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나의 가장 큰 자랑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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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802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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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11-18 십자가는 나의 가장 큰 자랑감입니다
지난 6월 2일 미국 어학연수 중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고 이진아양(외국어대 재학 중) 부모인 이상철성도와 이덕선권사(목양교회)는 한창 공부를 하던 딸을 먼저 보내는 큰 아픔과 슬픔이 있었지만 그 딸을 위해 오는 23일 경기도 양주 시에 덕진교회를 새로 창립하여 봉헌하는 한편 딸의 이름으로 기념 도서관 건립을 위해 50억을 서대문구청에 기탁했습니다.
이와 함께 이들 부부는 목양교회와 협의해 진아 양의 추모사업으로 미국 현지에서 장례절차를 도와준 이상혁선교사(호피부족 선교)에게 인디언 선교를 위한 헌금을 전달하고 미국 애리조나 주에 20여 평 규모로 지역 선교를 위해 ‘이진아 기념 선교센터’를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이덕선권사는 “딸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어 신앙인으로서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했을 뿐”이라며 더 이상의 딸의 죽음에 대하여 슬픔에 잠겨 있을 수가 없고 오히려 고인이 된 딸은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선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었습니다.
목양교회 담임 유관지목사는 “평소에도 유가족들은 교회와 사회에서 존경을 받을 일들을 해 왔다”며“딸을 잃은 큰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권사 부부의 신앙심이 더욱 깊어 졌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주를 위한다는 이름 앞에서 조그마한 어려움이 있어도 불평하는 우리 자신들과 비교를 해 볼 때에 똑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크게 대조가 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딸이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에 딸의 죽음을 조금도 헛되이 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딸의 이름이 복음을 위해 헌신되어 지는 일 외에는 그 어떤 세상적인 일도 없음을 알고 수십억의 돈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고 아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들의 마음을 볼 때에 참으로 어떠한 역경도 슬퍼하고 낙담만 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 이겨 낼 수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한 삶이 가장 값지고 귀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까?
아직도 여러분이 뜨뜻하게 자랑하며 나는 이것을 위해 살아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혹시 돈을 많이 벌고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돈이 자랑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배운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아서 소이 똑똑하다는 소리 듣는 것이 자랑입니까?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저 나는 그 누구 앞에도 꺾일 줄도 모르는 돈 한 푼 안 드는 자존심이 자랑감입니까?
물론 이런 것들도 자랑감이 되고 또한 자랑감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자랑은 오래가지 못하고 언제 비낄지도 모르는 불안한 것이요 다 헛된 것일 뿐입니다.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 왕의 고백을 들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모두가 부질없는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나가 보면 별 것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은 별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니 십자가는 모두가 싫어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도 모든 이들이 십자가를 싫어하고, 쳐다보기 조차 싫어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누가 십자가를 좋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하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이렇게 자기 부인과 헌신과 그리고 많은 핍박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제대로 안다면 그 십자가는 저주가 아니요 재수 없어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자랑해야 하고 내가져야 할 보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 누구보다도 세상 적으로 자랑 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문이 좋지요 학벌도 좋지요 신분도 권력도 어느 하나 자랑감이 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가 자랑 했던 것이 결코 자랑감이 될 수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내가 헛된 자랑을 하고 살았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자랑하고 십자가 자랑을 최고의 자랑감이 되었습니다.
14절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흔적 곧 십자가를 진 흔적입니다.
왜 십자가가 나의 가장 큰 자랑감입니까?
십자가는 내 대신 자신의 몸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십자가란 예수님 이전에는 로마사람들이 흉악한 죄인을 처형하던 잔인한 사형도구였습니다.
죄 많은 사람들이 못 박혀 죽는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이요, 또부끄러운 치욕의 상징이요, 저주의 상징 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십자가에서 내가 달려 고통당하고 부끄러움과 저주를 받으며 죽어야 마땅한 그 자리에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에는 여러 종류가있습니다. \\보통 죽음\\이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기력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생명을 부지 할 힙이 없어서 세상을 떠난 죽음이라든지,교통사고 테러 같은 사고로 인한 죽음이라든지, 병에 걸려서 죽는 죽음 같은 평범하고 일반적인 죽음이 있는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순국의 죽음\\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죽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죽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주신 죽음은 보통 죽음도, 사고 나서 죽은 테러를 당해 죽은 죽음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순국의 죽음도 아닙니다.예수님이 죽으신 죽음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 해내시기 위하여 나를 대신해서죽어주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믿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가장 고상한 죽음이요, 가장 위대한 죽음입니다.
이 같은 나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을 안다면 어찌 그 죽음을 헛되이 여기고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고귀하고 귀하여 그 죽음을 헛되이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딸의 죽음도 헛되지 않으려고 그렇게도 선한 일을 딸의 이름으로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사람은 고전 1장 23절에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란? 헬라인을 말합니다.(22절) 헬라인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들은 이성적인 증거를 요구하였으니, 이해할 수 없고, 이성적인 근거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오늘날에 까지 전해내려 오는 심오한 철학 사상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철학적이고 분석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볼 때에 미련하기 그지없는 짓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인류의 죄를 벗기고 온 인류를 구원한다는 소리가 헬라의 심오한 철학적 지혜로 볼 때에 허무맹랑하고도 미련하게 들릴 수밖에없었습니다.
이러한 헬라인들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는 과학 만능과 황금만능의 세태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범하기 쉬운 동일한 과오일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는 십자가를 자랑하고 사랑해야 함에도 쓸쓸 피하려고만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짊어지는 것이 자랑으로 여기고 스스로 자원하여 질 수 있는 자가 되시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신학자S.러더퍼드는새에게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에 새는 날아가고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나아간다. 성도는 그 십자가가 짐이 되나 그것이 그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여 전진케 하는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가 내게 없다면 영광도 구원도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십자가 없이 복을 받으려고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의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지혜의 풍부한 여부와 상관없이 십자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꺼리 낌도 아니요, 미련한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 해 주신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으로 말미암아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자 되었다\\고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불 뱀이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어 죽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매하나님께서 장대에 구리 뱀을 매달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사람들이 불 뱀에 물려 죽으면서, 구리 뱀을 쳐다보는 자는 기적적으로 다고침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이 구리 뱀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오늘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을 당할수밖에 없지만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기만하면 구원받게 될 줄로믿습니다.
미국 네바다 주에\\죽음의 골짜기(The Valleyof Death)\\라는 골짜기가있습니다. 폭이 10마일 내지 35마일 정도 되고, 길이가150마일입니다. 우리나라 휴전선 길이와 비슷합니다. 해면보다 낮은곳인 고로 여름철에는 풀 한포기 자라나지않습니다. 곤충도, 화초도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도그곳에 가서 살 수가없습니다.
다. 그래서 그곳을 일컬어죽음의 골짜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1930년 5월에 놀라운 큰 변화가일어났습니다. 19일 동안 폭우가 쏟아졌는데, 그 결과10년, 혹은 수십 년간 죽은 듯이묻혀있던 씨앗이 싹이 나고 움이 돋아서 온골짜기를 푸른 초원으로, 아름다운화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본
사람들이 \\죽음의 골짜기가 생명의 골짜기로 바뀌어 졌다\\라고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담이 죄를 범한이후 죽음의 골짜기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나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언덕에서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골짜기를 생명의골짜기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알거니와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하였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양이나 염소의피로 우리를 구속 해 주신것이 아니라, 무흠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구속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십자가는 언제든지 지고 다녀야 할 자랑스럽고 나의 삶에 구원을 가져오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지고 다니라고 하니 목걸이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내 몸에 흔적을 가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고서 따르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4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말씀하시기를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나를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있지만 하더라도 나와 상관이 없을 때에는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축복만을 강조하다 보니 십자가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라고하면 다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이것은 내 양이 아니므로 내 음성을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것은 진리도 복음도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자는 진정한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이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분명히 무시당함의 십자가, 수치 당함의 십자가 ,말 할 수 없는 고통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질 때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참으로 나를 사랑하고 은혜의 구원을 베풀려고 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제 몫의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십자가는 내 몸에 흔적이 날 정도로 아니 죽음으로 지는 것입니다.
적당히 적당히 이것은 세상에서 통하는 것이지 주님 앞에서는 무지막지하게 참으로 내 자신을 전부 드리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때문에 욕을 먹고 병신 소리 듣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경험이 없다면 그 십자가로 인하여 내게 진정한 구원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그 혹독한 노예제도 속에서의 흑인들이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잔악한 일제하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영문 밖의 길이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십자가에달리신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 서쪽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에십자가를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
십자가의 길은 참으로 힘든 길이었습니다.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시다가 힘에 부쳐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쓰러진 십자가위로 로마병정의 채찍은사정없이 날아들었습니다. 쓰러지다가 다시 걸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또 쓰러지는 십자가의 길은 걸음마다 자국마다 땀과 피로 적시며, 그렇게 걸어가셨습니다.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십자가에 못 밖히고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비통의 십자가이며 사실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실패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내세우고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그는 작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6:14절 에서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없노라고>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자신의 신학의 주제로 삼은 신학자가 독일 튀빙겐 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위르겐 몰트만입니다.
그는 그의 저서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받지 못하며 또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린 그분만이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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