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도 소망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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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18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에스겔 37;1-10 당신에게도 소망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는 세 가지의 기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첫째, 가난했던 그가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된 것이고 둘째, 그는 남을 위해 가장 많은 돈을 썼던 사람이요 셋째, 한때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지만 그는 98세까지 장수를 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와 같은 인물이 된 배경에는 그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남겨준 신앙적인 교훈이 10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 주일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4.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5.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7.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8. 아침에는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10. 예배시간에는 항상 앞에 앉으라.
그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어머니가 부탁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갑부가 된 그에게는 십일조만 계산하는 직원이 40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가난하고 능력이 없는 록펠러에게 무엇이 그에게 소망을 심어 주었고 그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까?
그의 어머니에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들이 전부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그 어떤 불행한 자도 희망적인 자로 만들 것이며 능력 있는 자로 세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킬링필드를 아십니까?
킬링필드(Killing Field-죽음의 뜰)란 캄보디아 쿠메르루즈 정권 때의 악명 높은 대학살로 생긴 집단 무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곡괭이와 대나무 창, 그리고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시켜 살해하는 방법 등으로 3년간 800만의 인구 중 약 2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참혹한 대학살이 바로 그것이라는데 킬링필드 현장은 피놈펜시에서 약 15km 떨어진 조용한 시골로 이곳은 만 명 이상의 양민들이 학살을 당한 곳으로 아직도 그 때 당시에 학살당한 자들의 해골을 모아 진열하여 놓고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라서 먼지가 뽀항게 쌓여 있고 건들며 는 푸석 푸석하고 부서질 그 뼈에서 무슨 생명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생명이라고는 찾아보지 못 할 것이요 오히려 당시에 죽어간 자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워 할 뿐 일 것입니다.
대구 성서 개구리 소년을 기억 하실 것입니다.
갓 10살 넘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가 실종이 되고 11년 후에야 그들이 해골이 되어 그들 부모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해골을 앞에 두고 아이들이 다시 살아 날 것이라고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가? 누가 죽였는가? 가 그들의 관심사이지 살아 날 수 있다 생명이 있다는 아무도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마른 뼈에서는 생명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마른 뼈를 두고 여기에 과연 생명이 있으냐? 라는 질문이 던져 졌을 때에 에스겔 선지자는 생명은 하나님 당신께 있습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과연 이 뼈들이 마디마디가 연결되고 살과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있는 사람으로 살아나게 하셨는데 보니 큰 군대의 무리였습니다.
이들이 살아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령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죽은 원인이 무엇입니까?
말씀의 하나님 성령의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육신을 따라 세상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마른 뼈들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갔던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아 있어야 할 이들이 죽은 지 오래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아직도 살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참으로 죽어 썩어 냄새가 나는 자가 있고 벌써 말라버린 뼈가 되어 전혀 소망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소망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참으로 소망 있는 자로 바꿔 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여러분 삶에서 일어 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왜 내가 죽게 생겼는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를 잘 아셔야 합니다.
왜 나의 처지가 이렇게까지 바닥으로 내려 왔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왜 살 소망이 없는 자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것은 소망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과 상관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구나? 를 아시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라는 위대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가 큰 능력을 행하는 자이었지만 한 때는 사망의 자리까지 내려갔고 실제로 자살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심정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4절), 엘리야는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 유하더니(9절) 로뎀 나무 아래에서 절망하던 엘리야는 죽기를 원했고, 호렙산 동굴에서 절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위대한 선지자인 엘리야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절망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였습니까?
그가 바라본 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적인 형편만을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3절) 엘리야가 당면했던 상황은 이세벨에게 쫓기던 형편이었습니다. 수백의 군사를 풀어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전국 방방곡곡에 명령을 합니다.
엘리야는 이런 곤고한 가운데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쳤고 방황을 하다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은 형편을 살펴보고 찾아오는 정신적인 질병입니다. 엘리야가 자기의 불리한 형편을 볼 때에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과 상관을 하지 않은 이와 같은 환경을 만들어 놓고는 죽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 빼 버리고 일을 처리 하려고 하니 죽을 지경이요 또한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자의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삶이기 때문에 살 수가 없고 죽게 생긴 것입니다.
오늘 이 같은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 20:22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성령을 따라 사는 자에게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기에 불가능 한 일이라도 능히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망적인 일도 생명적인 일로 바꿔 놓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생명은 주께 있습니다. 주께서 살릴 수 있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생각과 사고와 능력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 55: 7-9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할렐루야!
사실 우리 인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이나 과학적인 지혜와 사고가 그다지 위대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상식과 지식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 가운데 너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 색깔은 진흙탕 색깔이어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얼마나 아름다운 색깔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푸른 풀을 먹고 사는 소에게서 짜내는 우유는 푸른 색깔이어야 그것이 상식입니다.
죽음도 나이 많은 사람에게 먼저 임하고 젊은이는 나중에 죽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엔 비상식적인 것들이 더 많습니다.
더욱이 성경 안에는 상식과 과학을 초월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던 사건, 40년 동안 굶어 죽지 않고 광야를 횡단했던 사건, 하룻밤 사이에 창 한 번 던진 일이 없었지만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던 앗수르 병사 18만 5천 명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 등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상식과 과학을 초월한 사건들이 연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심을 미등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세상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소망이 없는 여러분들이 우리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적 같은 은혜가 임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저는 놀라운 일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나아와서 은혜를 구 할 때에 하나님이 축복을 하시는 것을 보고서는 깜짝 깜짝 저 자신이 놀라는 적이 한 두 번이 압니다.
특히 철야기도 때에 손을 얻고 위하여 기도 할 때에 그러 했습니다.
요한복음 2:1-11의 말씀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교훈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마른 뼈를 향하여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치에 맞든 안 맞든, 상식적이든 비상식적이든,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그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그대로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5:9를 보면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피조자는 창조자의 절대 권능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능력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수준에다가 하나님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실패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탄이 그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마음을 사로잡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게 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과소 평가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하나님을 거역했거나 불순종한 사람들은 모두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8을 보면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2:48을 보면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말씀을 주셨음에도 그 말씀을 받아 드리지 못하니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들고 이리 안 되게 만들고 사업을 망하게 만들고 가정을 파탄 시키시고 사망의 자리로 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아여야 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탓 하거나 원망 할 수가 없습니다.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있었던 포도주 기적은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을 채우라고 했을 때 물을 채웠습니다. 떠다 주라고 했을 때 그대로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라고 생각이 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 나갈 궁리를 하지 말고 그대로 순종합시다.
설교를 듣다가 저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고 깨달아지고 감동이 되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당장 실천합시다.
받기는 하고 순종이 없지 않습니까?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면 가득가득 채우는 사람이 됩시다.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 하시면 두말 말고 그대로 떠다가 줍시다.
믿으라 하셨으니 믿읍시다.
기도하라 하셨으니 기도합시다.
염려하지 말라 하셨으니 염려하지 맙시다.
헌신하라고 하면 하십시오
다 살리려고 하는 일이요 잘되게 하려고 하는 일이요 할 수 있으니까 시키는 것입니다.
마른 뼈 같이 소망과 생명이 없는 여러분들의 가정 그리고 생업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소망이 생길 것이요 깜짝 놀라운 일이 일어 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옳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합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이 맛보는 절망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게 되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비굴해지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문제에 직면하면 말씀으로 다시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절망할 때에 하나님은 그의 영으로 내 속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절망의 자리가 인생의 끝이 아님을, 하나님을 만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책에는 인생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절망하고 좌절하여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는 세 가지의 기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첫째, 가난했던 그가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된 것이고 둘째, 그는 남을 위해 가장 많은 돈을 썼던 사람이요 셋째, 한때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지만 그는 98세까지 장수를 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와 같은 인물이 된 배경에는 그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남겨준 신앙적인 교훈이 10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 주일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4.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5.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7.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8. 아침에는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10. 예배시간에는 항상 앞에 앉으라.
그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어머니가 부탁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갑부가 된 그에게는 십일조만 계산하는 직원이 40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가난하고 능력이 없는 록펠러에게 무엇이 그에게 소망을 심어 주었고 그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까?
그의 어머니에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들이 전부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그 어떤 불행한 자도 희망적인 자로 만들 것이며 능력 있는 자로 세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킬링필드를 아십니까?
킬링필드(Killing Field-죽음의 뜰)란 캄보디아 쿠메르루즈 정권 때의 악명 높은 대학살로 생긴 집단 무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곡괭이와 대나무 창, 그리고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시켜 살해하는 방법 등으로 3년간 800만의 인구 중 약 2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참혹한 대학살이 바로 그것이라는데 킬링필드 현장은 피놈펜시에서 약 15km 떨어진 조용한 시골로 이곳은 만 명 이상의 양민들이 학살을 당한 곳으로 아직도 그 때 당시에 학살당한 자들의 해골을 모아 진열하여 놓고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라서 먼지가 뽀항게 쌓여 있고 건들며 는 푸석 푸석하고 부서질 그 뼈에서 무슨 생명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생명이라고는 찾아보지 못 할 것이요 오히려 당시에 죽어간 자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워 할 뿐 일 것입니다.
대구 성서 개구리 소년을 기억 하실 것입니다.
갓 10살 넘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가 실종이 되고 11년 후에야 그들이 해골이 되어 그들 부모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해골을 앞에 두고 아이들이 다시 살아 날 것이라고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가? 누가 죽였는가? 가 그들의 관심사이지 살아 날 수 있다 생명이 있다는 아무도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마른 뼈에서는 생명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마른 뼈를 두고 여기에 과연 생명이 있으냐? 라는 질문이 던져 졌을 때에 에스겔 선지자는 생명은 하나님 당신께 있습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과연 이 뼈들이 마디마디가 연결되고 살과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있는 사람으로 살아나게 하셨는데 보니 큰 군대의 무리였습니다.
이들이 살아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령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죽은 원인이 무엇입니까?
말씀의 하나님 성령의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육신을 따라 세상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마른 뼈들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갔던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아 있어야 할 이들이 죽은 지 오래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아직도 살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참으로 죽어 썩어 냄새가 나는 자가 있고 벌써 말라버린 뼈가 되어 전혀 소망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소망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참으로 소망 있는 자로 바꿔 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여러분 삶에서 일어 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왜 내가 죽게 생겼는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를 잘 아셔야 합니다.
왜 나의 처지가 이렇게까지 바닥으로 내려 왔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왜 살 소망이 없는 자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것은 소망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과 상관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구나? 를 아시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라는 위대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가 큰 능력을 행하는 자이었지만 한 때는 사망의 자리까지 내려갔고 실제로 자살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심정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4절), 엘리야는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 유하더니(9절) 로뎀 나무 아래에서 절망하던 엘리야는 죽기를 원했고, 호렙산 동굴에서 절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위대한 선지자인 엘리야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절망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였습니까?
그가 바라본 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적인 형편만을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3절) 엘리야가 당면했던 상황은 이세벨에게 쫓기던 형편이었습니다. 수백의 군사를 풀어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전국 방방곡곡에 명령을 합니다.
엘리야는 이런 곤고한 가운데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쳤고 방황을 하다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은 형편을 살펴보고 찾아오는 정신적인 질병입니다. 엘리야가 자기의 불리한 형편을 볼 때에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과 상관을 하지 않은 이와 같은 환경을 만들어 놓고는 죽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 빼 버리고 일을 처리 하려고 하니 죽을 지경이요 또한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자의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삶이기 때문에 살 수가 없고 죽게 생긴 것입니다.
오늘 이 같은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 20:22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성령을 따라 사는 자에게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기에 불가능 한 일이라도 능히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망적인 일도 생명적인 일로 바꿔 놓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생명은 주께 있습니다. 주께서 살릴 수 있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생각과 사고와 능력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 55: 7-9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할렐루야!
사실 우리 인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이나 과학적인 지혜와 사고가 그다지 위대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상식과 지식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 가운데 너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 색깔은 진흙탕 색깔이어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얼마나 아름다운 색깔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푸른 풀을 먹고 사는 소에게서 짜내는 우유는 푸른 색깔이어야 그것이 상식입니다.
죽음도 나이 많은 사람에게 먼저 임하고 젊은이는 나중에 죽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엔 비상식적인 것들이 더 많습니다.
더욱이 성경 안에는 상식과 과학을 초월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던 사건, 40년 동안 굶어 죽지 않고 광야를 횡단했던 사건, 하룻밤 사이에 창 한 번 던진 일이 없었지만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던 앗수르 병사 18만 5천 명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 등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상식과 과학을 초월한 사건들이 연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심을 미등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세상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소망이 없는 여러분들이 우리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적 같은 은혜가 임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저는 놀라운 일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나아와서 은혜를 구 할 때에 하나님이 축복을 하시는 것을 보고서는 깜짝 깜짝 저 자신이 놀라는 적이 한 두 번이 압니다.
특히 철야기도 때에 손을 얻고 위하여 기도 할 때에 그러 했습니다.
요한복음 2:1-11의 말씀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교훈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마른 뼈를 향하여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치에 맞든 안 맞든, 상식적이든 비상식적이든,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그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그대로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5:9를 보면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피조자는 창조자의 절대 권능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능력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수준에다가 하나님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실패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탄이 그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마음을 사로잡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게 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과소 평가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하나님을 거역했거나 불순종한 사람들은 모두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8을 보면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2:48을 보면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말씀을 주셨음에도 그 말씀을 받아 드리지 못하니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들고 이리 안 되게 만들고 사업을 망하게 만들고 가정을 파탄 시키시고 사망의 자리로 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아여야 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탓 하거나 원망 할 수가 없습니다.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있었던 포도주 기적은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을 채우라고 했을 때 물을 채웠습니다. 떠다 주라고 했을 때 그대로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라고 생각이 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 나갈 궁리를 하지 말고 그대로 순종합시다.
설교를 듣다가 저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고 깨달아지고 감동이 되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당장 실천합시다.
받기는 하고 순종이 없지 않습니까?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면 가득가득 채우는 사람이 됩시다.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 하시면 두말 말고 그대로 떠다가 줍시다.
믿으라 하셨으니 믿읍시다.
기도하라 하셨으니 기도합시다.
염려하지 말라 하셨으니 염려하지 맙시다.
헌신하라고 하면 하십시오
다 살리려고 하는 일이요 잘되게 하려고 하는 일이요 할 수 있으니까 시키는 것입니다.
마른 뼈 같이 소망과 생명이 없는 여러분들의 가정 그리고 생업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소망이 생길 것이요 깜짝 놀라운 일이 일어 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옳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합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이 맛보는 절망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게 되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비굴해지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문제에 직면하면 말씀으로 다시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절망할 때에 하나님은 그의 영으로 내 속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절망의 자리가 인생의 끝이 아님을, 하나님을 만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책에는 인생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절망하고 좌절하여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