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신 것을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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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76회 작성일 2014-08-04 11:13본문
욥기23:10-14 작정하신 것을 이루소서
미국의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가 부른 노래 중에 찬송가에 올려진 흑인 영가가 있습니다
누가 나의 괴롬을 알며(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라는 찬양입니다.
찬송가 372장 그 누가 나의 괴롬을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그녀는 노래를 잘 불렀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음악학교 입학을 거절당하고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있었지만 그가 다니는 교회 교인들의 도움으로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첫 독창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유명한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함께 연주를 하고 난 뒤, 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한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라고 그를 극찬합니다.
모든 관중이 기립박수를 치고 앵콜송을 청했을 때 그가 부른 노래가 흑인의 영가 그 누가 나의 괴롬을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를 불렀습니다.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이 쓰라린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어서서 끝까지 노력하여, 마침내 세계적인 가수가 됩니다.
이것은 해피엔딩입니다.
예날 이야기는 대체로 잘 먹고 잘 살았더라 이지 않습니까?
볼레터 스틸 크럼리(Valetta Steel Crumley)라는 71세의 여인이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Thrice Through the Valley)라는 책을 썼는데 그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는데, 첫째 자녀는 4살 때 백혈병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답니다.
그분의 자녀에 대한 고난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둘째와 셋째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그만 교통사고로 18, 16살에 사망했습니다.
세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고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의 아빠요 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목사이면서 선교사였는데 33세에 임파선 암의 일종인 호치킨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는 한 사람의 가족도 남지 않았습니다.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과 고난의 강에 빠져 죽지 않았습니다.
중국 대만에 가서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난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크럼리 여사가 57세 되던 해에 선교를 하던 대만에서 살인범을 만나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일반적인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 원망하며 인생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소명을 더욱 불탔습니다.
왜 자신만이 당한 그 끔찍한 경험을 무슨 자랑이라고 무슨 유익을 보겠다고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까?
그는 왜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거를 들추어 가면서 솔직하게 이런 내용을 털어 놓는가?
이러한 기가 막힌 고통과 환난을 통해서 자신이 깨달은 한 가지 분명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펜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진리는 세상에 사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인생의 고난과 고통에서 면죄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환난에도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을 그 고난에서 망하도록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가운데 감당하게 하시며 극복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녀들을 품에 안고 몸부림치던 밤에도 하나님은 말씀의 능력으로 자신에게 찾아 오셨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마지막 숨 한번 들이마시기 위해 죽을힘을 다 쓰던 그 무서운 밤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찾아와 큰 위로와 소망의 말씀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그렇거니 했던 말씀들이 환난을 당하고 나니 말씀 하나하나도 절대 거짓이 아니고 진리로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오늘 본문에 역시 고난의 대 명사로 여겼던 욥이라는 인물이 고난의 사람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엄청난 믿음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성도는 믿음의 삶으로 살도록 인도하신다
다른 방법으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할 수가 없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모를 때에 참으로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항의하고, 그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고 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고난에 대한 욥과 친구들과의 긴 논쟁이 욥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친구들의 말의 요점은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고서는 그런 고난을 받을 수 없다는 말에 욥으로서는 너무나 황당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자신에게 오는 고난은 왜 자기 자신이 고난을 당해야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욥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왜 나에게 아직도 언제까지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하고 하나님께 묻고 따지고 벗어 버리려고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유가 분명하다면 고난을 받을 만 하다고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고난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워낙 고난이 많으니 사람들은 흔히 그저 이게 팔자려니 생각하는 게 편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 것은 그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은 것만이 아닙니다.
이 고난이 하루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언제 끝나는지를 안다면, 그래도 그 때까지는 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고난의 끝입니다.
욥은 이 고난이 계속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고난도 고난이거니와 아직도 많이 남아있을 앞으로의 고난을 생각합니다.
사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에 대해 물으면서 결론에 도달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왜 자신이 고난 받아야 하는지를 자신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이지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나약하고 추하게 만들 수도 있고,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쉽고 편하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으려 합니다.
세상은 고난이 없이 얻어 지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죄를 짓고 물질도 얻고 명예도 얻고 가정도 얻고 세상적인 성공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얻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진정 나의 삶에서 주시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필요만을 충족시키려는 삶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모두가 지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충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의 뜻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사람의 많은 계획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이 배제된 계획들이지요
그 중에 무엇이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도하시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인생의 길이 보입니다.
시32:8-9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아시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땀을 흘리며 고민하고 기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드려는 예배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네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잇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모른다는 것은 내 뜻대로 안되니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은 분명히 있습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믿음으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아직도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십니까?
욥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믿음으로 사는 자로 만들려고 하는지 말입니다.
어느 정도인지 잘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11-12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이제 욥은 이 고난이 바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자신을 향한 꿈이고, 뜻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의 고난이 자신을 통해 기어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가 그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그 고통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믿음으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실을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고통 중에서도 인내하며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순금 같이 되어 곧 믿음의 멋진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의 고통은 죄의 결과요 죄를 회개하지 않은 결과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순종함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습니다.
히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이 여길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한 고통이라 생각합니다.
왜 인생은 어차피 고난이 있습니다.
슬픈 인생을 만들지 마시고 영광된 인생을 만드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구원은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주어진 길입니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교회는 현실을 잊게 해주는 곳이 아닙니다.
현실의 삶과 정면으로 승부하기 위해서, 왜 하나님이 그런 삶을 내게 주시고, 또 주려고 하는지를 알게 하여 세상으로 다시 보내는 자리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롬12:2-3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미국의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가 부른 노래 중에 찬송가에 올려진 흑인 영가가 있습니다
누가 나의 괴롬을 알며(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라는 찬양입니다.
찬송가 372장 그 누가 나의 괴롬을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그녀는 노래를 잘 불렀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음악학교 입학을 거절당하고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있었지만 그가 다니는 교회 교인들의 도움으로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첫 독창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유명한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함께 연주를 하고 난 뒤, 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한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라고 그를 극찬합니다.
모든 관중이 기립박수를 치고 앵콜송을 청했을 때 그가 부른 노래가 흑인의 영가 그 누가 나의 괴롬을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를 불렀습니다.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이 쓰라린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어서서 끝까지 노력하여, 마침내 세계적인 가수가 됩니다.
이것은 해피엔딩입니다.
예날 이야기는 대체로 잘 먹고 잘 살았더라 이지 않습니까?
볼레터 스틸 크럼리(Valetta Steel Crumley)라는 71세의 여인이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Thrice Through the Valley)라는 책을 썼는데 그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는데, 첫째 자녀는 4살 때 백혈병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답니다.
그분의 자녀에 대한 고난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둘째와 셋째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그만 교통사고로 18, 16살에 사망했습니다.
세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고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의 아빠요 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목사이면서 선교사였는데 33세에 임파선 암의 일종인 호치킨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는 한 사람의 가족도 남지 않았습니다.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과 고난의 강에 빠져 죽지 않았습니다.
중국 대만에 가서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난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크럼리 여사가 57세 되던 해에 선교를 하던 대만에서 살인범을 만나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일반적인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 원망하며 인생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소명을 더욱 불탔습니다.
왜 자신만이 당한 그 끔찍한 경험을 무슨 자랑이라고 무슨 유익을 보겠다고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까?
그는 왜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거를 들추어 가면서 솔직하게 이런 내용을 털어 놓는가?
이러한 기가 막힌 고통과 환난을 통해서 자신이 깨달은 한 가지 분명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펜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진리는 세상에 사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인생의 고난과 고통에서 면죄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환난에도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을 그 고난에서 망하도록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가운데 감당하게 하시며 극복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녀들을 품에 안고 몸부림치던 밤에도 하나님은 말씀의 능력으로 자신에게 찾아 오셨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마지막 숨 한번 들이마시기 위해 죽을힘을 다 쓰던 그 무서운 밤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찾아와 큰 위로와 소망의 말씀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그렇거니 했던 말씀들이 환난을 당하고 나니 말씀 하나하나도 절대 거짓이 아니고 진리로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오늘 본문에 역시 고난의 대 명사로 여겼던 욥이라는 인물이 고난의 사람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엄청난 믿음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성도는 믿음의 삶으로 살도록 인도하신다
다른 방법으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할 수가 없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모를 때에 참으로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항의하고, 그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고 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고난에 대한 욥과 친구들과의 긴 논쟁이 욥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친구들의 말의 요점은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고서는 그런 고난을 받을 수 없다는 말에 욥으로서는 너무나 황당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자신에게 오는 고난은 왜 자기 자신이 고난을 당해야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욥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왜 나에게 아직도 언제까지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하고 하나님께 묻고 따지고 벗어 버리려고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유가 분명하다면 고난을 받을 만 하다고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고난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워낙 고난이 많으니 사람들은 흔히 그저 이게 팔자려니 생각하는 게 편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 것은 그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은 것만이 아닙니다.
이 고난이 하루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언제 끝나는지를 안다면, 그래도 그 때까지는 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고난의 끝입니다.
욥은 이 고난이 계속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고난도 고난이거니와 아직도 많이 남아있을 앞으로의 고난을 생각합니다.
사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에 대해 물으면서 결론에 도달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왜 자신이 고난 받아야 하는지를 자신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이지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나약하고 추하게 만들 수도 있고,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쉽고 편하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으려 합니다.
세상은 고난이 없이 얻어 지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죄를 짓고 물질도 얻고 명예도 얻고 가정도 얻고 세상적인 성공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얻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진정 나의 삶에서 주시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필요만을 충족시키려는 삶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모두가 지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충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의 뜻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사람의 많은 계획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이 배제된 계획들이지요
그 중에 무엇이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도하시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인생의 길이 보입니다.
시32:8-9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아시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땀을 흘리며 고민하고 기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드려는 예배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네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잇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모른다는 것은 내 뜻대로 안되니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은 분명히 있습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믿음으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아직도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십니까?
욥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믿음으로 사는 자로 만들려고 하는지 말입니다.
어느 정도인지 잘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11-12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이제 욥은 이 고난이 바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자신을 향한 꿈이고, 뜻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의 고난이 자신을 통해 기어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가 그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그 고통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믿음으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실을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고통 중에서도 인내하며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순금 같이 되어 곧 믿음의 멋진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의 고통은 죄의 결과요 죄를 회개하지 않은 결과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순종함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습니다.
히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이 여길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한 고통이라 생각합니다.
왜 인생은 어차피 고난이 있습니다.
슬픈 인생을 만들지 마시고 영광된 인생을 만드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구원은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주어진 길입니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교회는 현실을 잊게 해주는 곳이 아닙니다.
현실의 삶과 정면으로 승부하기 위해서, 왜 하나님이 그런 삶을 내게 주시고, 또 주려고 하는지를 알게 하여 세상으로 다시 보내는 자리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롬12:2-3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