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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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33회 작성일 2014-06-0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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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2:12-16 왕의 입성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사역을 다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은 많은 아주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모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열광적으로 환호했다고 했습니다.
12-13절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종려나무는 이스라엘민족에게는 거룩함의 상징이고 승리와 번영의 상징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들을 맞을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호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우는데 그 월계관이 종려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호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개선장군 즉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고 환호한 것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고 외친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메시아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이 절실히 요구되고 메시야가 필요로 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구세주로 만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의 진정한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구원의 이루시디기 위하여 피하여 다니시고 숨어 다니시던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33년입니다.
앞서 30년 동안의 기록은 별로 없고 공생애 3년 동안의 기록이 많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 1년 동안의 기록이 특히 많습니다.
1년의 기록 중에서도 십자가에서 죽기 전 1주일간의 기록이 가장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며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복음서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표적을 본 무리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삼고자 하였다.
오병이어를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6:14-15절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유월절 명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소문이 들렸기에 이 소문을 들은 구원을 갈망하는 큰 무리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지금의 형편에서 구원이 절실히 필요하였기에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구원해 주세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외치며 환호하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은 로마의 압제 하에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희망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로마로부터 억압과 착취와 억눌림을 당해서 미래가 지극히 불투명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오직 하늘만 쳐다보았습니다.
약소민족으로서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로마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게 할 메시야가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의 과다한 세금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시달린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오병이어 같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양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메시야로 믿었다.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들었기 때문에 질병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메시야로 믿고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였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왕으로 믿고 왕의 등극을 원하며 환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갈망은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다 알지 못하고 외치는 함성이었다.
다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만 보고 예수님을 왕으로 외치는 환호성이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사명도 알지 못하고 환호하는 함성이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에 대해서 몇 번이나 예고했지만,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셔야 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환호에 휩쓸리지 않으시고 묵묵히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은 자신들의 기대에 어긋나자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으소서 외치는 폭도가 되었습니다.
무지한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과 온 인류를 구원하는 죽음이었다.
사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 할 자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로 인하여 오는 모든 세상의 억압과 눌림의 고통에서 참된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장 육신의 소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예수님이 아니라 죄 때문에 사망의 권세가 들어 왔기에 그 근본이 되는 죄를 멸하려 오셨습니다.
이 죄악에서 얻은 구원은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 얻어지는 죄사함으로만 하여 얻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때로는 고난 받고 십자가를 지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고 축복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는 자기를 부정하는 일,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고난을 통하여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싫어하고 피한다면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기쁨은 없습니다.
신앙의 길에서 주어지는 진정한 복은 내가 예수를 앎으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내가 질 때에 내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삶, 그것이 복입니다.
내가 무거운 십자가를 졌는데 오히려 내 마음은 편안한 것, 그것이 복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겸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스가랴서 선지자는 메시아가 나귀를 타고 오신 이유가 겸손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4-15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어린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전쟁으로 로마를 정복할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겸손과 평화의 왕이 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겸손하신 왕이 오셔서 하실 일은 평화를 만드시는 일입니다. 병거와 말과 활을 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통치는 땅 끝까지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슥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예수님은 장차 영광의 왕으로 오십니다.
16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백성들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의미를 다 알지 못했다.
다 알지 못하고 따라갔지만 나중에 깨닫고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채 생명을 걸고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주님께서 처참하게 죽으시는 현장을 보는 것은, 바로 그 순간 주님을 좇던 제자들 역시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절망 속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은, 곧 주님과 함께 그들 자신이 부활한 것을 의미했습니다.
부활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남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아니 바로 우리 자신들의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의 참된 뜻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구원의 영원한 생명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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