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더 잘 사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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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11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태복음 6:24-34 지금보다 더 잘 사는 비결
한 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언어 중에 부자되세요라는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자들의 관심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함께 한 자들의 모두가 그러합니다.
어저께 VJ 클럽이라는 아마추어 비디오 촬영을 방영하는 보는 중에 지난 6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돌아 가시기 몇 년 전의 모습을 촬영한 것을 보게 되었는데 여덟이 넘은 나이신데 허리는 거의 90도를 넘게 꺾어져 있는 모습이요 많은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고생을 엄청나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아마 돌아가실 것을 전제로 한 것으로 기념으로 남겨 둔 것이었는데 자녀들에게 평생에 하실 말씀을 녹화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딸의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 딸의 이름을 부르며 용순아! 용순아! 부디 잘 살아라 내가 죽어서도 너 잘 되기를 바란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사연을 볼 때에 용순 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어렵게 살고 있을 것 같고 그 어미의 소원이 이 자식 잘 되기를 죽으면서도 원한다는 사연을 볼 때에 인지상정(人之常情)을 금 할 길이 없습니다. 그 모습이 인간의 정을 나누는 것 같아 아름답게 보이고 가슴을 찡하게 할지는 몰라도 사람이 잘 사는 데만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하나? 이것 하나에 자유하지 못하나? 하는 생각에 너무나도 씁슬한 마음이 들어서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별로 동감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이라도 삶의 방향을 바로 잡는다고 한다면 그렇게 슬픈 인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하여 있는 자가 아닙니다.
천하의 부귀영화를 다 누려본 솔로몬의 글을 빌자면 차라리 나지 않는 자보다 나을 것이 어디 있으며 낙태된 자가 오히려 더 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끝내는 우리가 돌아 갈 길이 다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인생의 삶을 생활고에만 매여 있는 자로만 전략을 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백이면 백 사람에게 물어도 왜? 당신은 오늘도 무슨 일에 매달려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먹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가 정답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슬프고 그렇게 되지 못하니깐? 억울하고 그것 하나 충족을 시키지 못하니 불쌍하고 처량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슬프고 눈물이 나고 불쌍하기만 존재가 아닙니다.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고 그리고 존귀하고 가치가 있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선한 목표를 위하여 살아가더라도 훨씬 더 잘 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살 수가 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제일 먼저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기가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아니 겁이 나서 겁난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받아야 할 말씀을 받기 보다는 자신들의 소욕을 이루기 위하여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장인어른 추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에 이번 추도 예배 때에는 또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소리만 해서는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장사도 잘 되게 하고 무조건 축복을 빕니다. 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예배를 드린 것 같고 복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제는 무조건 축복을 비는 것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온 식구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되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이제 그냥 축복을 빈다고 복이 되는 것이 압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배를 끝나자 말자 처남이 오늘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날인데 이렇게 끝나고 보니 뭔가 섭섭한데 다시 잘 기도 한 번 더 해 주면 안 되느냐? 고 묻는 것입니다.
어찌 내가 원하는 것을 말 해 주고 들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요.
이같이 우리들의 믿음이 믿지 않는 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찾기 보다는 내 소욕을 이루어 주지 않나? 하고 바라보고 있으니 겁이 난다는 말입니다.
처가 집에는 매년 추도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형제들이 모이면 언제부턴가 추도 예배를 드리지 않고 기도만 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도 자신들의 원하는 것하고 맞지 않으면 각자 자기들의 믿음을 가지고 복 받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 지날 때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무엇을 구걸하려 요한이와 베드로를 쳐다보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함부로 예배를 드린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물론 참으로 원하고 사모하는 심령에게는 얼마든지 말씀하고 기도 하고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자에게는 절대로 믿음적으로 대하지를 않지요
믿음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겉으로 기분 좋게 들어 보라는 소리는 할망정 참으로 바르게 일러 주는 복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은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그 무엇을 기대하면서 올라 온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에게 일러 당부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 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 소욕만을 추구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신앙 할 수가 없고 믿음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들의 소욕만을 기대하고 왔다가 진작 가져야 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생기지 않고 믿음 없이 하나님을 한번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그냥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축복을 받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자신의 소욕을 이루기만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내 마음에 맞는 말씀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자신들의 소욕을 이루기만 고집하는 자들은 제대로 믿음한번 생기지 못하니 믿음이 요구 될 때에 한번도 믿음의 요구에 응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축복이 되겠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행할 때에는 버린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한 자도 마찬가지요 물론 믿는지 얼마 되지 않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것을 구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요구를 들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필요는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것도 모르시면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다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요구에 인간이 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의 모습을 합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놀라운 역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내가 사용되고 내 가정이 사용되고 내 생업 내 직장이 사용 될 때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보다 자신 가정 생업이 더 잘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내 자신이 내 가정이 내 직장과 생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데로 만들겠다고만 하고 있으니 이런 고집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복 받기 힘든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초보적일 때에는 그냥 축복을 해 줄 수도 있습니다만 은 계속적으로 초보적인 자리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성장을 가져오기 위하여 혹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사용되기를 원하시기에 이제는 무조건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아이가 어릴 적에는 부모가 많이 봐 줍니다.
그런데 커서까지 봐주면 그 사람 사람 안 됩니다. 육신이 자라듯이 정신과 지적인 것등이 성장해야 합니다.
온전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창 17: 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75세에 불러서 축복을 약속했으나 이스마엘이나 낳고 하니......
삼하 22: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시 41:12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잠 20: 7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이제 우리 성도들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충 대충 그런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축복을 받으려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완전한 그 믿음대로 복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엡 4:12-13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위하는 자로 부름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일에 사용되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내 소욕만을 위한 것으로 전략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배만 채우는 자가 아닙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것은 하나님도 모르고 없고 자기 자신만의 힘을 의지하고 믿고 살아가야 하는 참으로 의지도 도움도 받지 못할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야 할 자들의 기도 제목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용순아! 내가 죽어서도 너 잘 살기를 바란다 이것이 내 소원이다 할 수 밖에 없으니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불쌍하고 얼마나 추해지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바꾸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바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의 생활에 이용자로 만들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위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꾸만 하나님께 무엇을 받으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해 줄 것이 없는데요? 하지 마십시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하나님으로 무엇을 얻기만 하려고 하고 있는 자는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하나님을 위한 일은 언제든지 돌아 설 수가 있는 자입니다.
왜? 주일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네 이런 일들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당연히 말해 버립니다.
그러니 주일의 존재 의미가 그 사람 앞에는 얼마나 무참히 부셔져 버리겠습니까? 주일은 내어 놓으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기도하라고 하는데 죽어라고 안 해 직분을 가진 자라고 하면서 예배 시간 제대로 참여치 안 해 하나님의 것을 구분해서 물질 봉사도 제대로 하지도 안 해
예배 시간 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안 하시겠습니까?
목사도 참으로 무안한데 말입니다.
총동원 주일을 정해 놓았는데 한 사람도 인도하지 못한 것도 무안한데 본인 자신도 나오지 않아요. 얼마나 황당하게 만들어 버립니까?
물질과 봉사 앞에도 마찬가지 물질로 예수님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들고요 헌신이 없는 생활이 얼마나 예수님을 실없는 자로 만들겠어요.
마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요일 4: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이제 여러분의 모두 것은 다 주를 위하여 있는 것을 아셔야 하고 주를 위하여 사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물질 직장 생업 육신 가정 자녀 아내 남편 등등……. 은사 탈랜트등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해서 안 될 것이요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의 몸을 여러분 마음대로 해서도 안 되고 물질도 생업도 여러분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 잘 되게 해 주십니다.
저는 우리 집안에서나 또 성도들을 볼 때에 깨닫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업을 4번이나 도전 했지만 손해만 보고 돈을 다 털어 버린 자 있습니다. 시작 할 때에 잘 됫 같다는 말을 할 때마다 본인의 입으로 하는데, 어떤 이는 자녀들이 대학 다 나와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은데 혼인길이 잘 열리지 않고 형통의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별로 생활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은데 자신하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하는 일마다 안 됩니다.
내 사업터 내 자녀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지 못하고 아직도 자기 소욕을 위해서 아끼고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신만을 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자리에 우리가 아직도 자신만을 위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절대로 모른다 하십니다. 예배고 기도도 생활도 안 받으십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리고 모든 것이 사용되어 진다면 참으로 더 하여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마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제 무엇인가 기도가 바뀔 때가 되었고 생활이 바뀔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받을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때가 온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내일 염려하지 말고 오늘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을 위하여 열심히 사용되는 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용순아! 선을 위해 열심히 살아라 하는 자들이 되셔야겠습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언어 중에 부자되세요라는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자들의 관심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함께 한 자들의 모두가 그러합니다.
어저께 VJ 클럽이라는 아마추어 비디오 촬영을 방영하는 보는 중에 지난 6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돌아 가시기 몇 년 전의 모습을 촬영한 것을 보게 되었는데 여덟이 넘은 나이신데 허리는 거의 90도를 넘게 꺾어져 있는 모습이요 많은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고생을 엄청나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아마 돌아가실 것을 전제로 한 것으로 기념으로 남겨 둔 것이었는데 자녀들에게 평생에 하실 말씀을 녹화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딸의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 딸의 이름을 부르며 용순아! 용순아! 부디 잘 살아라 내가 죽어서도 너 잘 되기를 바란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사연을 볼 때에 용순 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어렵게 살고 있을 것 같고 그 어미의 소원이 이 자식 잘 되기를 죽으면서도 원한다는 사연을 볼 때에 인지상정(人之常情)을 금 할 길이 없습니다. 그 모습이 인간의 정을 나누는 것 같아 아름답게 보이고 가슴을 찡하게 할지는 몰라도 사람이 잘 사는 데만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하나? 이것 하나에 자유하지 못하나? 하는 생각에 너무나도 씁슬한 마음이 들어서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별로 동감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이라도 삶의 방향을 바로 잡는다고 한다면 그렇게 슬픈 인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하여 있는 자가 아닙니다.
천하의 부귀영화를 다 누려본 솔로몬의 글을 빌자면 차라리 나지 않는 자보다 나을 것이 어디 있으며 낙태된 자가 오히려 더 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끝내는 우리가 돌아 갈 길이 다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인생의 삶을 생활고에만 매여 있는 자로만 전략을 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백이면 백 사람에게 물어도 왜? 당신은 오늘도 무슨 일에 매달려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먹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가 정답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슬프고 그렇게 되지 못하니깐? 억울하고 그것 하나 충족을 시키지 못하니 불쌍하고 처량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슬프고 눈물이 나고 불쌍하기만 존재가 아닙니다.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고 그리고 존귀하고 가치가 있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선한 목표를 위하여 살아가더라도 훨씬 더 잘 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살 수가 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제일 먼저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기가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아니 겁이 나서 겁난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받아야 할 말씀을 받기 보다는 자신들의 소욕을 이루기 위하여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장인어른 추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에 이번 추도 예배 때에는 또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소리만 해서는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장사도 잘 되게 하고 무조건 축복을 빕니다. 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예배를 드린 것 같고 복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제는 무조건 축복을 비는 것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온 식구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되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이제 그냥 축복을 빈다고 복이 되는 것이 압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배를 끝나자 말자 처남이 오늘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날인데 이렇게 끝나고 보니 뭔가 섭섭한데 다시 잘 기도 한 번 더 해 주면 안 되느냐? 고 묻는 것입니다.
어찌 내가 원하는 것을 말 해 주고 들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요.
이같이 우리들의 믿음이 믿지 않는 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찾기 보다는 내 소욕을 이루어 주지 않나? 하고 바라보고 있으니 겁이 난다는 말입니다.
처가 집에는 매년 추도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형제들이 모이면 언제부턴가 추도 예배를 드리지 않고 기도만 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도 자신들의 원하는 것하고 맞지 않으면 각자 자기들의 믿음을 가지고 복 받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 지날 때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무엇을 구걸하려 요한이와 베드로를 쳐다보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함부로 예배를 드린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물론 참으로 원하고 사모하는 심령에게는 얼마든지 말씀하고 기도 하고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자에게는 절대로 믿음적으로 대하지를 않지요
믿음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겉으로 기분 좋게 들어 보라는 소리는 할망정 참으로 바르게 일러 주는 복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은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그 무엇을 기대하면서 올라 온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에게 일러 당부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 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 소욕만을 추구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신앙 할 수가 없고 믿음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들의 소욕만을 기대하고 왔다가 진작 가져야 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생기지 않고 믿음 없이 하나님을 한번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그냥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축복을 받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자신의 소욕을 이루기만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내 마음에 맞는 말씀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자신들의 소욕을 이루기만 고집하는 자들은 제대로 믿음한번 생기지 못하니 믿음이 요구 될 때에 한번도 믿음의 요구에 응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축복이 되겠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행할 때에는 버린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한 자도 마찬가지요 물론 믿는지 얼마 되지 않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것을 구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요구를 들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필요는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것도 모르시면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다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요구에 인간이 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의 모습을 합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놀라운 역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내가 사용되고 내 가정이 사용되고 내 생업 내 직장이 사용 될 때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보다 자신 가정 생업이 더 잘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내 자신이 내 가정이 내 직장과 생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데로 만들겠다고만 하고 있으니 이런 고집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복 받기 힘든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초보적일 때에는 그냥 축복을 해 줄 수도 있습니다만 은 계속적으로 초보적인 자리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성장을 가져오기 위하여 혹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사용되기를 원하시기에 이제는 무조건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아이가 어릴 적에는 부모가 많이 봐 줍니다.
그런데 커서까지 봐주면 그 사람 사람 안 됩니다. 육신이 자라듯이 정신과 지적인 것등이 성장해야 합니다.
온전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창 17: 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75세에 불러서 축복을 약속했으나 이스마엘이나 낳고 하니......
삼하 22: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시 41:12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잠 20: 7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이제 우리 성도들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충 대충 그런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축복을 받으려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완전한 그 믿음대로 복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엡 4:12-13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위하는 자로 부름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일에 사용되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내 소욕만을 위한 것으로 전략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배만 채우는 자가 아닙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것은 하나님도 모르고 없고 자기 자신만의 힘을 의지하고 믿고 살아가야 하는 참으로 의지도 도움도 받지 못할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야 할 자들의 기도 제목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용순아! 내가 죽어서도 너 잘 살기를 바란다 이것이 내 소원이다 할 수 밖에 없으니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불쌍하고 얼마나 추해지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바꾸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바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의 생활에 이용자로 만들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위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꾸만 하나님께 무엇을 받으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해 줄 것이 없는데요? 하지 마십시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하나님으로 무엇을 얻기만 하려고 하고 있는 자는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하나님을 위한 일은 언제든지 돌아 설 수가 있는 자입니다.
왜? 주일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네 이런 일들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당연히 말해 버립니다.
그러니 주일의 존재 의미가 그 사람 앞에는 얼마나 무참히 부셔져 버리겠습니까? 주일은 내어 놓으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기도하라고 하는데 죽어라고 안 해 직분을 가진 자라고 하면서 예배 시간 제대로 참여치 안 해 하나님의 것을 구분해서 물질 봉사도 제대로 하지도 안 해
예배 시간 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안 하시겠습니까?
목사도 참으로 무안한데 말입니다.
총동원 주일을 정해 놓았는데 한 사람도 인도하지 못한 것도 무안한데 본인 자신도 나오지 않아요. 얼마나 황당하게 만들어 버립니까?
물질과 봉사 앞에도 마찬가지 물질로 예수님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들고요 헌신이 없는 생활이 얼마나 예수님을 실없는 자로 만들겠어요.
마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요일 4: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이제 여러분의 모두 것은 다 주를 위하여 있는 것을 아셔야 하고 주를 위하여 사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물질 직장 생업 육신 가정 자녀 아내 남편 등등……. 은사 탈랜트등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해서 안 될 것이요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의 몸을 여러분 마음대로 해서도 안 되고 물질도 생업도 여러분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 잘 되게 해 주십니다.
저는 우리 집안에서나 또 성도들을 볼 때에 깨닫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업을 4번이나 도전 했지만 손해만 보고 돈을 다 털어 버린 자 있습니다. 시작 할 때에 잘 됫 같다는 말을 할 때마다 본인의 입으로 하는데, 어떤 이는 자녀들이 대학 다 나와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은데 혼인길이 잘 열리지 않고 형통의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별로 생활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은데 자신하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하는 일마다 안 됩니다.
내 사업터 내 자녀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지 못하고 아직도 자기 소욕을 위해서 아끼고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신만을 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자리에 우리가 아직도 자신만을 위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절대로 모른다 하십니다. 예배고 기도도 생활도 안 받으십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리고 모든 것이 사용되어 진다면 참으로 더 하여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마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제 무엇인가 기도가 바뀔 때가 되었고 생활이 바뀔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받을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때가 온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내일 염려하지 말고 오늘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을 위하여 열심히 사용되는 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용순아! 선을 위해 열심히 살아라 하는 자들이 되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