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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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851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사도행전 2:36-42 회개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읍시다.
바울과 아불로가 에베소에 들려 성도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무언가 그들의 교회 생활과 신앙이 좀 이상하였는가. 봅니다. 아니면 더 멋있게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행19:1-7 당신들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고 했을 때에 이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대답입니까?
이같이 우리 가운데 교회 생활을 하지만 성령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저도 성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믿을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까? 고 말입니다.
아니 성령이 여러분의 일상생활과 신앙을 주장하고 계시는가? 말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이 이렇게 중요 하신 줄 아십니까?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믿음을 유지 할 수도 없고 믿음으로 살 수도 없고 범사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크리스천이라는 의미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교인은 교회 등록하고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은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교인은 누구든지 될 수가 있지만 저 사람 어떤 교회 다닌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를 다니던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이 그리스도인은 아무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을 잘하고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롬8:9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떠나면서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이 염려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몇 날이 되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날이 바로 성령 강림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주의 약속을 기다리며(행1:4)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참으로 신앙의 혁명을 가져왔고 신상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행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상당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각적으로 바람 소리가 들리며 시각적으로 불덩어리가 이글이글거림을 볼 수 있었고 이러한 현상이 이들의 언어와 행동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시작하는 변화가 찾아 왔습니다.
체험하는 그리스도 함께하는 그리스도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정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등장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드디어 겁에 질려 자신의 몸을 도사리던 이들이 죽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데 이곳에는 15 개국 이상의 방언으로 증거 되어지는 복음을 듣고 모두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 앞에 이들의 반응은 제 각각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고, 대낮부터 낮술을 마시고 술 취했다고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 한편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타난 대로 말씀을 끝까지 청종하고는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린 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기에 구원받을 자는 반드시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하는 말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우리 인간에게 선한 양심을 주셨지만 사람은 범죄로 인해 이 선한 양심이 더렵혀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양심은 하나님을 찾아가기를 원하고(벧전3:21), 영원을 사모하게 됩니다(전3:11).
이 선한 양심이 범죄로 더럽힘을 받을 때 내 마음 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주는 고통이 아니라 내 선한 양심이 내 스스로에게 주는 고통이기에 양심의 가책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에게 양심의 가책에 어떤 반응을 가져오느냐? 입니다. 양신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면 우리 인간에게는 성경에 나타난 대로 대략 세 가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나 너 할 것 없이 이들 세 사람 중 하나에 속하는 반응으로 행동하게 되리라고 본다.
첫째는 슬그머니 피해 버리는 형태이고, 둘째는 악을 쓰며 덤벼들어 더욱 죄를 짓는 형태이고, 셋째는 어찌할꼬.를 하며 회개하는 형태입니다.
요한복음 8:7-9절에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돌로 공개 처형을 하려고 온 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여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는 말씀 앞에 자신의 정체가 들어나고 찔림을 받았을 때에 겉으로만 빙빙 돌고 그 순간을 모면 하려고만 하는 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여기에 무슨 성령님의 역사가 있을 것이며 더욱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하지만은 그 사람에게는 전혀 변화가 없는 자들로 항상 남아 있을 것이며 그의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한 신앙 즉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자는 결국 토하여 내쳐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대다수의 교인들이 여기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인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 교인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 그리스도인이 결코 될 수가 없는 자입니다.
육에 끌리는 그리스도인이지 성령에 이끌림을 받은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54-58절에는 스데반 집사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쳐서 순교하게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성령에 충만하여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저들의 선한 양심을 찔렀을 때에 그들은 이를 갈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말씀 앞에 악을 쓰며 더욱 죄를 짓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더러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말씀 앞에 대적하는 모습이 결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라고 하지 못 할 것입니다.
결국은 이들의 이 강퍅함을 인하여 스스로 고난에 빠져 들어가고 마는 그 강퍅함으로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복된 자의 모습은 언제든지 말씀 앞에 자신들을 새롭게 하는 회개하는 일이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본문에 저희가 마음에 찔림을 받아. 그곳에 모인 군중들의 반응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여 마음에 찔림을 주는 것은 바로 이렇게 회개시켜 죄 사함을 얻게 하고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주시려는 역사하십니다. 믿습니까?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라” 고 말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변화될 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이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만 하면 하나님과 교제가 시작되고 그 교제함은 나의 삶에 참된 평안과 기쁨의 샘이 솟고 구원의 축복의 감격을 누리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기도는 하는데 전혀 성령님의 역사가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듣기 싫어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데 오로지 인간 자신의 생각과 지혜로 살아가고 있지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답답해서 되겠습니까?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1907년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 집회입니다. 모든 참석자들은 은혜를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마지막 날이 되어도 별 다른 성령의 은혜가 없자 부흥회를 인도하던 길선주목사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1500여명이 모인 대 집회였지마는 성령의 은사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통성기도를 하는 중 길선주목사는 집회에 은사가 없음은 자기의 회개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일어나 큰 소리로 회개했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놈입니다. 저 때문에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언젠가 제 친구가 죽으면서 재산을 정리 해 달라 해서 그것을 정리는 했는데 그 친구의 부인을 속이고 100원을 가로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 길선주목사는 공개적인 회개를 했습니다. 이 회개하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도 죄를 자복하며 통회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한국 역사에 길이 남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나 평양과 한국 교회에 새 부흥 운동과 변화의 물결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제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 성도들이 다 받아 여러분의 삶이 새롭게 되고 복 된 삶이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 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심을 믿지 못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인이 되십니다.
지난 주일에 다윗이 살길이 열렸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 밖에 나의 복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과 땅에서…….
회개는 마음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사람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압니까?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마음은 착한데 행동이 나쁠 수는 없습니다.
내 자신 중심적인 삶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위한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는 남에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요
남을 탓하고 정죄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남을 회개 시키고 정죄하는 자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을 나무라는 것과 같습니다.
요나가 불순종하여 도피하는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모르고 살려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 큰 풍랑이 왜 일어났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이 노했는가 보다 신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 누구 하나를 제물로 드리자. 그러기 위해서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이 때 요나는 “이런 큰 일이 일어난 것이 나 때문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십시오.”
다시 말하면 그는 늦게나마 회개를 했습니다. 내가 책임져야 하겠다는 분명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잘못되게 행하여 그렀습니다. 결국 요나를 바다에 들어 던지고 나니 그렇게 삼킬 듯하던 바닷가 잠잠해졌습니다.
가정의 풍랑도, 교회의 풍랑도, 다 너 때문이 아닙니다. 다 나 때문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다 나 때문이다. 네 덕분이다.’) 이렇게만 되면 우리가 만난 어떠한 풍랑도 잠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기 위하여 기도의 생활이 모든 생활의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나니(롬8:26) 했습니다. 말씀도 성령의 인도함이 필요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까 성령을 받아 읽어야 말씀의 감동이 되 살아납니다.
선교도 성령활동의 결과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이 임해서 활동하는 것이 복음증거의 일입니다. 성령 없이 선교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 라(요4:24)했습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예배라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봉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빌3:3)했습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육체의 일 곧 음란과 호색과 분냄과. 시기와 당 짓는 것과 원수 맺는 일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에서 자유 할 수 있음도 성령의 역사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사람으로 인격의 변화는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되는 일입니다.
이렇듯 믿음의 사람은 일거수일투족이 성령의 결과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고 성령으로 진행하며 성령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성령 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성령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때문에 매일 매일의 삶에서 성령의 충만을 구할 일입니다. 무엇 보다 먼저 성령에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전 삶은 성령에 붙잡힘을 받은 삶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여러분의 나아가는 길을 인도하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 하실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너무나도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번 성령 강림절을 맞이하여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가 기도 하여 성령 충만을 받았듯이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과 아불로가 에베소에 들려 성도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무언가 그들의 교회 생활과 신앙이 좀 이상하였는가. 봅니다. 아니면 더 멋있게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행19:1-7 당신들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고 했을 때에 이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대답입니까?
이같이 우리 가운데 교회 생활을 하지만 성령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저도 성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믿을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까? 고 말입니다.
아니 성령이 여러분의 일상생활과 신앙을 주장하고 계시는가? 말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이 이렇게 중요 하신 줄 아십니까?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믿음을 유지 할 수도 없고 믿음으로 살 수도 없고 범사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크리스천이라는 의미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교인은 교회 등록하고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은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교인은 누구든지 될 수가 있지만 저 사람 어떤 교회 다닌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를 다니던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이 그리스도인은 아무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을 잘하고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롬8:9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떠나면서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이 염려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몇 날이 되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날이 바로 성령 강림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주의 약속을 기다리며(행1:4)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참으로 신앙의 혁명을 가져왔고 신상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행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상당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각적으로 바람 소리가 들리며 시각적으로 불덩어리가 이글이글거림을 볼 수 있었고 이러한 현상이 이들의 언어와 행동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시작하는 변화가 찾아 왔습니다.
체험하는 그리스도 함께하는 그리스도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정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등장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드디어 겁에 질려 자신의 몸을 도사리던 이들이 죽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데 이곳에는 15 개국 이상의 방언으로 증거 되어지는 복음을 듣고 모두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 앞에 이들의 반응은 제 각각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고, 대낮부터 낮술을 마시고 술 취했다고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 한편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타난 대로 말씀을 끝까지 청종하고는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린 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기에 구원받을 자는 반드시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하는 말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우리 인간에게 선한 양심을 주셨지만 사람은 범죄로 인해 이 선한 양심이 더렵혀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양심은 하나님을 찾아가기를 원하고(벧전3:21), 영원을 사모하게 됩니다(전3:11).
이 선한 양심이 범죄로 더럽힘을 받을 때 내 마음 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주는 고통이 아니라 내 선한 양심이 내 스스로에게 주는 고통이기에 양심의 가책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에게 양심의 가책에 어떤 반응을 가져오느냐? 입니다. 양신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면 우리 인간에게는 성경에 나타난 대로 대략 세 가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나 너 할 것 없이 이들 세 사람 중 하나에 속하는 반응으로 행동하게 되리라고 본다.
첫째는 슬그머니 피해 버리는 형태이고, 둘째는 악을 쓰며 덤벼들어 더욱 죄를 짓는 형태이고, 셋째는 어찌할꼬.를 하며 회개하는 형태입니다.
요한복음 8:7-9절에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돌로 공개 처형을 하려고 온 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여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는 말씀 앞에 자신의 정체가 들어나고 찔림을 받았을 때에 겉으로만 빙빙 돌고 그 순간을 모면 하려고만 하는 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여기에 무슨 성령님의 역사가 있을 것이며 더욱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하지만은 그 사람에게는 전혀 변화가 없는 자들로 항상 남아 있을 것이며 그의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한 신앙 즉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자는 결국 토하여 내쳐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대다수의 교인들이 여기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인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 교인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 그리스도인이 결코 될 수가 없는 자입니다.
육에 끌리는 그리스도인이지 성령에 이끌림을 받은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54-58절에는 스데반 집사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쳐서 순교하게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성령에 충만하여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저들의 선한 양심을 찔렀을 때에 그들은 이를 갈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말씀 앞에 악을 쓰며 더욱 죄를 짓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더러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말씀 앞에 대적하는 모습이 결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라고 하지 못 할 것입니다.
결국은 이들의 이 강퍅함을 인하여 스스로 고난에 빠져 들어가고 마는 그 강퍅함으로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복된 자의 모습은 언제든지 말씀 앞에 자신들을 새롭게 하는 회개하는 일이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본문에 저희가 마음에 찔림을 받아. 그곳에 모인 군중들의 반응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여 마음에 찔림을 주는 것은 바로 이렇게 회개시켜 죄 사함을 얻게 하고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주시려는 역사하십니다. 믿습니까?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라” 고 말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변화될 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이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만 하면 하나님과 교제가 시작되고 그 교제함은 나의 삶에 참된 평안과 기쁨의 샘이 솟고 구원의 축복의 감격을 누리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기도는 하는데 전혀 성령님의 역사가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듣기 싫어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데 오로지 인간 자신의 생각과 지혜로 살아가고 있지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답답해서 되겠습니까?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1907년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 집회입니다. 모든 참석자들은 은혜를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마지막 날이 되어도 별 다른 성령의 은혜가 없자 부흥회를 인도하던 길선주목사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1500여명이 모인 대 집회였지마는 성령의 은사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통성기도를 하는 중 길선주목사는 집회에 은사가 없음은 자기의 회개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일어나 큰 소리로 회개했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놈입니다. 저 때문에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언젠가 제 친구가 죽으면서 재산을 정리 해 달라 해서 그것을 정리는 했는데 그 친구의 부인을 속이고 100원을 가로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 길선주목사는 공개적인 회개를 했습니다. 이 회개하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도 죄를 자복하며 통회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한국 역사에 길이 남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나 평양과 한국 교회에 새 부흥 운동과 변화의 물결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제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 성도들이 다 받아 여러분의 삶이 새롭게 되고 복 된 삶이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 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심을 믿지 못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인이 되십니다.
지난 주일에 다윗이 살길이 열렸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 밖에 나의 복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과 땅에서…….
회개는 마음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사람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압니까?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마음은 착한데 행동이 나쁠 수는 없습니다.
내 자신 중심적인 삶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위한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는 남에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요
남을 탓하고 정죄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남을 회개 시키고 정죄하는 자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을 나무라는 것과 같습니다.
요나가 불순종하여 도피하는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모르고 살려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 큰 풍랑이 왜 일어났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이 노했는가 보다 신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 누구 하나를 제물로 드리자. 그러기 위해서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이 때 요나는 “이런 큰 일이 일어난 것이 나 때문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십시오.”
다시 말하면 그는 늦게나마 회개를 했습니다. 내가 책임져야 하겠다는 분명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잘못되게 행하여 그렀습니다. 결국 요나를 바다에 들어 던지고 나니 그렇게 삼킬 듯하던 바닷가 잠잠해졌습니다.
가정의 풍랑도, 교회의 풍랑도, 다 너 때문이 아닙니다. 다 나 때문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다 나 때문이다. 네 덕분이다.’) 이렇게만 되면 우리가 만난 어떠한 풍랑도 잠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기 위하여 기도의 생활이 모든 생활의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나니(롬8:26) 했습니다. 말씀도 성령의 인도함이 필요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까 성령을 받아 읽어야 말씀의 감동이 되 살아납니다.
선교도 성령활동의 결과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이 임해서 활동하는 것이 복음증거의 일입니다. 성령 없이 선교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 라(요4:24)했습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예배라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봉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빌3:3)했습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육체의 일 곧 음란과 호색과 분냄과. 시기와 당 짓는 것과 원수 맺는 일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에서 자유 할 수 있음도 성령의 역사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사람으로 인격의 변화는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되는 일입니다.
이렇듯 믿음의 사람은 일거수일투족이 성령의 결과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고 성령으로 진행하며 성령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성령 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성령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때문에 매일 매일의 삶에서 성령의 충만을 구할 일입니다. 무엇 보다 먼저 성령에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전 삶은 성령에 붙잡힘을 받은 삶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여러분의 나아가는 길을 인도하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 하실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너무나도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번 성령 강림절을 맞이하여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가 기도 하여 성령 충만을 받았듯이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