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당신의 운명을 새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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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867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가복음 9:25-29 기도가 당신의 운명을 새롭게 합니다
이번에 태풍 루사가 우리 나라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대만과 중국으로 또는 일본 반도 등으로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한반도 고흥에 상륙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조정 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을 뿐입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전쟁에 승승장구를 하며 각 전투마다 승리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히틀러가 이 대전에서 승리를 했다면 과연 지금 세계의 운명은 독재자들의 통치하에서 오랜 동안 고생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자연적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단 2주만에 독일 군에게 함락되자 프랑스를 도우러 갔던 영국군 주력부대 35만 명이 던커크 반도에서 독일군의 총 공격을 받게 됐습니다.
독일 군은 이 영국군 함락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영국군만 섬멸하면 전쟁의 승리를 가져온다는 확신아래 육. 해. 공군의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영국군의 큰 위기를 맞았을 때에 당시의 처칠 수상은 영국 국민에게 비상방송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영국의 아들들 35만 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일손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이 때에 모든 영국 국민이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그 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독일군 진영에 폭우와 폭풍이 몰아쳐 비행기도 뜰 수가 없었고 군함도 출항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에 영국군은 안전하게 도버해협을 건너 무사히 탈출해 재정비해서 연합군의 승리로 세계 2차 대전은 끝이 나고 독일 군은 패배를 하였습니다.
이같이 영국 국민의 기도는 2차대전의 승패를 바꾸었으며 세계인의 운명을 바꾸어 벼렸습니다.
기도는 이 만큼 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년에 나의 운세가 좋은가? 나쁜가 이것이 궁금해서 토정비결을 보고 요즘은 컴퓨터가 운세를 점쳐 주기도 합니다. 중국 집에 가서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자신의 운세를 적은 쪽지가 들어 있는 과자를 나눠주지 않습니까? 그것 읽어보면 흥미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허무맹랑한 짓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요. 그것을 은근히 기대해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같이 운세 즉 운명에 대한 관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습니다.
운명에 대한 동양 사람들의 견해와 서양 사람들의 견해가 다릅니다. 동양 사람들은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인간이란 정해진 운명대로 되어진다고 믿어 왔습니다.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정해진 운명을 믿지 않고 자신의 노력에 의해 자기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고 삽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렇게 운명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른 것은 종교적 영향이 지배적입니다.
동양의 신들은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가르쳤습니다.
태국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국민 95% 이상이 불교도인 불교 문화권입니다. 태국에 가면 우리 나라보다 훨씬 빈부의 격차가 크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불평, 불만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난하게 사는 것은 전생에 결정된 자기의 업보 때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을 하나의 운명처럼 조용히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중동 아시아 회교권도 가난이나 불행을 알라의 뜻으로 받아드립니다. 운명으로 생각하고 삽니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도 동양 종교에서는 자연을 신성시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큰 운명으로 받아드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동양 사람들에게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자연숭배 사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창1:28)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연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 자연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과학이 서구 기독교 국에서 먼저 발전된 것입니다.
서양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고 노력한 만큼 될 수 있다고 긍정적인 사고를 심어 줍니다.
그러니 운명이란 정말 어찌 할 수 없이 받아드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뛰어 넘어 참으로 하나님의 주신 축복된 삶을 사는 길은 택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왜 운명을 탓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낙망하십니까?
오늘 본문에도 한 아이의 운명이 바뀌는 놀라운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벙어리 귀신이 들려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추스를 수가 없는 불쌍한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언제 이 아이의 생명이 다할 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귀신이 이 아이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육신의 몸도 점점 나약하여 파리해 져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사람도 이 아이의 비극적인 운명을 책임지거나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이들이 안타깝게만 바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바꿔졌습니다. 운명이 바꿔버렸습니다.
그 아이를 괴롭히던 귀신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그 괴로워하고 시달리던 아이가 평안을 찾았고 건강을 찾았습니다. 할렐루야!
이 광경을 바라다보던 제자들이 왜 우리는 그 아이를 괴롭히던 귀신을 별별 짓을 다하여도 내어 좇지 못하였는가?를 부끄럽게 생각하며 예수님께 조용히 물어 보았을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만큼 제자들은 문제가 만치만은 기도하지를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문제들이 많은데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운명으로만 받아 드리는 것 같고 될 대로 되라는 식입니다. 절대로 하나님 그런 마음의 태도에는 책임을 져 주지 않으시고 축복해 주시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잘 해 주시겠지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적극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첫 번 째로 힘써야 할 일도 기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후의 보루가 되는 것도 기도입니다.
반드시 기도는 만사를 능하게 하고 기도는 우리 모두를 최상의 길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 보십시오
야고보 사도는 그의 글에서 분명히 밝혀 두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언제 제대로 기도 한번 해 보았습니까?
저는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여 스스로 괴로워하고 삶을 힘겨워 하며 방황을 하며 지쳐 있는 모습을 볼 때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 할 길이 없습니다 만은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안타까운 일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기도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가 믿는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아닙니까?
여러분 왜 마음이 답답하신 줄 아십니까?
왜 머리가 아픈 줄 아십니까?
왜 짜증이 나고 혈기가 나는 줄 아십니까?
불쾌해 하고 있습니까? 왜 일이 형통하게 되지 않는 줄 아십니까?
기도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왕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이라도 아낌없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는 능력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음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조금 손해를 보는 것은 안절부절 하면서 어찌 기도하지 않음으로 영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고 나중에는 영육간에 다 잃어버립니다.
기도하지 않음으로 많은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9-11)
세상에서 악한 아버지라도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인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비록 물질적이고 육신 적인 것이든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요일5:14) 합력 하여 선을(롬8:28) 이루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나의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아주 확신과 자신감을 갖게 해줍니다. 우리의 기도의 동기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요1:12) 더 이상 거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거지처럼 하나님께 구걸할 필요는 없고 자녀답게 정당한 권리로 아버지께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유명한 신학자 엔드류머레이 겸손과 순종이라는 책을 제자 반을 한 사람들은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그의 글에서 땅위에 사는 하나님의 대리자 또는 大使(고후 5:20)로서 구원받은 성도는 기도를 통해서 이 세상의 역사를 결정짓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
정말로 기도는 세계역사를 바꿔 놓았으며 지금도 바꿔지고 있으며, 앞으로의 세계의 역사도 기도의 사람에 의하여 변화될 것입니다.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History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말 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손에 하늘의 무진장의 은혜를 주시고자 하시는데 기도를 통하여 주십니다. 기도는 어떤 면으로든지 응답을 받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여러분들의 믿음의 분량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풍성하고 넘치는 잔으로 응답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어 주신 좋은 것 성령으로 기도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기도의 모범을 그의 생애를 통해 보여 주셨으며, 이 세상에서 기도의 능력으로 가장 위대한 사역을 성공시킨 기도 중심의 삶이었다면 하물며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고 어찌 이 세상과 원수 마귀와 죄악의 물결을 이기고 성공적인 축복의 사역과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응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구하여 받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마7:7,8)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omniscient)하신 분이십니다. 분명히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구한 바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있지만 구하지 않는 자에게 억지로 주시지 않습니다. 구할 때 우리에게 주시며 구하는 이마다 얻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통로를 통하여 응답이라는 은혜와 축복을 내리십니다.
부유하고 풍성하신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사랑이시라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드렸든지 우리에게 최선의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여하튼 기도는 응답입니다. 즉시 응답해 주시든지, 때가 차면 응답해 주시든지, 아니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모양이 아닌 다른 방면으로 분명히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가 아니라서 응답해 주신 줄을 모를 수도 있겠지만, 성도들의 기도는 꼭 응답하시고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시81: 10하).
기도는 찾아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도는 찾아 나서서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광부가 광맥을 찾아 온 산을 뒤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온천을 찾아 산야를 헤매는 탐구자와 같습니다. 환자가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치유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중생의 구원을 받는 니고데모(요3:1-5)와 같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며,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29:12,13).
기도는 구하는 것이 마음의 소원이라면 찾는 것은 행동으로 옮겨진 탐구인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은 행동을 요구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감나무 밑에 가만히 팔을 베고 누웠어도 저절로 홍시가 입에 굴러 들어오거나, 가만히 놀고서도 밭숟가락이 저절로 날아와서 배부르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기도가 우리의 신앙행위의 전부가 아니고 행동과 함께 온전해 집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두드리면 열리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기도는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그 축복의 문이 계속 닫혀져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어 주실 때까지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는 기도는 불가능이 가능해질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며 끊임없이 부르짖는 간구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내게 보이리라(렘33:3).
우리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이방 여인의 간구에서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라고 고백하므로 귀신들린 자가 딸을 결국 고친 것입니다. 밤중에 떡세덩이를 빌리러 온 간청하는 벗에게 결국 어떻게 했습니까?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11:8) 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기도회를 통하여 여러분들의 기도가 응답이 되고 운명이 새롭게 바뀌는 축복을 받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태풍 루사가 우리 나라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대만과 중국으로 또는 일본 반도 등으로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한반도 고흥에 상륙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조정 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을 뿐입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전쟁에 승승장구를 하며 각 전투마다 승리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히틀러가 이 대전에서 승리를 했다면 과연 지금 세계의 운명은 독재자들의 통치하에서 오랜 동안 고생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자연적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단 2주만에 독일 군에게 함락되자 프랑스를 도우러 갔던 영국군 주력부대 35만 명이 던커크 반도에서 독일군의 총 공격을 받게 됐습니다.
독일 군은 이 영국군 함락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영국군만 섬멸하면 전쟁의 승리를 가져온다는 확신아래 육. 해. 공군의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영국군의 큰 위기를 맞았을 때에 당시의 처칠 수상은 영국 국민에게 비상방송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영국의 아들들 35만 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일손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이 때에 모든 영국 국민이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그 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독일군 진영에 폭우와 폭풍이 몰아쳐 비행기도 뜰 수가 없었고 군함도 출항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에 영국군은 안전하게 도버해협을 건너 무사히 탈출해 재정비해서 연합군의 승리로 세계 2차 대전은 끝이 나고 독일 군은 패배를 하였습니다.
이같이 영국 국민의 기도는 2차대전의 승패를 바꾸었으며 세계인의 운명을 바꾸어 벼렸습니다.
기도는 이 만큼 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년에 나의 운세가 좋은가? 나쁜가 이것이 궁금해서 토정비결을 보고 요즘은 컴퓨터가 운세를 점쳐 주기도 합니다. 중국 집에 가서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자신의 운세를 적은 쪽지가 들어 있는 과자를 나눠주지 않습니까? 그것 읽어보면 흥미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허무맹랑한 짓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요. 그것을 은근히 기대해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같이 운세 즉 운명에 대한 관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습니다.
운명에 대한 동양 사람들의 견해와 서양 사람들의 견해가 다릅니다. 동양 사람들은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인간이란 정해진 운명대로 되어진다고 믿어 왔습니다.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정해진 운명을 믿지 않고 자신의 노력에 의해 자기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고 삽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렇게 운명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른 것은 종교적 영향이 지배적입니다.
동양의 신들은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가르쳤습니다.
태국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국민 95% 이상이 불교도인 불교 문화권입니다. 태국에 가면 우리 나라보다 훨씬 빈부의 격차가 크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불평, 불만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난하게 사는 것은 전생에 결정된 자기의 업보 때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을 하나의 운명처럼 조용히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중동 아시아 회교권도 가난이나 불행을 알라의 뜻으로 받아드립니다. 운명으로 생각하고 삽니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도 동양 종교에서는 자연을 신성시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큰 운명으로 받아드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동양 사람들에게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자연숭배 사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창1:28)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연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 자연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과학이 서구 기독교 국에서 먼저 발전된 것입니다.
서양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고 노력한 만큼 될 수 있다고 긍정적인 사고를 심어 줍니다.
그러니 운명이란 정말 어찌 할 수 없이 받아드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뛰어 넘어 참으로 하나님의 주신 축복된 삶을 사는 길은 택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왜 운명을 탓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낙망하십니까?
오늘 본문에도 한 아이의 운명이 바뀌는 놀라운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벙어리 귀신이 들려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추스를 수가 없는 불쌍한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언제 이 아이의 생명이 다할 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귀신이 이 아이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육신의 몸도 점점 나약하여 파리해 져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사람도 이 아이의 비극적인 운명을 책임지거나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이들이 안타깝게만 바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바꿔졌습니다. 운명이 바꿔버렸습니다.
그 아이를 괴롭히던 귀신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그 괴로워하고 시달리던 아이가 평안을 찾았고 건강을 찾았습니다. 할렐루야!
이 광경을 바라다보던 제자들이 왜 우리는 그 아이를 괴롭히던 귀신을 별별 짓을 다하여도 내어 좇지 못하였는가?를 부끄럽게 생각하며 예수님께 조용히 물어 보았을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만큼 제자들은 문제가 만치만은 기도하지를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문제들이 많은데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운명으로만 받아 드리는 것 같고 될 대로 되라는 식입니다. 절대로 하나님 그런 마음의 태도에는 책임을 져 주지 않으시고 축복해 주시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잘 해 주시겠지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적극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첫 번 째로 힘써야 할 일도 기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후의 보루가 되는 것도 기도입니다.
반드시 기도는 만사를 능하게 하고 기도는 우리 모두를 최상의 길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 보십시오
야고보 사도는 그의 글에서 분명히 밝혀 두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언제 제대로 기도 한번 해 보았습니까?
저는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여 스스로 괴로워하고 삶을 힘겨워 하며 방황을 하며 지쳐 있는 모습을 볼 때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 할 길이 없습니다 만은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안타까운 일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기도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가 믿는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아닙니까?
여러분 왜 마음이 답답하신 줄 아십니까?
왜 머리가 아픈 줄 아십니까?
왜 짜증이 나고 혈기가 나는 줄 아십니까?
불쾌해 하고 있습니까? 왜 일이 형통하게 되지 않는 줄 아십니까?
기도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왕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이라도 아낌없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는 능력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음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조금 손해를 보는 것은 안절부절 하면서 어찌 기도하지 않음으로 영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고 나중에는 영육간에 다 잃어버립니다.
기도하지 않음으로 많은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9-11)
세상에서 악한 아버지라도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인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비록 물질적이고 육신 적인 것이든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요일5:14) 합력 하여 선을(롬8:28) 이루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나의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아주 확신과 자신감을 갖게 해줍니다. 우리의 기도의 동기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요1:12) 더 이상 거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거지처럼 하나님께 구걸할 필요는 없고 자녀답게 정당한 권리로 아버지께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유명한 신학자 엔드류머레이 겸손과 순종이라는 책을 제자 반을 한 사람들은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그의 글에서 땅위에 사는 하나님의 대리자 또는 大使(고후 5:20)로서 구원받은 성도는 기도를 통해서 이 세상의 역사를 결정짓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
정말로 기도는 세계역사를 바꿔 놓았으며 지금도 바꿔지고 있으며, 앞으로의 세계의 역사도 기도의 사람에 의하여 변화될 것입니다.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History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말 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손에 하늘의 무진장의 은혜를 주시고자 하시는데 기도를 통하여 주십니다. 기도는 어떤 면으로든지 응답을 받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여러분들의 믿음의 분량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풍성하고 넘치는 잔으로 응답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어 주신 좋은 것 성령으로 기도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기도의 모범을 그의 생애를 통해 보여 주셨으며, 이 세상에서 기도의 능력으로 가장 위대한 사역을 성공시킨 기도 중심의 삶이었다면 하물며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고 어찌 이 세상과 원수 마귀와 죄악의 물결을 이기고 성공적인 축복의 사역과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응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구하여 받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마7:7,8)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omniscient)하신 분이십니다. 분명히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구한 바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있지만 구하지 않는 자에게 억지로 주시지 않습니다. 구할 때 우리에게 주시며 구하는 이마다 얻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통로를 통하여 응답이라는 은혜와 축복을 내리십니다.
부유하고 풍성하신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사랑이시라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드렸든지 우리에게 최선의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여하튼 기도는 응답입니다. 즉시 응답해 주시든지, 때가 차면 응답해 주시든지, 아니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모양이 아닌 다른 방면으로 분명히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가 아니라서 응답해 주신 줄을 모를 수도 있겠지만, 성도들의 기도는 꼭 응답하시고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시81: 10하).
기도는 찾아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도는 찾아 나서서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광부가 광맥을 찾아 온 산을 뒤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온천을 찾아 산야를 헤매는 탐구자와 같습니다. 환자가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치유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중생의 구원을 받는 니고데모(요3:1-5)와 같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며,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29:12,13).
기도는 구하는 것이 마음의 소원이라면 찾는 것은 행동으로 옮겨진 탐구인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은 행동을 요구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감나무 밑에 가만히 팔을 베고 누웠어도 저절로 홍시가 입에 굴러 들어오거나, 가만히 놀고서도 밭숟가락이 저절로 날아와서 배부르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기도가 우리의 신앙행위의 전부가 아니고 행동과 함께 온전해 집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두드리면 열리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기도는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그 축복의 문이 계속 닫혀져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어 주실 때까지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는 기도는 불가능이 가능해질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며 끊임없이 부르짖는 간구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내게 보이리라(렘33:3).
우리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이방 여인의 간구에서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라고 고백하므로 귀신들린 자가 딸을 결국 고친 것입니다. 밤중에 떡세덩이를 빌리러 온 간청하는 벗에게 결국 어떻게 했습니까?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11:8) 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기도회를 통하여 여러분들의 기도가 응답이 되고 운명이 새롭게 바뀌는 축복을 받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