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전파가 당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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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46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가복음 8: 31-38 복음전파가 당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이 평화를 원하고 전쟁을 거부하지만 그러나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 명령아래 미 연합군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향해 수백발의 미사일을 쏘면서 거침없이 진격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이 될지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미 죽은 자가 있을 것이며 죽음에서 살아나는 경험을 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전쟁을 바라보는 우리 남북한의 시각은 그냥 편안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이 전쟁의 여파가 이번에는 우리 한반도에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벗어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특사자격으로 4일간 평양을 방문한 뒤 22일 베이징으로 돌아온 모리스 스트롱 유엔특사는 기자회견에서 미국-북한간 외교적 노력이 합의점을 찾지 못할 경우 한반도 전쟁발발 가능성이 있지만 북한은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하면서도 (한반도) 전쟁의 필요성은 당장 없지만 미국과 북한이 협상을 통한 해결책 마련에 실패할 경우 그럴 가능성도 있다며 모리스 스트롱 유엔특사가 22일 밝혔다고 합니다.
비단 전쟁이 아니더라도 나라의 운명도 개인의 운명도 언제든지 순식간에 바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대구 지하철의 방화 사건을 기억 할 것입니다.
수많은 생명이 희생 되는 가운데 용케도 그 지옥 같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모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관지에 큰 화상을 입고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말을 하지만 정상적이 아닌 목소리로 겨우 둔탁한 목소리를 발 할 수 있지만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하다고 하면서 죽은 자들에 대하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습니다.
나도 살아나지 않았다면 저들과 같은 모습으로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음이 감사하고 또한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의 경지를 벗어난 사람이야 말로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들 보다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는데 살아있음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난 생명을 또 다시 일상의 생활에서 나 자신만을 위하여 그렇게 살아간다고 한다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생명이 참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조금 먼저 죽으나 조금 나중 죽으나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100년전에 죽은 사람이나 1000년전에 죽은 사람이나 100년 후에 죽을 사람이나 1000년 후에 죽을 사람이나 무슨 다른 의미가 있겠습니까?
유명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그 친구가 벼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새카맣게 타 죽은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루터는 그 생애에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내가 죽지 않고 친구가 죽고 나는 살아남아 있을까?
수도사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타락한 로마 교황을 향해 개혁을 하고 많은 사람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줄로 믿습니다.
이 죽음의 사건을 계기로 그는 무엇을 하고 살아야 가장 잘 사는 길일까?를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어떻게 살아야 가장 잘 사는 길일까?을 누구든지 한번 쯤 생각을 해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내 자신의 일을 충족시키는 것으로만 잘 사는 방법으로 선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에 당연히 그런 생각 밖에 더 가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죽은 경험을 하고 죽음을 경지에서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한 자라고 한다면 더 이상 내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 유명한 전도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갈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죽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죽은 가운데서 새롭게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살아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라 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위한 삶이 의미가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이 그가 살아 있어야 하는 확신이 그에게 온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발견을 하였습니까?
오늘 우리 성도들이 어떤 자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였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 난 자임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내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 주신 그 분을 위하여 사는 자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사는 길입니다.
어떤 것이 복음을 위하여 사는 길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하는 길입니다.
본문에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예수님을 잘 따르는 베드로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듣고서는 상당히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제자를 향해 예수님은 거침없이 말을 토해 내십니다.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은혜로운 자로 알았는데 졸지에 베드로는 사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곧 사람의 일을 우선 하였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은 밀려 나고 말았습니다.
사단이 다른 모습이 아닙니다.
무슨 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어떤 괴물보다 더 무서운 일입니다.
어찌 자신의 일에 매여 있는 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고를 가진 자가 자기 자신을 주를 위해 무엇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하나도 이루어 나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삶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일이요 결과적으로는 망하는 일입니다.
3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3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결국 사단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배제 시키고 인간의 일을 먼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망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일을 말하면 자신들의 입장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무시하고 자신의 일을 정당하게 두둔하게 됩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자신을 드릴 때에 그 들은 더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핑계 삼으면 육신의 강건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육신을 주를 위해 드릴 때에 더 강건해 지는 법입니다.
저는 예배 시간마다 성도들이 올라오는 자들을 봅니다.
누가 더 육신적으로 건강을 얻는가?
열심히 올라오는 자들이 었습니다.
주일 예배는 물론이요 철야 그리고 수요 시간 그리고 매일 새벽마다 올라오는데 그 건강을 감당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백)집사님 다리 관절이 좋지 않으시지만 3층 계단을 매일 새벽시간마다 죽으라고 올라오십니다.
그것도 저 능동에서 ......
그러니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또한 얼마나 잘 감당하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 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은 자는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핑계 삼아 거스리는 일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여러분에게 올무가 될 것입니다.
육신을 거스려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사는 길이 생길 것입니다.
35절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할렐루야!
어떤 일이 복음을 위한 길입니까?
오히려 내 자신을 부인하는데 사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불러 놓고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의 생각을 개조 시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것을 모두 버리게 하는 일입니다.
왜 이렇게도 어려운 일을 해야 할까요?
왜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해야 할까요?
이것이 그 사람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자신들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합리화 시키는 일이 나를 살리는 일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결코 이런 인간적인 생각들을 가지고서는 그 자신들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도저히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 가운데 행복해 지는 자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틀림없이 그들의 가정과 생업에도 하나님께서 참으로 행복해 지게 할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자신들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힘쓰는 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내 자신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므로 내 자신이 더 잘 살아 가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거의 모든 구역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구역은 지난 몇주 매주 철야 100%가 다 나옵니다.
이들이 한가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구역원 모두가 직장과 생업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철야를 올라 와서 은혜를 받는데 모두가 얼굴이 은혜로운 얼굴로 바꾸어지고 이들이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드린다면 무슨 문제라도 하나도 염려가 없기 풀어 줄 것입니다.
복음의 길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길입니다.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눅 12: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이제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한 큰일을 벌려 놓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예배 시간마다 참여하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등 참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평화를 원하고 전쟁을 거부하지만 그러나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 명령아래 미 연합군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향해 수백발의 미사일을 쏘면서 거침없이 진격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이 될지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미 죽은 자가 있을 것이며 죽음에서 살아나는 경험을 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전쟁을 바라보는 우리 남북한의 시각은 그냥 편안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이 전쟁의 여파가 이번에는 우리 한반도에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벗어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특사자격으로 4일간 평양을 방문한 뒤 22일 베이징으로 돌아온 모리스 스트롱 유엔특사는 기자회견에서 미국-북한간 외교적 노력이 합의점을 찾지 못할 경우 한반도 전쟁발발 가능성이 있지만 북한은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하면서도 (한반도) 전쟁의 필요성은 당장 없지만 미국과 북한이 협상을 통한 해결책 마련에 실패할 경우 그럴 가능성도 있다며 모리스 스트롱 유엔특사가 22일 밝혔다고 합니다.
비단 전쟁이 아니더라도 나라의 운명도 개인의 운명도 언제든지 순식간에 바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대구 지하철의 방화 사건을 기억 할 것입니다.
수많은 생명이 희생 되는 가운데 용케도 그 지옥 같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모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관지에 큰 화상을 입고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말을 하지만 정상적이 아닌 목소리로 겨우 둔탁한 목소리를 발 할 수 있지만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하다고 하면서 죽은 자들에 대하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습니다.
나도 살아나지 않았다면 저들과 같은 모습으로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음이 감사하고 또한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의 경지를 벗어난 사람이야 말로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들 보다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는데 살아있음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난 생명을 또 다시 일상의 생활에서 나 자신만을 위하여 그렇게 살아간다고 한다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생명이 참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조금 먼저 죽으나 조금 나중 죽으나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100년전에 죽은 사람이나 1000년전에 죽은 사람이나 100년 후에 죽을 사람이나 1000년 후에 죽을 사람이나 무슨 다른 의미가 있겠습니까?
유명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그 친구가 벼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새카맣게 타 죽은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루터는 그 생애에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내가 죽지 않고 친구가 죽고 나는 살아남아 있을까?
수도사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타락한 로마 교황을 향해 개혁을 하고 많은 사람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줄로 믿습니다.
이 죽음의 사건을 계기로 그는 무엇을 하고 살아야 가장 잘 사는 길일까?를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어떻게 살아야 가장 잘 사는 길일까?을 누구든지 한번 쯤 생각을 해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내 자신의 일을 충족시키는 것으로만 잘 사는 방법으로 선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에 당연히 그런 생각 밖에 더 가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죽은 경험을 하고 죽음을 경지에서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한 자라고 한다면 더 이상 내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 유명한 전도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갈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죽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죽은 가운데서 새롭게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살아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라 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위한 삶이 의미가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이 그가 살아 있어야 하는 확신이 그에게 온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발견을 하였습니까?
오늘 우리 성도들이 어떤 자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였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 난 자임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내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 주신 그 분을 위하여 사는 자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사는 길입니다.
어떤 것이 복음을 위하여 사는 길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하는 길입니다.
본문에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예수님을 잘 따르는 베드로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듣고서는 상당히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제자를 향해 예수님은 거침없이 말을 토해 내십니다.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은혜로운 자로 알았는데 졸지에 베드로는 사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곧 사람의 일을 우선 하였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은 밀려 나고 말았습니다.
사단이 다른 모습이 아닙니다.
무슨 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어떤 괴물보다 더 무서운 일입니다.
어찌 자신의 일에 매여 있는 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고를 가진 자가 자기 자신을 주를 위해 무엇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하나도 이루어 나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삶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일이요 결과적으로는 망하는 일입니다.
3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3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결국 사단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배제 시키고 인간의 일을 먼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망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일을 말하면 자신들의 입장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무시하고 자신의 일을 정당하게 두둔하게 됩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자신을 드릴 때에 그 들은 더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핑계 삼으면 육신의 강건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육신을 주를 위해 드릴 때에 더 강건해 지는 법입니다.
저는 예배 시간마다 성도들이 올라오는 자들을 봅니다.
누가 더 육신적으로 건강을 얻는가?
열심히 올라오는 자들이 었습니다.
주일 예배는 물론이요 철야 그리고 수요 시간 그리고 매일 새벽마다 올라오는데 그 건강을 감당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백)집사님 다리 관절이 좋지 않으시지만 3층 계단을 매일 새벽시간마다 죽으라고 올라오십니다.
그것도 저 능동에서 ......
그러니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또한 얼마나 잘 감당하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 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은 자는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핑계 삼아 거스리는 일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여러분에게 올무가 될 것입니다.
육신을 거스려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사는 길이 생길 것입니다.
35절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할렐루야!
어떤 일이 복음을 위한 길입니까?
오히려 내 자신을 부인하는데 사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불러 놓고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의 생각을 개조 시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것을 모두 버리게 하는 일입니다.
왜 이렇게도 어려운 일을 해야 할까요?
왜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해야 할까요?
이것이 그 사람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자신들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합리화 시키는 일이 나를 살리는 일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결코 이런 인간적인 생각들을 가지고서는 그 자신들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도저히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 가운데 행복해 지는 자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틀림없이 그들의 가정과 생업에도 하나님께서 참으로 행복해 지게 할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자신들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힘쓰는 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내 자신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므로 내 자신이 더 잘 살아 가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거의 모든 구역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구역은 지난 몇주 매주 철야 100%가 다 나옵니다.
이들이 한가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구역원 모두가 직장과 생업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철야를 올라 와서 은혜를 받는데 모두가 얼굴이 은혜로운 얼굴로 바꾸어지고 이들이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드린다면 무슨 문제라도 하나도 염려가 없기 풀어 줄 것입니다.
복음의 길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길입니다.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눅 12: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이제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한 큰일을 벌려 놓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예배 시간마다 참여하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등 참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