을 정해 놓고 칠판에 기록한 문장을 틀리지 않고 다 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외웠을까요 못 외웠을까요 당연히 외웠습니다.
살기 위하여 외웠어요 이 길이 아니면 죽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 외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글을 외우는 동안 수많은 마병을 동원하여 그 주위를 달리게 하여 아주 소음이 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그 소리가 전혀 그 귀에 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찌 다른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 소경은 구원의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일념으로 예수를 향해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은 이 길이라고 정해졌으면 무엇에 마음이 빼앗길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못하지 않습니까?
내가 바라 볼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툭하면 사사로운 소리에 마음이 빼앗기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험에 들어버리는 자리에서 이제는 벗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하소서 불과 같은 성령이여 내 맘에 항상 계셔 천국 가는 그날까지 주여 지켜 주옵소서
원하는 것이란 온 몸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하여 주께 무엇을 헌신하였는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 무엇을 더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주실 것 다 주셨습니다. 그의 아들을 주시고 그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생명까지 주신 주님이 더 이상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것 주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보답 할 수 있을까? 하고 주님께 묻고 그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기도 제목이 좀 바꿔야 합니다.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문제에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면 좋겠습니까? 하여야 합니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예수님을 최고를 본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십자가를 지고 선한 뜻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최고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롬 9: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이 그랬듯이 모세가 그랬듯이 에스더가 그랬듯이 우리 자신을 주께 온전히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안일하게 적당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겨우 주일 낮 한 시간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만큼의 은혜 밖에 받지 못합니다.
그 은혜로 족하면 그 정도에서 그치십시오
더 큰 은혜를 받으려면 더욱 열심을 내면 더 큰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날마다 여러분을 위해 다 기도하지 못합니다.
오늘은 힘을 내어 모두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했습니다만 은 계속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 눈에 보이고 예배 시간에 만나는 자는 위하여 한번 더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게 됩니다.
자신은 하나도 노력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알아서 해 달라고 하며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다 돌리고 모든 영광은 자신들이 다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을 드리기는 싫어하고 무엇인가 자신을 위하여 해 달라고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내가 아들까지 다 줬는데 무엇을 더 달라고 하느냐?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는 내 자신을 드리면서 주를 위하여 그의 뜻을 구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은혜는 받으면서 안 받은 자 같이 행동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원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마음도 감동이 됩니다.
하나님이나를 감동시키지 않으시나 하고 아주 소극적인 자세로 하나님이나를 감동시키시면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습니다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당신이나를 감동시키십시오 한번 나를 위해 이것도 해주시고 저것도 해주시고 하시지요 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것보다 놀랍고 감동적인 것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나를 감동시킬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때입니다.
하나님은 달려오는 이 소경에게 감동을 받으시기에 충분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감동시킬까? 을 생각하십시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나드 향유를 드림으로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진실로 내가 갈망하는 그 모습을 주님 앞에 기도로 봉사로 헌신으로 열심히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놀라운 일이 일어 날 것입니다. (힘쓰니 하나님이 남편의 사업에 축복을 하고 등등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를 그렇게도 원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