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은 구원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74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누가복음18:26-30 금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은 구원은?
TV 방송 중에서 우리들의 세상이라는 사람들의 삶을 그려 놓은 다큐물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정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 결과는 참으로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한 사연은 50대 중반의 한 가정의 가장인 남자의 사연이었고 또 한 사연은 30대 초반의 아직 결혼을 하지 아니한 여자의 사연이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사연은 한결 같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들이었고 그러한 삶을 모습을 그렸습니다만은 어떠한 자세를 가자느냐? 에 따라 그 결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습니다.
중년 남자는 죽음과 눈물로서 슬픔으로 그 막을 내림으로서 바라보는 제 마음을 찹작하게 만들었고 여기 30대 초반의 여자는 소망이 넘치는 웃음을 보여 줌으로서 삶이 향기가 나는 것 같아 제 마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왜? 똑같은 인생이라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데 이렇게 다른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자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것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내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한 사람에게는 있었고 한 사람에게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만을 위하여 추구하는 자는 자신을 변화를 기대하기보다는 나를 제외한 내 주위가 내가 원하는 것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것이니 변하지 않는 주위로 인하여 그 삶이 얼마나 힘이 들고 고통스럽게 습니까?
이 중년의 남성은 매우 가정에 충실하고 그리고 성격적으로도 내성적인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그러한 사람입니다.
I M F 때에 직장을 잃고 청계천에서 노점상을 했는데 지정한 장소 외에 물건을 진열하는 것은 행인의 방해가 되니 구청에서 제지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피일 피제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제지를 하는 가운데 길에 진열된 물건을 단속반이 싣고 가버렸습니다. 이 물건을 찾아오려면 벌금을 내고 또 물건을 싣고 오기 위하여 차를 부르고 하면 경비가 나는 것입니다. 또 그 물건을 찾기 위하여 갔다오면 하루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값을 치르고 와서 그 다음 날 영업을 하는데 또 길거리에 진열을 하다가 단속반에게 물건을 또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하고 차를 가로막고 길거리에 들어 눕기도 했지만 결국 물건을 싣고 가버렸습니다. 단속반은 으래히 해야 할 일이니 또 이 분은 생계의 수단이니 피차 어쩔 수 없는 일이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이 중년 남자는 너무나도 화가 나서 구청장에게 탄원서를 쓰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니 신나를 싸 들고 구청에 들어가 자신의 몸에 뿌리고 불을 붙여 구청장 실로 고함을 지르며 돌진을 했습니다. 순식간에 물은 온 몸에 번졌고 마침 한 직원이 소화기로 그 몸에 물을 끝지만 그 사람은 온 몸에 전신 화상을 입고 입원을 했지만 결국은 며칠이 못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이지요 그렇다면 이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만들은 사회를 나무라면 좋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아무리 삶이 급박함이 이해가 되지만 이 일로 인하여 목숨까지 버려야만 합니까? 설령 노점상들이 거리를 마음대로 점령해서 영업을 해서 먹고 살으라고 법이 그렇게 바뀌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으로 만족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다른 무엇이나를 만족해 주지 못 할 일이 생기지 않으라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남겨진 아내의 울부짖음입니다. 그 내용이 이런 하소연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내 점포 반 평이라도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하며 울부짓는 것입니다. 그 아내가 신앙 생활을 했는지 같이 했는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기도를 그렇게 했으면 좋은 결과 생길 때까지 아니 내 점포 반 평이라도 생길 때까지 죽지는 말아야지요
이런 결과를 보니 자신의 삶의 요구를 위하다는 명목에서만 보면 결국은 구청의 단속원들이 나쁜 사람이 되고 구청장을 위시한 모든 사회의 규범이 잘못되었고 그렇게도 매달리며 기도하던 하나님도 무심한 하나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노점상 협회에서는 또 다른 의인이 죽고 열사가 죽었다고 그렇게 데모를 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열사가 되기 전에 죽지를 말아 야죠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했다면 더욱이 더 죽지를 말고 내 자신이 기도를 드린대로 변화시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2주간 교회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제 개인적으로 많은 은혜를 주시고 또 열심히 기도를 하는 자들은 새로운 은혜를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고 내 주위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는 뜻 안에서 새로운 인생과 삶이 바뀌어져 갈 때에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직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내 자신을 위한 주위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변화를 가져오기 전에 먼저 내 스스로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의 변화가 되는 것이 선결되어지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가 변화되어 보니 내 주위가 벌써 나를 위하여 변화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변하기 전에는 결코 내 주위는 변화가 일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한 여자의 사연은 이러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그는 8살이 되는 해에 소경이 되었는데 너무 먹지 못해서 가난하여 영양 실종으로 인하여 실명을 하였습니다.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하다가 겨우 11살이 되어 맹아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도 그의 앞을 보지 못함을 인하여 그 부모에게 원망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으요 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원망으로만 끝을 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선한 목표를 두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점차적으로 만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움이 있었지만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좋은 성적으로 맹아 학교을 졸업 할 수가 있었고 그런데 그에게는 대학 진학의 어려움이 있었지만은 수소문 끝에 대학을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또 취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소경이라는 이유로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굴하지 않고 원망하고 한탄하고 그것을 폭발하기보다는 아마 한강 물에 뛰어 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지금은 동경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밝고 있으며 장애우를 위한 삶을 위한 꿈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인터뷰 순간에 스스로 밥을 지어먹고 심지어는 부글부글 끓은 된장찌개까지 끓어 먹는 모습과 휴지산 등반을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작은 산을 오르내리는 모습도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그의 얼굴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계속하여 생긋 생긋 웃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요 믿음이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에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그리고 도와주심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는 자로 바뀌기는 싫어하고 세상이 바뀌기를 원하는 신앙을 가졌다면 이 신앙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 신앙에는 결코 기적 같은 일이 일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모순을 많이 보게 되는데 자신들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고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소리를 크게 지르고 있는 모습은 너무 나도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유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영생 즉 구원을 얻을 수가 있으냐?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구원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구원이시오 또한 이 땅에 오심도 구원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원하는 자에게 주시면 될 것 같지만은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너 자신이 이렇게 변화를 받으라 그러면 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가운데 구원이란 결코 주어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의 변화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고 변화하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하고 걱정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위가 변화 되기를 바라고 결국은 구원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리고는 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응답에 사람들이 순종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나는 나 그대로 남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사람하고는 구원의 거리가 멀고 힘이 들겠습니까?
본문의 말을 인용하면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보다 쉽다고 하였으니 자신이 변화가 없는 사람은 아직도 구원의 체험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믿음과 신념을 확실히 구분해야 합니다.
내가 변화가 없이 내 주관을 굽히지 않는 다고 한다면 그의 종교 행위는 신앙이 아니라 신념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내가 변화가 된다면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거기에는 언제든지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가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지난 금요 기도회에 어떤 교회 성도가 함께 기도를 했는데 저는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 달 전에도 한번 온 걸로 기억이 되는데 위하여 기도를 하는데 전번과 똑같은 기도의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순전히 자신의 사연만을 알렸지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일방적인 기도요 나중에는 참으로 답답한 기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받드시 신앙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기도와 신앙은 결코 신앙의 발전을 가져 올 수가 없고 응답과 구원은커녕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점점 은혜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에는 변화가 있으며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금세에 여러 배를 받고 (갑절로부터 시작해서 30, 60, 100배 수천 수만 배를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수천 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 자녀 천대에 이르기까지 축복하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실 때에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많아지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에도 이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본문의 사람들은 이제 구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아마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지만은 아직도 이런 고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죽어도 바뀌지 못해 바낄라면 하나님이나 바뀌세요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당신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그 고집을 끊고 말 것입니다.
물질로 가난하게 하시든지 그것도 안되시면 질병을 주어서라도 그래도 안되면 육신은 멸하고 그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도 합니다.
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사랑을 받은 자요 지혜로운 자라면 스스로 깨우치고 그렇게 변화됨을 감사함으로 받은 자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도 많은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28절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쫓았나이다 할렐루야!
여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가 무엇이며 우리의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주위의 변화가 아니라 내 자신의 변화가 우선하는 것입니다.
버린 것이 아니라 결국은 여러 배를 얻고 영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전혀 변화되려고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헌신이 없이 무엇인가를 구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고 조금도 아깝지 아니하고 주를 위하여 조금이라도 사용이 되어지면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같이 무슨 죽을죄라도 지은 것같지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멸망 받은 유다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내어놓은 마리아를 보고서 분해하면서 왜 이런 쓸데없는데 허비하느냐? 고 가난한 사람이나 나눠주지 하며 나섰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너는 도독이다(요12: ) 너는 나를 위해 그 흔해 빠진 감람유도 주지 않았지 않느냐? 이 여자는 참으로 복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망하는 자입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자입니다.
우리 인간적으로 잘 살아 보자 해 보십시오 잘 되는지 절대로 잘되는 법 없습니다.
누가 복된 자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내 자신이 한번 바뀌어져 보십시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 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선이 요구되어 질 때에 그 선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반드시 사용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반드시 구원이 있습니다.
에스더가 왜 왕후의 자리에 가게 되었을까요?
그의 왕후를 즐기기가 아니라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니냐?
우리 모두가 그러합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니요 그의 선을 통하여 유대는 구원을 가져왔듯이 여러분을 통하여 구원의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지 않았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그러한 은혜가 여러분들에게도 모두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번 기도회의 제목에서 이제 여러분들이 행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정해졌습니다.
이런 믿음 저런 믿음을 달라고 했는데 그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시면 구원이 일어납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변화해야 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잘 말하고 있었습니다. 술 담배를 끊기를 원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술 담배하지 않으면 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원 한다면 내가 하면 됩니다.
교회와 주를 위하여 헌신하고 싶다면 하시면 될 것입니다.
목사를 위하여 기도하고 돕은 자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외 모든 기도 제목 적은 대로 행하면 반드시 여러 배의 구원이 있고 그 사람은 영생 받은 삶임에 틀림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기도를 한다고 해도 나와는 상관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거나 문제가 있어서 기도하러 나오지 못한 분들도 아예 기도 제목을 적은 것조차 의미를 두지 못하고 아니 무엇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도 모르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을 주를 위하는 삶으로 체제를 바뀌고 내 자신이 변화가 되십시오
거기에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할지라도 요동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수지가 맞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자는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TV 방송 중에서 우리들의 세상이라는 사람들의 삶을 그려 놓은 다큐물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정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 결과는 참으로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한 사연은 50대 중반의 한 가정의 가장인 남자의 사연이었고 또 한 사연은 30대 초반의 아직 결혼을 하지 아니한 여자의 사연이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사연은 한결 같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들이었고 그러한 삶을 모습을 그렸습니다만은 어떠한 자세를 가자느냐? 에 따라 그 결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습니다.
중년 남자는 죽음과 눈물로서 슬픔으로 그 막을 내림으로서 바라보는 제 마음을 찹작하게 만들었고 여기 30대 초반의 여자는 소망이 넘치는 웃음을 보여 줌으로서 삶이 향기가 나는 것 같아 제 마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왜? 똑같은 인생이라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데 이렇게 다른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자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것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내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한 사람에게는 있었고 한 사람에게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만을 위하여 추구하는 자는 자신을 변화를 기대하기보다는 나를 제외한 내 주위가 내가 원하는 것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것이니 변하지 않는 주위로 인하여 그 삶이 얼마나 힘이 들고 고통스럽게 습니까?
이 중년의 남성은 매우 가정에 충실하고 그리고 성격적으로도 내성적인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그러한 사람입니다.
I M F 때에 직장을 잃고 청계천에서 노점상을 했는데 지정한 장소 외에 물건을 진열하는 것은 행인의 방해가 되니 구청에서 제지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피일 피제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제지를 하는 가운데 길에 진열된 물건을 단속반이 싣고 가버렸습니다. 이 물건을 찾아오려면 벌금을 내고 또 물건을 싣고 오기 위하여 차를 부르고 하면 경비가 나는 것입니다. 또 그 물건을 찾기 위하여 갔다오면 하루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값을 치르고 와서 그 다음 날 영업을 하는데 또 길거리에 진열을 하다가 단속반에게 물건을 또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하고 차를 가로막고 길거리에 들어 눕기도 했지만 결국 물건을 싣고 가버렸습니다. 단속반은 으래히 해야 할 일이니 또 이 분은 생계의 수단이니 피차 어쩔 수 없는 일이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이 중년 남자는 너무나도 화가 나서 구청장에게 탄원서를 쓰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니 신나를 싸 들고 구청에 들어가 자신의 몸에 뿌리고 불을 붙여 구청장 실로 고함을 지르며 돌진을 했습니다. 순식간에 물은 온 몸에 번졌고 마침 한 직원이 소화기로 그 몸에 물을 끝지만 그 사람은 온 몸에 전신 화상을 입고 입원을 했지만 결국은 며칠이 못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이지요 그렇다면 이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만들은 사회를 나무라면 좋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아무리 삶이 급박함이 이해가 되지만 이 일로 인하여 목숨까지 버려야만 합니까? 설령 노점상들이 거리를 마음대로 점령해서 영업을 해서 먹고 살으라고 법이 그렇게 바뀌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으로 만족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다른 무엇이나를 만족해 주지 못 할 일이 생기지 않으라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남겨진 아내의 울부짖음입니다. 그 내용이 이런 하소연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내 점포 반 평이라도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하며 울부짓는 것입니다. 그 아내가 신앙 생활을 했는지 같이 했는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기도를 그렇게 했으면 좋은 결과 생길 때까지 아니 내 점포 반 평이라도 생길 때까지 죽지는 말아야지요
이런 결과를 보니 자신의 삶의 요구를 위하다는 명목에서만 보면 결국은 구청의 단속원들이 나쁜 사람이 되고 구청장을 위시한 모든 사회의 규범이 잘못되었고 그렇게도 매달리며 기도하던 하나님도 무심한 하나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노점상 협회에서는 또 다른 의인이 죽고 열사가 죽었다고 그렇게 데모를 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열사가 되기 전에 죽지를 말아 야죠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했다면 더욱이 더 죽지를 말고 내 자신이 기도를 드린대로 변화시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2주간 교회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제 개인적으로 많은 은혜를 주시고 또 열심히 기도를 하는 자들은 새로운 은혜를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고 내 주위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는 뜻 안에서 새로운 인생과 삶이 바뀌어져 갈 때에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직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내 자신을 위한 주위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변화를 가져오기 전에 먼저 내 스스로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의 변화가 되는 것이 선결되어지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가 변화되어 보니 내 주위가 벌써 나를 위하여 변화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변하기 전에는 결코 내 주위는 변화가 일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한 여자의 사연은 이러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그는 8살이 되는 해에 소경이 되었는데 너무 먹지 못해서 가난하여 영양 실종으로 인하여 실명을 하였습니다.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하다가 겨우 11살이 되어 맹아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도 그의 앞을 보지 못함을 인하여 그 부모에게 원망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으요 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원망으로만 끝을 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선한 목표를 두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점차적으로 만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움이 있었지만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좋은 성적으로 맹아 학교을 졸업 할 수가 있었고 그런데 그에게는 대학 진학의 어려움이 있었지만은 수소문 끝에 대학을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또 취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소경이라는 이유로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굴하지 않고 원망하고 한탄하고 그것을 폭발하기보다는 아마 한강 물에 뛰어 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지금은 동경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밝고 있으며 장애우를 위한 삶을 위한 꿈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인터뷰 순간에 스스로 밥을 지어먹고 심지어는 부글부글 끓은 된장찌개까지 끓어 먹는 모습과 휴지산 등반을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작은 산을 오르내리는 모습도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그의 얼굴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계속하여 생긋 생긋 웃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요 믿음이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에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그리고 도와주심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는 자로 바뀌기는 싫어하고 세상이 바뀌기를 원하는 신앙을 가졌다면 이 신앙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 신앙에는 결코 기적 같은 일이 일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모순을 많이 보게 되는데 자신들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고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소리를 크게 지르고 있는 모습은 너무 나도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유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영생 즉 구원을 얻을 수가 있으냐?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구원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구원이시오 또한 이 땅에 오심도 구원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원하는 자에게 주시면 될 것 같지만은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너 자신이 이렇게 변화를 받으라 그러면 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가운데 구원이란 결코 주어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의 변화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고 변화하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하고 걱정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위가 변화 되기를 바라고 결국은 구원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리고는 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응답에 사람들이 순종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나는 나 그대로 남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사람하고는 구원의 거리가 멀고 힘이 들겠습니까?
본문의 말을 인용하면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보다 쉽다고 하였으니 자신이 변화가 없는 사람은 아직도 구원의 체험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믿음과 신념을 확실히 구분해야 합니다.
내가 변화가 없이 내 주관을 굽히지 않는 다고 한다면 그의 종교 행위는 신앙이 아니라 신념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내가 변화가 된다면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거기에는 언제든지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가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지난 금요 기도회에 어떤 교회 성도가 함께 기도를 했는데 저는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 달 전에도 한번 온 걸로 기억이 되는데 위하여 기도를 하는데 전번과 똑같은 기도의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순전히 자신의 사연만을 알렸지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일방적인 기도요 나중에는 참으로 답답한 기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받드시 신앙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기도와 신앙은 결코 신앙의 발전을 가져 올 수가 없고 응답과 구원은커녕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점점 은혜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에는 변화가 있으며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금세에 여러 배를 받고 (갑절로부터 시작해서 30, 60, 100배 수천 수만 배를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수천 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 자녀 천대에 이르기까지 축복하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실 때에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많아지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에도 이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본문의 사람들은 이제 구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아마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지만은 아직도 이런 고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죽어도 바뀌지 못해 바낄라면 하나님이나 바뀌세요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당신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그 고집을 끊고 말 것입니다.
물질로 가난하게 하시든지 그것도 안되시면 질병을 주어서라도 그래도 안되면 육신은 멸하고 그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도 합니다.
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사랑을 받은 자요 지혜로운 자라면 스스로 깨우치고 그렇게 변화됨을 감사함으로 받은 자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도 많은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28절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쫓았나이다 할렐루야!
여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가 무엇이며 우리의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주위의 변화가 아니라 내 자신의 변화가 우선하는 것입니다.
버린 것이 아니라 결국은 여러 배를 얻고 영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전혀 변화되려고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헌신이 없이 무엇인가를 구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고 조금도 아깝지 아니하고 주를 위하여 조금이라도 사용이 되어지면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같이 무슨 죽을죄라도 지은 것같지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멸망 받은 유다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내어놓은 마리아를 보고서 분해하면서 왜 이런 쓸데없는데 허비하느냐? 고 가난한 사람이나 나눠주지 하며 나섰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너는 도독이다(요12: ) 너는 나를 위해 그 흔해 빠진 감람유도 주지 않았지 않느냐? 이 여자는 참으로 복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망하는 자입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자입니다.
우리 인간적으로 잘 살아 보자 해 보십시오 잘 되는지 절대로 잘되는 법 없습니다.
누가 복된 자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내 자신이 한번 바뀌어져 보십시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 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선이 요구되어 질 때에 그 선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반드시 사용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반드시 구원이 있습니다.
에스더가 왜 왕후의 자리에 가게 되었을까요?
그의 왕후를 즐기기가 아니라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니냐?
우리 모두가 그러합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니요 그의 선을 통하여 유대는 구원을 가져왔듯이 여러분을 통하여 구원의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지 않았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그러한 은혜가 여러분들에게도 모두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번 기도회의 제목에서 이제 여러분들이 행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정해졌습니다.
이런 믿음 저런 믿음을 달라고 했는데 그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시면 구원이 일어납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변화해야 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잘 말하고 있었습니다. 술 담배를 끊기를 원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술 담배하지 않으면 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원 한다면 내가 하면 됩니다.
교회와 주를 위하여 헌신하고 싶다면 하시면 될 것입니다.
목사를 위하여 기도하고 돕은 자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외 모든 기도 제목 적은 대로 행하면 반드시 여러 배의 구원이 있고 그 사람은 영생 받은 삶임에 틀림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기도를 한다고 해도 나와는 상관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거나 문제가 있어서 기도하러 나오지 못한 분들도 아예 기도 제목을 적은 것조차 의미를 두지 못하고 아니 무엇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도 모르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을 주를 위하는 삶으로 체제를 바뀌고 내 자신이 변화가 되십시오
거기에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할지라도 요동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수지가 맞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자는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