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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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765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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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6:12-17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희극 배우 김희갑씨가 불란서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말이 내가 불란서에 가서<멸치 뽁쿰>을 배웠다고 했답니다. 멜시 뽀쿠(Merci beaucoups),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한국에 돌아와서 멸치 뽁금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일어로는 당케 쉰(Danke schon), 화란어로는 당퀴 벧(Dank U wel),일본어로는 아리가도우 고자이마수,중국말로는 셰 셰, 이태리어로는 그라지에(Grazie),스페인어로는 무차스 그라시아스(Mucharistia),헬라어로도 유카리스티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어로 토다라고 하고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덴큐(Thank you)라고 합니다.
이 감사라는 단어는 사랑합니다. 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언어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사랑을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감사를 하게 하셨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3대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지켜야 하는 출애굽기23:14에 보면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그 첫째가 유월절(무교절)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신16:1-18) 이 절기는 이스라엘이 종으로 있던 애굽을 나오게 될 때에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 인방에 바르고 쓴 나물과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먹으며 출애굽을 하게 됨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죄의 종이된 인간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값없이 얻게 된 구원을 감사하는 절기 입니다.
죄에서 자유 함을 얻은 이 사실만을 감사만 해도 너무 너무 감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다가도 감사 할 수 있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감사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만약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면 과연 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오순절(맥추절)로서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것과 가나안에 들어가 첫 번째 수확하는 곡식인 보리수확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과 성령을 보내 주심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참으로 만족케 하게 하시지 않습니까?
너희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배고픈 자도 오라 값없이 돈 없이 이 젓과 꿀을 사라 그리하면 너 심령이 배부름을 얻고 다시는 목마름이나 기갈이 나지 아니하라라
우리에게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마음에 계시는 성령이 얼마나 우리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말씀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 이 감사를 다 하여도 부족하지 않습니까?
셋째는 초막절(수장절, 칠칠절)로서 가을에 거둬들인 곡식들과 포도와 무화과 추수를 감사하며 또 출애굽하여 가나안까지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지내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를 지킬 때에는 광야로 나아가 초막을 짓거나 텐트를 치고 한 주 동안 그 안에서 조상들이 겪은 삶을 실제로 경험해 보면서 보내는 절기입니다.
날마다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지금까지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절기의 특징과 공통점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라는 사실입니다
이 감사의 절기를 근거로 해서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면 범사의 생활에서 언제든지 감사 할 수가 있고 그 어떤 일에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람은 감사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감사를 잃어버리고 특히 하나님께 감사를 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죽게 생겼고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에 자리를 함께한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앞서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평이 삶을 주관하고 있습니까?
이번 감사 절기를 기회로 감사를 하는 자로 바뀌게 되고 불만과 불평이 물러가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반드시 복되게 살게 될 것입니다.
불만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다 죽고 다 망하였고 소망도 꿈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자는 소망이 생겼고 기적 같은 축복이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이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감사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 할 수 있는 조건이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감사하므로 서 형통케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 따라 해 보시시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진짜로 감사합니다.
어디 뭔가 어색합니까? 아니면 아멘이십니까?
감사의 조건은 구언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감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 추수 감사절에는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함으로서 기적 같은 축복을 경험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만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에게 감사 할 수 있고 불평하게 하고 불만하게 하는 어두움의 권세도 물러 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없어서 망하게 되었고 감사가 있으면 살게 됩니다.
근대의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보면 은 1620년 4월 5일 102명의 청교도(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자들)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는 데서부터 그 기원을 찾게 됩니다. 그들은 메이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망망한 대해를 항해하다가 도중에 51명이 죽었고 장장 3,400마일(5440Km)을 항해하여 뉴잉글랜드 프리마우스라는 곳에 정박하게 되었습니다. 1년을 지내는 동안 맹수의 위협과 원주민들의 살상공격, 그리고 질병과 싸우고 굶주림과 싸우다가 남은 사람의 반수가 죽고 49명이 생존한 가운데 땅을 개간하여 옥수수를 심고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고 울창한 숲 속에 들어가 짐승들을 사냥하여 일용할 양식을 삼으며 보내었습니다. 그러다 1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그들은 처음으로 거둬들인 얼마 안 되는 곡식을 모아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이 때가 늦은 가을이었습니다. 이 예배가 바로 첫 번째 추수감사절예배였습니다. 그들의 추수감사절예배는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가운데서 지극히 원시적인 여건과 가난한 사람들의 손길에 의하여 드려진 예배였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인디언의 습격을 받기도하였고 질병으로 쓰러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드린 추수감사절의 예배는 동료를 절반이나 잃어버린 예배로서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동료들의 묘지 곁에서 드린 예배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함께 쓰던 공동변소도 불이 나서 타 버린 상태에서 얼어붙은 땅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예배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원망을 찾기 전에 감사를 하는 사람 들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지금의 미국은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축복을 받은 부강한 나라가 되기에는 이와같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이 기초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789년 11월 26일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대통령에 의하여 미국 국경일로 채택되면서 추수감사절은 더욱 아름다운 믿음의 본이 되는 축제의 날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이 감사절은 미국의 대대적인 축제의 날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감사절을 지키기는 1904년부터이다. 제 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한국교회에서도 감사일을 정해 지키기로 하여 그 후 1914년 각 교파선교부의 회의를 거쳐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날을 기념한 매년 11월 제 3주일 후 3일(수요일)을 감사일로 정하여 예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모아 총회 전도국에 보내 전도사업에 쓰기로 하였고 그후 수요일을 일요일로 변경하여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도 더 오랜 기원은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기원이 바로 본문입니다.
이 감사절기를 오늘 날 우리에게 적용을 시킨다면 하나님은 지난 1년 동안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추수감사는 지나간 1년을 뒤돌아 보면서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을 깊게 기억하며 감사하는 절기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많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하여 요구하며, 간구하는 바는 많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없거나 부족한 것 같습니다.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는 어떻게 하나님께 헌신 할 것인가를 각자 나와서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지 않음을 하나님은 염려하시고 또한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평생에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소리를 높여서 예수 선생님이요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예수님께 간구하였으니, 이 열 문둥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셨니다(눅17:13). 그런데 이들이 병이 나은 후에는 열사람 가운데 하나만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고(눅17:15), 나머지 아홉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들 아홉 사람은 그들이 소리를 높여 간구하였던 일도 그렇게나 추한 병인 문둥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은혜도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로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현실이 이렇지 아니한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요구하며, 간구하는 것들이 결코 적지 아니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하나님께 많은 것들을 주시라고 요구할 뿐만 아니라 소리를 높여서 간절하게 간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에 대하여서는 감사의 부르짖음도 없이, 그저 잠잠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삶이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이며 오히려 주님의 마음에 슬픔을 안겨드리며, 상처를 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찾아온 그 한 사람의 고침 받은 문둥병자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서글픈 심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눅17:17).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은혜가 은혜롭고 축복이 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해를 살아오는 동안 너무 바빠서 지난날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생각해 보실 여유가 없었습니까? 지금 생각하면서 감사해 보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삶의 고비를 넘겨왔는지 어떻게 오늘에까지 이르렀는지 얼마나 복을 주셨는가를 자신이 압니다. 자신이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인정하고 느끼는 만큼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받은 은혜 감사하지 못해서 더 큰 은혜를 못 받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고후9:6,10-11)
저는 이 자리에 그 어떤 성도를 보아도 감사 할 것이 없는 자가 한 사람도 없고 다만 감사를 하지 못해서 은혜와 축복이 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고난도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어느 곤충학자가 여러 해 동안 누에고치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누에고치가 터지면서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누에고치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고치의 한 끝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구멍으로 아주 힘들게 애를 쓰며 나비가 빠져 나오더니 한동안 날개 짓을 해대며 나는 연습을 하더니 하늘을 날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곤충학자가 또 다시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는 것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누에고치야 그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느냐. 내가 좀 편하게 해주마. 그래서 그는 누에고치가 나올 때 구멍을 크게 뚫어주었는데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나비가 쉽게 나오기는 하지만 날지를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다시 연구를 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서야 곤충학자는 더욱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비가 그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기까지 여러 날 동안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고는 나비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비가 누에고치를 빠져 나오면서 몸부림을 칠 때에 몸속에 있는 영양분이 이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양분이 나비의 날개 쪽으로 모아져서 날개에 힘이 생겨 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로우신 분이십니까?
그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생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생하게 하십니다, 그것도 알고 보면 큰 감사 거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의 길을 걷게 하였습니까?
신 8: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일은 감사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합니까?
감사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좋아하는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영어로 “ 감사절 ” 이란 말 “THANK SGIVING DAY” 에는 “ 감사 [THANK]”라는 말과 “ 드린다[GIVING]” 는 말이 복합된 단어로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서 “ 감사 ” 의 표시를 할 때에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말씀에 보면 “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영화롭게 하나니... ” 라고 했습니다.
감사를 하는 방법은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싹이 나고 아름다운 열매가 있게 됩니다.
예물을 드림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를 은혜를 입은 일이 있거나 상대에 대하여 감사할 마음이 있을 때에 무엇인가 주고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감사하는 마음을 예물을 통하여 표하는 것입니다.
감사예물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감사는 삶에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아서 믿음이 자라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여지고 하늘의 소망가운데 살아감으로 놀라운 열매들이 가정과 그 사람의 삶에 임하게 됩니다. 감사는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는 종자요 능력입니다. 감사를 심고 감사를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의 감사를 심고 여러 개의 감사를 거두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가장 어려울 때에 감사가 입에서 생활에서 절로 나와야 합니다.
또한 감사는 성령의 요구를 응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드리는 성도는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성령의 충만함과 능력을 힘입어 살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기만 하면 내 생활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감사의 용어를 많이 사용한 사도바울은 좋은 일들이 있어서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수 없는 고통과 핍박을 받았고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감사만이 나왔고 감사로 살아왔습니다. 사도바울의 가는 곳에는 적도 많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를 해하거나 막지 못하였습니다 감사하는 성도에게 성령의 능력은 충만하고 하나님과 영적 교통이 되니 생활의 형통함이 따라오게 됩니다
감사를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은 성도가 됩니다. 욥은 형편이 아주 어렵게 되였어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고서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기도와 인내심으로 승리하여 그가 전에 소유하였던 것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자기 집에 가장 작은 아이요 막내로써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할 다윗은 들에 나아가서 양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일을 감사함으로 감당하는 다윗을 택하시어 왕으로 삼으시고 축복하여 주시였습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를 나의 가정으로 끌어당기는 능력입니다.
내 생업과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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