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원하십니까? 진정 들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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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709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가복음 10:46-52 무엇을 원하십니까? 진정 들어 주십니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안산제일교회 조중옥이라는 여집사님이 근래에 책을 한 권 펴냈습니다. 선불집사 축복받았네! 라는 그의 간증 집입니다. 그 내용은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미리 드리라는 내용입니다. 마음도 기도도 미리 드리고 몸도 예물도 미리 드리세요. 그리고 기도응답이 이뤄질 때까지 굳게 믿으며 기도 하세요 그래서 그 집사님의 별명이 선불 집사님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6살 딸의 손에 붙들려 교회로 처음 인도 받았는데 물론 그 딸은 지금 시집을 갔습니다. 역시 사위를 얻게 된 것도 선불 신앙으로 얻게 되었고 남편이 직업 군인을 제대하고 직장을 얻게 된 것도 선불 신앙의 결과라고 합니다.
반듯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을 믿는 그런 마음이 그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선불 신앙의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까지 선불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데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빚을 져서라도 선불의 믿음을 보이고 기도하는데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은 교회와 도움을 받은 이의 신앙과 삶에 축복을 내려주시고, 자신에게는 몇 배의 물질을 채워주시고 신앙의 은혜를 더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불은 대체로 어떤 때 드립니까?
참으로 귀하고 소중하고 꼭 내가 필요로 하고 할 때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을 때에 그것을 공급하는 자에게 먼저 값을 지불하고 그 물건이 나오면 내게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주인은 선불 받은 자에게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러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바가 되셔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이 있음을 아는 자에게는 선불의 믿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꾸만 외상으로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외상 즉 후불 신앙은 참으로 내 편에서는 무리가 없고 편안 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받은 것 내 손에 쥐어 지는 것이 있으면 그기에 따라 적당하게 사례를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하고 이게 얼마나 합리적이요 이성적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세가 나에게 믿음이 생기게 하기 보다는 믿음이 떨어지고 무엇인가? 투자한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심지 않고 잘 되기를 기다리는 자는 정상적인 심보가 아니라 강도요 도적의 심보입니다.
본문에 소경이요 거지된 바디매오는 외상을 합시다 라는 자세가 아니라 선불을 드리는 믿음입니다.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그 스스로가 재물이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은 보시고 너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고 물었습니다.
마치 솔로몬이 천 번의 제사로 하나님께 선불의 믿음을 드린 후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너게 무엇을 줄꼬 하고 묻지 않았습니까?
내 소원의 성취를 위한 신앙이기 보다는 먼저 내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8:21-22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우리는 자꾸만 착각을 하게 됩니다.
내게 무엇인가를 잘 해 주시면 잘 할게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의 소욕을 구하기에 급합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러한 마음으로는 잘 안 됩니다.
먼저 내 자신을 드려 보십시오.
그러면 잘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자신을 드리는 것을 오늘 본문은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할렐루야!
먼저 자신을 드리는 것이 내 자신의 소원을 이 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려 하나님의 뜻을 쫒아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오늘 무엇인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싶습니까?
먼저 하나님께 내 자신을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내 자신을 먼저 드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아니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주께 사용되기를 원하여야 합니다.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하나님은 한 집사님은 나귀같이 사용되고 한 집사님은 걸레같이 사용되시기를 원했습니다.
이 모두는 다 주를 위함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위함입니다.
아무나 나귀가 되고 걸레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되게 하시려고 하시니 그렇게 사용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이것도 막히고 저것도 막히고 은혜는 점점 떨어지고 이렇게 있으면 갈 길은 멀고 해는 지는데 그냥 주십시요가 되어서는 안 되고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주께 드리기를 기뻐하시는데 길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게 살 길입니다.
한 집사님은 그렇게 고민스럽고 걱정스러운 일이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바쳐서 해결되기를 원한다면 그 문제를 두고 온 식구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오늘 이 바디매오는 어떠한 모습을 보임으로 그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어떠한 문제라도 하나님께 있다는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대하여 뜨거운 열망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전부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활을 살펴보면 양과 같은 사람 돼지와 같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양은 시궁창에 빠지면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고 돼지는 거기에 드러누워 뒹굴어 버립니다.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언제든지 세상에서 빠져 나오려는 노력을 하는 자이고 은혜가 되지 못하는 자는 세상에 뒹굴어 버리고 될 되로 되라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릭 프롬」은 인간을 ‘희망을 가진 존재’라고 하였으며 심리학자 「앨프레드 애들러」는 ‘인간의 가장 훌륭한 점은 우리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내 자신을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이김은 주를 믿는 믿음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헨델의 메시야는 헨델의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힘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바울사도가 많은 서신을 써서 기독교의 교리를 완성했고 성경의 체계를 이루었는데 그 편지의 대부분은 안락한 침대나 평안한 휴식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이라, 싸늘하고 춥고 배고프고 매 맞아 고통스러운 감옥 안에서 써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스럽고 힘든 곳에서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 한 곳에서도 신앙의 힘으로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은 환경을 탓하며 사는 사람이요 남을 탓하는 사람입니다. 주어진 여건이 믿음의 기회임을 모르고 불평과 불만만 토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에 의하여 신앙이 변하거나 자신의 가치를 저울질 하는 자들이 아니요, 오히려 신앙의 힘으로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진정한 존재가치 즉 하나님을 위한 삶을 망각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느 스파르타 장군의 아들이 자기의 칼이 너무 짧다고 불평했을 때 그 장군의 대답은 칼이 짧으면 한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찾아갈 형편이 되지 못했던 그 사람은 예수님이 그가 사는 마을을 지나가실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에 그의 기다림은 더욱 간절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달려 나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깊이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가 목마른 사슴으로 그의 사모하는 심령을 표현했듯이 그는 한 마리 목마른 사슴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였던 상징에는 물고기 상징 외에도 사슴 상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슴에 사슴 상징을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나는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간절히 찾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은혜는 받게 되어 있습니다. 간절한 심령으로 주님께 간구하는 이를 주님은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사모하는 심령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임하는 법입니다.
외상 믿음을 버리시고 선불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디매오는 어떠하십니까?
예수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듯이 한나가 입술을 동하며 기도하듯이 예수님의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다른 이들의 입술을 통하여 기도가 되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누구를 위하여 제일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아니 누구에게 내 마음을 쏟게 습니까?
참으로 무엇인가? 자신을 적극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요리 조리 다 빠지고 자신 마음대로 하는 자입니까?
참으로 안타깝지만 저는 별로 관심이 없기 마련입니다.
잘 되도 그만 못 되어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지극 정성으로 하나님 앞에 행한다고 해 보십시오
저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에게 온갖 정성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 쳤을 때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고 예수님께로 가는 걸음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모습입니까?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어떠한 모양이든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모르고 게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찾기 까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께 너무 무관심하고 있었구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한 것이 너무나도 없구나?
선불은 안하고 외상만을 했구나?
우리의 패배는 하나님께 어떠한 모양으로도 나아가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포기함에 있습니다.
조그마한 어려움과 시험이 오면 포기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발을 붙잡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주위 사람을 통하여 방해합니다. 환경을 통하여 방해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약해지고 흔들려서 포기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마귀가 은퇴를 하면서 자기가 가장 잘 사용하던 무기들을 소개하는데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절망과 포기‘라는 물건이었습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비싼 가고 물었을 때 그 마귀는 자신이 이제껏 사용하면서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지옥에 보낼 수가 있었던 가장 강한 무기였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진정 우리의 창조적 신앙의 용기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그럴수록 더욱 도전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마귀의 꾐에 빠져 죄악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이 인간을 향해 포기하셨다면 우리의 존재는 어떠했을까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끊임없는 배신과 죄악과 타락으로 하나님을 버렸던 이러한 인간을 향해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구속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루어 나가셨던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그가 수상에서 물러난 뒤 어려서 다니던 그의 모교를 방문하여 그이 후배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명한 말은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결코, 결코!”라는 명언 이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며 도전하는 자를 하나님은 반드시 복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소원함이 주께 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갈 길을 가르쳐 보여 주고......
어떤 이가 거의 죽게 되어 방황하고 있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 인생의 길이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니 어찌 길이 보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생명이 있는데 그러니 죽을 지경이지요 하나님을 떠남이 고통이요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 주고 싶어 하시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이 원하시고 계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꼭 그 소원을 들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들어 주기는커녕 막아 버리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자기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달려 나갔습니다.
그 겉옷은 그의 전 재산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버리고 달려갔습니다.
새로움의 역사를 위하여 이제 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고 희생 할 줄 아는 용기를 보여 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약속을 얻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신앙이 성숙이 없고 믿음의 힘이 약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벗어버려야 할 것들을 벗지 못하고, 끊어야 할 요소를 끊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그대로 있으면 한 알 그대로라고 했습니다. 아직 내가 썩어져 죽어야 할 부분이 그대로 있으면 나의 신앙의 성장과 은혜의 복된 삶도 옛날 그 상태로 멈추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구속신앙은 십자가가 정점을 이룹니다. 그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포기와 자기희생의 결과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적 신앙은 버릴 것을 버리고, 더욱 새로운 것을 붙잡는 도전입니다.
옛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바울 사도의 믿음이 우리에게 더욱 힘 있게 나타나야 합니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안산제일교회 조중옥이라는 여집사님이 근래에 책을 한 권 펴냈습니다. 선불집사 축복받았네! 라는 그의 간증 집입니다. 그 내용은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미리 드리라는 내용입니다. 마음도 기도도 미리 드리고 몸도 예물도 미리 드리세요. 그리고 기도응답이 이뤄질 때까지 굳게 믿으며 기도 하세요 그래서 그 집사님의 별명이 선불 집사님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6살 딸의 손에 붙들려 교회로 처음 인도 받았는데 물론 그 딸은 지금 시집을 갔습니다. 역시 사위를 얻게 된 것도 선불 신앙으로 얻게 되었고 남편이 직업 군인을 제대하고 직장을 얻게 된 것도 선불 신앙의 결과라고 합니다.
반듯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을 믿는 그런 마음이 그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선불 신앙의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까지 선불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데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빚을 져서라도 선불의 믿음을 보이고 기도하는데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은 교회와 도움을 받은 이의 신앙과 삶에 축복을 내려주시고, 자신에게는 몇 배의 물질을 채워주시고 신앙의 은혜를 더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불은 대체로 어떤 때 드립니까?
참으로 귀하고 소중하고 꼭 내가 필요로 하고 할 때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을 때에 그것을 공급하는 자에게 먼저 값을 지불하고 그 물건이 나오면 내게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주인은 선불 받은 자에게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러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바가 되셔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이 있음을 아는 자에게는 선불의 믿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꾸만 외상으로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외상 즉 후불 신앙은 참으로 내 편에서는 무리가 없고 편안 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받은 것 내 손에 쥐어 지는 것이 있으면 그기에 따라 적당하게 사례를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하고 이게 얼마나 합리적이요 이성적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세가 나에게 믿음이 생기게 하기 보다는 믿음이 떨어지고 무엇인가? 투자한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심지 않고 잘 되기를 기다리는 자는 정상적인 심보가 아니라 강도요 도적의 심보입니다.
본문에 소경이요 거지된 바디매오는 외상을 합시다 라는 자세가 아니라 선불을 드리는 믿음입니다.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그 스스로가 재물이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은 보시고 너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고 물었습니다.
마치 솔로몬이 천 번의 제사로 하나님께 선불의 믿음을 드린 후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너게 무엇을 줄꼬 하고 묻지 않았습니까?
내 소원의 성취를 위한 신앙이기 보다는 먼저 내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8:21-22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우리는 자꾸만 착각을 하게 됩니다.
내게 무엇인가를 잘 해 주시면 잘 할게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의 소욕을 구하기에 급합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러한 마음으로는 잘 안 됩니다.
먼저 내 자신을 드려 보십시오.
그러면 잘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자신을 드리는 것을 오늘 본문은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할렐루야!
먼저 자신을 드리는 것이 내 자신의 소원을 이 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려 하나님의 뜻을 쫒아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오늘 무엇인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싶습니까?
먼저 하나님께 내 자신을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내 자신을 먼저 드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아니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주께 사용되기를 원하여야 합니다.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하나님은 한 집사님은 나귀같이 사용되고 한 집사님은 걸레같이 사용되시기를 원했습니다.
이 모두는 다 주를 위함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위함입니다.
아무나 나귀가 되고 걸레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되게 하시려고 하시니 그렇게 사용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이것도 막히고 저것도 막히고 은혜는 점점 떨어지고 이렇게 있으면 갈 길은 멀고 해는 지는데 그냥 주십시요가 되어서는 안 되고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주께 드리기를 기뻐하시는데 길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게 살 길입니다.
한 집사님은 그렇게 고민스럽고 걱정스러운 일이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바쳐서 해결되기를 원한다면 그 문제를 두고 온 식구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오늘 이 바디매오는 어떠한 모습을 보임으로 그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어떠한 문제라도 하나님께 있다는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대하여 뜨거운 열망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전부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활을 살펴보면 양과 같은 사람 돼지와 같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양은 시궁창에 빠지면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고 돼지는 거기에 드러누워 뒹굴어 버립니다.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언제든지 세상에서 빠져 나오려는 노력을 하는 자이고 은혜가 되지 못하는 자는 세상에 뒹굴어 버리고 될 되로 되라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릭 프롬」은 인간을 ‘희망을 가진 존재’라고 하였으며 심리학자 「앨프레드 애들러」는 ‘인간의 가장 훌륭한 점은 우리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내 자신을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이김은 주를 믿는 믿음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헨델의 메시야는 헨델의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힘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바울사도가 많은 서신을 써서 기독교의 교리를 완성했고 성경의 체계를 이루었는데 그 편지의 대부분은 안락한 침대나 평안한 휴식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이라, 싸늘하고 춥고 배고프고 매 맞아 고통스러운 감옥 안에서 써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스럽고 힘든 곳에서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 한 곳에서도 신앙의 힘으로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은 환경을 탓하며 사는 사람이요 남을 탓하는 사람입니다. 주어진 여건이 믿음의 기회임을 모르고 불평과 불만만 토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에 의하여 신앙이 변하거나 자신의 가치를 저울질 하는 자들이 아니요, 오히려 신앙의 힘으로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진정한 존재가치 즉 하나님을 위한 삶을 망각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느 스파르타 장군의 아들이 자기의 칼이 너무 짧다고 불평했을 때 그 장군의 대답은 칼이 짧으면 한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찾아갈 형편이 되지 못했던 그 사람은 예수님이 그가 사는 마을을 지나가실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에 그의 기다림은 더욱 간절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달려 나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깊이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가 목마른 사슴으로 그의 사모하는 심령을 표현했듯이 그는 한 마리 목마른 사슴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였던 상징에는 물고기 상징 외에도 사슴 상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슴에 사슴 상징을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나는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간절히 찾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은혜는 받게 되어 있습니다. 간절한 심령으로 주님께 간구하는 이를 주님은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사모하는 심령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임하는 법입니다.
외상 믿음을 버리시고 선불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디매오는 어떠하십니까?
예수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듯이 한나가 입술을 동하며 기도하듯이 예수님의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다른 이들의 입술을 통하여 기도가 되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누구를 위하여 제일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아니 누구에게 내 마음을 쏟게 습니까?
참으로 무엇인가? 자신을 적극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요리 조리 다 빠지고 자신 마음대로 하는 자입니까?
참으로 안타깝지만 저는 별로 관심이 없기 마련입니다.
잘 되도 그만 못 되어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지극 정성으로 하나님 앞에 행한다고 해 보십시오
저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에게 온갖 정성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 쳤을 때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고 예수님께로 가는 걸음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모습입니까?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어떠한 모양이든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모르고 게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찾기 까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께 너무 무관심하고 있었구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한 것이 너무나도 없구나?
선불은 안하고 외상만을 했구나?
우리의 패배는 하나님께 어떠한 모양으로도 나아가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포기함에 있습니다.
조그마한 어려움과 시험이 오면 포기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발을 붙잡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주위 사람을 통하여 방해합니다. 환경을 통하여 방해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약해지고 흔들려서 포기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마귀가 은퇴를 하면서 자기가 가장 잘 사용하던 무기들을 소개하는데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절망과 포기‘라는 물건이었습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비싼 가고 물었을 때 그 마귀는 자신이 이제껏 사용하면서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지옥에 보낼 수가 있었던 가장 강한 무기였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진정 우리의 창조적 신앙의 용기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그럴수록 더욱 도전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마귀의 꾐에 빠져 죄악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이 인간을 향해 포기하셨다면 우리의 존재는 어떠했을까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끊임없는 배신과 죄악과 타락으로 하나님을 버렸던 이러한 인간을 향해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구속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루어 나가셨던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그가 수상에서 물러난 뒤 어려서 다니던 그의 모교를 방문하여 그이 후배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명한 말은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결코, 결코!”라는 명언 이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며 도전하는 자를 하나님은 반드시 복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소원함이 주께 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갈 길을 가르쳐 보여 주고......
어떤 이가 거의 죽게 되어 방황하고 있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 인생의 길이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니 어찌 길이 보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생명이 있는데 그러니 죽을 지경이지요 하나님을 떠남이 고통이요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 주고 싶어 하시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이 원하시고 계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꼭 그 소원을 들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들어 주기는커녕 막아 버리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자기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달려 나갔습니다.
그 겉옷은 그의 전 재산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버리고 달려갔습니다.
새로움의 역사를 위하여 이제 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고 희생 할 줄 아는 용기를 보여 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약속을 얻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신앙이 성숙이 없고 믿음의 힘이 약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벗어버려야 할 것들을 벗지 못하고, 끊어야 할 요소를 끊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그대로 있으면 한 알 그대로라고 했습니다. 아직 내가 썩어져 죽어야 할 부분이 그대로 있으면 나의 신앙의 성장과 은혜의 복된 삶도 옛날 그 상태로 멈추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구속신앙은 십자가가 정점을 이룹니다. 그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포기와 자기희생의 결과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적 신앙은 버릴 것을 버리고, 더욱 새로운 것을 붙잡는 도전입니다.
옛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바울 사도의 믿음이 우리에게 더욱 힘 있게 나타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