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하나님의 준비된 축복의 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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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625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창 세 기 24: 42-48 당신은 하나님의 준비된 축복의 그릇입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남태평양의 조그마한 섬에서 보냈습니다.
5박 3일을 보내는 중에 6번의 예배와 3번의 세미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9번의 만남에서 주는 메시지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인생이 어떠한 자로 살아야 참으로 복된 삶이 되는가 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바로 가지고 기도하며 헌신하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참으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또한 축복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내용들은 사실 말하기란 쉽기만 사실 내 자신을 그렇게 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더욱이 경제가 어려운 이 시기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는 자는 그렇게 할 수가 있는 자입니다.
그 중에 한 설교자의 예를 들겠습니다
에벤에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목사님은 여기까지 도와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결코 우연과 요행으로 나타난 역사가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께 자신이 드려진 헌신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7-9의 말씀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면서 두 사람을 소개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또 복권을 4000만원어치를 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1등이 되면 10분의 9는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하였는데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다 꽝이 되고 3만 원짜리 한 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분은 교회에 참으로 헌신을 하면서 건설업을 하는 성도가 한분이 있는데 교회나 노회서나 연합회나 필요를 요구하면 거의 자원해서 헌신을 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교회를 자랑을 하는데 자신의 교회는 당회를 해도 3분을 넘어 간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순종하는 잘하는 칭찬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이 성도가 얼마 전에 찾아와서 대전 유성에 건물을 짓고 있는데 분양이 잘 끝나면 순수익 100억을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우리 시찰 가락동에 있는 오장렬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낙원 교회입니다.
사실 그 교회는 개척 교회를 시작하여 지금은 기존 교회 건물을 매입하고 그 주위에 있는 빌딩 2개를 매입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부럽다고 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100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요사이 성도들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지 않습니까? 거의 울다 시피 보내고 있는 자들도 있는 줄 압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수양회 기간 중에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말씀을 주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이들이 세상의 더러운 때를 벗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살아가실 수 있을까? 마치 무슨 음식을 주어도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아이 앞에 무엇을 먹어야 맛있게 먹고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하는 어미의 심정으로 말씀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살아있는 자가 음식이 맛이 있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맛있게 음식을 먹는 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의 음식 먹는 모습을 여러분 보지 않았습니까?
맛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건강한 내 육체가 음식을 맛이 있게 먹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의 맛은 음식 차체에 있기 보다는 내 입에 있고 내 몸의 건강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는 사람은 내 입에 맞는 말씀이기 때문에 은혜를 받기보다는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내 것으로 나의 필요로 한 것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음식은 맛으로 먹을 수 없을 때에는 살기 위해서 먹듯이 오늘 우리 성도들도 내 기호에 맞는 말씀을 찾아 구하기보다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 드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씀을 먹는 자만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이 여기 있사오니 내가 어디로 가겠사옵니까?
저는 지금도 성도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이유 없는 가난이 물러가고 질병과 질고가 떠나고 어두운 세력이 물러가기를 축원합니다.
더 이상 구원 받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으로 복된 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자부를 얻기 위하여 종 엘리에셀을 하란으로 보내었습니다.
이 자부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결혼을 하여 약속의 자녀를 생산하고 그 후손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그러한 복된 여인이 될 것입니다.
많은 여인 중에 이 리브가라는 여인이 축복의 그릇임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맛있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기 때문에 맛있게 음식을 먹는 자이었습니다.
내 입에 맞기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복된 자이기 때문에 아니 하나님의 준비된 축복의 그릇이기 때문에 리브가와 같이 맛있게 말씀을 먹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에셀은 하나님께 아브라함의 자부를 얻기 위하여 확실한 응답을 얻기 위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42절-45절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나의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 찐대 내가 이 우물 이 우물곁에 섰다가 청년 여자가 물을 길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내가 물을 조금 마시우라 하여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약대를 위하여도 길으리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어진 형편에서 주어지는 헌신을 수용하는 사람을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통령이 되고 무슨 어떤 큰 지위와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잘 생겼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에서 그 격에 맞게 행 할 때에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고 어부가 고기를 잡고 일군이 일을 하고 주부가 아이를 돌보고 선생이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기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은 돼지 코에 금고리를 달아 놓은 것 같지 아름답지 못하지만 격에 어울리는 행동은 은쟁반에 금 사과와 같이 우아하고 감히 넘볼 수 없는 아름다움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요구 하실 적에 절대로 그 형편에서 넘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 무슨 큰일을 하고 많은 헌금을 하고가 아닙니다. 자신의 형편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는 행동들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요구는 있었지만 하나님에게 그기에 맞게 내가 드려지는 합당한 헌신은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투자하지만 아깝지 않고 교회를 위하고 주를 위하는 데는 인색하고 그렇게 아까 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온갖 판단과 간섭을 즐겨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금은 내게 합당한 헌신이 요구되어 지는 것이지 나의 요구를 찾는 기회를 만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뱃세다 광야에서 누가 먹을 것이 없느냐? 는 주님의 요구에 부정적이요 비판적이요 못들은 자 같이 되지 마시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선뜻 내어 놓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무엇인가? 구하는 일에만 능사가 되어 있지 자신을 하나님의 요구에 드리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관심도 없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내 입맛에 맞는 것을 찾는 자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드리는 자가 무엇이든지 맛있게 먹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찾다가 망한 왕입니다.
참다운 헌신은 더욱 더 깊고 큰 헌신의 기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이 정도만 하면 되었다고 하는 마음은 하나님에게 받을 축복을 스스로 끊어 버리는 자이며 믿음의 성장을 막아 버리게 됩니다.
내가 주께 이 보다 더 헌신하면 내가 어떻게 되는 것 아닌가? 나도 살고 봐야지 이것이 우리를 망쳐 놓은 길입니다.
헌신은 응당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으로 여기고 늘 부족함을 가져야 합니다.
헌신은 내 스스로 이만하면 되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족하시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다 받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힘겨운 헌신은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극한 가난과 환난이 많았지만 하나님께 대한 헌금과 헌신은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크게 기뻐하시고 오히려 큰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한번도 감동시키지 않고 하나님이여 나를 감동시켜 주십시오.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어디 하나님을 감동 시킨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어쩌면은 우리의 신앙의 생활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가로 막혀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고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한번 감동 시키시기를 바랍니다.
몸이 아프면 신앙생활이 더 움츠려 지기 쉽습니다.
우리 가운데 참으로 몸이 건강하시지 않아서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집사님이 계시는데 순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신다는 말에 저에게 감동적이요 은혜로 다가옵니다.
더 이상 형편에 매여 있는 자가 아니라 형편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리브가에게 항아리의 물 한잔을 원했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함께한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우게 했다는 말입니다.
물 한잔을 주는 데는 1분의 시간이 필요하고 200-300ml의 한 잔의 물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낙타에게 물을 먹이려면 2시간의 시간이 필요하고 8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낙타에게 물을 주는 일은 강아지 몇 마리에게 물을 먹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노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낙타 열 필을 끌고 갔으니까, 한 마리 당 80리터를 마신다고 쳐도 다음과 같이 엄청난 ‘낙타 물주기’ 공식이 나옵니다.
낙타 10마리 X 80리터 = 800리터 800리터= 20리터 용량 바가지 X 40번 물 긷기 40번 물 긷기 X 3분 = 2시간
언 뜻 생각하면 ‘낙타에게 물주는 것쯤이야’라고 여기겠지만, 정작 리브가가 이 일을 끝내는 데는 무려 2시간 이상이 걸렸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내가 요청받은 일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하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헌신의 모습입니다.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그네만 달랑 마시게 하고 집으로 향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요? 그 정도는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낙타에게까지 물을 주겠다고 말하기 전에, 분명 그녀는 그 일을 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지 속으로 계산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낙타에게 물을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바로 그 행위가 그날 저녁 우물가에 모여 있던 다른 처녀들과 그녀와의 현격한 차이점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의 인생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방향으로 달라졌습니다.
결국은 이와 같은 하나님께 향한 헌신이 자신에게 축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한 수고가 자신의 축복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조건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약하고 부족한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려 질 때에 향기로운 재물이 되며 그 재물로 인하여 하나미의 은혜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남태평양의 조그마한 섬에서 보냈습니다.
5박 3일을 보내는 중에 6번의 예배와 3번의 세미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9번의 만남에서 주는 메시지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인생이 어떠한 자로 살아야 참으로 복된 삶이 되는가 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바로 가지고 기도하며 헌신하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참으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또한 축복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내용들은 사실 말하기란 쉽기만 사실 내 자신을 그렇게 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더욱이 경제가 어려운 이 시기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는 자는 그렇게 할 수가 있는 자입니다.
그 중에 한 설교자의 예를 들겠습니다
에벤에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목사님은 여기까지 도와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결코 우연과 요행으로 나타난 역사가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께 자신이 드려진 헌신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7-9의 말씀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면서 두 사람을 소개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또 복권을 4000만원어치를 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1등이 되면 10분의 9는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하였는데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다 꽝이 되고 3만 원짜리 한 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분은 교회에 참으로 헌신을 하면서 건설업을 하는 성도가 한분이 있는데 교회나 노회서나 연합회나 필요를 요구하면 거의 자원해서 헌신을 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교회를 자랑을 하는데 자신의 교회는 당회를 해도 3분을 넘어 간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순종하는 잘하는 칭찬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이 성도가 얼마 전에 찾아와서 대전 유성에 건물을 짓고 있는데 분양이 잘 끝나면 순수익 100억을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우리 시찰 가락동에 있는 오장렬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낙원 교회입니다.
사실 그 교회는 개척 교회를 시작하여 지금은 기존 교회 건물을 매입하고 그 주위에 있는 빌딩 2개를 매입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부럽다고 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100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요사이 성도들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지 않습니까? 거의 울다 시피 보내고 있는 자들도 있는 줄 압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수양회 기간 중에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말씀을 주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이들이 세상의 더러운 때를 벗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살아가실 수 있을까? 마치 무슨 음식을 주어도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아이 앞에 무엇을 먹어야 맛있게 먹고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하는 어미의 심정으로 말씀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살아있는 자가 음식이 맛이 있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맛있게 음식을 먹는 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의 음식 먹는 모습을 여러분 보지 않았습니까?
맛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건강한 내 육체가 음식을 맛이 있게 먹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의 맛은 음식 차체에 있기 보다는 내 입에 있고 내 몸의 건강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는 사람은 내 입에 맞는 말씀이기 때문에 은혜를 받기보다는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내 것으로 나의 필요로 한 것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음식은 맛으로 먹을 수 없을 때에는 살기 위해서 먹듯이 오늘 우리 성도들도 내 기호에 맞는 말씀을 찾아 구하기보다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 드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씀을 먹는 자만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이 여기 있사오니 내가 어디로 가겠사옵니까?
저는 지금도 성도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이유 없는 가난이 물러가고 질병과 질고가 떠나고 어두운 세력이 물러가기를 축원합니다.
더 이상 구원 받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으로 복된 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자부를 얻기 위하여 종 엘리에셀을 하란으로 보내었습니다.
이 자부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결혼을 하여 약속의 자녀를 생산하고 그 후손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그러한 복된 여인이 될 것입니다.
많은 여인 중에 이 리브가라는 여인이 축복의 그릇임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맛있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기 때문에 맛있게 음식을 먹는 자이었습니다.
내 입에 맞기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복된 자이기 때문에 아니 하나님의 준비된 축복의 그릇이기 때문에 리브가와 같이 맛있게 말씀을 먹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에셀은 하나님께 아브라함의 자부를 얻기 위하여 확실한 응답을 얻기 위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42절-45절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나의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 찐대 내가 이 우물 이 우물곁에 섰다가 청년 여자가 물을 길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내가 물을 조금 마시우라 하여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약대를 위하여도 길으리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어진 형편에서 주어지는 헌신을 수용하는 사람을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통령이 되고 무슨 어떤 큰 지위와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잘 생겼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에서 그 격에 맞게 행 할 때에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고 어부가 고기를 잡고 일군이 일을 하고 주부가 아이를 돌보고 선생이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기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은 돼지 코에 금고리를 달아 놓은 것 같지 아름답지 못하지만 격에 어울리는 행동은 은쟁반에 금 사과와 같이 우아하고 감히 넘볼 수 없는 아름다움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요구 하실 적에 절대로 그 형편에서 넘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 무슨 큰일을 하고 많은 헌금을 하고가 아닙니다. 자신의 형편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는 행동들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요구는 있었지만 하나님에게 그기에 맞게 내가 드려지는 합당한 헌신은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투자하지만 아깝지 않고 교회를 위하고 주를 위하는 데는 인색하고 그렇게 아까 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온갖 판단과 간섭을 즐겨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금은 내게 합당한 헌신이 요구되어 지는 것이지 나의 요구를 찾는 기회를 만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뱃세다 광야에서 누가 먹을 것이 없느냐? 는 주님의 요구에 부정적이요 비판적이요 못들은 자 같이 되지 마시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선뜻 내어 놓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무엇인가? 구하는 일에만 능사가 되어 있지 자신을 하나님의 요구에 드리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관심도 없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내 입맛에 맞는 것을 찾는 자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드리는 자가 무엇이든지 맛있게 먹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찾다가 망한 왕입니다.
참다운 헌신은 더욱 더 깊고 큰 헌신의 기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이 정도만 하면 되었다고 하는 마음은 하나님에게 받을 축복을 스스로 끊어 버리는 자이며 믿음의 성장을 막아 버리게 됩니다.
내가 주께 이 보다 더 헌신하면 내가 어떻게 되는 것 아닌가? 나도 살고 봐야지 이것이 우리를 망쳐 놓은 길입니다.
헌신은 응당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으로 여기고 늘 부족함을 가져야 합니다.
헌신은 내 스스로 이만하면 되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족하시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다 받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힘겨운 헌신은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극한 가난과 환난이 많았지만 하나님께 대한 헌금과 헌신은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크게 기뻐하시고 오히려 큰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한번도 감동시키지 않고 하나님이여 나를 감동시켜 주십시오.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어디 하나님을 감동 시킨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어쩌면은 우리의 신앙의 생활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가로 막혀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고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한번 감동 시키시기를 바랍니다.
몸이 아프면 신앙생활이 더 움츠려 지기 쉽습니다.
우리 가운데 참으로 몸이 건강하시지 않아서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집사님이 계시는데 순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신다는 말에 저에게 감동적이요 은혜로 다가옵니다.
더 이상 형편에 매여 있는 자가 아니라 형편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리브가에게 항아리의 물 한잔을 원했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함께한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우게 했다는 말입니다.
물 한잔을 주는 데는 1분의 시간이 필요하고 200-300ml의 한 잔의 물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낙타에게 물을 먹이려면 2시간의 시간이 필요하고 8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낙타에게 물을 주는 일은 강아지 몇 마리에게 물을 먹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노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낙타 열 필을 끌고 갔으니까, 한 마리 당 80리터를 마신다고 쳐도 다음과 같이 엄청난 ‘낙타 물주기’ 공식이 나옵니다.
낙타 10마리 X 80리터 = 800리터 800리터= 20리터 용량 바가지 X 40번 물 긷기 40번 물 긷기 X 3분 = 2시간
언 뜻 생각하면 ‘낙타에게 물주는 것쯤이야’라고 여기겠지만, 정작 리브가가 이 일을 끝내는 데는 무려 2시간 이상이 걸렸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내가 요청받은 일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하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헌신의 모습입니다.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그네만 달랑 마시게 하고 집으로 향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요? 그 정도는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낙타에게까지 물을 주겠다고 말하기 전에, 분명 그녀는 그 일을 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지 속으로 계산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낙타에게 물을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바로 그 행위가 그날 저녁 우물가에 모여 있던 다른 처녀들과 그녀와의 현격한 차이점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의 인생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방향으로 달라졌습니다.
결국은 이와 같은 하나님께 향한 헌신이 자신에게 축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한 수고가 자신의 축복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조건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약하고 부족한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려 질 때에 향기로운 재물이 되며 그 재물로 인하여 하나미의 은혜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