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은 당신의 마음가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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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28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가복음 5:25-34 하나님의 구원은 당신의 마음가짐에 있습니다.
예년에 없는 긴 추석절기를 보내셨는데 어찌 여러분들은 즐겁게 만족하게 보내셨습니까?
그렇지 못하다고요 비가 오고, 태풍 매미가 올라오고, 매미가 이렇게 무서운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여건이 내 신상이 별로 변변치 않아서 등등으로 그렇지 못하다고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만족이 없어서 만족하지 못한 것이지 다른 그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저도 육신의 형제들이 만나서 보냈습니다마는 제가 만족 할 수 있음은 육신의 형제이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 에 달려 있지 결코 다른 조건이 나로 하여금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리 인생은 던져진 생애를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thrown life―세상에, 고독에, 혹은 주어진 운명에 던져진 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인간은 상당한 자유를 누리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자유란 거의 없습니다. 아직 세상에 속박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부득불 다른 사람에게 투사해서 자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 가장 대하기에 불가능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대하기 참 힘들다, 이래도 어렵고 저래도 어렵다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제 자신에게 일어나는 열등의식 때문입니다. 혹은 소외감 때문입니다. 혹은 스스로 고독감을 느끼고 아니면 인간적인 판단이 앞을 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달리 위로 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애를 긍정적인 생애로 바꾸고, 긍정적인 자아형성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대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첫 번 째가 소속감입니다. belongingness―다시 말하면 ‘나는 다른 이에게서 받아들여지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내 친구에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NO’라고 하는 대답이 나올 때에 괴로운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반갑게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짜증스럽게 대하고 있는가? 어떤 분은 상대방에게 내게 인사하지 말하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까 “별로 반갑지도 않으면서 반갑다고 인사하는데, 그 사람 참 웃깁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악수는 하고 반갑다며 말은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저 사람이 나를 받아들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소속감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두 번째가 가치감입니다. ‘내가 정말 요구되고 있는가, 저 사람에게 내가 필요한가, 내가 쓸만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는가, 가정에서 내가 정말 필요한가?’ 내가 속한 곳에서 참으로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봐도 쓸모가 없거든요. 그 느낌은 절망감입니다.
세 번째가 신뢰감입니다. component― ‘내가 할 수 있는가? 입니다. ‘내가 정말 능력이 있는가, 이 사회를 위해서 내가 정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결국은 내가 무능하다고 할 때에 나는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내가 할 수 있다면, 그만큼 내 가치는 커지는 것이고,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나는 소모적인 인간이다, 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절대 질문에 대한 자아 응답이 있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self acceptance’― ‘자기 스스로 옳다’라고 인정할 때에 비로소 나라는 존재는 고독에서 벗어날 수고 삶에 의욕과 활기가 차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소외감, 열등의식, 피해의식, 고독의식, 절망의식에 빠집니다. 누구도 위로하지 못합니다.
사실 그 누가 나를 볼 때마다 받아 드리고, 그리고 내가 필요한 존재라고 하며 그리고 선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할 사람은 사실 그 누구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아무도 받아 주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고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선을 행 할 수도 없는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버려진 한 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여인이 처한 입장을 받아 주고 그 여인을 만족하게 해 주지를 못했습니다.
이 여인은 말 할 수 없는 소외감과 그리고 열등의식, 또한 피해 의식 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은 그의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자신을 포기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한 우울증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울증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저에게도 찾아오고 있습니다. 열등의식 피해의식 소외감등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의 처한 그 형편에서 진정한 치유를 얻고 새로운 삶을 얻은 길이 열렸습니다.
그 마음을 형편이 없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자리에게서 예수님께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바람과 물결과 자기 자신들만 바라보고 죽겠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한 이들이 살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풍랑만을 바라보던 마음을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확신합니다.
왜? 세상이 나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만 하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질수록 세상은 더욱 그렇게 나에게 다가 올 것이며 나는 그렇게 만들어 져 갈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버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그 마음을 예수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져 보십시오.
세상에서 해결 받지 못한 그 모든 문제들을 예수님으로부터 해결이 되는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사실 날마다 순간마다 이러한 은혜를 받고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극히 인간적인 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된 만물 중에 우리 인간에게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찾음으로서 구원함을 받게 만드셨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시고기는 새끼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 시키는데 어떤 착한 가시고기는 그렇게 하고 어떤 못된 가시고기는 그렇게 안 하고가 없습니다.
모든 가시고기 다 그렇게 합니다. 가시고기에게 너무 감동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능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감동을 받아야지요.
사람들 중에는 자식을 갖다 내 버리고 심지어는 죽이는 못된 부모도 있지만 가시고기 이상으로 헌신하는 착한 부모들도 있습니다. 이같이 할 수 있음은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사람은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마음은 의식. 감정. 생각 따위의 정신 작용의 총체로 히브리어로 레브라 하는데 이 레브는 마음이란 의미 외에 중심, 내부, 핵심이라는 의미로 육체적으로는 생명의 중심인 가슴, 심장을 의미하였고 정신적으로는 감정의 공간이며 영적으로는 인식 기억 사고의 근거지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작용을 통하여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매주 중요한 영향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로 쓰라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마음 먹은 대로 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마음을 바로 가짐으로 구원함을 얻은 이 여인 같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여인이 마음은 자신의 힘에만 의존함에는 구원이 없음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25절에 보시면 열 두해를 열 둘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만수입니다. 아주 긴 세월을 말할 때 열 둘, 사십 이런 숫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12년이나 앓았다는 말은 희망 없이 앓아왔습니다.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받쳐 보았지만 희망이 없었어요. 여기 이 여인의 절망이 있습니다. 이제는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태, 이것이 이 여인이 처하고 있었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12년 동안을 겪어 왔고 아니 12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깨달은 진리이었습니다.
인간사에서는 내 개인적인 힘으로는 구원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이 여인과 같이 12년을 (긴 세월을 가리킵니다.) 아직도 내 힘으로 버티고 있는 안타까움을 보게 됩니다.
아니 12년을 채워야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을 채우느라고 무던히도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제발 꼭 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나를 받아 주지 않는데 별로 능력도 없는 내 힘으로 나를 받아 달라고 하는 식으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과 같이 하면 할수록 죽을 지경입니다.
이제 세상에 마음을 두지 마시고 아예 포기를 하십시오.
아니 세상적인 마음을 비우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은 그 마음을 예수님께로 향하였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하기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곧 인간적인 그 이상의 결과를 가져오는 놀라운 힘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믿음의 행위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의 구원함에 이룰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뒤에서 옷에 손을 대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쉬운 것 같아요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여인은 하혈을 하기 때문에 얼굴은 창백하고 하체에는 힘이 없고 손은 부르르 떨리고 머리는 현기증이 나고 참으로 자신의 힘으로 많은 군중이 혜치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참으로 죽을힘을 다 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적당히 이성적으로 종교적인 행위만 하고 있습니다. 예식과 형식을 가지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어떻게 섬기라고 하십니까?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적당하게 너 볼일 다보고 시간이 있으면 물질이 여유가 있으면 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스스로 자기에게는 관용하며 이정도하면 되었지 하는 식으로 자신의 할 짖 다하고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사실 그렇게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 하지 않는 것은 결단코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믿음에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찌 예수님이 무리 가운데 계실 때에 이 여인만 예수님의 옷에 손이 대었을 까요?
밀고 밀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보다 더 오래 더 강하게 부딪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이 나간 것은 이 여인 뿐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예배 시간 마다 성도들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고 축복을 하지만은 사실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그 마음에 최선을 다 하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있었는데 그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동기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보니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8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언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그러니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모릅니다.
사실 하나님이 구원의 능력이 없어서 구원치 않음도 아니요 우리의 사정을 모르고 계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믿음이 너무나도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죽을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기도하며 죽을힘을 다해 순종을 하였는가? 말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은 다면 믿음으로 죽어야지
내 스스로 이만하면 되었다는 아주 교만한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만하면 되었다고 하셔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구원하심이 있다고 한다면 아니 하나님께만 구원하심이 있음을 안다고 한다면 어찌 내 자신을 기꺼이 드리기에 주저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밤에도 찾고 낮에도 찾고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신약 시대의 사도들의 외침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까?
이 여인의 부르짖음이 무엇입니까?
역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구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가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핑계가 될 수가 없고 이유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 믿음을 드러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의 글에서 행함이 없으면서 나는 믿노라 하는 경우가 있는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역사를 가져오지 못하고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요 그리고 아무런 역사하심이 없습니다.
귀신들도 믿고 떨지만은 그러나 행함이 없습니다.
절대로 행함이 없이 믿음이 있노라 하는 허탄한 자랑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적인 행위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곧 예수님의 구원하심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여태까지 인간적으로 행한 일에는 별별 노력과 수고를 하였지만은 아무런 효험이 없었지만은 믿음의 행위에는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데 29절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습니다.
사실 온전한 믿음에는 여러분의 생활상에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효과가 나타납니다.
가정과 기업과 생업에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 믿음에는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이 나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요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 생명과 그 축복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제 마음을 예수님께로 바로 쓰십시오.
그에게 내 생애의 전부를 걸어 보십시오.
당장 새로운 생활이 유쾌케 되는 날이 임할 것입니다.
예년에 없는 긴 추석절기를 보내셨는데 어찌 여러분들은 즐겁게 만족하게 보내셨습니까?
그렇지 못하다고요 비가 오고, 태풍 매미가 올라오고, 매미가 이렇게 무서운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여건이 내 신상이 별로 변변치 않아서 등등으로 그렇지 못하다고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만족이 없어서 만족하지 못한 것이지 다른 그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저도 육신의 형제들이 만나서 보냈습니다마는 제가 만족 할 수 있음은 육신의 형제이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 에 달려 있지 결코 다른 조건이 나로 하여금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리 인생은 던져진 생애를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thrown life―세상에, 고독에, 혹은 주어진 운명에 던져진 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인간은 상당한 자유를 누리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자유란 거의 없습니다. 아직 세상에 속박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부득불 다른 사람에게 투사해서 자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 가장 대하기에 불가능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대하기 참 힘들다, 이래도 어렵고 저래도 어렵다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제 자신에게 일어나는 열등의식 때문입니다. 혹은 소외감 때문입니다. 혹은 스스로 고독감을 느끼고 아니면 인간적인 판단이 앞을 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달리 위로 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애를 긍정적인 생애로 바꾸고, 긍정적인 자아형성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대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첫 번 째가 소속감입니다. belongingness―다시 말하면 ‘나는 다른 이에게서 받아들여지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내 친구에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NO’라고 하는 대답이 나올 때에 괴로운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반갑게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짜증스럽게 대하고 있는가? 어떤 분은 상대방에게 내게 인사하지 말하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까 “별로 반갑지도 않으면서 반갑다고 인사하는데, 그 사람 참 웃깁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악수는 하고 반갑다며 말은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저 사람이 나를 받아들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소속감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두 번째가 가치감입니다. ‘내가 정말 요구되고 있는가, 저 사람에게 내가 필요한가, 내가 쓸만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는가, 가정에서 내가 정말 필요한가?’ 내가 속한 곳에서 참으로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봐도 쓸모가 없거든요. 그 느낌은 절망감입니다.
세 번째가 신뢰감입니다. component― ‘내가 할 수 있는가? 입니다. ‘내가 정말 능력이 있는가, 이 사회를 위해서 내가 정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결국은 내가 무능하다고 할 때에 나는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내가 할 수 있다면, 그만큼 내 가치는 커지는 것이고,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나는 소모적인 인간이다, 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절대 질문에 대한 자아 응답이 있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self acceptance’― ‘자기 스스로 옳다’라고 인정할 때에 비로소 나라는 존재는 고독에서 벗어날 수고 삶에 의욕과 활기가 차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소외감, 열등의식, 피해의식, 고독의식, 절망의식에 빠집니다. 누구도 위로하지 못합니다.
사실 그 누가 나를 볼 때마다 받아 드리고, 그리고 내가 필요한 존재라고 하며 그리고 선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할 사람은 사실 그 누구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아무도 받아 주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고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선을 행 할 수도 없는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버려진 한 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여인이 처한 입장을 받아 주고 그 여인을 만족하게 해 주지를 못했습니다.
이 여인은 말 할 수 없는 소외감과 그리고 열등의식, 또한 피해 의식 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은 그의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자신을 포기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한 우울증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울증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저에게도 찾아오고 있습니다. 열등의식 피해의식 소외감등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의 처한 그 형편에서 진정한 치유를 얻고 새로운 삶을 얻은 길이 열렸습니다.
그 마음을 형편이 없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자리에게서 예수님께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바람과 물결과 자기 자신들만 바라보고 죽겠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한 이들이 살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풍랑만을 바라보던 마음을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확신합니다.
왜? 세상이 나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만 하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질수록 세상은 더욱 그렇게 나에게 다가 올 것이며 나는 그렇게 만들어 져 갈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버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그 마음을 예수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져 보십시오.
세상에서 해결 받지 못한 그 모든 문제들을 예수님으로부터 해결이 되는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사실 날마다 순간마다 이러한 은혜를 받고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극히 인간적인 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된 만물 중에 우리 인간에게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찾음으로서 구원함을 받게 만드셨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시고기는 새끼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 시키는데 어떤 착한 가시고기는 그렇게 하고 어떤 못된 가시고기는 그렇게 안 하고가 없습니다.
모든 가시고기 다 그렇게 합니다. 가시고기에게 너무 감동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능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감동을 받아야지요.
사람들 중에는 자식을 갖다 내 버리고 심지어는 죽이는 못된 부모도 있지만 가시고기 이상으로 헌신하는 착한 부모들도 있습니다. 이같이 할 수 있음은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사람은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마음은 의식. 감정. 생각 따위의 정신 작용의 총체로 히브리어로 레브라 하는데 이 레브는 마음이란 의미 외에 중심, 내부, 핵심이라는 의미로 육체적으로는 생명의 중심인 가슴, 심장을 의미하였고 정신적으로는 감정의 공간이며 영적으로는 인식 기억 사고의 근거지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작용을 통하여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매주 중요한 영향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로 쓰라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마음 먹은 대로 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마음을 바로 가짐으로 구원함을 얻은 이 여인 같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여인이 마음은 자신의 힘에만 의존함에는 구원이 없음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25절에 보시면 열 두해를 열 둘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만수입니다. 아주 긴 세월을 말할 때 열 둘, 사십 이런 숫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12년이나 앓았다는 말은 희망 없이 앓아왔습니다.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받쳐 보았지만 희망이 없었어요. 여기 이 여인의 절망이 있습니다. 이제는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태, 이것이 이 여인이 처하고 있었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12년 동안을 겪어 왔고 아니 12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깨달은 진리이었습니다.
인간사에서는 내 개인적인 힘으로는 구원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이 여인과 같이 12년을 (긴 세월을 가리킵니다.) 아직도 내 힘으로 버티고 있는 안타까움을 보게 됩니다.
아니 12년을 채워야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을 채우느라고 무던히도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제발 꼭 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나를 받아 주지 않는데 별로 능력도 없는 내 힘으로 나를 받아 달라고 하는 식으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과 같이 하면 할수록 죽을 지경입니다.
이제 세상에 마음을 두지 마시고 아예 포기를 하십시오.
아니 세상적인 마음을 비우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은 그 마음을 예수님께로 향하였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하기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곧 인간적인 그 이상의 결과를 가져오는 놀라운 힘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믿음의 행위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의 구원함에 이룰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뒤에서 옷에 손을 대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쉬운 것 같아요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여인은 하혈을 하기 때문에 얼굴은 창백하고 하체에는 힘이 없고 손은 부르르 떨리고 머리는 현기증이 나고 참으로 자신의 힘으로 많은 군중이 혜치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참으로 죽을힘을 다 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적당히 이성적으로 종교적인 행위만 하고 있습니다. 예식과 형식을 가지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어떻게 섬기라고 하십니까?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적당하게 너 볼일 다보고 시간이 있으면 물질이 여유가 있으면 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스스로 자기에게는 관용하며 이정도하면 되었지 하는 식으로 자신의 할 짖 다하고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사실 그렇게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 하지 않는 것은 결단코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믿음에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찌 예수님이 무리 가운데 계실 때에 이 여인만 예수님의 옷에 손이 대었을 까요?
밀고 밀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보다 더 오래 더 강하게 부딪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이 나간 것은 이 여인 뿐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예배 시간 마다 성도들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고 축복을 하지만은 사실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그 마음에 최선을 다 하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있었는데 그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동기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보니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8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언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그러니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모릅니다.
사실 하나님이 구원의 능력이 없어서 구원치 않음도 아니요 우리의 사정을 모르고 계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믿음이 너무나도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죽을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기도하며 죽을힘을 다해 순종을 하였는가? 말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은 다면 믿음으로 죽어야지
내 스스로 이만하면 되었다는 아주 교만한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만하면 되었다고 하셔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구원하심이 있다고 한다면 아니 하나님께만 구원하심이 있음을 안다고 한다면 어찌 내 자신을 기꺼이 드리기에 주저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밤에도 찾고 낮에도 찾고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신약 시대의 사도들의 외침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까?
이 여인의 부르짖음이 무엇입니까?
역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구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가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핑계가 될 수가 없고 이유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 믿음을 드러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의 글에서 행함이 없으면서 나는 믿노라 하는 경우가 있는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역사를 가져오지 못하고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요 그리고 아무런 역사하심이 없습니다.
귀신들도 믿고 떨지만은 그러나 행함이 없습니다.
절대로 행함이 없이 믿음이 있노라 하는 허탄한 자랑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적인 행위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곧 예수님의 구원하심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여태까지 인간적으로 행한 일에는 별별 노력과 수고를 하였지만은 아무런 효험이 없었지만은 믿음의 행위에는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데 29절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습니다.
사실 온전한 믿음에는 여러분의 생활상에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효과가 나타납니다.
가정과 기업과 생업에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 믿음에는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이 나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요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 생명과 그 축복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제 마음을 예수님께로 바로 쓰십시오.
그에게 내 생애의 전부를 걸어 보십시오.
당장 새로운 생활이 유쾌케 되는 날이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