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감사함으로 받아드릴 때 구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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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06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누가복음 2: 8-14 복음은 감사함으로 받아드릴 때 구원이 됩니다.
온 세상에 성탄의 소식이 널리 널리 펴지고 있습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부부는 지난주 역대 대통령중 가장 많은 100만 통의 성탄절카드를 각료와 의원, 주지사, 공화당전국위원회 소속 당원, 공화당 주지부 당원, 지지자, 자원봉사자, 친지 등에게 보냈다고 뉴욕 타임스 인터넷 판이 9일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장당 37센트짜리 성조기 스탬프가 찍혀 있어 발송료만 최소한 37만 달러가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올해 대통령이 보내는 성탄절 카드에 들어간 성경구절은 시편 100장 5절로 ‘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라는 구절을 적었다고 합니다.
죽의 장막이라고 일컫는 공산주의 중국에서도 이 성탄의 소식은 전하여졌습니다. 최근 수년간 중국에서 기독교 신도가 음양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젊은층을 중심으로 성탄절이 가장 선호하는 휴일로 변모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중국 주요 도시의 쇼핑센터와 호텔, 극장 등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클로스 그림이 내걸렸다고 하고 중국교회에서는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도 온통 캐럴 송이 울리고 집집마다 건물마다 성탄 장식을 하고 성탄의 선물을 주고받고 성탄 카드를 주고받은 것을 볼 때에 분명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진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본 사람은 없다는 게 문제이요 아니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인간적으로 즐기는데 만 관심이 있을 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을 구원이 그들의 삶에서 진작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오는 구원의 즐거움은 전혀 함께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구원의 축복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땅의 사람들 누구에게나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오셨지만은 그 구원은 아무나 받지를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 중에는 구원을 받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밤에 자기 양 떼를 치는 목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구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나를 위하여 오신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어찌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이 목자들에게만 들렸겠습니까? 아닙니다.
당시에 헤롯 왕도 들었으며 종교의 지도자들도 익히 아는 바입니다.
성경에는 수백 번씩이나 이 소식에 대하여 일러 주셨으며 심지어 그가 누구의 가문에, 태어나는 동네까지 일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셔t지만 자기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보기조차 싫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영접하기를 마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목자들에게 천사들을 통해서 찾아 오셨듯이 주님은 오늘 우리 가운데 말씀과 성령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살인강도에게도 찾아오시고 간음한 여인에게도 찾아 오셨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 가운데 각자의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에게도 예수님은 큰 기쁨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예수님께 관심이 별로 없다는데 있습니다.
다섯 살 난 아이가 할아버지가 주신 백 달러짜리 지폐를 거절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백 달러를 거절한 이유는 자기의 저금통이 가득 차 있어 지폐를 넣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보니 손자의 저금통에는 1센트 동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실상 백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은 1센트 만 개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인데도 페니로 채운 저금통이 백 달러를 거절케 한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이 아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가치 없는 세상 것들로 마음이 가득 차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실 자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습니다. 무슨 생각입니까? 무슨 관심입니까?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드려야 합니다.
홀만 헌트(William Holman Hunt)라는 사람이 그린 세상의 빛이라는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의 그림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안으로부터 굳게, 조그만 빈틈도 없이 단단히 잠긴 어떤 집 문 앞에 예수님 바싹 다가서서 계십니다. 마치 그 모습은 안의 동정이라도 살피기 위해서 온 신경을 거기에 기울이고 계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십니다. 조용히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문에 문고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이 그림이 미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미완성이 아닙니다. 홀만 헌트는 일부러 그림에 문고리를 그리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여기 이 그림의 핵심이 있습니다. 문은 밖에서 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밖에는 문고리가 없으니 밖에서는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전적으로 문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내가 내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해 드려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십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고 있으니 열기만 하면 들어오십니다. 그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오셔서 함께 교제하며 새 힘과 새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내 힘으로 나를 바꾸지 못합니다. 내 결심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속에 오실 때 진정한 변화가 있어납니다. 새로운 가치관에 세워지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의 삶이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모든 어려움 앞에 능력으로 함께 합니다. 모든 일에 승리하게 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된 사람, 생명의 사람, 능력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겸손히 주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새로운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깨끗한 자가 만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목자들은 이 복음의 소식이 믿어지고 받아 질 수 있음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은혜를 받은 것을 가만히 보면 그래도 무엇인가 순전하고 순수함을 가진 자들이 은혜를 받지 복잡하고 따지고 하는 자들이 은혜를 받는 것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주님은 한 성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향하였습니다. 그도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물론 주님도 그 사람에게 들어가셔서 구원하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데 그 사람의 마음에는 주님이 들어 갈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것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공간을 좀 마련하기 위하여 금식을 하게하였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상한 취미가 있었는데 쓰레기통을 찾아다니며 고물을 수집하는 취미였습니다. 3년 뒤에 그의 집은 쓰레기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소방소에서 소방법에 위반된다고 하여, 교회 친구들이 그 쓰레기들을 치워주었는데, 쓰레기를 얼마나 많이 주어다 놓았는지, 무려 쓰레기가 세 트럭이나 나왔습니다. 친구들은 그의 쓰레기를 다 치워주고 집안을 말끔히 청소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젊은이는 다음날 다시 고물을 수집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자들은 모두가 다 그의 삶과 행동을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이 젊은이와 같이 어리석고 헛된 것을 구하는 자들은 역사상 계속 있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쓰레기통을 뒤지며, 곧 세상적인 것에서 그 속에서 행복과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지금 어둠 가운데서 고난당한다는 것, 어둠 가운데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어떻게 빛을 찾겠습니까?
자기들이 지금 어둠가운데서 고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활이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행복할 것이라고 찾은 것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생활이 좋으면, 왜 그곳을 버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겠습니까?
그러므로 빛 되신 하나님을 찾으려면, 지금 자기들이 멸망의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멸망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지금 자기가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주려 죽는구나!(눅15:17)하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빛 되신 아버지를 찾아 집으로 돌아왔지, 지금 있는 곳이 좋은 곳으로 알았다면 왜 그곳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려고 했겠습니까?
다시 아버지 얼굴을 뵙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데, 그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려고 했겠습니까?
얼마나 지금 있는 곳이 고통스러우며, 차마 자식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머슴 중 하나와 같이 여겨달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 아버지께로 돌아 왔겠습니까?
잠을 자고 있으면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을 모릅니다.
잠을 자고 있으면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잠을 자고 있으면 어둠을 좋아하고,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을 잘 때 불을 끕니다. 잘 때는 빛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찾아가려면 잠을 깨야 합니다.
잠들어 있으면 절대로 빛을 찾지 않습니다. 반드시 깨어나야 빛을 찾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때는 불을 끄고, 잠을 깨면 제일 먼저 불을 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잠을 깨는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잠을 깨야 자기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빛을 찾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겸손한 자가 만날 수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려면 겸손해야 하고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고대광실이 있는 왕도가 아니라 자그마한 마을에서, 휘황찬란한 온갖 등불이 켜진 곳이 아니라 간신히 우리를 비출 수 있는 등불이 켜진 곳에서, 푹신푹신한 침대 위에서가 아니라 꺼칠한 짚을 깔은 구유 위에서, 온갖 향기가 진동하는 곳이 아니라 역겨운 냄새가 나는 곳에서, 따뜻하고 푸근한 곳이 아니라 약간은 썰렁함이 드는 곳에서, 감미로운 풍악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니라 씨끌씨끌한 가축 소리가 들리는 곳에 예수님은 계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아직도 만나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나아와 배워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함을 잘 받은 자입니다.
엉뚱한 것에 인도함을 받는 자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50년 동안 많은 관광객들이 지금까지 지어진 주택 중에 가장 이상야릇한 사저(私邸)가 있는데 그 집을 방문한 자들은 다 그 집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방이 무려 160개나 있었고,10,000개의 창이 있었고, 40개의 침실이 있었고, 13 개의 욕실이 있었고, 47개의 부엌이 있었고, 40개의 계단이 있었고, 9개의 주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마 어마하게 큰집에 오직 한 사람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윈체스터 무기(Winchester Arms) 회사의 모든 재산의 상속녀인 사라 파르디 윈체스터(Sarah Pardee Winchester)였습니다. 그 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1922년에 85살로 죽을 때까지 38년 동안 하루 24 시간 일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2,000만 달러(우리 나라 돈으로 200억원)의 유산 중에 550만 달러(55억원)를 건물을 짓고, 그 건물에 가구를 설비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왜 이 별난 노파가 자기 혼자 밖에 살지 않는 집을 그렇게 크게 짓고, 그리고 그렇게 많은 가구를 설비했을까요? 보스톤에 살고 있는 한 무당이 윈체스터 부인의 남편이 죽은 후에 그녀가 아플 때 찾아와서 그녀에게 그녀의 남편의 회사가 만든 총에 죽은 수천 명의 사람들의 영혼이 그녀를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떠나가지 않고, 늘 그녀를 해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그녀의 편이 되는 친구 영혼들을 위하여 흉가를 지어 놓으면, 그 흉가에 그녀의 편이 되는 영혼들이 거하면서, 자기 남편이 만든 총에 죽어서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오는 영혼들을 물리쳐 줄 것이고, 그러면 그녀는 해를 입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더 많은 자기편의 영혼들을 자기 집에 거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큰 흉가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개의 탑들 중에 한 탑에는 종이 달려 있었으며, 그녀의 하인들 중에 한 사람이 매일 밤 12시에 그녀의 집에 오는 그녀의 친구 영들을 환영하기 위하여 종을 울렸으며, 새벽 2시에는 아군들의 영혼들이 자기들의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을 환송하기 위하여 또 종을 울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거부한 자들, 그래서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두려움에 싸이게 되며, 그들은 쉽게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희생이 됩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됩니다.
빛 되신 하나님을 떠나면 이 윈체스터 부인과 같이 수많은 돈을 써가며 평안과 행복을 구하나 얻지 못하게 됩니다. 빛 되신 예수님께로 나아오셔서, 인생의 참 빛을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서 보라는 것입니다. 진리로 인도 할 때에 가르침을 잘 받는 것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철야기도 시간에 금식을 시키고 2가지 순종 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일 성수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11조 생활 지금 영업을 하고 경제적으로 축복을 받아야 살 수 있으니 이 두 가지가 그 사람에게는 가서 보는 일이요 예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우리는 진리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빛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남서 태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에서 하루는 미국 전투기들이 적전함을 도중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출격하여 아무런 피해도 없이 임무를 완수한 때는 해질 무렵이었는데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을 했고, 안개로 더욱더 캄캄해 졌으며, 비가 내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본부 기지로부터 무려 200 마일이나 떨어진 바다 위에 떠 있었는데 그들 비행기에게는 어떤 신호전파나 자동유도장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나침판은 정확하지 않아 그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기지에 있는 부대에서는 그들에게 무선전파를 통하여 계속해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의 돌아 왔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시간에 하늘을 향하여 서치라이트를 비춰주었습니다. 그들은 조종사들이 그 빛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 조종사들의 운명은 이 빛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소리와 비행하는 비행기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비행기로부터 무전이 날라 왔습니다. 딕이 짐에게 너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 (Do you know where we are ?) 그 후 숨 가쁜 무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피터 고도를 높여. 지금 너희들 너무 낮게 떠 있다 빛이 보이지 않느냐 ? 기지는 거기에 있다. 너 넓게 선회하면서 빛을 찾아보라 연료는 얼마나 남았는가?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초침이 가면서 더욱더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침묵을 깨고 분명한 무전 연락이 왔다. 나는 빛을 봤다.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빛을 보았다(I see the light ! Were saved ! I see the light) 그러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쉬며, 환호했습니다. 그들은 빛을 보고 안전하게 기지로 돌아 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죽아 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빛이 필요하다. 그 빛을 찾아야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 빛은 예수님 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빛을 찾아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우리의 죄가 무겁고,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크게 배반을 했어도,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를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요6:37)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온 세상에 성탄의 소식이 널리 널리 펴지고 있습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부부는 지난주 역대 대통령중 가장 많은 100만 통의 성탄절카드를 각료와 의원, 주지사, 공화당전국위원회 소속 당원, 공화당 주지부 당원, 지지자, 자원봉사자, 친지 등에게 보냈다고 뉴욕 타임스 인터넷 판이 9일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장당 37센트짜리 성조기 스탬프가 찍혀 있어 발송료만 최소한 37만 달러가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올해 대통령이 보내는 성탄절 카드에 들어간 성경구절은 시편 100장 5절로 ‘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라는 구절을 적었다고 합니다.
죽의 장막이라고 일컫는 공산주의 중국에서도 이 성탄의 소식은 전하여졌습니다. 최근 수년간 중국에서 기독교 신도가 음양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젊은층을 중심으로 성탄절이 가장 선호하는 휴일로 변모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중국 주요 도시의 쇼핑센터와 호텔, 극장 등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클로스 그림이 내걸렸다고 하고 중국교회에서는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도 온통 캐럴 송이 울리고 집집마다 건물마다 성탄 장식을 하고 성탄의 선물을 주고받고 성탄 카드를 주고받은 것을 볼 때에 분명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진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본 사람은 없다는 게 문제이요 아니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인간적으로 즐기는데 만 관심이 있을 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을 구원이 그들의 삶에서 진작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오는 구원의 즐거움은 전혀 함께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구원의 축복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땅의 사람들 누구에게나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오셨지만은 그 구원은 아무나 받지를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 중에는 구원을 받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밤에 자기 양 떼를 치는 목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구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나를 위하여 오신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어찌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이 목자들에게만 들렸겠습니까? 아닙니다.
당시에 헤롯 왕도 들었으며 종교의 지도자들도 익히 아는 바입니다.
성경에는 수백 번씩이나 이 소식에 대하여 일러 주셨으며 심지어 그가 누구의 가문에, 태어나는 동네까지 일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셔t지만 자기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보기조차 싫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영접하기를 마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목자들에게 천사들을 통해서 찾아 오셨듯이 주님은 오늘 우리 가운데 말씀과 성령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살인강도에게도 찾아오시고 간음한 여인에게도 찾아 오셨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 가운데 각자의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에게도 예수님은 큰 기쁨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예수님께 관심이 별로 없다는데 있습니다.
다섯 살 난 아이가 할아버지가 주신 백 달러짜리 지폐를 거절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백 달러를 거절한 이유는 자기의 저금통이 가득 차 있어 지폐를 넣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보니 손자의 저금통에는 1센트 동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실상 백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은 1센트 만 개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인데도 페니로 채운 저금통이 백 달러를 거절케 한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이 아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가치 없는 세상 것들로 마음이 가득 차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실 자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습니다. 무슨 생각입니까? 무슨 관심입니까?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드려야 합니다.
홀만 헌트(William Holman Hunt)라는 사람이 그린 세상의 빛이라는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의 그림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안으로부터 굳게, 조그만 빈틈도 없이 단단히 잠긴 어떤 집 문 앞에 예수님 바싹 다가서서 계십니다. 마치 그 모습은 안의 동정이라도 살피기 위해서 온 신경을 거기에 기울이고 계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십니다. 조용히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문에 문고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이 그림이 미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미완성이 아닙니다. 홀만 헌트는 일부러 그림에 문고리를 그리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여기 이 그림의 핵심이 있습니다. 문은 밖에서 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밖에는 문고리가 없으니 밖에서는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전적으로 문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내가 내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해 드려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십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고 있으니 열기만 하면 들어오십니다. 그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오셔서 함께 교제하며 새 힘과 새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내 힘으로 나를 바꾸지 못합니다. 내 결심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속에 오실 때 진정한 변화가 있어납니다. 새로운 가치관에 세워지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의 삶이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모든 어려움 앞에 능력으로 함께 합니다. 모든 일에 승리하게 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된 사람, 생명의 사람, 능력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겸손히 주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새로운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깨끗한 자가 만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목자들은 이 복음의 소식이 믿어지고 받아 질 수 있음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은혜를 받은 것을 가만히 보면 그래도 무엇인가 순전하고 순수함을 가진 자들이 은혜를 받지 복잡하고 따지고 하는 자들이 은혜를 받는 것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주님은 한 성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향하였습니다. 그도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물론 주님도 그 사람에게 들어가셔서 구원하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데 그 사람의 마음에는 주님이 들어 갈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것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공간을 좀 마련하기 위하여 금식을 하게하였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상한 취미가 있었는데 쓰레기통을 찾아다니며 고물을 수집하는 취미였습니다. 3년 뒤에 그의 집은 쓰레기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소방소에서 소방법에 위반된다고 하여, 교회 친구들이 그 쓰레기들을 치워주었는데, 쓰레기를 얼마나 많이 주어다 놓았는지, 무려 쓰레기가 세 트럭이나 나왔습니다. 친구들은 그의 쓰레기를 다 치워주고 집안을 말끔히 청소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젊은이는 다음날 다시 고물을 수집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자들은 모두가 다 그의 삶과 행동을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이 젊은이와 같이 어리석고 헛된 것을 구하는 자들은 역사상 계속 있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쓰레기통을 뒤지며, 곧 세상적인 것에서 그 속에서 행복과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지금 어둠 가운데서 고난당한다는 것, 어둠 가운데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어떻게 빛을 찾겠습니까?
자기들이 지금 어둠가운데서 고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활이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행복할 것이라고 찾은 것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생활이 좋으면, 왜 그곳을 버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겠습니까?
그러므로 빛 되신 하나님을 찾으려면, 지금 자기들이 멸망의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멸망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지금 자기가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주려 죽는구나!(눅15:17)하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빛 되신 아버지를 찾아 집으로 돌아왔지, 지금 있는 곳이 좋은 곳으로 알았다면 왜 그곳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려고 했겠습니까?
다시 아버지 얼굴을 뵙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데, 그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려고 했겠습니까?
얼마나 지금 있는 곳이 고통스러우며, 차마 자식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머슴 중 하나와 같이 여겨달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 아버지께로 돌아 왔겠습니까?
잠을 자고 있으면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을 모릅니다.
잠을 자고 있으면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잠을 자고 있으면 어둠을 좋아하고,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을 잘 때 불을 끕니다. 잘 때는 빛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찾아가려면 잠을 깨야 합니다.
잠들어 있으면 절대로 빛을 찾지 않습니다. 반드시 깨어나야 빛을 찾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때는 불을 끄고, 잠을 깨면 제일 먼저 불을 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잠을 깨는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잠을 깨야 자기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빛을 찾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겸손한 자가 만날 수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려면 겸손해야 하고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고대광실이 있는 왕도가 아니라 자그마한 마을에서, 휘황찬란한 온갖 등불이 켜진 곳이 아니라 간신히 우리를 비출 수 있는 등불이 켜진 곳에서, 푹신푹신한 침대 위에서가 아니라 꺼칠한 짚을 깔은 구유 위에서, 온갖 향기가 진동하는 곳이 아니라 역겨운 냄새가 나는 곳에서, 따뜻하고 푸근한 곳이 아니라 약간은 썰렁함이 드는 곳에서, 감미로운 풍악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니라 씨끌씨끌한 가축 소리가 들리는 곳에 예수님은 계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아직도 만나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나아와 배워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함을 잘 받은 자입니다.
엉뚱한 것에 인도함을 받는 자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50년 동안 많은 관광객들이 지금까지 지어진 주택 중에 가장 이상야릇한 사저(私邸)가 있는데 그 집을 방문한 자들은 다 그 집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방이 무려 160개나 있었고,10,000개의 창이 있었고, 40개의 침실이 있었고, 13 개의 욕실이 있었고, 47개의 부엌이 있었고, 40개의 계단이 있었고, 9개의 주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마 어마하게 큰집에 오직 한 사람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윈체스터 무기(Winchester Arms) 회사의 모든 재산의 상속녀인 사라 파르디 윈체스터(Sarah Pardee Winchester)였습니다. 그 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1922년에 85살로 죽을 때까지 38년 동안 하루 24 시간 일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2,000만 달러(우리 나라 돈으로 200억원)의 유산 중에 550만 달러(55억원)를 건물을 짓고, 그 건물에 가구를 설비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왜 이 별난 노파가 자기 혼자 밖에 살지 않는 집을 그렇게 크게 짓고, 그리고 그렇게 많은 가구를 설비했을까요? 보스톤에 살고 있는 한 무당이 윈체스터 부인의 남편이 죽은 후에 그녀가 아플 때 찾아와서 그녀에게 그녀의 남편의 회사가 만든 총에 죽은 수천 명의 사람들의 영혼이 그녀를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떠나가지 않고, 늘 그녀를 해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그녀의 편이 되는 친구 영혼들을 위하여 흉가를 지어 놓으면, 그 흉가에 그녀의 편이 되는 영혼들이 거하면서, 자기 남편이 만든 총에 죽어서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오는 영혼들을 물리쳐 줄 것이고, 그러면 그녀는 해를 입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더 많은 자기편의 영혼들을 자기 집에 거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큰 흉가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개의 탑들 중에 한 탑에는 종이 달려 있었으며, 그녀의 하인들 중에 한 사람이 매일 밤 12시에 그녀의 집에 오는 그녀의 친구 영들을 환영하기 위하여 종을 울렸으며, 새벽 2시에는 아군들의 영혼들이 자기들의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을 환송하기 위하여 또 종을 울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거부한 자들, 그래서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두려움에 싸이게 되며, 그들은 쉽게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희생이 됩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됩니다.
빛 되신 하나님을 떠나면 이 윈체스터 부인과 같이 수많은 돈을 써가며 평안과 행복을 구하나 얻지 못하게 됩니다. 빛 되신 예수님께로 나아오셔서, 인생의 참 빛을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서 보라는 것입니다. 진리로 인도 할 때에 가르침을 잘 받는 것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철야기도 시간에 금식을 시키고 2가지 순종 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일 성수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11조 생활 지금 영업을 하고 경제적으로 축복을 받아야 살 수 있으니 이 두 가지가 그 사람에게는 가서 보는 일이요 예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우리는 진리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빛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남서 태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에서 하루는 미국 전투기들이 적전함을 도중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출격하여 아무런 피해도 없이 임무를 완수한 때는 해질 무렵이었는데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을 했고, 안개로 더욱더 캄캄해 졌으며, 비가 내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본부 기지로부터 무려 200 마일이나 떨어진 바다 위에 떠 있었는데 그들 비행기에게는 어떤 신호전파나 자동유도장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나침판은 정확하지 않아 그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기지에 있는 부대에서는 그들에게 무선전파를 통하여 계속해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의 돌아 왔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시간에 하늘을 향하여 서치라이트를 비춰주었습니다. 그들은 조종사들이 그 빛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 조종사들의 운명은 이 빛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소리와 비행하는 비행기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비행기로부터 무전이 날라 왔습니다. 딕이 짐에게 너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 (Do you know where we are ?) 그 후 숨 가쁜 무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피터 고도를 높여. 지금 너희들 너무 낮게 떠 있다 빛이 보이지 않느냐 ? 기지는 거기에 있다. 너 넓게 선회하면서 빛을 찾아보라 연료는 얼마나 남았는가?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초침이 가면서 더욱더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침묵을 깨고 분명한 무전 연락이 왔다. 나는 빛을 봤다.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빛을 보았다(I see the light ! Were saved ! I see the light) 그러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쉬며, 환호했습니다. 그들은 빛을 보고 안전하게 기지로 돌아 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죽아 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빛이 필요하다. 그 빛을 찾아야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 빛은 예수님 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빛을 찾아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우리의 죄가 무겁고,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크게 배반을 했어도,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를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요6:37)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