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해결은 당신의 믿음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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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20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가복음 9:14-27 문제의 해결은 당신의 믿음이 먼저입니다
프랑스가 전쟁 중에 있을 때, 오른 팔에 총탄을 맞은 어느 병사가 육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그의 한쪽 팔을 자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군의관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당신의 팔을 이제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 병사를 위로하는 말을 건넸습니다. 그때 그 병사는 “내 팔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 팔을 조국에 바쳤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몸까지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은 한 병사의 헌신을 본 군의관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가졌으면 프랑스 군대가 반드시 이기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군인이 자신에 처한 입장을 어떻게 보고 있었습니까?
이젠 큰일이다 내게는 한 쪽 팔을 잃어버리는 병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하는 문제에만 자신의 역량을 총 동원 시켰더라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생애는 참으로 비참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당한 상황에서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문제에 바라본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한 쪽 팔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가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는 그 순간에 그의 문제는 자신을 불행과 파멸로 몰아넣은 장애가 아니라 참으로 영광스러운 자리로 격상이 될 수 있었으며 또한 그의 존재의 의미가 얼마나 가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문제가 많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당한 문제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고 어떡하지 큰일인데 하고 난처해하고만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점점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초라하게 만들며 불가능한 자리로 몰아넣고 결국은 그것으로 인하여 나를 파멸의 자리에 몰아넣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들 때문에 거의 죽게 생긴 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가끔 보면는 거의 죽게 생겼다고 하여 달려오는 자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인간적으로 생각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가만히 보면 나를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문제로만 바라보는 시각을 버리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형태로 바꿔 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더 이상 문제로 남지 않게 하며 시원한 해결을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바로 그거야 너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참으로 괴로운 문제를 가지고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무리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귀신이 들려 벙어리가 되고 점점 몸이 약해져 가도 있는 어떤 아버지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을 바라 볼 때마다 이렇게 두었다가는 우리 집안에 너무 슬픈 일이 되고 아이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그 아버지는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하겠는데 하는 마음이 초급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제 그 자체만을 두고 보면 참으로 모든 이를 당황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 이 아이를 데리고 여기 저기 쫓아다니며 인간적으로 좋다는 것은 다 해 보았지만 그 결과는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종교적으로 해결을 하기 위하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으며 또한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만은 그러나 이상하게 이 문제는 역시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서로 이 아이가 무엇이 잘못되었다든지 그 아버지가 잘못되었다든지 그런 변론만을 벌이고 있었지 그 변론은 아무런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문제가 하나 생기면 말이 얼마나 많은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두고 바리새인들 사이에 변론이 일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소경이 된 것이 누구의 잘 못인가 그 부모인가? 그 아이인가?
지금 이것저것 따지면 무엇 하겠습니까? 만은 우리 인생은 이렇게 책임전가를 잘하는 자들입니다.
하여튼 문제자체를 두고 볼 때에 아무리 안타까워도 해결이 안 되는데 어떡하겠습니까?
우리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어려운 일이 당하거나 참으로 난감한 일을 당 했을 때에 그 문제를 안고 엉엉 울면서 여기 저기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결이 되느냐? 오히려 더 상심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좋으신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역시 이 자녀의 아버지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이 아이의 치유를 원했던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이 아버지가 바라는 것이 이것 이었습니다.
어떻게 치유 할 수 없겠느나? 는 것입니다.
여기 저기 이렇게 달려 왔으나 치유가 되지 않으니 예수님에서 어떻게 좀 치유 해 줄 수 없느냐? 는 것입니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어 보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께 나아 올 때에 이런 기대를 가지고 나아오는 자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생긴 문제 내가 할 수 없고 세상에서 모든 방법을 다해 보았지만 안 되니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께로 나아보자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예, 여러분 참으로 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여러분의 어떠한 문제도 예수님은 해결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해결사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문제로 인하여 믿음을 주시기 원하시지 문제만 해결 시켜 주시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보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이 더 중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낫기를 바라는 이 아이의 아비에게 예수님은 낫은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믿음이야 말로 능히 구원하고 남음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렇게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는 아이의 아버지께 예수님은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다 즉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 라고 하신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 가운데는 문제 해결에 우선을 두고 예수님께 나왔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까?
아마 믿음은 차후 문제고 빨리 내 문제 해결 해 달라고 주문하고 있는 자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교회 처음 나오는 자들 중에는 혹시 그렇게 생각이 되어 질 수 있지만은 교회 생활을 오래 동안 하였지만은 아직도 믿음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내 당면한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런 분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아직도 내가 너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여 그대로 남겨 두고 있는 자로 보이느냐?
문제하나 해결해 주지 않은 냉정하고 악한 분으로 보이느냐? 그게 아니냐?
믿음을 줄려고 그 문제가 아직도 문제로 남아 있는 거야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 우리 가운데는 내 스스로가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께서 왜 내 문제에는 해결해 주시지 않느냐? 하고 안타까워하는 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더 이상 문제 삼지 마십시오. 나의 믿음이 없음을 문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는 우리의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요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롬 10: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제를 통하여 믿음을 주시기 위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방인들이 구하는 식으로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고 신앙생활을 무슨 고행을 하듯이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바라 볼 때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해서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주시기 위해 아니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그냥 그 문제들을 남겨 두고 있음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실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을 믿음으로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좋아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믿음은 나중이고 문제만 해결해 주면 믿음이 생기는 것으로 여겼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도 믿음이 없구나 하고 믿음으로 돌아서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조금 전만 해도 그는 아이의 문제 해결을 도와 달라고만 하였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것이 그 아버지의 예수님을 향한 마음의 태도입니다.
마치 앉은뱅이가 동정이이라도 하는 얻을까? 하는 심정이 전부 이듯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이 가지는 태도입니다.
그들에게 무엇인가 잘되게 해 준다고 하면 어디에다도 빌지 않습니까?
어제 같은 경우는 보름달보고 소원을 빌었을 것이며 년 초에는 해에게 복을 달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러한 사상을 가진 자는 소원이 이루어지고 잘 되게만 해주면 어디든지 빌 수가 있습니다.
고목에도 빌 수 있고 소나 돼지에게도 비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믿음입니까?
이제 여러분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참다운 나의 구주를 만나는 믿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에게도 동전이 문제가 아니라 역시 믿음이 먼저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이 아이의 아버지는 비로소 그가 참으로 구해야 할 것이 믿음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제는 문제 해결을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24절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아버지가 크게 깨달은 것은 문제 때문에 내게 문제가 되었던 줄 알았는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성도 여러분들의 문제를 문제로 만드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없음을 문제로 여기고 먼저 믿음을 가지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그 아이에게 예수님은 역사를 하셨고 그 아버지의 믿음 앞에 귀신이 나가고 그 아이가 깨끗하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지 절대로 감추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 9: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무엇입니까?
문제의 해결만을 바라고 예수님께 무엇을 요구하는 기복적인 것이 되고요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예수님을 위하여 먼저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림이 없이 믿음이 생기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믿음이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자신이 만들어지고 드려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윈스턴 처칠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 조국 앞에 눈물과 땀과 피밖에 바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조국을 위하여 눈물과 땀과 피를 바치십시오.” 이 연설에 감동받은 영국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 싸우는 전쟁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결국 영국은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눈물과 피와 땀까지 바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께 헌신하는 이 믿음이야 말로 반드시 여러분의 삶에서 승리를 가져 올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주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주를 위함은 없고 자꾸만 주가 나를 위하여만 달라고만 하십니까?
그러니 믿음이 생기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자신을 주께 모두 드린 사람들이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아직 까지도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문제의 해결만을 기도의 제목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임을
그리고 이 가운데 내가 어떻게 주를 위해 헌신되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그리하면 너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일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리라
주를 위하여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내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믿음이 안 생긴다 하지 말고 내 자신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주께 자신의 수고와 헌신의 투자가 없는데 어찌 주께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억지라도 해 놓으니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금보다 은보다 여러분의 생명보다 더 귀한 믿음을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프랑스가 전쟁 중에 있을 때, 오른 팔에 총탄을 맞은 어느 병사가 육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그의 한쪽 팔을 자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군의관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당신의 팔을 이제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 병사를 위로하는 말을 건넸습니다. 그때 그 병사는 “내 팔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 팔을 조국에 바쳤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몸까지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은 한 병사의 헌신을 본 군의관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가졌으면 프랑스 군대가 반드시 이기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군인이 자신에 처한 입장을 어떻게 보고 있었습니까?
이젠 큰일이다 내게는 한 쪽 팔을 잃어버리는 병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하는 문제에만 자신의 역량을 총 동원 시켰더라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생애는 참으로 비참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당한 상황에서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문제에 바라본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한 쪽 팔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가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는 그 순간에 그의 문제는 자신을 불행과 파멸로 몰아넣은 장애가 아니라 참으로 영광스러운 자리로 격상이 될 수 있었으며 또한 그의 존재의 의미가 얼마나 가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문제가 많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당한 문제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고 어떡하지 큰일인데 하고 난처해하고만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점점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초라하게 만들며 불가능한 자리로 몰아넣고 결국은 그것으로 인하여 나를 파멸의 자리에 몰아넣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들 때문에 거의 죽게 생긴 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가끔 보면는 거의 죽게 생겼다고 하여 달려오는 자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인간적으로 생각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가만히 보면 나를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문제로만 바라보는 시각을 버리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형태로 바꿔 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더 이상 문제로 남지 않게 하며 시원한 해결을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바로 그거야 너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참으로 괴로운 문제를 가지고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무리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귀신이 들려 벙어리가 되고 점점 몸이 약해져 가도 있는 어떤 아버지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을 바라 볼 때마다 이렇게 두었다가는 우리 집안에 너무 슬픈 일이 되고 아이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그 아버지는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하겠는데 하는 마음이 초급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제 그 자체만을 두고 보면 참으로 모든 이를 당황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 이 아이를 데리고 여기 저기 쫓아다니며 인간적으로 좋다는 것은 다 해 보았지만 그 결과는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종교적으로 해결을 하기 위하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으며 또한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만은 그러나 이상하게 이 문제는 역시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서로 이 아이가 무엇이 잘못되었다든지 그 아버지가 잘못되었다든지 그런 변론만을 벌이고 있었지 그 변론은 아무런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문제가 하나 생기면 말이 얼마나 많은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두고 바리새인들 사이에 변론이 일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소경이 된 것이 누구의 잘 못인가 그 부모인가? 그 아이인가?
지금 이것저것 따지면 무엇 하겠습니까? 만은 우리 인생은 이렇게 책임전가를 잘하는 자들입니다.
하여튼 문제자체를 두고 볼 때에 아무리 안타까워도 해결이 안 되는데 어떡하겠습니까?
우리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어려운 일이 당하거나 참으로 난감한 일을 당 했을 때에 그 문제를 안고 엉엉 울면서 여기 저기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결이 되느냐? 오히려 더 상심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좋으신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역시 이 자녀의 아버지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이 아이의 치유를 원했던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이 아버지가 바라는 것이 이것 이었습니다.
어떻게 치유 할 수 없겠느나? 는 것입니다.
여기 저기 이렇게 달려 왔으나 치유가 되지 않으니 예수님에서 어떻게 좀 치유 해 줄 수 없느냐? 는 것입니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어 보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께 나아 올 때에 이런 기대를 가지고 나아오는 자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생긴 문제 내가 할 수 없고 세상에서 모든 방법을 다해 보았지만 안 되니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께로 나아보자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예, 여러분 참으로 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여러분의 어떠한 문제도 예수님은 해결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해결사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문제로 인하여 믿음을 주시기 원하시지 문제만 해결 시켜 주시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보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이 더 중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낫기를 바라는 이 아이의 아비에게 예수님은 낫은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믿음이야 말로 능히 구원하고 남음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렇게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는 아이의 아버지께 예수님은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다 즉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 라고 하신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 가운데는 문제 해결에 우선을 두고 예수님께 나왔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까?
아마 믿음은 차후 문제고 빨리 내 문제 해결 해 달라고 주문하고 있는 자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교회 처음 나오는 자들 중에는 혹시 그렇게 생각이 되어 질 수 있지만은 교회 생활을 오래 동안 하였지만은 아직도 믿음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내 당면한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런 분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아직도 내가 너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여 그대로 남겨 두고 있는 자로 보이느냐?
문제하나 해결해 주지 않은 냉정하고 악한 분으로 보이느냐? 그게 아니냐?
믿음을 줄려고 그 문제가 아직도 문제로 남아 있는 거야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 우리 가운데는 내 스스로가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께서 왜 내 문제에는 해결해 주시지 않느냐? 하고 안타까워하는 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더 이상 문제 삼지 마십시오. 나의 믿음이 없음을 문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는 우리의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요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롬 10: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제를 통하여 믿음을 주시기 위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방인들이 구하는 식으로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고 신앙생활을 무슨 고행을 하듯이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바라 볼 때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해서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주시기 위해 아니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그냥 그 문제들을 남겨 두고 있음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실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을 믿음으로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좋아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믿음은 나중이고 문제만 해결해 주면 믿음이 생기는 것으로 여겼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도 믿음이 없구나 하고 믿음으로 돌아서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조금 전만 해도 그는 아이의 문제 해결을 도와 달라고만 하였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것이 그 아버지의 예수님을 향한 마음의 태도입니다.
마치 앉은뱅이가 동정이이라도 하는 얻을까? 하는 심정이 전부 이듯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이 가지는 태도입니다.
그들에게 무엇인가 잘되게 해 준다고 하면 어디에다도 빌지 않습니까?
어제 같은 경우는 보름달보고 소원을 빌었을 것이며 년 초에는 해에게 복을 달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러한 사상을 가진 자는 소원이 이루어지고 잘 되게만 해주면 어디든지 빌 수가 있습니다.
고목에도 빌 수 있고 소나 돼지에게도 비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믿음입니까?
이제 여러분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참다운 나의 구주를 만나는 믿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에게도 동전이 문제가 아니라 역시 믿음이 먼저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이 아이의 아버지는 비로소 그가 참으로 구해야 할 것이 믿음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제는 문제 해결을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24절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아버지가 크게 깨달은 것은 문제 때문에 내게 문제가 되었던 줄 알았는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성도 여러분들의 문제를 문제로 만드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없음을 문제로 여기고 먼저 믿음을 가지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그 아이에게 예수님은 역사를 하셨고 그 아버지의 믿음 앞에 귀신이 나가고 그 아이가 깨끗하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지 절대로 감추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 9: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무엇입니까?
문제의 해결만을 바라고 예수님께 무엇을 요구하는 기복적인 것이 되고요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예수님을 위하여 먼저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림이 없이 믿음이 생기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믿음이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자신이 만들어지고 드려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윈스턴 처칠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 조국 앞에 눈물과 땀과 피밖에 바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조국을 위하여 눈물과 땀과 피를 바치십시오.” 이 연설에 감동받은 영국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 싸우는 전쟁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결국 영국은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눈물과 피와 땀까지 바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께 헌신하는 이 믿음이야 말로 반드시 여러분의 삶에서 승리를 가져 올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주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주를 위함은 없고 자꾸만 주가 나를 위하여만 달라고만 하십니까?
그러니 믿음이 생기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자신을 주께 모두 드린 사람들이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아직 까지도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문제의 해결만을 기도의 제목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임을
그리고 이 가운데 내가 어떻게 주를 위해 헌신되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그리하면 너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일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리라
주를 위하여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내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믿음이 안 생긴다 하지 말고 내 자신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주께 자신의 수고와 헌신의 투자가 없는데 어찌 주께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억지라도 해 놓으니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금보다 은보다 여러분의 생명보다 더 귀한 믿음을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