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87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창 세 기 13:9-18 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자
사람이 바라보는 눈은 3가지로 구분이 되어집니다.
그 사람의 육안의 시력입니다. 이 시력은 안경이라는 기구를 통하여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안이 있습니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지안은 노력을 통하여 얻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안경으로도 지식으로도 얻을 수 없는 영안이 있습니다. 이 눈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눈을 가지고 바라보는 눈의 판단을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세상적인 풍요를 따라 나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절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인간 롯이 스스로 인간적인 눈으로 참으로 육신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장차 멸망할 땅을 축복의 땅같이 보였지만 결국은 인간적인 선택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조건들을 선택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당장은 축복을 받은 것 같지만 멀지 않아 축복이 아니라 멸망의 조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눈은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눈이었습니다.
그 눈으로 바라 볼 때에 동서남북 어디든지 사람의 조건으로는 합당치 아니하였지만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자손이 대대로 누릴 그런 축복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14절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눈으로 곧 믿음으로 바라 볼 때에 사실 아브라함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곳은 바로 축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베를린 제일 교회 수련회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월요일 밤 10시 경에 베를린에 도착하여 다음날 오전에 함부르크가 가까이 있는 북쪽 베르멘에 있는 수련회 장소로 버스로 5시간 달려 이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저녁부터 4박 5일간의 집회가 토요일 새벽까지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크게 2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30-40년 전에 꽃다운 나이로 간호사 혹은 광부로 오신 50-60대의 성도들과 그리고 20-30대의 유학생들입니다.
나이도 30년 가까이 차이가 나고 그리고 사고도 다르고 삶의 형태도 다릅니다.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 같이 하나가 되어 은혜를 받기 시작하는데 저는 놀라버렸습니다.
60명이 참석했는데 거의 반반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어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했습니까?
그 누구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0-40년 전에 온 자들은 타향의 삶에서 인생을 다 보내고 이제는 참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학생들은 타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힘이 아니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모두가 이러한 인간적인 조건이 있었지만 오로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시간 시간마다 주시는 말씀을 얼마나 잘 받아드리는지 나중에 결단의 시간에는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적극적인 신앙을 고백하는데 특히 남성들의 고백은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모두가 적극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토요일 집회가 끝이 나고 다음 날 주일 날 예배를 인도하는데 모두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을 하시는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축복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제가 나오는 길에 너도 나도 머리를 내 밀고 기도를 하여 달라고 하여 올 때까지 기도를 해 주고 왔습니다.
축복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데 있는 것입니다.
저는 누가 누군지를 알지 못합니다.
안수를 하는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합당하게 축복을 하시는데 나중에 그들이 하는 말이 아니 우리 목사님이 언제 강사 목사님에게 우리 사정을 다 알려 주어서 우리를 이렇게 잘 알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누구누구를 시시콜콜 묻고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문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음에 있습니다.
저는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자는 참으로 불안합니다.
그들은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행동을 합니다.
멀리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그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행동하는 자는 지금 자신들이 어떤 경우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축복을 하십니다.
그래서 합력하여 선이 라는 말이 나오고 화라도 변하여 복이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행하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집으로 와서 이메일을 체크 하는데 제 보다 이 메일이 독일에서 먼저 와 있었습니다.
한 여학생이었습니다.
플룻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지금 상당한 고민에 빠져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알지를 못하고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안수를 해 주었는데 다시 공부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유는 5년간 플룻을 전공을 했는데 학점 관리가 되지 않아 자퇴를 하고 또 다시 대학에 들어가 5년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여학생에게 학점이 어떻게 되어 졸업을 시켜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달란트를 주었는데 그것을 성실히 잘하면 축복 하리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졸업하고 하지 않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마 이 학생이 이렇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감당을 하면은 하나님은 반드시 지금 어떻게 하든지 졸업이나 하고 보자하는 것보다 더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으로 멀리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당장의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그에게는 현실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에 내 눈을 만족케 하는 소돔과 고모라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장차 크게 멸망을 당 할 것입니다.
멀리 에덴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집회를 마치고 4일간 2200킬로를 달려 이태리 베네치아와 스위스 융프라우 아레취 빙하를 다녀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숙식을 차에서 해결 할 수 있는 레저 차를 빌려 주었습니다.
이태리에서 알프스 산을 넘어 스위스에 이르게 되는데 남쪽으로 된 산의 면은 이태리 지역이고 북쪽으로 펼쳐진 면은 스위스 지역인데 똑 같은 산인데 이렇게 주준이 차이가 나는 줄 몰랐습니다.
이태리 쪽의 집은 오래 되어 낡아 있고 산림 자원도 황폐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위스 쪽은 모두가 별장 같은 집이었으며 온 산림이 푸른 초원으로 덥혀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 또한 달라습니다.
이태리 쪽은 도적들이 많고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비일 비재 하며 어찌나 포악하고 난폭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난폭한지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주행하는 차를 보아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살벌 한지 제 앞에서 차가 스스럼없이 끼어들고 끼어드는 것을 용납지 않는 운전자 사이에서 그만 차가 하나가 피하다가 전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치하면 제 차에 그 차가 팅겨들번 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는 사람 자체가 달랐습니다.
도적 조심하라는 말이 없고 휴게소 분위기부터 달랐습니다.
아주 여유가 있고 순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이탈리아는 점점 더 가난하게 되어 갈 소지가 많습니다.
무엇 때문일 것 같습니까?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 했습니다.
그것은 마을 마을 마다 교회가 마을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크고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습니다.
유럽의 번성기는 바로 기독교와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쇠퇴는 기독교의 몰락과 함께 되어 가고 있습니다.
동 베를린에 가 보았습니다.
통일전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가 망하였음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동 베를린과 동독지역은 가난과 범죄의 소굴이 되어 있어 사람들이 그 곳을 가기를 기피한다고 합니다.
북한 아무리 큰 소리 치지만 끝까지 하나님 부인하면 언제 망 할 줄 모릅니다.
국민들은 가난과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는 공산 정권 하나님 부인하는 정권 참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아직도 번성을 하고 있는 나라들은 개신교를 그나마 신앙하는 나라들이었고 저 이태리 같은 케토릭 국가들은 상당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교황이 있으면 무엇 합니까?
교황이 있는 로마시 자체가 도적의 소굴이요 향락의 소굴입니다. 매일 매일 미사가 들어지면 무엇 합니까?
사람하나 변화 시키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남미에는 케토릭이 들어가 마약 경제 등으로 나라마다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나라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북미는 기독교의 정신으로 얼마나 많이 번창한지 모릅니다.
지금 유럽등 세계는 미국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김종필씨가 박정희 정권 때에 총리 시절에 세계 일주를 하고 난후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불교 국가는 다 가난하고 기독교 국가가 흥하다 는 것 말입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무엇 하나 세계적으로 내 세울 만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왕궁이라 하지만 다른 나라 한 성주의 집에 비유 할 바도 되지 않습니다.
또한 무슨 지하자원 등이 풍부합니까?
그렇다고 정치인들이 정치를 깨끗하게 합니까?
관료들이 친절합니까?
아직도 멀었습니다.
구청에 서류를 한번 띄어 가보니 민원인들을 하고 전화 상담을 하고 난후 자기들끼리 민원인 욕하는 것 예사고요 국민의 세금으로 생활을 하지만은 자신들의 것을 주는 것 같이 거만을 뜹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가 이 만큼 먹고 사는 것은 믿는 자들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섬기니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것을 아셔야 합니다.
노무현 정권 참으로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기도하고 있는 이상은 하나님이 이 나라를 축복하시고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 나라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만큼 밥 먹고 사는 민족입니다.
베네치아 융프라우에서 단체 관광객 배낭 여행객 중에 한국인 만나는 것 쉽습니다.
불황 불황 하지만 세계에 돈 쓰고 다니는 민족은 한국인 들입니다.
다녀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니지 말고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세계를 보고 다녀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계는 믿음을 가진 한국 사람들의 손으로 들어 올 것입니다.
특히 우리 기독인들과 교역자들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소리가 들려 올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영적으로 갈급해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집 사람 찬양을 듣기만 하여도 심령이 치유되고 질병이 낳았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베를린 제일 교회가 진짜 베를린 제일 교회 유럽의 제일 교회가 되도록 하나님이 축복을 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십시오.
참으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축복을 명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손에게도 축복을 하실 것입니다. 이런 복된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바라보는 눈은 3가지로 구분이 되어집니다.
그 사람의 육안의 시력입니다. 이 시력은 안경이라는 기구를 통하여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안이 있습니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지안은 노력을 통하여 얻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안경으로도 지식으로도 얻을 수 없는 영안이 있습니다. 이 눈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눈을 가지고 바라보는 눈의 판단을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세상적인 풍요를 따라 나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절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인간 롯이 스스로 인간적인 눈으로 참으로 육신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장차 멸망할 땅을 축복의 땅같이 보였지만 결국은 인간적인 선택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조건들을 선택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당장은 축복을 받은 것 같지만 멀지 않아 축복이 아니라 멸망의 조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눈은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눈이었습니다.
그 눈으로 바라 볼 때에 동서남북 어디든지 사람의 조건으로는 합당치 아니하였지만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자손이 대대로 누릴 그런 축복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14절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눈으로 곧 믿음으로 바라 볼 때에 사실 아브라함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곳은 바로 축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베를린 제일 교회 수련회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월요일 밤 10시 경에 베를린에 도착하여 다음날 오전에 함부르크가 가까이 있는 북쪽 베르멘에 있는 수련회 장소로 버스로 5시간 달려 이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저녁부터 4박 5일간의 집회가 토요일 새벽까지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크게 2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30-40년 전에 꽃다운 나이로 간호사 혹은 광부로 오신 50-60대의 성도들과 그리고 20-30대의 유학생들입니다.
나이도 30년 가까이 차이가 나고 그리고 사고도 다르고 삶의 형태도 다릅니다.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 같이 하나가 되어 은혜를 받기 시작하는데 저는 놀라버렸습니다.
60명이 참석했는데 거의 반반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어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했습니까?
그 누구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0-40년 전에 온 자들은 타향의 삶에서 인생을 다 보내고 이제는 참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학생들은 타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힘이 아니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모두가 이러한 인간적인 조건이 있었지만 오로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시간 시간마다 주시는 말씀을 얼마나 잘 받아드리는지 나중에 결단의 시간에는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적극적인 신앙을 고백하는데 특히 남성들의 고백은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모두가 적극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토요일 집회가 끝이 나고 다음 날 주일 날 예배를 인도하는데 모두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을 하시는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축복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제가 나오는 길에 너도 나도 머리를 내 밀고 기도를 하여 달라고 하여 올 때까지 기도를 해 주고 왔습니다.
축복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데 있는 것입니다.
저는 누가 누군지를 알지 못합니다.
안수를 하는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합당하게 축복을 하시는데 나중에 그들이 하는 말이 아니 우리 목사님이 언제 강사 목사님에게 우리 사정을 다 알려 주어서 우리를 이렇게 잘 알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누구누구를 시시콜콜 묻고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문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음에 있습니다.
저는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자는 참으로 불안합니다.
그들은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행동을 합니다.
멀리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그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행동하는 자는 지금 자신들이 어떤 경우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축복을 하십니다.
그래서 합력하여 선이 라는 말이 나오고 화라도 변하여 복이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행하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집으로 와서 이메일을 체크 하는데 제 보다 이 메일이 독일에서 먼저 와 있었습니다.
한 여학생이었습니다.
플룻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지금 상당한 고민에 빠져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알지를 못하고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안수를 해 주었는데 다시 공부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유는 5년간 플룻을 전공을 했는데 학점 관리가 되지 않아 자퇴를 하고 또 다시 대학에 들어가 5년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여학생에게 학점이 어떻게 되어 졸업을 시켜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달란트를 주었는데 그것을 성실히 잘하면 축복 하리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졸업하고 하지 않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마 이 학생이 이렇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감당을 하면은 하나님은 반드시 지금 어떻게 하든지 졸업이나 하고 보자하는 것보다 더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으로 멀리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당장의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그에게는 현실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에 내 눈을 만족케 하는 소돔과 고모라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장차 크게 멸망을 당 할 것입니다.
멀리 에덴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집회를 마치고 4일간 2200킬로를 달려 이태리 베네치아와 스위스 융프라우 아레취 빙하를 다녀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숙식을 차에서 해결 할 수 있는 레저 차를 빌려 주었습니다.
이태리에서 알프스 산을 넘어 스위스에 이르게 되는데 남쪽으로 된 산의 면은 이태리 지역이고 북쪽으로 펼쳐진 면은 스위스 지역인데 똑 같은 산인데 이렇게 주준이 차이가 나는 줄 몰랐습니다.
이태리 쪽의 집은 오래 되어 낡아 있고 산림 자원도 황폐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위스 쪽은 모두가 별장 같은 집이었으며 온 산림이 푸른 초원으로 덥혀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 또한 달라습니다.
이태리 쪽은 도적들이 많고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비일 비재 하며 어찌나 포악하고 난폭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난폭한지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주행하는 차를 보아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살벌 한지 제 앞에서 차가 스스럼없이 끼어들고 끼어드는 것을 용납지 않는 운전자 사이에서 그만 차가 하나가 피하다가 전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치하면 제 차에 그 차가 팅겨들번 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는 사람 자체가 달랐습니다.
도적 조심하라는 말이 없고 휴게소 분위기부터 달랐습니다.
아주 여유가 있고 순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이탈리아는 점점 더 가난하게 되어 갈 소지가 많습니다.
무엇 때문일 것 같습니까?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 했습니다.
그것은 마을 마을 마다 교회가 마을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크고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습니다.
유럽의 번성기는 바로 기독교와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쇠퇴는 기독교의 몰락과 함께 되어 가고 있습니다.
동 베를린에 가 보았습니다.
통일전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가 망하였음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동 베를린과 동독지역은 가난과 범죄의 소굴이 되어 있어 사람들이 그 곳을 가기를 기피한다고 합니다.
북한 아무리 큰 소리 치지만 끝까지 하나님 부인하면 언제 망 할 줄 모릅니다.
국민들은 가난과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는 공산 정권 하나님 부인하는 정권 참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아직도 번성을 하고 있는 나라들은 개신교를 그나마 신앙하는 나라들이었고 저 이태리 같은 케토릭 국가들은 상당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교황이 있으면 무엇 합니까?
교황이 있는 로마시 자체가 도적의 소굴이요 향락의 소굴입니다. 매일 매일 미사가 들어지면 무엇 합니까?
사람하나 변화 시키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남미에는 케토릭이 들어가 마약 경제 등으로 나라마다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나라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북미는 기독교의 정신으로 얼마나 많이 번창한지 모릅니다.
지금 유럽등 세계는 미국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김종필씨가 박정희 정권 때에 총리 시절에 세계 일주를 하고 난후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불교 국가는 다 가난하고 기독교 국가가 흥하다 는 것 말입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무엇 하나 세계적으로 내 세울 만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왕궁이라 하지만 다른 나라 한 성주의 집에 비유 할 바도 되지 않습니다.
또한 무슨 지하자원 등이 풍부합니까?
그렇다고 정치인들이 정치를 깨끗하게 합니까?
관료들이 친절합니까?
아직도 멀었습니다.
구청에 서류를 한번 띄어 가보니 민원인들을 하고 전화 상담을 하고 난후 자기들끼리 민원인 욕하는 것 예사고요 국민의 세금으로 생활을 하지만은 자신들의 것을 주는 것 같이 거만을 뜹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가 이 만큼 먹고 사는 것은 믿는 자들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섬기니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것을 아셔야 합니다.
노무현 정권 참으로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기도하고 있는 이상은 하나님이 이 나라를 축복하시고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 나라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만큼 밥 먹고 사는 민족입니다.
베네치아 융프라우에서 단체 관광객 배낭 여행객 중에 한국인 만나는 것 쉽습니다.
불황 불황 하지만 세계에 돈 쓰고 다니는 민족은 한국인 들입니다.
다녀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니지 말고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세계를 보고 다녀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계는 믿음을 가진 한국 사람들의 손으로 들어 올 것입니다.
특히 우리 기독인들과 교역자들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소리가 들려 올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영적으로 갈급해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집 사람 찬양을 듣기만 하여도 심령이 치유되고 질병이 낳았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베를린 제일 교회가 진짜 베를린 제일 교회 유럽의 제일 교회가 되도록 하나님이 축복을 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십시오.
참으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축복을 명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손에게도 축복을 하실 것입니다. 이런 복된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