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선의 요구에 적극적입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8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야 고 보 서 4:13-17 믿음은 선의 요구에 적극적입니다
어제 어떤 분과 이야기 하는 가운데 모대기업체에서 60명의 직원을 뽑는데 1,200명이 응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능력있는 자들에게 청탁이 80건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기업의 회장이 3명을 추천하였고 물론 이야기하는 본인도 1명을 청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60명의 모집에 80명의 청탁이 들어 왔으니 인사과에서는 이 얼마나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인사 담당자가 회장을 찾아 가서 자초지정을 이야기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원을 채용하기 위해서는 토익이 몇 점 이상이어야 되고 그리고 이러 이러한 인물이 필요로 하는데 하고 고민을 하니 그 자리에서 회장이 자신이 청탁한 서류 3장을 되돌려 달라고 하고는 찢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다가는 회사 꼴이 말이 아니겠다 청탁을 한 자들에게 매이지 말고 원칙에 따라 선발하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회장이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데 다른 이들의 청탁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 인사 담당자는 청탁에 매이지 않고 참으로 이 회사에 필요한 능력 있는 일군들을 눈치 보지 않고 뽑을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회사는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업이 그래도 잘 운영이 될 수 있었음은 비록 기업의 회장이라 할지라도 청탁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회사의 발전에 저해가 되는 것임을 알았을 때에 과감히 버릴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휼륭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내가 회장인데 사원 뽑는 것 이것쯤이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참된 선의 요구가 따를 때에 회장의 힘이라 할지라도 그 뜻을 굽히고 그 선을 따르는 것이 회장을 더욱 회장답게 설 수 있으며 자신의 회사를 더욱 든든히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자신이 청탁한 자를 기대하지 않는 눈치며 하는 말이 이런 회사가 어찌 잘 되지 않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생활도 마찬가지로 여겨집니다.
내 자신의 추구하는 선이 있지만 하나님의 요구 앞에는 과감히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참으로 자신들 나름대로 선의 기준을 두고 추구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에 대하여 얼마나 이야기 많이 하는 줄 모릅니다.
정치이야기만을 들어 보아도 모두가 거품을 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정치 맡기면 얼마나 잘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선은 참으로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선을 낡은 옷에다 비유를 했습니다.
이 낡은 옷은 나를 멋있게 해 주지 못하고 또한 안전하게 보호를 해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자신의 선의 기준이 지금까지 확실하다고 믿어온 자라 할지라도 그것보다 참된 선이 드러날 때에는 내 자신의 선을 버릴 줄 아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르는 이러한 행동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이야 말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요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선은 내 계획을 앞장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들으라”고 성령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얼마나 엄히 선포하는 분의기 인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없이 자기 욕망을 따라 뜻없는 삶을 꿈꾸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니 오늘 이 시간에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 사람들은 행선지가 분명합니다.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체류 기간이 확실합니다. “일년을 유하며”할 일이 뚜렸했습니다. “장사하여” 더구나 그 결과가 자신 있었습니다. “이를 보리라”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만 삶을 살려고 합니다.
1세기의 상인들의 가치관은 철저한 물질주의였습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사상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의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같은 것이며 이것은 임박한 심판의 징조라고 말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먹고 마시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이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만 도취되어 잠시 잠간의 이익을 위하는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원한 삶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의 사람들이 이러한 삶, 다시 말하면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에게는 오늘은 있을 수 있지만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당장 내일은 없는 삶입니다.
14절 너희 생명이 무엇이요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인간의 계획만을 고집하고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지 않음으로 참으로 불안한 결과를 가져 올 일들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제 아무리 바벨탑은 휼륭하게 세워졌다고 하지만 인간의 고집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인간이 보이에는 참으로 무식하게 보이지만은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이시기 때문에 큰 구원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선은 내 생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더 놀라운 축복을 하고 계심을 아셔야 합니다.
세상에는 경험으로만 증명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그렇습니다. 순종하고 행동을 함으로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막연한 하나님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 할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서고 그리고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막연하게 하지 마십시오
인간적을 버티고 신경질 내고 자기 주장을 합리화 시킨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는 아니지만 끝까지 남아 기도하는 여 성도를 보고 얼마나 부러운지 그 성도는 무엇이든지 아무런 염려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을 할 것이며 하나님 편에서 생각을 할까? 축복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먼저 하나님과 의논하셔야 합니다. 기도로써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과 막힘없는 관계 속에서 주님과 의논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계획하세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생활을 계획없이 일시적 감정에 따라 사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잠언 16장 1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에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계획의 성취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계획하고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며 그 일을 하나님과 더불어 열매를 맺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계획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획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행하세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의 삶에는 축복이 있습니다.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마가복음 3장 35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럴 때 주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응답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요한 1서 3장 22절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이든지 받습니다. 그런데 받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만이 영원한 가치를 남기는 삶입니다. 요한 1서 2장 17절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후회 없는 영원한 가치를 이 세상에 남기고 싶습니까?
조지 트루엣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가장 위대한 지식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큰 일을 이룬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말 할 것입니다.
다 바람을 잡은 것같이 헛되고 헛되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에는 얼마나 보람이 있고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숨 질 때에도 내가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고백과 같이 영광된 죽음이 될 것입니다.
얼마전에 사돈 어른이 돌아 가셨습니다.
또 한 사돈은 오늘 내일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은 수 많은 수고와 슬픔을 안고 이렇게 지나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은 미루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요 지금입니다.
여기 작가 미상의 아름다운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밝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어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에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위대한 신앙의 사도 바울은 그의 삶이 회개된 후부터는 오로지 그의 삶을 움직여 가는 원인은 \\십자가에 예수\\ 뿐이었다.
고전2: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3: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빌3: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
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언제나 바울의 눈앞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명하게 보였고 그것이 일하게 했고, 겸손하게 했고, 울게 했고, 기쁘게했고, 참게 했고, 겸손하게 했고, 먹게 했고, 굶게 했고, 찬송하게 했고, 매 맞게 했고, 죽게 한 유일한 원인이었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며, 이곳에 있으며, 예배케 하는가가 분명해야만 합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우리 내 인생은 돈이나 부와세상적인 명예나 재미, 만을 좇아가기에는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도 짧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엇에 의해서 움직여지는가?\\고 누가 묻는다면 나나 여러분이나 다같이 유일한 답변은 권력, 명예, 돈, 재미만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희생의 제물이되신 예수 때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고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
날마다 심고 날마다 거두는 기쁨을 맛보시는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어떤 분과 이야기 하는 가운데 모대기업체에서 60명의 직원을 뽑는데 1,200명이 응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능력있는 자들에게 청탁이 80건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기업의 회장이 3명을 추천하였고 물론 이야기하는 본인도 1명을 청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60명의 모집에 80명의 청탁이 들어 왔으니 인사과에서는 이 얼마나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인사 담당자가 회장을 찾아 가서 자초지정을 이야기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원을 채용하기 위해서는 토익이 몇 점 이상이어야 되고 그리고 이러 이러한 인물이 필요로 하는데 하고 고민을 하니 그 자리에서 회장이 자신이 청탁한 서류 3장을 되돌려 달라고 하고는 찢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다가는 회사 꼴이 말이 아니겠다 청탁을 한 자들에게 매이지 말고 원칙에 따라 선발하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회장이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데 다른 이들의 청탁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 인사 담당자는 청탁에 매이지 않고 참으로 이 회사에 필요한 능력 있는 일군들을 눈치 보지 않고 뽑을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회사는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업이 그래도 잘 운영이 될 수 있었음은 비록 기업의 회장이라 할지라도 청탁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회사의 발전에 저해가 되는 것임을 알았을 때에 과감히 버릴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휼륭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내가 회장인데 사원 뽑는 것 이것쯤이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참된 선의 요구가 따를 때에 회장의 힘이라 할지라도 그 뜻을 굽히고 그 선을 따르는 것이 회장을 더욱 회장답게 설 수 있으며 자신의 회사를 더욱 든든히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자신이 청탁한 자를 기대하지 않는 눈치며 하는 말이 이런 회사가 어찌 잘 되지 않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생활도 마찬가지로 여겨집니다.
내 자신의 추구하는 선이 있지만 하나님의 요구 앞에는 과감히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참으로 자신들 나름대로 선의 기준을 두고 추구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에 대하여 얼마나 이야기 많이 하는 줄 모릅니다.
정치이야기만을 들어 보아도 모두가 거품을 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정치 맡기면 얼마나 잘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선은 참으로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선을 낡은 옷에다 비유를 했습니다.
이 낡은 옷은 나를 멋있게 해 주지 못하고 또한 안전하게 보호를 해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자신의 선의 기준이 지금까지 확실하다고 믿어온 자라 할지라도 그것보다 참된 선이 드러날 때에는 내 자신의 선을 버릴 줄 아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르는 이러한 행동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이야 말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요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선은 내 계획을 앞장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들으라”고 성령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얼마나 엄히 선포하는 분의기 인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없이 자기 욕망을 따라 뜻없는 삶을 꿈꾸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니 오늘 이 시간에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 사람들은 행선지가 분명합니다.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체류 기간이 확실합니다. “일년을 유하며”할 일이 뚜렸했습니다. “장사하여” 더구나 그 결과가 자신 있었습니다. “이를 보리라”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만 삶을 살려고 합니다.
1세기의 상인들의 가치관은 철저한 물질주의였습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사상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의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같은 것이며 이것은 임박한 심판의 징조라고 말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먹고 마시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이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만 도취되어 잠시 잠간의 이익을 위하는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원한 삶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의 사람들이 이러한 삶, 다시 말하면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에게는 오늘은 있을 수 있지만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당장 내일은 없는 삶입니다.
14절 너희 생명이 무엇이요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인간의 계획만을 고집하고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지 않음으로 참으로 불안한 결과를 가져 올 일들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제 아무리 바벨탑은 휼륭하게 세워졌다고 하지만 인간의 고집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인간이 보이에는 참으로 무식하게 보이지만은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이시기 때문에 큰 구원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선은 내 생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더 놀라운 축복을 하고 계심을 아셔야 합니다.
세상에는 경험으로만 증명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그렇습니다. 순종하고 행동을 함으로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막연한 하나님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 할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서고 그리고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막연하게 하지 마십시오
인간적을 버티고 신경질 내고 자기 주장을 합리화 시킨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는 아니지만 끝까지 남아 기도하는 여 성도를 보고 얼마나 부러운지 그 성도는 무엇이든지 아무런 염려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을 할 것이며 하나님 편에서 생각을 할까? 축복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먼저 하나님과 의논하셔야 합니다. 기도로써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과 막힘없는 관계 속에서 주님과 의논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계획하세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생활을 계획없이 일시적 감정에 따라 사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잠언 16장 1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에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계획의 성취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계획하고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며 그 일을 하나님과 더불어 열매를 맺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계획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획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행하세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의 삶에는 축복이 있습니다.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마가복음 3장 35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럴 때 주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응답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요한 1서 3장 22절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이든지 받습니다. 그런데 받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만이 영원한 가치를 남기는 삶입니다. 요한 1서 2장 17절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후회 없는 영원한 가치를 이 세상에 남기고 싶습니까?
조지 트루엣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가장 위대한 지식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큰 일을 이룬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말 할 것입니다.
다 바람을 잡은 것같이 헛되고 헛되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에는 얼마나 보람이 있고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숨 질 때에도 내가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고백과 같이 영광된 죽음이 될 것입니다.
얼마전에 사돈 어른이 돌아 가셨습니다.
또 한 사돈은 오늘 내일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은 수 많은 수고와 슬픔을 안고 이렇게 지나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은 미루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요 지금입니다.
여기 작가 미상의 아름다운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밝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어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에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위대한 신앙의 사도 바울은 그의 삶이 회개된 후부터는 오로지 그의 삶을 움직여 가는 원인은 \\십자가에 예수\\ 뿐이었다.
고전2: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3: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빌3: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
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언제나 바울의 눈앞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명하게 보였고 그것이 일하게 했고, 겸손하게 했고, 울게 했고, 기쁘게했고, 참게 했고, 겸손하게 했고, 먹게 했고, 굶게 했고, 찬송하게 했고, 매 맞게 했고, 죽게 한 유일한 원인이었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며, 이곳에 있으며, 예배케 하는가가 분명해야만 합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우리 내 인생은 돈이나 부와세상적인 명예나 재미, 만을 좇아가기에는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도 짧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엇에 의해서 움직여지는가?\\고 누가 묻는다면 나나 여러분이나 다같이 유일한 답변은 권력, 명예, 돈, 재미만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희생의 제물이되신 예수 때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고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
날마다 심고 날마다 거두는 기쁨을 맛보시는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