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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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28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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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5: 14-30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 합시다
지금 우리나라는 이라크 전쟁을 바라보면서 상당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미영 연합군이 치루는 전쟁에 참여 할 것인가? 아니면 참여치 말아야 할 것인가?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참여치 말아야 하고 국익을 생각 할 때에는 참여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라크 전쟁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지만 전쟁을 반대하여 참여치 않는 나라들도 벌써 전쟁후의 돌아올 이익에 관심을 가지고 미국 혼자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은 아마 미국은 자신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전후의 일들을 주도적으로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과연 이 전쟁에 어떻게 관여 하였는가에 따라 그 후의 결과는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수고와 헌신이 있는 자에게와 그렇지 않는 자에게 돌아갈 대가가 다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견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만 은 성경에서도 전쟁에 관한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전쟁은 인간의 이해타산에 따른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전쟁이었습니다.
역시 전쟁에서 승리는 대단히 중요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패배를 함으로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만 승리를 하였을 때에는 풍성한 노획물을 나눠 가지게 됩니다.
사 9: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같이 이사야 선지자는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에까지 비유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쟁과 같습니다.
언제든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노략을 얻고 그리고 하나님의 즐거움에 동참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오스트리아의 유태계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門밖에서 일생 동안을 기다리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 밖에서 일생 동안 서성거리다가 죽기 전에야 자기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문지기에게 나를 들여보내지 않고 지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이 문은 당신의 문입니다. 나는 당신을 돕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번도 이 문을 열어달라고 나에게 요청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일생을 문 밖에서 서성거렸지만 한번도 물을 열어달라고 요청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용기도, 모험심도 없이 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죽어간 한 사람은 마치 우리 앞에 믿음의 문이 열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도 열어보려고 하지 아니하고 시도도 해보지도 못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성공의 때를 놓치고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일생 동안 삶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은 믿음의 싸움이라는 긴박성을 가지지 못하고 그 싸움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겨우 자신의 신앙을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주님 앞에 설 때에는 비겁한 자라 칭함을 받고 가진 믿음까지 빼앗기고 말았고 저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인의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의 즐거움에 우리 모두를 참여 시키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의 즐거움에 참여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적당량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재능대로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잘 하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는 이런 불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는 다른 이들과 같이 많은 것을 주시지 않았나? 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면 내가 주의 일을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따져서 묻을 일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능력대로 적당하게 주셨습니다. 네게 주신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님은 다 그 그릇대로 적당하게 하셨지 더 하시지도 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잠 16: 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 갈 수 있도록 합당하게 하셨으니 어느 누구도 나는 하나님께 사용 될 수 없다 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눅 때문에 못하겠다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이 받은 만큼의 수고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능력이상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다섯 만큼의 분량을 받았으면 다섯 만큼의 일을 하면 되고 자신이 이 만큼의 분량이라면 이 만큼의 일을 하는 것이요 일이라고 생각되면 오와 이 만큼이 아니라 일만큼의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합당한 것입니까?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적게 받은 자에게는 적게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헌금 궤 앞에서 사람들이 헌금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부자는 오더니 많은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헌금을 자랑삼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는 동전 한 닢을 하며 부끄럽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누가 많은 헌금을 하였는가?
물론 상대적으로는 부자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보시기 때문에 과부가 더 많은 헌금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부자는 그 많은 중에 얼마를 하였지만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내었다고 하였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을 했다고 하나님께까지 많은 것을 한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이 적은 것을 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께까지 적은 것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내가 얼마큼 능력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내가 받은 것에 얼마나 최선을 하는가. 아닌가.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분들은 자신의 능력에 절대로 구애를 받지 마시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도 마시고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 길 수 있는 자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자는 자신의 분량에 따라 사용되는 자입니다.
5를 받은 자는 바로 가서 5를 남겼고 2를 받은 자도 그리하여 2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을 받은 자는 땅 속에다가 묻어 감추어 두었다가 1을 가지고 왔습니다. 마치 주인에게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다는 식입니다.
이유는 주인의 뜻을 따라 행하기를 싫어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그냥 가지고 있다가 그냥 돌려 주면되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신앙만을 겨우 유지 하자는 것입니다.
혹시나 벌을 받을까봐 자신만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안 믿으면 혹시 지옥 갈까봐 혹시 벌을 받을 까봐 떠날 수는 없고 겨우 겨우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싶지 않고 자유하고 싶어 하는 자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소욕대로 할 것은 다하고 하나님에게 구속되기는 싫고
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이중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인은 그 염려하는 것이 그에게 임하고 의인은 그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저는 성도들을 바라다보면서 크게 염려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신앙을 겨우 마지못해 유지하고 있는 분들을 볼 때 말입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언젠가는 크게 실망을 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참으로 주인이 와서 회계 할 때에 그 믿음은 가짜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듯이 사용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사용되지 않은 선물은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믿음이 내게 별 볼일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 삶과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생명입니까?
이게 참으로 궁금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서 섬기고 있는 부분이 더 많은 것 아닙니까?
1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두려운 분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 25:24-25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어찌 하나님을 두려워서 섬기게 됩니까?
우상에게 잘못보이면 어떻게 될까하여 두려워서 섬기는 것이지 하나님은 받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와 기쁨으로 자원하여 섬기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대한 진보와 발전이 없다고 한다면 아니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으면 1을 받은 자와 견주어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짜 교만한 자가 누구입니까?
자신 혼자의 믿음만을 견지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바른 믿음은 언제든지 자라고 발전을 가져오고 믿음의 행위가 있으며 열매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의 수고를 보시고 평가를 하시고 그 수고에 따라 댓가을 주십니다.
사실 믿음은 하나님의 즐거움에 날마다 참여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일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즐거움이 없습니다.
겨우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는 자는 그 믿음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살지 못했으니 그 믿음은 그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주었지만은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무익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들을 너무나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믿음만을 겨우 유지 한자들은 은혜를 받고 모두가 축복을 받은 자리에서 빠져 버리고 그 믿음이 소멸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가 운명 할 때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믿음이 아무 것도 행치 못했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새 신자들을 대상으로 공부를 하면서 어떡하면은 이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사용하도록 할까? 물론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사용이 되어야겠는데 그래야만 이 사람이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배나 더 하는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사용되는 자는 남여 노소 빈부귀천 무식유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다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유익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의 그릇대로 말입니다.
2와 5를 받은 자는 당연히 하나님께 사용되었습니다. 아주 유익한 자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이것이 영적인 생리현상인 것입니다.
어찌 사람이 해라해라 해서 숨을 쉬고 밥을 먹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왜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까?
네 당연히 영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고한 것은 모두가 그들에게 다 돌려 주었습니다.
2는 4가 되고 5는 10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은 0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마이너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허탈감을 느끼며 허무감을 느끼겠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살면서 허탈감과 허무감으로 쌓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빨리 하나님께 사용 되어야 만이 주님이 주시는 새 은혜와 새로운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불러 주시고 왜 믿음을 주셨습니까?
결국은 이 믿음으로 살아감으로 우리를 더 풍성하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나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안 받았다는 태도를 가지고 믿음 없는 자 같이 살아야 합니까?
1, 2, 5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나가 믿음으로 행하느냐? 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것이 더 많은 것으로 여러분에게 다가 올 것입니다.
1895년 미국의 아담스(Adams)라는 선교사가 대구에서 선교 생활을 하다가 안식년이 되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대구에 돌아올 때에 아담스 선교사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과가 대구에 없는 것을 생각하고 사과씨 한 알을 주머니에 넣어 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는 잡 마당에 사과 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었는데, 그 사과 씨가 대구의 기후와 토질에 맞았기 때문에 점점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과 맛을 보니까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사과 씨를 이웃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과씨 하나가 아담스라는 선교사에 의해 대구에 심어지고, 그로인해 오늘날 대구가 세계 제일의 사과 명산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 알의 사과 씨앗이 떨어지게 될 때 기적을 일으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믿음 이것을 과소평가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삶 속에 소중히 심어둘 때에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가장 작은 겨자씨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 있기에 결실하여 많은 유익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번 부활절에는 우리의 믿음을 한 영혼을 부활의 주님께로 인도함으로서 그 부활의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생업에 넘쳐 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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