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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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269회 작성일 2014-06-0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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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6:23-26 하나님의 일
어떤 분이 부지런히 일하는 토종 꿀벌을 가지고 따뜻한 남양에 가지고 갔더니 첫 해에는 부지런히 벌들이 꿀을 날라서 수확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벌은 그렇게 부지런히 일하지 않아 수확이 많지 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해는 전혀 일하지 않고 다 벌통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꿀벌 사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겨울이 없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없으니 꿀을 저장할 필요가 없고 그러니 사람은 달콤한 꿀을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어느 정도의 삶에 저항이 있어야 보다 나은 삶을 기대 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도 그리고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는 자기에게 꼭 필요한 알맞은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 의미를 바로 알 때는 누구든지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기를 주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에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진리는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이 신앙의 첫 걸음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새로운 나로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자신을 죽일 수 있어야 진리를 누리게 됩니다.
런던타임즈가 저명한 작가들에게 이 세상에 무엇이 문제인가?
역사상 가장 짧고도 가장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나라는 것입니다 I am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죽이는 도구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 안에 주님이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갈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십자가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고, 죄의 유혹하고 죽이는 권세를 물리치고,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는 자랑이요 영광입니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지느냐?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욕심, 자기주장을 세우고,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지는 십자가는 기독교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냥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앞섰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 후에야 올 부활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이 주시는 떡에 너무 배가 불러 있었고, 주님이 베푸신 기적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꿈꾸는 것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주님은 이런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부인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무시가 아니며, 자기 비하도 아닙니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멸시도 아닙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분명한 자아인식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하시며 자신이 곧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는 주님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죽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불법 재판 앞에서는 어땠습니까?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는 질문 앞에서 주님은 그들이 책잡으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긍정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때로 침묵과 긍정으로 예수님 자신이 곧 그리스도요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결코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 주님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에 자기 부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부인하신 예수님, 그것만이 하나님의 구속의 사업을 완성하는 일이었기에 죽기까지 자기를 쳐서 부인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존재의 가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해야 할 때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120년을 산 모세는 그의 생애를 세 등분 하여 말 할 수 있습니다.
첫 40년은 자신의 자아에 대한 가치를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애굽 궁중의 40년 생활에서 모든 학술을 다 익혔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잘 훈련받은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학문에 통달했고, 지도력을 습득하기까지 철저히 자기를 훈련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행7:20-25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인 후에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그의 숨은 애국심을 알아주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이미 40세에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 사명에 대한 인식이 분명히 있었지만 자기 부인보다 자기 부각이 능히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부인의 시간이 있어야만 자기 성취나 자기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실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광야의 40년은 자기 부인이 필요로 한 것입니다.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우리 허물과 죗값을 치르기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남을 위한 자기희생입니다.
남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기가 수치를, 남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 자기가 고난을,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롭게 하는 십자가의 원수인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예수님을 좇는 길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 부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어 가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과 우연히 사람들을 만날 때 주는 인상 등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자신의 행동과 행위 뿐 아니라 복장, 외모, 모든 삶 전체를 분석해 본다면, 자아에 대한 이 불건전한 태도가 차지한 범위를 발견하고 몹시 놀랄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갑시다.
과연 삶 가운데서 단 한 가지, 자아로 말미암는 비참과 불행과 실패와 괴로움의 범위를 깨달은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지난 주(週)로 돌이켜서, 불행과 긴장과 성급함과 언짢음, 말하고 행동한 것들 가운데 지금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것들, 여러분을 혼란케 하고 균형을 잃게 한 순간들을 마음으로 상고하며 회상해 보십시오. 하나씩 하나씩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거의 이 자아의 문제, 이 자아의 민감성, 이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귀착되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아는 삶 가운데 있는 모든 불행의 주된 원인입니다.
자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의미합니다.
자아는 내가 항상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왕좌에 앉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항상 나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삶 가운데 모든 불행한 순간들은 궁극적으로 이 분리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과 및 주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가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비참이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하나님과의 분리의 유일한 원인은 자아입니다.
우리가 불행할 때는 언제나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대신 자신을 보고 자신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때를 의미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삶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영예와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인데, 선을 행하기도 하고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성도가 자기 생각을 따라 사는 것을 육체를 따라 행한다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육체를 따라 살게 되면 악을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선(善)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악한 일만 하지 않으면 상을 받게 될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선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한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선을 행 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약4:15-17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베드로가 주 예수님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사랑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베드로가 말리는 장면을 늘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때 베드로는 인간적으로는 선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악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부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중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분과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권리를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아를 부인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성육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조금도 자기를 위하여, 자기 스스로 사시지 않았습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나님의 일은 영생을 얻는 길
사람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지만 그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주관하시는 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지탱하고 가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육체를 위한다고 해서 우리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창조주와 구속주가 되시는 예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곧 결단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 하는 결단이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느냐 잃게 하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25-26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역설적 진리(Paradox) 라고 하는 이 말씀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증명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한가지의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입니다. 죽으면 반드시 산다는 진리를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지금 어떤 일에 투자하고 있습니까? 어떤 일로 해서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몸부림 치고 있습니까?
썩어질 육적인 목숨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지 마시고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내 목숨을 드리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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