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후회 없이 효도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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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44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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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6:19-31 영원히 후회 없이 효도하는 길
101살이나 되신 어머니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장애인 딸을 4살 때부터 60이 훨씬 넘도록 돌보신다는 사연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연에 어머니의 애틋한 혈육의 사랑에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감동을 받고 성금과 격려가 쇄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출판사에는 그 할머니의 사연을 책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작 당사자인 할머니는 많은 격려와 성금이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은 어떻게 하면 앞으로 잘 살아 보실 수 있을까?가 아니라 잘 죽을 수 있을까를 염려하시고 계셨습니다. 딸을 혼자 버려 둘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시며 자신이 생애를 마감 하실 때에 아무도 돌보아 줄 수 없는 불쌍한 딸의 여생도 자신과 함께 끝을 내었으면 한다는 이 세상의 마지막 바람을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장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감히 그 누구도 도전 할 수 없는 백수를 넘어섰는데 이제는 그의 바람은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느냐? 가 관심이 되었으니 잘 사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라 잘 죽은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일찍이 모세는 그의 글에서 인생을 이렇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시91: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결국 우리 인생은 별로 오래 살지도 못하면서 그 삶의 슬픔을 노래하고 이별을 노래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임을 부인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새로운 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죽느냐? 가 아니라 반드시 어떻게 하든지 살아야 한다는 그런 의지를 가진 20대의 랠스턴이라는 미국 남자였습니다. 지난 4월 26일에 미 서부의 사막지대를 혼자 등반을 하다 바위틈에 손이 낀 그는 온갖 방법으로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허사였고 구조대가 올 가능성도 없고 이렇게 3일을 버티다가 물과 양식이 다 떨어지고 급기야는 5일 째 되는 날에는 죽음의 공포가 찾아 왔는데 이렇게 있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구나?를 결단을 내리고 더 힘이 다하기 전에 자신의 팔을 자르기로 결심을 하고 한 시간에 걸쳐서 그 손을 잘라 내었습니다. 먼저 팔을 비틀어 뼈를 뿌질러 놓고 잘 들지 않는 칼로 한 시간에 걸쳐 자신의 팔을 잘라 내고는 10킬로를 달려 온 끝에 구조를 받았는데 그는 미 방송사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리고는 또 말하기를 한 쪽 팔을 잃었지만 앞으로 탐험을 계속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너무 나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도 그 누구에게도 못잖은 격려를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건을 바라보면서 과연 인생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가? 항상 결정을 내리고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죽어야 할 이유를 한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합당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우리 사람이 산다는 것과 죽은 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조금 일찍 죽을 수도 있고 좀더 살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죽어도 후회가 없는 죽음이 되어야 하고 살아도 후회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여겨집니다.
살아도 내가 왜 살아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하고 죽어도 내가 왜 죽어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왜 살아야 하며 왜 죽어야 하는 놀라운 사실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사실이 있습니다.
어떤 두 인물의 이생에 살아 있을 때의 모습과 그리고 육신의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잘 살았다고 생각이 되어지는 사람은 너무나도 후회를 하고 있고요 이 세상에서 저렇게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고 여겨지는 사람은 너무나도 행복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 살았다고만 생각한 자가 죽고 보니 그가 살아 왔던 삶이 결코 잘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아니 후회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후회였습니까?
물론 자신이 후회되었지만 그의 부모의 집에 함께 거하는 형제들의 삶이 후회 할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가장 최고로 혈육을 대하는 기준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잘 먹고 잘 사는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그렇게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린 자였습니다.
비단 옷을 입고 날마다 파티를 열 정도로 부유함을 즐긴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와보니 혈육만을 위한 삶이 행복인 줄 알고 여기에 관심을 기울인 자신이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신자고 불신자고 간에 돌아가신 고인들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생존자에게 가장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내 사랑하는 자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죽고 보니 참으로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과연 무엇으로 우리의 부모에게 영원히 후회 없는 효를 해 드리고 또 무엇이라 논 할 수 있겠습니까?
자주 찾아뵈어라, 용돈을 많이 드려라, 평안하게 해드려라, 등등 이런 내용은 혈육의 정을 가진 자들이 응당히 해야 하는 예가 아니겠습니까? 사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어 왔고요 우리나라만큼 유교의 영향을 받아 효를 이야기 많이 하는 민족도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죽은 조상 잘 대접함으로 무덤 숭배를 통해서라도 복을 받은 것으로까지 속여 죽은 조상이라도 숭배를 철칙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상 숭배 때문에 집안이 잘 되기보다는 조상 숭배로 제사문제로 형제간 다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부모 제삿날 찾아오니 안 오니 그게 뭐 그리 중요한지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 망치게 생겼어요.
성경은 조상숭배를 우상 숭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이 여러분의 죽은 조상이 해 주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육신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살아 계실 때에도 잘 해 주지 못했는데 어찌 죽어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영혼은 귀신이 되어 떠도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영원은 낙원에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음부에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효는 살아 있을 때 이루어져야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죽은 자도 산 자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의 간절한 소원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구하오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간증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28) 정말 기막힌 소원이요 절규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 다섯이 자신이 고통 받고 있는 지옥에 오지 않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옥의 실존을 맛보면서 깨달은 전도의 소원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소원은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그 큰 이유는 죽은 자의 기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는 이 세상의 일에 관여 못 하고 사후에는 금세에서 주어지는 모든 기회가 상실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가 죽은 자를 위하거나, 죽은 자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피차가 살아 있는 동안에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큰 효도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가톨릭에서 말하는 사후에도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고 가르치는 이른바 연옥설 교리는 이단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후손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그 어떠한 속죄 공덕 행위도 전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죽은 자를 위하여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하면 좋은 곳으로 간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합니다.
마치 불교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우면 죽은 자가 좋은 대로 간다고 하는 것과 똑 같은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죽은 부모를 위해 제사를 드린다거나 아니면 죽은 자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살아남은 자들이 속죄 공덕을 쌓는 일을 대신하는 죄들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지옥 간 부자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 공개해 주시는 은혜는 조상 숭배로 미신 섬기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이 산 사람에게 결코 의사전달을 할 수가 없고 생사고락을 주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후회 없이 효도하는 길은 내 사랑하는 부모 형제자매가 지옥 가지 않도록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지옥 가도록 복음 전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불효 중에 불효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우리가 보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가책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저 세상 적으로 잘해 주면 효가 되는 것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투고 분쟁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효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불을 던지러 왔노라
진정한 화평은 하나님과 화평이지 인간의 혈육의 화평이 아닙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와 다투고 딸과 어미가 다툴 것이며…….
어찌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가운데 화평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하지 혈육만의 화평은 하나님이 결코 원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함께 하며 우상과 성전이 어찌 함께 하리요
성경에는 분명히 효가 무엇인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 입니다.
에베소서 6장 1절-2절 말씀을 보면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 하리라,
구원 받은 자의 인격, 성품, 생활로 효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주 예수님을 본받아서 효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모친을 기억하시고 제자에게 부탁하셨던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대로 효도하라는 뜻입니다,
궁극적인 효는 어버이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하라는 뜻입니다,
혈과 육은 희희 낙낙히는 것만으로 우리 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드십시오 육신적인 안일만으로 효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대 할 때에 복음적으로 대하는 것이 진정한 효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 가셨습니다. 이제 부친은 돌아 가신지가 23년이 되시고 모친은 11년이 되셨습니다.
얼굴을 기억하면 이제는 감감합니다.
자꾸만 더듬어서 함께 했던 때의 기억을 찾아보려고 하고 아쉬움을 표하고 쉽기도 하고 혈육의 정을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러나 제 마음은 결코 여기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서 일년에 한 두 번은 산소에 찾아 갑니다 만은 별로 의미는 없었습니다. 지난 며칠 전에도 다녀왔습니다. 경기도 일산이기 때문에 한 시간 남짓하면 다녀옵니다.
나에게도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사랑하신 부모님이 계셨다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 계실 때에 더 잘해주고 못해주고 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혈육에 매여 있는 자도 아니요 추억과 과거에 매여 있을 시간도 없습니다.
우리는 영에 속한 자요 그리고 미래를 향하여 영원을 위하여 사는 자인 줄로 믿습니다.
다만 부모님을 통하여 믿음의 선물을 받은 것이 가장 귀하고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도 중요하지만 믿음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많은 것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믿음을 받았으니 모든 것을 다 받은 것 이상의 축복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적으로 잘 못해주고 잘 해 주고에 매여 있지 마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실 때에 육신의 그 어떤 것보다 부모님들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제 딸이 미국을 간지 만 4년이 되었고 제가 작년에 다녀온 후로 일년이 되었는데 이렇게 떨어져 있으니 제 아무리 사랑하는 딸이지만 얼굴이 가물가물 해요
혈육의 정도 서로 마주보고 대 할 때에 더하여 지지 그렇다고 과거로 돌려서 함께 있을 때를 말하면서 머물려 있어도 안 될 것입니다.
앞으로 장래 지향적으로 무엇인가를 위하여 달려 가야하며 믿음 적으로 영적인 것을 위하여 소망을 두는 생활이 되기를 부모로서 딸을 바라는 것입니다.
육적인 무엇을 이루는 것 아닙니다. 피차가 믿음 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무덤을 바라보고 절을 하거나 울거나 복을 빌거나 소원을 바라거나 하는 혈육의 정에 매여 있지 말아야 합니다.
저의 앞으로 천국에서 만날 부모님을 생각합니다.
얼마나 소망 적이고 얼마나 기대가 되고 감사하고 기쁜 일이요 미래 지향적인지 모릅니다.
혈육에 매여 있고 과거를 추억하고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실 천국에 가면 아내도 남편도 없습니다. 혈육의 부모 자식의 관계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자녀로서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 갈 것입니다.
영원히 후회 없는 효를 생각한다면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고 아무런 의미 없이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내 부모 형제자매의 영혼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 혈육이 구원을 받은 일이라면 내 몸을 관제로 드리기를 기뻐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살아도 복되고 예수 안에 죽는 자도 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감사한 것은 어떤 모습이라도 형제자매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다행이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형제자매라 할지라도 혈육의 조건을 가지고 형인데 동생인데 이거 따지고 다투고 분쟁을 하고요 돈 문제 가지고 다투고요 그래서 의리를 상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는 우리 형제들은 의리가 있어 서로 잘하는 줄 알았어요. 사실 피차 살아 보니깐 그렇지 못하더라고요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믿음의 생활을 하셨지만 은 부모님 형제들도요 그렇지 못해요 형제들과도 원만하지 못함을 보았습니다. 이게 혈육을 가진 인생의 모습이구나?
그런데 이렇게 혈육의 조건이 피차 만족이 되지 않아 결국은 영원히 만날 수가 없을 수도 있는데 혈육의 조건은 맞지 않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각자가 신앙을 하고 있으니 결국은 천국에서 혈육의 조건을 벗어나서 신령한 만남을 가질 것을 생각하니 이 믿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혈육으로 효를 이루는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진정한 효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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