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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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54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창 세 기 39:1-5 축복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차 전쟁 당시 히틀러 나치 독일 치하에 유태인 600만이 죽은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가스 챔버(gas-chamber)에까지 들어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빅 프랭크라는 정신과 의사는 죽음을 넘나드는 그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으로서 인생에게는 3가지 중심이 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경험적 가치로서 누가 어떤 것을 경험하였는가? 가 소중한 가치가 있고, 또 하나는 창조적 가치로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이로부터 새로운 일을 창출하는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태도적 가치입니다. 가령 누군가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병 걸려 죽는 것을 억울하게 만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고칠까 몸부림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는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이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내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태도적 가치, 이것이 매우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환경을 지배합니다. 환경을 탓하지도 않고, 환경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이라고 하는 환경을 언제나 내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자세를 최선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도적 인간입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환경 때문에 누구 때문에 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가 주인의 의식을 가지고 그리고 내가 주도합니다. 모든 사건은 내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은 나에게 책임이 있음을 알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태도와 자세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간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힘이 든다고 합니다.
어렵다고 합니다.
그 말로 위안을 삼기도 하고, 동정을 받기도 하고, 핑계를 하기도 하지만 힘들다고 어렵다고 말하기 위하여 그러한 환경에 예속되어 살기 위하여 이러한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환경에서 내게 요구되어 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 행하기 위하여 나에게 이러한 환경이 주어 졌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환경이 괴롭다고 만 이제 소리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환경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환경을 잘 감당 할 때에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은 바벨론 군대의 침략으로 인하여 상당히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그 괴로움을 인하여 환경을 탓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하나님은 그 괴로움만 타령하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이와 같은 환경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는데 이 환경에서 무조건 벗어나게만 해 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이 환경에서 이스라엘이 왜 이런 환경이 내개 주어졌는가? 을 알고 자신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성도들이 어렵다고 하며 힘이 든다는 사실도 알고 그리고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어렵고 힘든다는 소리만 하고 소히 환경만을 탓하였지 이 가운데서 내가 믿음으로 어떻게 행해야 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는 것이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개 당한 환경이 나의 행복과 축복을 가로막은 것이 절대로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어려움에서 일으켜 세워 줄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닙니다.
이 시간에도 나의 환경이 참으로 암담하고 힘들고 눈물이 나고 한숨이 나올 지경이라 할지라도 이 환경에 매여 있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를 아시고 하나님이라는 분을 나의 가장 좋은 축복의 환경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백그라운드를 만드시라는 말입니다.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한 성도에게 하나님은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까?
의지가 없고 방황이 되는 이 환경에 내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이 소망이 되어 주시고 의지와 힘과 용기가 되어 주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내게 처한 환경이 비록 나의 부족과 연약함으로 인하여 생겼다 할지라도 오히려 이 환경을 들어 합력하여 선을 만드실 것이요 화라도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두가 이런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복을 받은 인물 요셉을 소개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생각하지 못한 불리한 환경이 찾아 왔습니다.
부잣집에서 12아들 중에서 최고로 사랑을 받는 자가 하루아침에 형님들의 모함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고 남의 나라에 쇠사슬에 끌려 다니는 종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1 절 요셉이 이끌려…….
이렇게 나쁜 환경 비참한 환경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17세에 자기의 사랑하는 형님들에 의해 팔려갑니다. 세상에 억울하다면 이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고, 모순이라면 얼마나 모순입니까? 죄악이라면 최악의 죄악입니다. 차라리 죽여 버릴 것이지. 일생동안 쇠사슬에 묶여서 노예 생활하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이런 비참한 환경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는 현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노예로 팔려가고, 13년 동안 많은 고생을 합니다마는 마침내 당시 최대의 강국인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야말로 해피 앤드(happy end)입니다. 가장 크게 성공한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런 인물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될 수 있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처한 환경에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가까이 나아감을 표현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이런 말들을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기적을 보이지 아니하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자에게 기적을 주시지 않습니다.
가까이 나아오는 자에게 기적을 주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세 가지 질문에 도전을 받고, 이에 응답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 첫째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지식에 대한 도전입니다. 세상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하지만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서 잘못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엇을 아느냐? 에 따라서 그 운명은 각각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강한 도덕성을 말합니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지요. “You can do it. Because you should do it.”― “네가 그것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많이 해놓고 뒤에 가서 후회하고 뉘우치는 사람처럼 비참한 일이 없지 않습니까? 일이 라고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꼭 해야 할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사람에게 지혜와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 입니다. 내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행하는 현실이 미래적 의미를 가지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항상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이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는 참된 소망이라는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새벽에도 소망의 하나님께 나아와 그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특별히 받던 요셉이 형님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해져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노예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몸은 분명히 노예요, 확실한 노예였습니다 마는 노예된 과거로부터 그 마음은 항상 자유 했습니다. 보세요. 그는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남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있을 수도 없는 엄청난 과거로 인해서 억울하고 한이 맺힙니다. 그러나 한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잘못된 것, 그것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해서 아무 일도 못해요. 이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어요.
하나님을 믿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두었을 때에는 얼마나 긍정적으로 삶이 전개 되는지 모릅니다.
총리가 되어 자신을 노예로 팔은 형들이 양식을 구하려 와서 엎드릴 때에 아니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이의 삶의 가치와 철학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표현 하는데 단 한마디로 요셉이가 참으로 복된 사람이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 자를 삼으셨나이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 말고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부정적인 것에는 언제든지 부정적으로 끝나 버리고 긍정적인 것에는 언제든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지난 철야 시간에 황 선생님 올라 오셨습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긍정적으로 인도 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오니 하나님이 소망이 되어 주시고 함께 하시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한 집사님에게도 자신의 환경만을 해결하기를 원하시니 한숨을 쉬다가 해결해 달라고 기도를 하다가 또 한탄을 하다가 또 부르짖다가 또 낙심을 하다가 하니 하나님이 아무런 역사하심이 없으시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대한 사고를 가지니 축복을 명하시지 않습니까?
계속 지속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되었다 하지 말고 하나님이 되었다고 하실 때까지…….
여러분 모두가 그러합니다. 오늘 모두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져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자는 복된 자는 다른 이에게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어 주는 자입니다.
사람에게는 3종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있어나 마나 한 사람.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 남에게 축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는 상당히 잘 못 믿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무조건 내게만 유익이 되는 삶을 찾아서 하는데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니 사는 삶이 겨우 남에게도 도움도 안받고 도움도 안주겠다는 것이 최고의 선이 되고 어디 그것이 쉽습니까? 자기를 위하다 보니 남에게 피해만 주고 사는 자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가지고 남에게 은혜를 나누는 자입니다.
주는 자가 복이 되고 흩어 구제 하여도 부유하게 되며 더 풍성하게 되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요셉은 은혜를 입은 만큼 잘 섬겼다고 합니다.
현재적으로 요셉은 노예로서 진실하게, 정직하게 살아서 주인의 신임을 받는 자이지 있으나 마나하고 문제나 일으키고 불편케 하는 자가 아니라 주인이 가정의 모든 것을 다 마길 정도로 주인의 손발이 되었습니다.
롬12: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었습니다.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자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하고 편안해 하며 만족해하는 자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관심을 가지고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남에게 복을 주는 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선을 위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고 그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셉이 때문에 그 집에 복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아 예 하나님은 요셉을 들어 온 나라를 주관하는 총리로 세우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행하는 일에 하나님이 축복을 해 주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이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로 인정을 받은 자입니다.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주인이 보았는데, 틀림없이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여러분을 통해서 얼마만큼 축복이 나타날 것이냐? 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구나! 하는 증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안 믿는 것이 손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 때문에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 증거 드러나는 것을 보고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입증된 축복을 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틀림없이 살아계셔서 나를 축복하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똑같이 아메리카 대륙을 갔는데, 돈벌기 위해서 간 사람들은 남미 쪽으로 갔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간 사람들은 북미의 청교도들입니다. 미국의 조상들입니다. 똑같은 땅인데, 목적이 다르게 갔습니다. 한 팀은 돈벌기 위해서 갔고, 한 팀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너무 재미나게 나타났습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남미 사람들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해방신학이 남미에서 일어났습니다. 해방신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고 뭐고 말하지 마라! 밥을 먹어야 사람이 사는것 아니냐?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빵이나 하나 달라! 이것이 해방신학입니다. 그것이 남미에서 나왔습니다. 하였튼 거지 풍속은 전부 남미에서 다 나왔습니다. 세계를 먹여 살리는 나라가 북미 미국입니다. 똑 같은 땅에 너무나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지치와는 대명사를 빼고 4305번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가 놀라지 마십시오 더 많습니다. 오천구백 아홉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가라는 단야 1746번 예수단어가 1937번 그리스도가 642번 성령이 247번이나 기록되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다기 한번 찾아 보고 또 찾아 보았습니다.
나중에는 성경에서 직접 세어 보고 싶을 정도로 이렇게 많이 기록되어 있는가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셔야 합니다.
이차 전쟁 당시 히틀러 나치 독일 치하에 유태인 600만이 죽은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가스 챔버(gas-chamber)에까지 들어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빅 프랭크라는 정신과 의사는 죽음을 넘나드는 그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으로서 인생에게는 3가지 중심이 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경험적 가치로서 누가 어떤 것을 경험하였는가? 가 소중한 가치가 있고, 또 하나는 창조적 가치로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이로부터 새로운 일을 창출하는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태도적 가치입니다. 가령 누군가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병 걸려 죽는 것을 억울하게 만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고칠까 몸부림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는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이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내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태도적 가치, 이것이 매우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환경을 지배합니다. 환경을 탓하지도 않고, 환경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이라고 하는 환경을 언제나 내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자세를 최선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도적 인간입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환경 때문에 누구 때문에 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가 주인의 의식을 가지고 그리고 내가 주도합니다. 모든 사건은 내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은 나에게 책임이 있음을 알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태도와 자세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간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힘이 든다고 합니다.
어렵다고 합니다.
그 말로 위안을 삼기도 하고, 동정을 받기도 하고, 핑계를 하기도 하지만 힘들다고 어렵다고 말하기 위하여 그러한 환경에 예속되어 살기 위하여 이러한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환경에서 내게 요구되어 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 행하기 위하여 나에게 이러한 환경이 주어 졌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환경이 괴롭다고 만 이제 소리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환경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환경을 잘 감당 할 때에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은 바벨론 군대의 침략으로 인하여 상당히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그 괴로움을 인하여 환경을 탓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하나님은 그 괴로움만 타령하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이와 같은 환경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는데 이 환경에서 무조건 벗어나게만 해 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이 환경에서 이스라엘이 왜 이런 환경이 내개 주어졌는가? 을 알고 자신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성도들이 어렵다고 하며 힘이 든다는 사실도 알고 그리고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어렵고 힘든다는 소리만 하고 소히 환경만을 탓하였지 이 가운데서 내가 믿음으로 어떻게 행해야 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는 것이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개 당한 환경이 나의 행복과 축복을 가로막은 것이 절대로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어려움에서 일으켜 세워 줄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닙니다.
이 시간에도 나의 환경이 참으로 암담하고 힘들고 눈물이 나고 한숨이 나올 지경이라 할지라도 이 환경에 매여 있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를 아시고 하나님이라는 분을 나의 가장 좋은 축복의 환경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백그라운드를 만드시라는 말입니다.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한 성도에게 하나님은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까?
의지가 없고 방황이 되는 이 환경에 내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이 소망이 되어 주시고 의지와 힘과 용기가 되어 주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내게 처한 환경이 비록 나의 부족과 연약함으로 인하여 생겼다 할지라도 오히려 이 환경을 들어 합력하여 선을 만드실 것이요 화라도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두가 이런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복을 받은 인물 요셉을 소개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생각하지 못한 불리한 환경이 찾아 왔습니다.
부잣집에서 12아들 중에서 최고로 사랑을 받는 자가 하루아침에 형님들의 모함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고 남의 나라에 쇠사슬에 끌려 다니는 종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1 절 요셉이 이끌려…….
이렇게 나쁜 환경 비참한 환경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17세에 자기의 사랑하는 형님들에 의해 팔려갑니다. 세상에 억울하다면 이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고, 모순이라면 얼마나 모순입니까? 죄악이라면 최악의 죄악입니다. 차라리 죽여 버릴 것이지. 일생동안 쇠사슬에 묶여서 노예 생활하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이런 비참한 환경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는 현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노예로 팔려가고, 13년 동안 많은 고생을 합니다마는 마침내 당시 최대의 강국인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야말로 해피 앤드(happy end)입니다. 가장 크게 성공한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런 인물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될 수 있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처한 환경에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가까이 나아감을 표현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이런 말들을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기적을 보이지 아니하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자에게 기적을 주시지 않습니다.
가까이 나아오는 자에게 기적을 주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세 가지 질문에 도전을 받고, 이에 응답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 첫째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지식에 대한 도전입니다. 세상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하지만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서 잘못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엇을 아느냐? 에 따라서 그 운명은 각각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강한 도덕성을 말합니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지요. “You can do it. Because you should do it.”― “네가 그것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많이 해놓고 뒤에 가서 후회하고 뉘우치는 사람처럼 비참한 일이 없지 않습니까? 일이 라고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꼭 해야 할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사람에게 지혜와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 입니다. 내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행하는 현실이 미래적 의미를 가지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항상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이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는 참된 소망이라는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새벽에도 소망의 하나님께 나아와 그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특별히 받던 요셉이 형님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해져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노예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몸은 분명히 노예요, 확실한 노예였습니다 마는 노예된 과거로부터 그 마음은 항상 자유 했습니다. 보세요. 그는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남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있을 수도 없는 엄청난 과거로 인해서 억울하고 한이 맺힙니다. 그러나 한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잘못된 것, 그것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해서 아무 일도 못해요. 이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어요.
하나님을 믿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두었을 때에는 얼마나 긍정적으로 삶이 전개 되는지 모릅니다.
총리가 되어 자신을 노예로 팔은 형들이 양식을 구하려 와서 엎드릴 때에 아니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이의 삶의 가치와 철학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표현 하는데 단 한마디로 요셉이가 참으로 복된 사람이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 자를 삼으셨나이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 말고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부정적인 것에는 언제든지 부정적으로 끝나 버리고 긍정적인 것에는 언제든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지난 철야 시간에 황 선생님 올라 오셨습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긍정적으로 인도 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오니 하나님이 소망이 되어 주시고 함께 하시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한 집사님에게도 자신의 환경만을 해결하기를 원하시니 한숨을 쉬다가 해결해 달라고 기도를 하다가 또 한탄을 하다가 또 부르짖다가 또 낙심을 하다가 하니 하나님이 아무런 역사하심이 없으시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대한 사고를 가지니 축복을 명하시지 않습니까?
계속 지속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되었다 하지 말고 하나님이 되었다고 하실 때까지…….
여러분 모두가 그러합니다. 오늘 모두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져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자는 복된 자는 다른 이에게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어 주는 자입니다.
사람에게는 3종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있어나 마나 한 사람.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 남에게 축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는 상당히 잘 못 믿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무조건 내게만 유익이 되는 삶을 찾아서 하는데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니 사는 삶이 겨우 남에게도 도움도 안받고 도움도 안주겠다는 것이 최고의 선이 되고 어디 그것이 쉽습니까? 자기를 위하다 보니 남에게 피해만 주고 사는 자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가지고 남에게 은혜를 나누는 자입니다.
주는 자가 복이 되고 흩어 구제 하여도 부유하게 되며 더 풍성하게 되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요셉은 은혜를 입은 만큼 잘 섬겼다고 합니다.
현재적으로 요셉은 노예로서 진실하게, 정직하게 살아서 주인의 신임을 받는 자이지 있으나 마나하고 문제나 일으키고 불편케 하는 자가 아니라 주인이 가정의 모든 것을 다 마길 정도로 주인의 손발이 되었습니다.
롬12: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었습니다.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자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하고 편안해 하며 만족해하는 자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관심을 가지고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남에게 복을 주는 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선을 위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고 그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셉이 때문에 그 집에 복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아 예 하나님은 요셉을 들어 온 나라를 주관하는 총리로 세우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행하는 일에 하나님이 축복을 해 주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이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로 인정을 받은 자입니다.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주인이 보았는데, 틀림없이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여러분을 통해서 얼마만큼 축복이 나타날 것이냐? 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구나! 하는 증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안 믿는 것이 손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 때문에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 증거 드러나는 것을 보고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입증된 축복을 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틀림없이 살아계셔서 나를 축복하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똑같이 아메리카 대륙을 갔는데, 돈벌기 위해서 간 사람들은 남미 쪽으로 갔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간 사람들은 북미의 청교도들입니다. 미국의 조상들입니다. 똑같은 땅인데, 목적이 다르게 갔습니다. 한 팀은 돈벌기 위해서 갔고, 한 팀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너무 재미나게 나타났습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남미 사람들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해방신학이 남미에서 일어났습니다. 해방신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고 뭐고 말하지 마라! 밥을 먹어야 사람이 사는것 아니냐?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빵이나 하나 달라! 이것이 해방신학입니다. 그것이 남미에서 나왔습니다. 하였튼 거지 풍속은 전부 남미에서 다 나왔습니다. 세계를 먹여 살리는 나라가 북미 미국입니다. 똑 같은 땅에 너무나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지치와는 대명사를 빼고 4305번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가 놀라지 마십시오 더 많습니다. 오천구백 아홉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가라는 단야 1746번 예수단어가 1937번 그리스도가 642번 성령이 247번이나 기록되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다기 한번 찾아 보고 또 찾아 보았습니다.
나중에는 성경에서 직접 세어 보고 싶을 정도로 이렇게 많이 기록되어 있는가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