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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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12회 작성일 2014-06-04 10:32본문
로마서12:1-3 지혜로운 삶
예배는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예배는 신앙생활의 모든 요소들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등한시 되면 당연 신앙은 등한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가 형식적이면, 신앙 역시 형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는 사람은 좋은 신앙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배는 실제 생활의 성공 패배를 가져오니 곧 인생의 성공과 패배를 가늠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제는 역시 하나님과의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가? 에 달려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보듯이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소히 가인의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만 이 예배 생활로 인하여 그에게 화가 미치고 동생 아벨을 돌로 살해하고 그 가문은 저주 받은 가문이 되었습니다.
창4:5-11절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제대로 드려지지 않는 예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우상 바알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 850인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왕상18:37-40절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바른 예배가 얼마나 내 삶을 승리하게 하며 복되게 합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생활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40년간 광야에서 지낼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항상 이스라엘 중앙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 진을 치고 머물 때나, 진군할 때에 동서남북 네 방향에 세 지파씩 나누어 놓고 그 중앙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그 법궤가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원칙을 주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배가 삶의 중심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가 움직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움직입니다. 법궤가 멈추면 당연 이스라엘 백성들도 멈춥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간과 예법을 지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기보다는 바른 예배가 이스라엘을 지켰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배를 드릴 때 예배가 나의 삶과 모든 발걸음을 지켜줍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모든 삶은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배를 승리하면 삶도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정성을 다하여 잘 드리면 생활도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이 잘 지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배 잘 드리고 가셔야 합니다.
리우리 하우엘이라는 학자는 언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말로 하는 언어이고 또 하나는 관계성의 언어라고 합니다.
관계성의 언어란 말하지 않고 느낌이나 그 외 다른 수단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언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바라만 보아도 옆에 있기만 해도 수만 마디의 언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의 언어보다 관계성의 언어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의 언어보다 관계성의 언어를 살피십니다.
즉 우리의 기도소리보다 그 기도가 바른 기도인가? 와 바른 자의 기도인가? 를 먼저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생활의 행위를 살피십니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결과는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예배대로 드리고 생활을 생활대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노엽게 생각하십니다.
예배는 생활의 시작이요 마지막이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정신으로 생활해야 하고, 생활하는 도중 생긴 문제를 예배로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예배를 드려서도 안 되고, 아무렇게나 생활을 해서도 안 됩니다.
예배는 행동적인 것으로서 윤리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감상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예식만 예배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을 내 생활 속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예배에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행위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내적 평안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는 우리의 생활을 두 영역, 즉 신성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으로 나누는 습관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서로 분리되고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내적 삶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 이것인 참된 예배입니다.
한 마디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산제사 곧 몸으로 드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는 동물을 제물 삼아 죽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짐승이 아닌 너희 몸으로 살아있는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삶의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영적예배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예배는 합당한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삶속에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산제사 없이 예배한다고 나온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이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사야1:10-17절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옛 사람과는 영원히 결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그저 말로만, 이론적으로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대신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나를 그와 연합시키셨기 때문에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요 진리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만약 이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요 구원의 뿌리가 되는 대속의 은총이 무너지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취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죽은 제사를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의 옛 몸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왔다고 했습니다
롬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죄에게 드려왔으며 이것이 곧 죽은 제사였습니다.
지난날의 죄의 병기에서 의의 병기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롬6:15-19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참된 영적 예배다.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자리까지 인도하실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당신의 예배를 원하시며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예배드리지 말라. 예배를 하나의 형식으로 여기지 말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당신 전부를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즉,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모두 주께 의탁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의 뜻 분별하는 삶이다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분별하다는 어떤 것에 대해 조사와 시험을 해 보거나 실제로 사용해 봄으로써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려고 노력하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이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실험과 시험과 실습을 통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욕심과 혼동하게 되거나 속아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모든 것은 무조건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시험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분별 할 수 있는 성품입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성품을 키우는 데 있어서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시험하고 질문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성품이 형성되고, 성품이 형성되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품은 오랜 시간을 두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크고 작은 결정들을 그분의 뜻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성품이 만들어집니다.
성품은 마치 운동선수가 수많은 연습을 통해 몸에 익힌 실력과 같은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물들어 있고, 세속적 가치를 좇아가는 본래의 마음으로 갱신하고 회복하는 것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돈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 세대는 돈을 너무 사랑합니다.
딤전6:8-10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들도 열심히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물질로 하나님의 일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정직하게 돈 버십시오.
그러나 결코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이 세대를 따라갈 수밖에 없고, 이 세대를 따르다 보면 우리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지혜로운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남은 것은 믿음으로 살았던 것만 남습니다.
바른 예배란 만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분량대로 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정해주신 분복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자족의 비결이 담겨져 있다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기대하면서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항상 불만과 아쉬움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주어지지 않은 것을 기대하며 살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산다면 이것이 곧 자족의 비결이며 행복의 척도(尺度)일 것이다.
다윗은 이런 이치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시131:1-2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외에는 일체 크고 기이한 일을 꿈꾸지 않겠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 결과 어린아이와 같이 아무 근심과 불만 없이 평안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생각이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분복대로 됨을 알고 어리석은 육신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만족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예배는 신앙생활의 모든 요소들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등한시 되면 당연 신앙은 등한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가 형식적이면, 신앙 역시 형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는 사람은 좋은 신앙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배는 실제 생활의 성공 패배를 가져오니 곧 인생의 성공과 패배를 가늠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제는 역시 하나님과의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가? 에 달려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보듯이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소히 가인의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만 이 예배 생활로 인하여 그에게 화가 미치고 동생 아벨을 돌로 살해하고 그 가문은 저주 받은 가문이 되었습니다.
창4:5-11절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제대로 드려지지 않는 예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우상 바알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 850인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왕상18:37-40절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바른 예배가 얼마나 내 삶을 승리하게 하며 복되게 합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생활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40년간 광야에서 지낼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항상 이스라엘 중앙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 진을 치고 머물 때나, 진군할 때에 동서남북 네 방향에 세 지파씩 나누어 놓고 그 중앙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그 법궤가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원칙을 주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배가 삶의 중심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가 움직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움직입니다. 법궤가 멈추면 당연 이스라엘 백성들도 멈춥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간과 예법을 지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기보다는 바른 예배가 이스라엘을 지켰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배를 드릴 때 예배가 나의 삶과 모든 발걸음을 지켜줍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모든 삶은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배를 승리하면 삶도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정성을 다하여 잘 드리면 생활도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이 잘 지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배 잘 드리고 가셔야 합니다.
리우리 하우엘이라는 학자는 언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말로 하는 언어이고 또 하나는 관계성의 언어라고 합니다.
관계성의 언어란 말하지 않고 느낌이나 그 외 다른 수단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언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바라만 보아도 옆에 있기만 해도 수만 마디의 언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의 언어보다 관계성의 언어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의 언어보다 관계성의 언어를 살피십니다.
즉 우리의 기도소리보다 그 기도가 바른 기도인가? 와 바른 자의 기도인가? 를 먼저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생활의 행위를 살피십니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결과는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예배대로 드리고 생활을 생활대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노엽게 생각하십니다.
예배는 생활의 시작이요 마지막이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정신으로 생활해야 하고, 생활하는 도중 생긴 문제를 예배로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예배를 드려서도 안 되고, 아무렇게나 생활을 해서도 안 됩니다.
예배는 행동적인 것으로서 윤리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감상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예식만 예배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을 내 생활 속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예배에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행위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내적 평안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는 우리의 생활을 두 영역, 즉 신성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으로 나누는 습관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서로 분리되고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내적 삶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 이것인 참된 예배입니다.
한 마디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산제사 곧 몸으로 드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는 동물을 제물 삼아 죽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짐승이 아닌 너희 몸으로 살아있는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삶의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영적예배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예배는 합당한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삶속에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산제사 없이 예배한다고 나온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이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사야1:10-17절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옛 사람과는 영원히 결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그저 말로만, 이론적으로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대신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나를 그와 연합시키셨기 때문에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요 진리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만약 이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요 구원의 뿌리가 되는 대속의 은총이 무너지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취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죽은 제사를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의 옛 몸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왔다고 했습니다
롬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죄에게 드려왔으며 이것이 곧 죽은 제사였습니다.
지난날의 죄의 병기에서 의의 병기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롬6:15-19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참된 영적 예배다.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자리까지 인도하실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당신의 예배를 원하시며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예배드리지 말라. 예배를 하나의 형식으로 여기지 말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당신 전부를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즉,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모두 주께 의탁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의 뜻 분별하는 삶이다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분별하다는 어떤 것에 대해 조사와 시험을 해 보거나 실제로 사용해 봄으로써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려고 노력하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이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실험과 시험과 실습을 통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욕심과 혼동하게 되거나 속아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모든 것은 무조건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시험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분별 할 수 있는 성품입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성품을 키우는 데 있어서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시험하고 질문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성품이 형성되고, 성품이 형성되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품은 오랜 시간을 두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크고 작은 결정들을 그분의 뜻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성품이 만들어집니다.
성품은 마치 운동선수가 수많은 연습을 통해 몸에 익힌 실력과 같은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물들어 있고, 세속적 가치를 좇아가는 본래의 마음으로 갱신하고 회복하는 것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돈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 세대는 돈을 너무 사랑합니다.
딤전6:8-10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들도 열심히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물질로 하나님의 일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정직하게 돈 버십시오.
그러나 결코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이 세대를 따라갈 수밖에 없고, 이 세대를 따르다 보면 우리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지혜로운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남은 것은 믿음으로 살았던 것만 남습니다.
바른 예배란 만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분량대로 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정해주신 분복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자족의 비결이 담겨져 있다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기대하면서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항상 불만과 아쉬움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주어지지 않은 것을 기대하며 살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산다면 이것이 곧 자족의 비결이며 행복의 척도(尺度)일 것이다.
다윗은 이런 이치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시131:1-2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외에는 일체 크고 기이한 일을 꿈꾸지 않겠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 결과 어린아이와 같이 아무 근심과 불만 없이 평안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생각이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분복대로 됨을 알고 어리석은 육신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만족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