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이름만이 당신의 삶에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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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57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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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1-10 예수님의 이름만이 당신의 삶에 구원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가 있었는데 이 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살아 갈 수가 없어 구걸로 얻어먹는 인생을 나이 40이 넘도록 살아가는 그런 운명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40여년이란 세월은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았으므로 무엇인가 남에게 유익을 주며 성숙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그런 시기입니다.
그런데 남의 도움을 입고 사는 삶이 그리 행복하지는 못하고 만족하지 못한 삶이 하루하루 이어 가는 그런 삶을 사는데 이 사람에게 행운이 터진 것입니다.
태어나서부터 한번도 사용하지 못했던 40여 년간 사용하지 못하였던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일어서서는 걷고 뛰기까지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었습니까?
오늘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이 같은 이기한 일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마찬가지로 여러분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기만 하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놀라운 일이 나 자신에게도 일어 날 줄로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이 그 사람의 삶의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까?
누군가의 기도로서 예수님의 이름 곧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변화산에 계실 때에 제자 9명이 귀신들린 어린 아이 하나를 가운데 두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주님이 내려오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우리는 왜 능히 그 아이를 고치지 못하였나이까?”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것이 주님의 대답이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지 않느냐? 기도를 하였느냐? 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의 능력의 시대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사는 시대입니다.
맨 정신을 가지고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악한 영에 사로잡혀서 순전히 육체적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악한 영이 사람들을 사로잡아 사람이 돈으로 보이고 부부가 원수가 되고 부자가 원수가 되고 음란과 호색과 더러운 것에 사로잡혀 ……. 진짜로 세상에 종노릇 하며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을 이기고 살아 갈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믿습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가 그 약속을 믿고 기도 했더니 불같은 성령 바람 같은 성령이 임하여 120명의 성도들이 각각 성령의 능력을 입어 새롭게 변화가 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도 성령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불 붓듯 부어 주시겠다고 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실제적으로 예언하며 환상을 보며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은 기도하는 가운데 충만히 받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여선교회 주관으로 1달간을 작정하고 하루 3차례 기도회를 가지는데 그 가운데 참여하는 자들은 모두가 성령의 체험을 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 철야 시간에 간증을 들어보니 30대 초반의 남 성도는 술 담배를 끊고 자신이 정결케 되며 깨끗케 됨을 말하면서 성령이 그를 떠나지 않고 어디든지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을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시는데 뜨거운 성령이 그가 학교에 가서도 또 식당에 가서 사람을 만날 때도 차를 타고 갈 때에도 함께 하심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해가 되어 집니다마는 받지 못하는 자는 이해를 못하실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내게는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일러주시니 세상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술과 담배에 쪄 들려져 있었는데 이제는 본인 스스로 자신을 정결케하고 깨끗케 하는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자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가 가만히 있는데 이런 역사가 일어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선교 회원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올라와서 순종하고 기도 시간마다 올라 와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물론 다른 이들의 간증 가운데서도 너무나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하심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자신들이 새롭게 되고 변화가 되며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을 말하는데 이들 모두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육적인 것이기 전에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육체적인 것만으로는 결코 무엇이든지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있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생사화복 하나님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케 되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천하게도 하시고 사람에게 있음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도함 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든지 아니면 세상의 영 사단의 영에 인도함을 받든지 2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본문에 일어난 사건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 베드로와 요한이를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의 이름으로 일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돕지 않으면 인간적으로 도저히 안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찾는 것,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곧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고 귀을 열어 주시고 입을 열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시고 무엇이든지 감당 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것이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못함이요
기도하지를 않는다면 참으로 하나님께 유감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해보지도 않으면서 안 된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내 삶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 같은 것이 가능할까?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느끼게 되는 삶에 대한 허무감과 절망을 근본적으로 그 밑바닥에서부터 변화시키는 일이 정말 가능할까?”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포기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기적을 포기한 이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이 사람이 무슨 신령한 일을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구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 들어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 입구에 앉아 있으면서도 성전 안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기도하러 성전으로 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에게까지 한 잎의 동전을 구하는 대상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배부르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저 성전 안에 들어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믿음을 말하고, 소망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 나처럼 하루하루 벌어먹기에 바쁜 사람에게 믿음이니 소망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어?”
그래서 그는 이런 것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도 없이 포기해 버렸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나타난 이 앉은뱅이의 필요는 육체적으로 살아남는데 대한 필요뿐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이 땅에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돈 몇 푼이나 빵 한 조각이 필요한 것이지 믿음, 소망, 사랑 같은 것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으로 보람되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이냐 하는 데는 관심도 없고 살 집이나 먹을 양식에 대해서 육체적인 쾌락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관심을 쏟아야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답답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물론 우리 사람에게 육신이 살아가야 할 양식이 필요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위의 문제,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골 3:1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보다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지느냐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가지게 되면 다른 것은 자연히 해결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육적인 관계는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지 인간적인 그 무엇을 충족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은혜를 힘입기 위하여 기도하는 일입니다.
인간의 요구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구원입니다.
앉은뱅이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성전 미문은 이방인의 뜰이라고도 했는데 바로 성전에 들어가 제사하기 위해 짐승을 잡는 장소였습니다. 성전 문턱에 바로 그가 안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구원의 환경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만나지 않으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서 물과 음식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굶어 죽어 가는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당 옆에서 맛있는 음식 냄새 맡으며 죽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디에 있어도 굶어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비참하기로 말하면 식당 옆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더 비참합니다.
이 앉은뱅이의 문제는 그가 앉은뱅이로 평생 걸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육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구원받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교회를 열심히 들락날락 합니다 만은 참으로 답답하고 서글퍼지는 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육체적인 문제 만에 관심을 가졌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는 관심 밖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에만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가졌다 성도와 교제를 한다. 종교적인 생활을 한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진정 만남이 없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앉은뱅이는 여기에서 먼저 벗어나야 했습니다. 신분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주목하여 보라 했을 때 저들에게 은과 금을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가 기대하는 은과 금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이 엄청난 이름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할 수 있는 선지자의 이름 예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사장의 이름 예수, 온갖 죄와 저주와 불행을 가져다주는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만왕의 왕이신 이름 예수, 그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주었을 때 그가 일어났습니다. 육신이 치료되었습니다. 마음에 기쁨을 얻었습니다. 성전에 뛰어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내 자신의 영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육신의 봉사, 물질의 구제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육체적인 임시방편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입니다.
18세기 위대한 영적 부흥 운동가였던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들은 당시에 유행했던 바자회를 하지 않기로 서원 다짐하고 선교 자금 마련이나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한 수단으로 영원히 바자회 같은 것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불행한 세상이 교회의 은과 금에 주목하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에 눈을 돌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가 바자회를 금지하기로 한 것은 바로 그 시대의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은과 금이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가 있었습니다. 단지 하루살이의 문제를 해결해줄 뿐인 은과 금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예수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소유하고 그 이름을 증거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앉은뱅이 곁에는 육신의 봉사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를 불쌍하게 여기고 매일 성전 미문까지 데려다 앉혀주는 육신의 봉사자가 있었습니다. 저 사람 저래서 어떻게 사나 하면서 동전을 던져주는 물질을 봉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앉은뱅이의 생활을 돕는 현실적인 도움을 될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되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도움으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원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물질의 봉사자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앉은뱅이의 평생소원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문은 들었으나 정확하게 전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는 영혼의 안내자를 만나야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는 앉은뱅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70-80%는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일어나 걸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일어나야 합니다. 남에게만 의존하는 데서 일어나야 합니다. 줄줄 모르는 손 마른 자의 병을 고쳐야 합니다. 이제 일어납시다.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 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 역사 하실 것입니다.
가난이 물러가고 질병이 떠나고 더럽고 어두운 영이 물러가고 다같이 앉은뱅이의 신앙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나도 그 구원을 기뻐하며 뛰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증거하는 산 신앙의 소유자가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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