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하는 고생 끝내고 값없이 주는 행복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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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29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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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6:9-18 사서하는 고생 끝내고 값없이 주는 행복 시작
지금 시중에는 바보들이라는 시리즈의 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문제가 뭔지도 모른다.
바보들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바보들은 항상 남의 탓만 한다. 이런 종류의 책입니다.
바보들이 항상 남의 탓만 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서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 지는커녕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문제 해결을 향해 달려가는 당신, 핑계와 불평, 무책임으로 회사를 좀먹는 암적인 존재는 바로 당신이 아닌가?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문제 해결을 향해 달려가는 것…….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요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모릅니다. 이게 누군지…….
바보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하라고 시켰잖아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겁니까?”, “왜 나 보고 다 책임지라고 그래?”
변명으로 날 새는 사람, 남의 얘긴 듣지도 않고 자신만 이해해 달라고 하는 사람, 작은 일도 큰 일로 부풀려 사고를 치는 사람, 말 따로 몸 따로 늘 딴소리를 하는 사람, 우리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우리들, 잘되면 내 덕 못되면 남 탓만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언제’, ‘누가’와 같은 불평과 핑계 대신, 즉,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와 같은 질문을 통해서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호전시킬 수 있도록 개인의 책임의식을 행동으로 연결하며 실천으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내용입니다.
세상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수고를 하는데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는커녕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치는 소이 사서 고생하는 바보 같은 짓이 되고 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바보 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느냐?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바보 같은 행동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고생하지 않고 축복 가운데 얼마든지 살아 갈 수 있는데 이런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보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163번이나 기록되어 있더라고요
잠27:22 어리석은 자는 절구에 넣어 찧어도 그 어리석음이 벗겨지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전10:13 어리석은 자는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리석음으로 시작해서 광기로 끝난다.
시 53: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잠12:15 어리석은 자는 제 잘난 맛에 산다.
잠16:22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이 벌이 된다
잠14:17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짓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변화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생활에는 구원의 은혜와 평안의 은혜와 축복이 따르는 은혜로운 생활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주 사실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14절 가시 채를 뒷발길질을 하는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길들여지지 않은 소나 기타 짐을 실은 짐승들이 주인의 뜻에 복종하지 않고 가시채 즉 쇠로 된 가시가 달린 소몰이 채를 뒷발길질 할 경우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헛되고 위험한 저항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고생을 그만하라고 주님은 사울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 즉 행복된 삶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7절 내가 너를 구원하여…….
18절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기업을 얻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리석은 삶이 청산되어 사서 고생하는 인생이 청산이 되고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축복으로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먼저 어리석은 쓸데없는 수고를 그치시기 바랍니다.
하지 않아도 될 수고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의로운 줄 알고 남을 열심히 정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와같이 남을 정죄하고 스스로 의로움에 처한 자는 신앙의 연수하고 상관이 없고 오히려 신앙 연배가 오래 되고 즉 스스로 나는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여길 때에 생기는 영적 질병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자신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생활에 축복이 따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 적인 신앙생활은 아무런 승산이 없고 아무리 열심을 내지만 고생만 합니다. 아무리 큰 소리쳐도 자기 자신 하나 구원받지 못 합니다. 더욱이 남을 구원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 할 일입니다.
중국의 촉나라의 장수 위연(魏延)은 제갈 공명이 살아 있을 때 위(魏)나라의 수도 허창(許昌)을 기습 공격하자고 공명에게 진언했지만 공명은 무모한 짓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묵살해 버렸습니다. 그때 이후 위연은 만약 공명이 자기의 진언을 받아 들였다면 지금쯤 촉나라는 천하를 통일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자기는 용맹으로는 관우 장비에지지 않고 지략으로는 공명보다 한 수 위에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니 공명이 죽고 나자 당연히 촉한의 군사권은 자기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미 죽은 공명이 자기를 시기하고 멍청한 촉한의 문무백관은 자기의 능력을 몰라주고 있다고 불평을 했으니 이런 사람이 어찌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명은 자기 사후에 반드시 위연이 모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때를 대비하여 위연을 처치할 비밀 계획서를 작성하여 양의(楊儀)라는 사람에게 맡겨 두었었다. 그때 공명은 당신이 위연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그 시점에 이것을 펼쳐보라고 지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공명이 죽은 다음 양의는 결국 위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양의가 공명의 지시대로 예의 작전 지시서를 펼쳐보니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는가?” 라는 말을 위연이 세 번 외칠 수 있다면 내가 당신의 부하가 되겠다는 제안을 하라고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양의는 영문도 모르고 위연을 향하여 ‘누가 감히 나를 죽일 수 있는가’라고 세 번 외칠 수 있다면 나는 즉시 당신의 부하가 되겠소. 이 말을 들은 위연은 호걸웃음을 웃으면서 그까짓 것이야 누워서 떡먹기라며 목청 것 “누가 감히 나를 죽일 수 있느냐?”라고 외쳤습니다. 바로 그 순간 지금까지 위연을 모시고 있던 마대(馬岱)가 단칼에 위연의 목을 베고 말았다는 고사입니다.
우리가 과연 호기를 부리며 “내가 내라고?”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얼마나 바보짓이요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사는 자요 그의 은혜 아래 있는 자입니다.
사울은 그렇게 내가 내라고 큰소리치며 살아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안 중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나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큰일입니다. 내가 작게 보여야 하는데 너무 크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안 중에는 내가 너무나도 대단한 인물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스스럼없이 거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9절 예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 그의 안중에 예수님이 없는 아니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아니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아니 자기 마음대로 해버립니다.
하는 것마다 예수님 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만 골라 합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시행하리니…….
사서 고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만하죠.
사사 건건 예수님이 싫어하는 것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만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투표하고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괜한 격분을 내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찾아다니며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이런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는 않는 나로 인하여 얼마든지 다른 이들에게 이런 결과를 가져 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나로 말미암아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우리 가운데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에게는 언제든지 나를 버릴 수 있게 하시는 기회를 주시 줄로 앎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이 의로운 일인 줄 알아야 여기에는 반드시 승산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 만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많은 이를 구원의 자리에 서게 합니다.
고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되는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를 만드는 자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은혜 중에 만나게 됩니다.
나를 주장하는 자에게는 그의 안 중에 하나님이 없고 그의 생각에도 두지 않으니 물론 하나님을 생활 가운데 만나지를 못하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복된 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입니다.
둔하여 사울과 같이 큰 충격 가운데 만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큰 축복입니다.
사실 사울과 함께 한 자들이 많았지만 이들은 이 난리 중에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행9: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간섭하시고 주장하는데 그럴 모르고 있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줄로 믿으십니까? 아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까?
예,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의 앞길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내가 그릇 된 길을 가고 있다면 그 길을 막아 버리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 단단히 가로 막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 둔하여 세미하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아니 듣지 않으려고 하고 내 마음대로 가니 크게 막아 버리시는 수도 잇습니다.
아예 눈을 멀게 하여 더 이상 나아가게 못하고 하나님의 가르쳐 주심을 듣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지금 내가 어떠한 곤경에 빠져 있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은혜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고집을 피운다면 하나님이 사랑 하신다면 눈이 아니라 더 이상 나아가지도 못하도록 다리라도 부러지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고집을 피운다면 그 육신을 데리고 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게 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하고 거리가 먼 자는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지 그대로 내 버려 둘 것입니다.
돈을 잘 벌든지 못 벌든지 하여튼 나 둘 것입니다.
그러나 택한 자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제 마음대로 놔두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눈이라도 멀게 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로 세워 두면 좋겠습니까?
듣는 자가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눈이 멀었다고 한탄 할 일이 아니라 내가 당 한 이일로 하나님을 듣게 된 것을 기뻐하는 자가 되셔야 하지 않습니까?
반드시 하나님은 치료 하시고 더 좋은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만히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어떠한 상처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 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로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내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도 힘들고 어렵고 잘 되지 않았는데 이제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데 신기하게도 더 잘되고 더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사서 하는 고생 제발 그만 하시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행복한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언제까지 죽을 고생만 하실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도구로만 열심히 사용되어도 내 생활은 하나님의 기업의 축복을 은혜로 받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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