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항상 함께 계시는 구주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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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773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태복음 1:18-25 나와 항상 함께 계시는 구주 예수님
1912년 4월 14일 저녁 10시, 그 당시 세계 최대, 최고, 호화 여객선인 5만 톤의 타이타닉 호가 대서양 한 가운데서 큰 빙산을 들이받고 바다 4천m 속에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2,200명의 승객과 승무원 중 1,600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많은 보물이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구명보트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승객들을 구할 수는 없었고, 승객들이 신사도를 발휘하여 구명보트에 여자와 아이들을 태우고, 나머지는 다 익사했습니다.
그런데 스티라우스라는 부인은 구명보트를 타도록 되어있었지만, 구명보트를 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보트에 탈 수 있었으나, 남편은 구명보트를 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스트라우스 부인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오랫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늙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남편을 떠나 나만 살기보다는 남편이 가는 곳에 함께 가렵니다. 그리고는 남편의 손을 꼭 잡고, 함께 죽음의 길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부부 사이에도 혼자 잘 살겠다고 멀쩡한 사람과도 이혼을 하는 판국에 이들 노부부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릅답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은 자기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 뿐인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롬 5: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오늘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 성탄절은 나를 위하여 죽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입니다.
이 얼마나 거룩하고 숭고한 날입니까?
여러분들은 이 성탄절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아마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흥청망청하며 보낼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야합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을 죽게 왜 하셨습니까?
죄인은 죄인을 구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도 해결 할 수 없는 사람이 어찌 남을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훌륭해도 죄인이요, 석가모니가 아무리 훌륭해도 죄인이요, 공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도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난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죄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신 (벧전 2:22-23)분이십니다.
만일 남자로 인하여 예수가 잉태되었다면 그분도 역시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여기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하는 말은 인간의 몸은 입었지만 하나님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에 성육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세상에서도 죄를 지으면 그 대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질 수 없는 무거운 죄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은 죄의 영향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무거운 세상의 짐들을 지고 있습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으면 여러 가지 무거운 짐들로 인해서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고 괴로워 하다가 결국은 사망에 이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너무 많더라고요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 왔습니다.
그 누구도 죄의 문제는 해결 할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해결 할 수가 있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죄짐 세상의 짐을 그 누가 대신 져 줄 수 있습니까?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강박관념과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인해 평안 없는 우리 인생에게 그 누가 평안의 빛을 줄 수 있을까요?
똑같이 죄짐을 지고 자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가 도울 수가 있습니까?
[유교] - ‘너의 바른 윤리와 도덕으로 헤엄쳐 나오라!’ 윤리와 도덕을 최고의 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상을 받은 우리 민족이 최고의 선을 지향하는 민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불교] - ‘너의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얼마나 무책임 합니까? 결국은 진리도 발견하지 못하고 허무하기만 하지 않습니까?
[도교] - ‘스스로 수영을 터득해서 나오라!’
[기독교]- ‘예수께서 직접 나만 의지하고 붙들어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영생의 문제까지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를 열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방법을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도덕입니까? 철학입니까?
예수님만이 나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인생의 문제를 풀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자는 윤리 도덕을 행한 자라고 받은 것도 아니요 도덕적이지 못한 자는 받지 못한다고 하지도 아니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구원 받을 죄인임을 알고 나오는 자는 구원함을 받게 됩니다.
마태가 육신에 따른 그리스도의 선조들로 소개한 족보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례에 따르면 족보를 기록하는 사람은 여인의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남자만이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랜 관습의 하나이기 때문에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손만 간추린 이 족보 안에 있는 다섯 명의 여인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마리아만이 깨끗하다 할 수가 있지만 나머지 4명은 참으로 모든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에 딱 좋은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정결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쌍둥이를 낳았습니다(창 38:24-30).
라합은 여리고성의 몸을 파는 기생이었습니다.
룻은 그 조상이 아버지와 딸 사이에 생긴 모압족속이요 또한 남편을 잃은 과부입니다.
밧세바는 다윗 왕과 통간하고 전쟁터에 있는 그의 남편을 죽게 한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왜 이 간단한 족보는 왜 이런 깨끗지 못한 여인들을 모두 언급 했을까요? 그들이 우리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 된다면 우리들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근원을 추론해 보십시요. 우리들이 그 여인들보다 낳은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가장 나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혈통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혈통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사람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공로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주님은 참으로 죄인들의 구주이십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찬양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훌륭한 여인들도 많습니다. 만약 성경의 기자가 인간적인 역사가였다면, 그리스도의 명예를 떨어뜨릴 불순한 여인들이 아닌 정숙한 여인들을 포함시켰을 것입니다. 만약에 신성한 족보 속에 불순한 사람들의 이름이 자취를 감추었다면, 우리는 모두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는 신성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깨끗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비난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사실은 좋은 사람들 보다 나쁜 사람들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입니다.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교회로 나 올 필요가 없고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 여기는 자만이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구원의 손길은 한 순간 한번만 한 사건만이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면 웨슬리 형제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기념비에는 세 마디가 새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 둘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일꾼은 땅에 묻으시지만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 셋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외국 잡지사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를 독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많은 대답은 “혼자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독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독이 무엇입니까? 고독은 혼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창세기 2:18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했습니다. 가정을 꾸리게 하고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게 하지 않았습니까?
혼자 있는 아이를 고아라. 부르고 혼자 사는 여자를 과부라 부르고 혼자 사는 사람을 고독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혼자 살아도 고독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는 데도 고독한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살아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지위가 낮아도 평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위가 높아도 불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린 여기서 고독하다는 것과 불행하다는 것과 불안하다는 것들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조건들 때문에 성립되거나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365일을 함께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유익을 주고 편안한 사람일 때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고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건을 ‘임마누엘’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승천 직전에 우리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28:20).
어떻게 세상 끝날 까지 임마누엘 하시는가?
(1) 성령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령(보혜사)은 아버지의 영이요(요15:26), 아들 예수의 영입니다(요15:7). 예수의 약속은 성실하고 진실하였습니다.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은 오순절에 그의 제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행1:5, 8, 2:1-4). 그리고 지금 우리 가운데 여러분의 마음속에 계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말씀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입을 벌리게 하였습니다.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게 하였습니다.」(행2:11). 하나님의 큰일은 예수 십자가 대속의 사건과 예수 부활, 승천의 사건입니다. 성령은 베드로의 입을 열어 구원의 설교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3000명이 일시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2: ). 스데반 집사가 성령 충만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순교에 이르고 만 설교가 되었습니다(행6: - 7: ). 베드로는 이방 로마 장교 고넬료 가정에 선교사가 되어 그와 그 집과 친구들을 구원하였습니다(행10: ). 이 말씀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3) 기사와 표적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났습니다(행4:31).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가 성전문 앞에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걷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도하다가 감옥에 같혀있는 베드로가 천사의 인도를 받고, 감옥에서 풀려나와 자유로운 몸이 되어 전도를 계속하였습니다(행12:3-) 실로 놀라운 표적이요, 기적들입니다.
(4) 선교 운동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1-).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26-). 박해자 사울이 주의 역사 앞에 회개하고, 갑자기 예수 선교사로 변했습니다(행9: ). 그는 이방인을 위한 예수의 사도가 되어 마침내 땅 끝까지 복음을 확산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여러 번 주께서 자기와 함께 해 주신다고 하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확인받고, 또 일어나고, 뛰고, 외쳤습니다.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이 배척하였지만은 말살 정책을 폅지만 땅 끝까지 전파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임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운동’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성령과 말씀(설교), 표적과 기사와, 세계 선교 운동을 통하여 ‘임마누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사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누구나 값없이 돈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를 믿음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심은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의 재물이 되려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1912년 4월 14일 저녁 10시, 그 당시 세계 최대, 최고, 호화 여객선인 5만 톤의 타이타닉 호가 대서양 한 가운데서 큰 빙산을 들이받고 바다 4천m 속에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2,200명의 승객과 승무원 중 1,600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많은 보물이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구명보트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승객들을 구할 수는 없었고, 승객들이 신사도를 발휘하여 구명보트에 여자와 아이들을 태우고, 나머지는 다 익사했습니다.
그런데 스티라우스라는 부인은 구명보트를 타도록 되어있었지만, 구명보트를 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보트에 탈 수 있었으나, 남편은 구명보트를 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스트라우스 부인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오랫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늙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남편을 떠나 나만 살기보다는 남편이 가는 곳에 함께 가렵니다. 그리고는 남편의 손을 꼭 잡고, 함께 죽음의 길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부부 사이에도 혼자 잘 살겠다고 멀쩡한 사람과도 이혼을 하는 판국에 이들 노부부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릅답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은 자기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 뿐인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롬 5: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오늘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 성탄절은 나를 위하여 죽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입니다.
이 얼마나 거룩하고 숭고한 날입니까?
여러분들은 이 성탄절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아마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흥청망청하며 보낼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야합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을 죽게 왜 하셨습니까?
죄인은 죄인을 구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도 해결 할 수 없는 사람이 어찌 남을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훌륭해도 죄인이요, 석가모니가 아무리 훌륭해도 죄인이요, 공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도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난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죄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신 (벧전 2:22-23)분이십니다.
만일 남자로 인하여 예수가 잉태되었다면 그분도 역시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여기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하는 말은 인간의 몸은 입었지만 하나님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에 성육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세상에서도 죄를 지으면 그 대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질 수 없는 무거운 죄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은 죄의 영향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무거운 세상의 짐들을 지고 있습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으면 여러 가지 무거운 짐들로 인해서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고 괴로워 하다가 결국은 사망에 이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너무 많더라고요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 왔습니다.
그 누구도 죄의 문제는 해결 할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해결 할 수가 있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죄짐 세상의 짐을 그 누가 대신 져 줄 수 있습니까?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강박관념과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인해 평안 없는 우리 인생에게 그 누가 평안의 빛을 줄 수 있을까요?
똑같이 죄짐을 지고 자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가 도울 수가 있습니까?
[유교] - ‘너의 바른 윤리와 도덕으로 헤엄쳐 나오라!’ 윤리와 도덕을 최고의 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상을 받은 우리 민족이 최고의 선을 지향하는 민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불교] - ‘너의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얼마나 무책임 합니까? 결국은 진리도 발견하지 못하고 허무하기만 하지 않습니까?
[도교] - ‘스스로 수영을 터득해서 나오라!’
[기독교]- ‘예수께서 직접 나만 의지하고 붙들어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영생의 문제까지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를 열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방법을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도덕입니까? 철학입니까?
예수님만이 나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인생의 문제를 풀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자는 윤리 도덕을 행한 자라고 받은 것도 아니요 도덕적이지 못한 자는 받지 못한다고 하지도 아니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구원 받을 죄인임을 알고 나오는 자는 구원함을 받게 됩니다.
마태가 육신에 따른 그리스도의 선조들로 소개한 족보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례에 따르면 족보를 기록하는 사람은 여인의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남자만이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랜 관습의 하나이기 때문에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손만 간추린 이 족보 안에 있는 다섯 명의 여인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마리아만이 깨끗하다 할 수가 있지만 나머지 4명은 참으로 모든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에 딱 좋은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정결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쌍둥이를 낳았습니다(창 38:24-30).
라합은 여리고성의 몸을 파는 기생이었습니다.
룻은 그 조상이 아버지와 딸 사이에 생긴 모압족속이요 또한 남편을 잃은 과부입니다.
밧세바는 다윗 왕과 통간하고 전쟁터에 있는 그의 남편을 죽게 한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왜 이 간단한 족보는 왜 이런 깨끗지 못한 여인들을 모두 언급 했을까요? 그들이 우리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 된다면 우리들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근원을 추론해 보십시요. 우리들이 그 여인들보다 낳은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가장 나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혈통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혈통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사람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공로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주님은 참으로 죄인들의 구주이십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찬양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훌륭한 여인들도 많습니다. 만약 성경의 기자가 인간적인 역사가였다면, 그리스도의 명예를 떨어뜨릴 불순한 여인들이 아닌 정숙한 여인들을 포함시켰을 것입니다. 만약에 신성한 족보 속에 불순한 사람들의 이름이 자취를 감추었다면, 우리는 모두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는 신성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깨끗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비난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사실은 좋은 사람들 보다 나쁜 사람들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입니다.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교회로 나 올 필요가 없고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 여기는 자만이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구원의 손길은 한 순간 한번만 한 사건만이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면 웨슬리 형제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기념비에는 세 마디가 새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 둘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일꾼은 땅에 묻으시지만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 셋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외국 잡지사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를 독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많은 대답은 “혼자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독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독이 무엇입니까? 고독은 혼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창세기 2:18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했습니다. 가정을 꾸리게 하고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게 하지 않았습니까?
혼자 있는 아이를 고아라. 부르고 혼자 사는 여자를 과부라 부르고 혼자 사는 사람을 고독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혼자 살아도 고독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는 데도 고독한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살아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지위가 낮아도 평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위가 높아도 불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린 여기서 고독하다는 것과 불행하다는 것과 불안하다는 것들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조건들 때문에 성립되거나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365일을 함께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유익을 주고 편안한 사람일 때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고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건을 ‘임마누엘’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승천 직전에 우리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28:20).
어떻게 세상 끝날 까지 임마누엘 하시는가?
(1) 성령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령(보혜사)은 아버지의 영이요(요15:26), 아들 예수의 영입니다(요15:7). 예수의 약속은 성실하고 진실하였습니다.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은 오순절에 그의 제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행1:5, 8, 2:1-4). 그리고 지금 우리 가운데 여러분의 마음속에 계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말씀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입을 벌리게 하였습니다.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게 하였습니다.」(행2:11). 하나님의 큰일은 예수 십자가 대속의 사건과 예수 부활, 승천의 사건입니다. 성령은 베드로의 입을 열어 구원의 설교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3000명이 일시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2: ). 스데반 집사가 성령 충만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순교에 이르고 만 설교가 되었습니다(행6: - 7: ). 베드로는 이방 로마 장교 고넬료 가정에 선교사가 되어 그와 그 집과 친구들을 구원하였습니다(행10: ). 이 말씀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3) 기사와 표적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났습니다(행4:31).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가 성전문 앞에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걷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도하다가 감옥에 같혀있는 베드로가 천사의 인도를 받고, 감옥에서 풀려나와 자유로운 몸이 되어 전도를 계속하였습니다(행12:3-) 실로 놀라운 표적이요, 기적들입니다.
(4) 선교 운동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1-).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26-). 박해자 사울이 주의 역사 앞에 회개하고, 갑자기 예수 선교사로 변했습니다(행9: ). 그는 이방인을 위한 예수의 사도가 되어 마침내 땅 끝까지 복음을 확산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여러 번 주께서 자기와 함께 해 주신다고 하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확인받고, 또 일어나고, 뛰고, 외쳤습니다.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이 배척하였지만은 말살 정책을 폅지만 땅 끝까지 전파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임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운동’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성령과 말씀(설교), 표적과 기사와, 세계 선교 운동을 통하여 ‘임마누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사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누구나 값없이 돈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를 믿음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심은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의 재물이 되려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