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케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참된 일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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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97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고린도후서 5: 17-19 화목케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참된 일군입니다
어저께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멀리 떨어져있는 한 성도에게서 이멜일이 왔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제 마음에 감동이 되고 또한 감사하기 이를 때가 없었습니다.
이 내용중 한 글을 소개한다면 “여기에 오실땐 여름이 막 시작하기 전 이었는데... 어느새 여름도 가고 가을로 접어드내요. 흐르는 세월은 생각보다 더 훨신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빨리 흘러간다 하더라도 목사님과 사모님의 사랑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늘 감사하는 맘입니다.
몇 명의 성도들을 가지고도 제대로 목회를 하지 못하는 저에게는 이 한 성도가 들려주는 글귀는 저에게 많은 위로가 되고 보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느끼는 것은 목회자와 성도간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그리고 받아 주는 화목하는 것입니다.
목사인 제가 성도를 볼 때에 이해가 되지 않고 답답하고 속상한 일이 있는데 하물며 성도가 목사를 볼 때에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몇 명만 모였다 하면은 시작하는 것이 비판하고 판단하고 헐뜻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예사입니다.
오늘 우리 나라의 정치를 한번 보십시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역대에서 이렇게 까지 되는 것을 저는 아직 보지를 못했습니다.
뻔히 속이 다 들어다 보이는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으니 너무나도 서글픈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고 헤아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고유의 권을 우리 사람이 행한다면 그 헤아림으로 하나님의 헤아림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사람의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죄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우리 사람과 화목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화목하시기를 원하였습니다.
비단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만 아니라 성도와 성도간의 관계,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것은 부모 자식 형제간에도 그러해야 하고 이웃간에도 그렇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교회 장로님이 아들의 결혼식 청첩장을 돌린 적이 있었는데 결혼을 얼마 두지 않고 통보가 오기를 이 결혼식이 성사 될 수 없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또 어제는 천호동에 있는 모 교회에서 목사 위임식을 하기 위해 기독신문에 광고를 내고 저에게도 초청장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위임식는 보류되었다는 통보도 하지 않고 위임식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내용은 년로 목사님이 은퇴를 하시고 난 후에 새로운 목사님을 청빙하고 위임하기로 했는데 그 교회 장로들끼리 패가 갈리어서 한 쪽에서는 이 목사님을 위임하자고 하고 한 쪽에서는 안 된다고 성도들끼리 다투는 바람에 괜한 초청 받은 목사님만 애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가운데 참으로 많이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화목을 잘 하지 못합니다.
화목하기에 익숙하지 못하고 불화하는 데에는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모습을 두고 육체를 가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갈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전혀 덕을 끼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를 못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와같은 육체적인 조건들을 이미 십자가에 다 못을 박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니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나는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어 버렸으니 그의 삶에는 육체적인 것이 지배하기보다는 성령이 그 사람을 주관하시는 자가 되었으니 그의 삶의 형태는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달 말 경에 교회 직원을 선택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군이 요구가 될까요?
목사와 성도간에서 또한 성도와 성도간에서 화목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자가 가장 휼륭한 일군이 될 수 있는 첫 번 째 요건입니다.
교회는 이런 인물을 요구로 하고 오늘의 사회도 이런 인물이 요구되어 집니다.
1852년 4월 10일 한 미국인이 알제리아 튜니스에서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1년이 흐른 후에 미국은 이 사람의 시체를 되돌려 오기 위하여 군함을 파견했습니다. 마침내 그를 실은 군함이 뉴욕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군악대가 동원되었고 축포가 울렸으며 모든 깃발은 조기로 나부꼈습니다. 그의 시체는 특별 열차 편으로 워싱턴으로 옮겨졌고 의회가 소집되고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고위관리들이 그를 추모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과연 누구였을까요? 위대한 군인? 위대한 발명가? 아니면 위대한 문학가? 정치가? 사업가도 아닙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그의 이름을 아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아실 것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일세 ...” 바로 ‘홈, 스위트 홈’을 작곡한 죤 하워드 패인이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노래는 가정에서 식구들의 사랑과 화목의 소중함에 대하여 너무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죤 하워드 패인은 생전에 전혀 가정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꿈속에서나마 그가 원하는 가정을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가정의 화목을 그리웠으면 노래로 가정을 나타냈을까요? 그러나 오늘날의 가정은 과연 어떻습니까? 오랜 비바람에 황폐해진 집처럼 가정도 그렇게 황폐해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화하며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아비와 자식이 대적하며 부부간에 갈등이 바로 우리의 가정을 숨막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해 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고통받으시고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화목은 얼마나 중요한 직책인 줄을 아셔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화목한 직책을 하는 일군이 될 수 있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제5대 제사가 있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사인데 그 제사의 의미와 뜻을 따라서 우리의 삶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할 때마다 전적인 헌신과 감사의 헌물과 속죄의 회개와 성도의 친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령과 진리의 예배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형식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형식에 치우쳐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콩이 자라는 것을 보면 콩 꽃이 떨어지면 콩깍지가 먼저 생깁니다. 그 콩깍지 안에서 작은 씨눈과 같은 콩이 점점 자라게 됩니다. 그 콩 알맹이가 자라는데는 콩깍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콩깍지 안에서 자란 콩 알맹이가 다 성숙해지면 콩깍지는 터져 나가고 콩 알맹이만 남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신앙행위에 있어서 틀과 같은 의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앙의 내용들을 담을 수 있는 틀이 있어야 하고 튼튼해야 합니다. 예컨대 예배를 인도하는 분들이나 성가대원과 헌금위원이 의식을 행하는 것은 하나의 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보에 나타난 순서를 통하여 예배를 진행하는 것은 틀입니다. 이 틀은 내용을 정성스럽게 담기 위한 것입니다. 틀이 없는 내용은 흐트러지며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틀인 의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의 제사들은 내용으로 볼 때 의식법에 속합니다. 이 의식은 세밀하고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의식법이지만 그대로 준행할 때 거룩이 손상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도대로 내용을 지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구약의 의식대로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사법의 정신과 근본의도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그 의식법을 자신의 몸으로 완성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의식법대로 하지는 않더라도 그 정신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와 삶에서 그 정신은 계승해야 하고 규례의 깊은 뜻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예컨대,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태워서 드렸듯이 우리가 예배에서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제물은 흠없는 것을 드렸듯이 우리의 예배와 삶에 흠이 없게 드려야 하나님이 열납하십니다. 소제는 가루를 만들어 드렸듯이 우리는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져서 영적으로 성화의 제물이 되어야 드려야 합니다.
그 중에 화목제가 있습니다.
화목제를 Peace Offering이라고 하는데 평화의 제사, 화목을 위한 제사라는 뜻입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은 번제를 드릴 때처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흠없는 것이어야 하고 예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하며 온전히 죽여서 각을 뜨고 피는 제단 4면에 뿌려야 하며 불태워 화제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번제와 다른 점은 비둘기는 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목제는 잔치제사이기 때문에 비둘기 고기로는 잔치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점은 번제는 온전히 하나님께 태워서 드렸는데 화목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몫이 있고, 제사장에게 드리는 몫이 있고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이 받을 몫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몫만 태워서 드렸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화목제를 자원제라고 하기도 하고 낙헌제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 성도와 이웃과의 화평과 친교를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을 표징하며 동시에 사람 사이에 거룩한 교제를 뜻하는 제사로서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되었고 지금도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성도의 기쁜 삶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화목제라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양을 화목제물로 드려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혈을 흘려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믿을 때 하나님과 화목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0:19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사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당신을 생각합니다하는 뜻입니다. 영어의 Thank You는 Think You 즉 당신을 생각합니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감사하는 삶이며,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감사하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피차의 수고와 사랑을 생각할 때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잃어야 얻는 진리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십자가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단순히 잃어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희생을 지불하며서 내 자신을 포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신을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자기신뢰, 자기교만, 안일주의, 편리주의, 자기만족, 세상정욕 이런 것들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화목제의 삶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므로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나 또한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화목제는 성도와 성도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화목제물은 기름과 콩팥 부위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부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의학의 발달로 기름을 먹으면 몸에 해롭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기름을 먹으면 해롭기 때문에 불에 태우라고 일찌기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먹어서 해로운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몫을 인간이 취하면 사람에게는 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의 가슴부분 즉 안심 부분과 뒷다리는 제사장과 그 가족에게 주었습니다. 저들은 이 고기를 받고 요제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요제는 앞으로 내밀었다 뒤를 돌아보는 흔드는 제사입니다. 앞으로 내미는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이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께 받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부분의 고기는 헌제자 즉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에게 되돌려 주어 그것으로 잔치를 배설하게 했습니다. 그 잔치는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소외당한 자, 나그네를 위한 잔치였습니다. 화목제가 아니면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는 고기맛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나눔의 잔치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제물을 나누어 먹듯이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기에 이 축복과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몫과 제사장에게 드릴 몫과 이웃과 성도들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며 화평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나누게 될 때 그 복은 참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35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25:에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해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의인들이 주여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드려진 화목제는 자기 자신에게 기쁨과 행복을 줍니다.
화목제란 기쁨, 행복의 뜻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제사이고 앞으로도 하나님과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일종의 서원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감사와 찬양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오늘의 성도의 화목제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하셨습니다.
화목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 4: 6-7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창 28: 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어저께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멀리 떨어져있는 한 성도에게서 이멜일이 왔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제 마음에 감동이 되고 또한 감사하기 이를 때가 없었습니다.
이 내용중 한 글을 소개한다면 “여기에 오실땐 여름이 막 시작하기 전 이었는데... 어느새 여름도 가고 가을로 접어드내요. 흐르는 세월은 생각보다 더 훨신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빨리 흘러간다 하더라도 목사님과 사모님의 사랑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늘 감사하는 맘입니다.
몇 명의 성도들을 가지고도 제대로 목회를 하지 못하는 저에게는 이 한 성도가 들려주는 글귀는 저에게 많은 위로가 되고 보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느끼는 것은 목회자와 성도간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그리고 받아 주는 화목하는 것입니다.
목사인 제가 성도를 볼 때에 이해가 되지 않고 답답하고 속상한 일이 있는데 하물며 성도가 목사를 볼 때에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몇 명만 모였다 하면은 시작하는 것이 비판하고 판단하고 헐뜻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예사입니다.
오늘 우리 나라의 정치를 한번 보십시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역대에서 이렇게 까지 되는 것을 저는 아직 보지를 못했습니다.
뻔히 속이 다 들어다 보이는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으니 너무나도 서글픈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고 헤아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고유의 권을 우리 사람이 행한다면 그 헤아림으로 하나님의 헤아림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사람의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죄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우리 사람과 화목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화목하시기를 원하였습니다.
비단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만 아니라 성도와 성도간의 관계,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것은 부모 자식 형제간에도 그러해야 하고 이웃간에도 그렇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교회 장로님이 아들의 결혼식 청첩장을 돌린 적이 있었는데 결혼을 얼마 두지 않고 통보가 오기를 이 결혼식이 성사 될 수 없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또 어제는 천호동에 있는 모 교회에서 목사 위임식을 하기 위해 기독신문에 광고를 내고 저에게도 초청장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위임식는 보류되었다는 통보도 하지 않고 위임식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내용은 년로 목사님이 은퇴를 하시고 난 후에 새로운 목사님을 청빙하고 위임하기로 했는데 그 교회 장로들끼리 패가 갈리어서 한 쪽에서는 이 목사님을 위임하자고 하고 한 쪽에서는 안 된다고 성도들끼리 다투는 바람에 괜한 초청 받은 목사님만 애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가운데 참으로 많이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화목을 잘 하지 못합니다.
화목하기에 익숙하지 못하고 불화하는 데에는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모습을 두고 육체를 가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갈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전혀 덕을 끼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를 못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와같은 육체적인 조건들을 이미 십자가에 다 못을 박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니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나는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어 버렸으니 그의 삶에는 육체적인 것이 지배하기보다는 성령이 그 사람을 주관하시는 자가 되었으니 그의 삶의 형태는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달 말 경에 교회 직원을 선택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군이 요구가 될까요?
목사와 성도간에서 또한 성도와 성도간에서 화목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자가 가장 휼륭한 일군이 될 수 있는 첫 번 째 요건입니다.
교회는 이런 인물을 요구로 하고 오늘의 사회도 이런 인물이 요구되어 집니다.
1852년 4월 10일 한 미국인이 알제리아 튜니스에서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1년이 흐른 후에 미국은 이 사람의 시체를 되돌려 오기 위하여 군함을 파견했습니다. 마침내 그를 실은 군함이 뉴욕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군악대가 동원되었고 축포가 울렸으며 모든 깃발은 조기로 나부꼈습니다. 그의 시체는 특별 열차 편으로 워싱턴으로 옮겨졌고 의회가 소집되고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고위관리들이 그를 추모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과연 누구였을까요? 위대한 군인? 위대한 발명가? 아니면 위대한 문학가? 정치가? 사업가도 아닙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그의 이름을 아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아실 것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일세 ...” 바로 ‘홈, 스위트 홈’을 작곡한 죤 하워드 패인이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노래는 가정에서 식구들의 사랑과 화목의 소중함에 대하여 너무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죤 하워드 패인은 생전에 전혀 가정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꿈속에서나마 그가 원하는 가정을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가정의 화목을 그리웠으면 노래로 가정을 나타냈을까요? 그러나 오늘날의 가정은 과연 어떻습니까? 오랜 비바람에 황폐해진 집처럼 가정도 그렇게 황폐해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화하며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아비와 자식이 대적하며 부부간에 갈등이 바로 우리의 가정을 숨막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해 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고통받으시고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화목은 얼마나 중요한 직책인 줄을 아셔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화목한 직책을 하는 일군이 될 수 있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제5대 제사가 있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사인데 그 제사의 의미와 뜻을 따라서 우리의 삶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할 때마다 전적인 헌신과 감사의 헌물과 속죄의 회개와 성도의 친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령과 진리의 예배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형식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형식에 치우쳐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콩이 자라는 것을 보면 콩 꽃이 떨어지면 콩깍지가 먼저 생깁니다. 그 콩깍지 안에서 작은 씨눈과 같은 콩이 점점 자라게 됩니다. 그 콩 알맹이가 자라는데는 콩깍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콩깍지 안에서 자란 콩 알맹이가 다 성숙해지면 콩깍지는 터져 나가고 콩 알맹이만 남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신앙행위에 있어서 틀과 같은 의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앙의 내용들을 담을 수 있는 틀이 있어야 하고 튼튼해야 합니다. 예컨대 예배를 인도하는 분들이나 성가대원과 헌금위원이 의식을 행하는 것은 하나의 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보에 나타난 순서를 통하여 예배를 진행하는 것은 틀입니다. 이 틀은 내용을 정성스럽게 담기 위한 것입니다. 틀이 없는 내용은 흐트러지며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틀인 의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의 제사들은 내용으로 볼 때 의식법에 속합니다. 이 의식은 세밀하고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의식법이지만 그대로 준행할 때 거룩이 손상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도대로 내용을 지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구약의 의식대로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사법의 정신과 근본의도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그 의식법을 자신의 몸으로 완성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의식법대로 하지는 않더라도 그 정신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와 삶에서 그 정신은 계승해야 하고 규례의 깊은 뜻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예컨대,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태워서 드렸듯이 우리가 예배에서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제물은 흠없는 것을 드렸듯이 우리의 예배와 삶에 흠이 없게 드려야 하나님이 열납하십니다. 소제는 가루를 만들어 드렸듯이 우리는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져서 영적으로 성화의 제물이 되어야 드려야 합니다.
그 중에 화목제가 있습니다.
화목제를 Peace Offering이라고 하는데 평화의 제사, 화목을 위한 제사라는 뜻입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은 번제를 드릴 때처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흠없는 것이어야 하고 예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하며 온전히 죽여서 각을 뜨고 피는 제단 4면에 뿌려야 하며 불태워 화제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번제와 다른 점은 비둘기는 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목제는 잔치제사이기 때문에 비둘기 고기로는 잔치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점은 번제는 온전히 하나님께 태워서 드렸는데 화목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몫이 있고, 제사장에게 드리는 몫이 있고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이 받을 몫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몫만 태워서 드렸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화목제를 자원제라고 하기도 하고 낙헌제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 성도와 이웃과의 화평과 친교를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을 표징하며 동시에 사람 사이에 거룩한 교제를 뜻하는 제사로서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되었고 지금도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성도의 기쁜 삶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화목제라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양을 화목제물로 드려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혈을 흘려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믿을 때 하나님과 화목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0:19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사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당신을 생각합니다하는 뜻입니다. 영어의 Thank You는 Think You 즉 당신을 생각합니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감사하는 삶이며,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감사하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피차의 수고와 사랑을 생각할 때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잃어야 얻는 진리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십자가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단순히 잃어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희생을 지불하며서 내 자신을 포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신을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자기신뢰, 자기교만, 안일주의, 편리주의, 자기만족, 세상정욕 이런 것들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화목제의 삶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므로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나 또한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화목제는 성도와 성도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화목제물은 기름과 콩팥 부위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부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의학의 발달로 기름을 먹으면 몸에 해롭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기름을 먹으면 해롭기 때문에 불에 태우라고 일찌기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먹어서 해로운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몫을 인간이 취하면 사람에게는 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의 가슴부분 즉 안심 부분과 뒷다리는 제사장과 그 가족에게 주었습니다. 저들은 이 고기를 받고 요제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요제는 앞으로 내밀었다 뒤를 돌아보는 흔드는 제사입니다. 앞으로 내미는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이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께 받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부분의 고기는 헌제자 즉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에게 되돌려 주어 그것으로 잔치를 배설하게 했습니다. 그 잔치는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소외당한 자, 나그네를 위한 잔치였습니다. 화목제가 아니면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는 고기맛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나눔의 잔치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제물을 나누어 먹듯이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기에 이 축복과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몫과 제사장에게 드릴 몫과 이웃과 성도들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며 화평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나누게 될 때 그 복은 참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35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25:에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해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의인들이 주여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드려진 화목제는 자기 자신에게 기쁨과 행복을 줍니다.
화목제란 기쁨, 행복의 뜻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제사이고 앞으로도 하나님과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일종의 서원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감사와 찬양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오늘의 성도의 화목제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하셨습니다.
화목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 4: 6-7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창 28: 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