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은혜로 주어지는 축복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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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48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누가복음 13:1-9또 다시 은혜로 주어지는 축복의 기회
이제 2003년 한해도 한 3일을 남겨 놓았습니다.
어찌 후회가 없는 한 해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엄청 후회가 되는 한 해가 되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후회가 되는 한 해가 되기보다는 후회하지 않는 한 해로 보내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후회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렇다고 남보다 무엇인가?를 뛰어나게 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남보다 못 하였다는 말도 아닙니다.
제가 후회 없는 한 해를 말 할 수 있는 것은 올 한 해를 하나님의 은혜만 받고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만족하면서 살아 올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이 시간에 저를 부르신다고 해서 억울한 것도 없고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더 하지 못하고 간다는 송구한 마음과 아쉬움만 있을 뿐입니다.
사실 저는 매년 한 해가 갈 때마다 초조하고 상당히 불안해했습니다.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또 한 해를 보내었다는 그런 마음으로 매년 송년을 보내었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이 마당에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마 초조하고 불안해하면서 또 한살 더 먹구나 할 것입니다.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이 한 해가 또 가는가 보다 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내개 또 한해라는 시간이 주어지느냐? 는 의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새로운 한 해를 살아 갈 수 있느냐? 말입니다.
아마 모두가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또 한 해가 주어지겠지? 과연 모두에게 한 해가 주어질까요?
아무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어제 조간신문을 보았습니다.
이제 며칠만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대망의 새 해가 시작 할 터인데 이 며칠을 기다리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란 밤시에서는 지진으로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흑담에 깔려 죽었다는 것이요
중국 청진에서는 유독 천연가스 분출로 200명의 사람이 질식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태국은 지난 수년간에 에이즈로 죽는 환자가 6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미 켈리포니아주에서는 산사태로 2명이 죽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라크 모슬 지역에서는 성탄 연휴에 미군 8명이 테러 공격을 받아 숨졌다는 것입니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사망의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서울 서초에서는 동거녀 아들을 칼로 찔러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노원 구에서는 성탄전야에 술을 마시던 고3학생이 음주로 숨졌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부산에서는 10여일 전에 실종 되었던 40대 여인의 시신을 찾았다고 합니다.
동해안 배타 수역에서는 우리 어선이 침몰되어 지금 며칠 째 11명의 선원이 실종된 상태니 거의 사망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아이는 전기 장판과열로 화상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이 며칠을 견디지 못하여 새로운 한 해를 소유하지 못하였습니다.
앞으로 한 3일 남았지만 이 3일 안에 그 누구도 자신의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인가?를 아무도 장담하지 못 할 것입니다.
왜? 어떤 이는 죽어야만 하고 어떤 이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 기준이 어디에 있을까요?
먼저 죽은 자들은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살펴보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칼에 살해를 당하여 자신들이 드리는 희생의 피를 제물에 섞어 드리는 일이 자행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또한 실로암의 물을 채워 놓은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사람들이 깔려 죽는 일이 벌어 졌습니다.
과연 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자들보다 죄가 많아서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논한다고 한다면 결코 그들보다 의롭다고 할 수가 없는 자들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은 일찍 죽고 죄가 없는 사람은 오래 사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만 않습니다.
얼마든지 죄가 없는 사람도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저 사람 염라대왕이 안 데려가고 뭐하나? 하는 인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떤 이는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 갔다고 안타까워하는 자들도 있지 않습니까?
제 막내 동생이 먼저 하늘나라로 수년 전에 갔는데 사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착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은 싸우고 별별 짓을 다 해도 불러 가지 않고 이 동생을 먼저 불러 가시더라고요
왜? 우리를 불러 가지 않았냐? 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의롭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유는 나 같이 살아 있은 자에게 하나님에게 회개하고 선을 행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파란 많은 이 세상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느냐? 는 것입니다.
아니 죽고 싶은 그런 마음도 있었는데 왜? 살아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들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이루시기 위함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냥 죽어 버리면 참으로 불쌍한 죽음이요 헛된 죽음이요 멸망의 죽음을 죽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는 죽을 뻔 했던 자리에서 참으로 살아난 자도 있지 않습니까?
너무 힘이 들어 죽으려고도 했지만 죽지 않고 살은 자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냥 당신의 백성을 아무런 선도 행치 않고 그냥 망하도록 두지 않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깨끗한 그릇으로 사용 하여 복된 자로 만드시려는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도 하나님이 그렇게 빨리 불러 가시지 않으려는 것을 요사이 들어서 새삼 알게 됩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한 것이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저를 불러 가신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이 갈 것이요 가도 상급을 받지 못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를 사랑해서 선을 행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아무도 살아 나 올수 없는 로마 옥중에서 그는 죽지 않고 살아 나 올 곳을 확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도 자신이 행 할 로마에 복음을 전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또 다시 내 자신에게 매여 산다고 한다면 내게 주어진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가장 불행한 일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인생이 선의 기회를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행 한 일을 살펴본다면 하나님의 진노로 망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내가 그 진노에 멸하지 않고 살아 있음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인 것입니다.
7-8절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주인이여 금년에도 글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셨다 하느니라.
어쩌면 나 같은 인생이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 주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망해도 우리는 벌써 몇 번 씩이나 망 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내가 잘나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입니다.
나도 바울은 지금 내가 나 될 수 있음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오늘 이후부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또 다시 과거의 생활이 반복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온 지나온 세월로 족한 줄로 아셔야 합니다.
아니 반복 되어 질 수가 없는 것이 우리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얼마든지 선의 결실을 가져오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실 것입니다.
넉넉히 선을 행하고도 남음이 있게 하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두고 볼 때에 무슨 선을 찾을 수가 있습니까?
대통령입니까?
대학 교수입니까?
윤리 선생입니까?
불우한 자를 돌보는 어떤 봉사자입니까?
음성 꽃동네 신부입니까?
다 인간의 냄새를 열심히 내고 있는 자들이지 더 이상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오직 우리가 예수님을 힘입었을 때에 참으로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향기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화를 그리던 어떤 화가가 너무나도 인자한 한 사람을 모델로 삼아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얼마 후에 가륫유다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찾아다니다가 참으로 배신자 가륫유다 같이 생긴 사람을 발견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가륫유다의 모델이 된 사람은 얼마 전에 예수님의 모델이 되었던 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붙잡히지 않으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가륫유다가 될 수가 있고 하나님께 붙잡힌 자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예수님 같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덤으로 사는 인생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집행을 지금 유예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더 확실한 것은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있는 자라 하겠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만약에 내가 행 할 선을 외면하고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허무와 헛됨을 노래하고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얼마 전에 빈 배라는 이름을 가진 킹메이커라고 자부하는 한 정치인이 암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그는 한창 정치에 빛을 발휘 할 때에 복음을 접 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결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죽기 며칠 전에 목사님을 불러 기도라고 받고 싶어 청을 해서 갔지만은 그는 그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참으로 빈 배가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배에 영생의 소망을 싣고 가지를 못했습니다.
이제 한 해를 보내는 마당에서 무엇을 자신 있게 내어 놓겠습니까?
아무리 살펴도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것뿐입니다.
아니 아무리 살펴도 은혜만 받은 것뿐입니다.
허주는 빈 배로 가버렸지만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붙잡아 두심은 빈 배로 보내시지 않으시려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도 애타하시고 열망을 가지고 계시고 기대를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직분을 주실 때에 잘 했기 보다는 앞으로 잘 할 것으로 여겨서 주시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간청을 하시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그냥가면 너무나도 헛되고 너무나도 가치 없고 그리고 영원히 망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 년에는 틀림없이 기대를 하여도 좋겠다는 희망적인 투로 말씀하십니다.
아니 죄인인 우리 자신보다 예수님이 최선을 다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삶의 성공의 여부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니 예수 안에서 나의 인생은 새롭게 전개 될 것입니다.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하나님은 참여한 모든 이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가 아닌 예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복된 삶을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에게는 더 이상 혈육적인 것을 가지고서는 성공을 이야기 할 수가 없고 오히려 그 혈육의 관계가 도리어 큰 짐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하게 복된 생업을 기대 하려면 혈육을 자랑하지 말고 예수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에 참으로 그 사업을 통하여 축복을 하시려고 하셨습니다.
또한 어떤 이는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방편으로 기도에 최선을 하고 예배에 최선을 다 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마 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전도의 사역을 감당하시기를 원하셨고요 어찌 일년을 가도 한 명의 영혼을 인도하지 못해서 되겠습니까?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계획을 세우고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이삭이 한 해 100배의 축복을 받았듯이 100배의 축복을 허락 하실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나에게 선을 행할 기회가 무진장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밤에도 우리는 부르시면 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이번 이 말씀을 듣는 이시간이 기회입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러나 한 가지 확신 할 수 있음은 받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여기까지 온 것을 아는 자는 아니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아는 자는 받듯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의 열매를 맺을 줄로 믿습니다.
아직도 나는 아니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때가 아니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꾸만 지간이 마냥 남아 있는 자같이 내일 내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선을 위한 기회만 내게 주어졌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선을 행함이 나를 살리는 길이요
내가 가장 잘 되는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남은 삶을 헛되이 보낼 이유도 없고 선을 위하여 달려 갈 길만 남았습니다.
이제 2003년 한해도 한 3일을 남겨 놓았습니다.
어찌 후회가 없는 한 해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엄청 후회가 되는 한 해가 되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후회가 되는 한 해가 되기보다는 후회하지 않는 한 해로 보내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후회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렇다고 남보다 무엇인가?를 뛰어나게 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남보다 못 하였다는 말도 아닙니다.
제가 후회 없는 한 해를 말 할 수 있는 것은 올 한 해를 하나님의 은혜만 받고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만족하면서 살아 올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이 시간에 저를 부르신다고 해서 억울한 것도 없고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더 하지 못하고 간다는 송구한 마음과 아쉬움만 있을 뿐입니다.
사실 저는 매년 한 해가 갈 때마다 초조하고 상당히 불안해했습니다.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또 한 해를 보내었다는 그런 마음으로 매년 송년을 보내었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이 마당에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마 초조하고 불안해하면서 또 한살 더 먹구나 할 것입니다.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이 한 해가 또 가는가 보다 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내개 또 한해라는 시간이 주어지느냐? 는 의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새로운 한 해를 살아 갈 수 있느냐? 말입니다.
아마 모두가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또 한 해가 주어지겠지? 과연 모두에게 한 해가 주어질까요?
아무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어제 조간신문을 보았습니다.
이제 며칠만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대망의 새 해가 시작 할 터인데 이 며칠을 기다리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란 밤시에서는 지진으로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흑담에 깔려 죽었다는 것이요
중국 청진에서는 유독 천연가스 분출로 200명의 사람이 질식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태국은 지난 수년간에 에이즈로 죽는 환자가 6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미 켈리포니아주에서는 산사태로 2명이 죽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라크 모슬 지역에서는 성탄 연휴에 미군 8명이 테러 공격을 받아 숨졌다는 것입니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사망의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서울 서초에서는 동거녀 아들을 칼로 찔러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노원 구에서는 성탄전야에 술을 마시던 고3학생이 음주로 숨졌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부산에서는 10여일 전에 실종 되었던 40대 여인의 시신을 찾았다고 합니다.
동해안 배타 수역에서는 우리 어선이 침몰되어 지금 며칠 째 11명의 선원이 실종된 상태니 거의 사망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아이는 전기 장판과열로 화상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이 며칠을 견디지 못하여 새로운 한 해를 소유하지 못하였습니다.
앞으로 한 3일 남았지만 이 3일 안에 그 누구도 자신의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인가?를 아무도 장담하지 못 할 것입니다.
왜? 어떤 이는 죽어야만 하고 어떤 이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 기준이 어디에 있을까요?
먼저 죽은 자들은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살펴보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칼에 살해를 당하여 자신들이 드리는 희생의 피를 제물에 섞어 드리는 일이 자행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또한 실로암의 물을 채워 놓은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사람들이 깔려 죽는 일이 벌어 졌습니다.
과연 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자들보다 죄가 많아서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논한다고 한다면 결코 그들보다 의롭다고 할 수가 없는 자들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은 일찍 죽고 죄가 없는 사람은 오래 사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만 않습니다.
얼마든지 죄가 없는 사람도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저 사람 염라대왕이 안 데려가고 뭐하나? 하는 인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떤 이는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 갔다고 안타까워하는 자들도 있지 않습니까?
제 막내 동생이 먼저 하늘나라로 수년 전에 갔는데 사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착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은 싸우고 별별 짓을 다 해도 불러 가지 않고 이 동생을 먼저 불러 가시더라고요
왜? 우리를 불러 가지 않았냐? 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의롭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유는 나 같이 살아 있은 자에게 하나님에게 회개하고 선을 행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파란 많은 이 세상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느냐? 는 것입니다.
아니 죽고 싶은 그런 마음도 있었는데 왜? 살아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들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이루시기 위함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냥 죽어 버리면 참으로 불쌍한 죽음이요 헛된 죽음이요 멸망의 죽음을 죽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는 죽을 뻔 했던 자리에서 참으로 살아난 자도 있지 않습니까?
너무 힘이 들어 죽으려고도 했지만 죽지 않고 살은 자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냥 당신의 백성을 아무런 선도 행치 않고 그냥 망하도록 두지 않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깨끗한 그릇으로 사용 하여 복된 자로 만드시려는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도 하나님이 그렇게 빨리 불러 가시지 않으려는 것을 요사이 들어서 새삼 알게 됩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한 것이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저를 불러 가신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이 갈 것이요 가도 상급을 받지 못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를 사랑해서 선을 행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아무도 살아 나 올수 없는 로마 옥중에서 그는 죽지 않고 살아 나 올 곳을 확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도 자신이 행 할 로마에 복음을 전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또 다시 내 자신에게 매여 산다고 한다면 내게 주어진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가장 불행한 일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인생이 선의 기회를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행 한 일을 살펴본다면 하나님의 진노로 망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내가 그 진노에 멸하지 않고 살아 있음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인 것입니다.
7-8절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주인이여 금년에도 글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셨다 하느니라.
어쩌면 나 같은 인생이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 주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망해도 우리는 벌써 몇 번 씩이나 망 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내가 잘나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입니다.
나도 바울은 지금 내가 나 될 수 있음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오늘 이후부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또 다시 과거의 생활이 반복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온 지나온 세월로 족한 줄로 아셔야 합니다.
아니 반복 되어 질 수가 없는 것이 우리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얼마든지 선의 결실을 가져오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실 것입니다.
넉넉히 선을 행하고도 남음이 있게 하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두고 볼 때에 무슨 선을 찾을 수가 있습니까?
대통령입니까?
대학 교수입니까?
윤리 선생입니까?
불우한 자를 돌보는 어떤 봉사자입니까?
음성 꽃동네 신부입니까?
다 인간의 냄새를 열심히 내고 있는 자들이지 더 이상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오직 우리가 예수님을 힘입었을 때에 참으로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향기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화를 그리던 어떤 화가가 너무나도 인자한 한 사람을 모델로 삼아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얼마 후에 가륫유다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찾아다니다가 참으로 배신자 가륫유다 같이 생긴 사람을 발견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가륫유다의 모델이 된 사람은 얼마 전에 예수님의 모델이 되었던 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붙잡히지 않으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가륫유다가 될 수가 있고 하나님께 붙잡힌 자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예수님 같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덤으로 사는 인생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집행을 지금 유예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더 확실한 것은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있는 자라 하겠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만약에 내가 행 할 선을 외면하고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허무와 헛됨을 노래하고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얼마 전에 빈 배라는 이름을 가진 킹메이커라고 자부하는 한 정치인이 암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그는 한창 정치에 빛을 발휘 할 때에 복음을 접 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결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죽기 며칠 전에 목사님을 불러 기도라고 받고 싶어 청을 해서 갔지만은 그는 그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참으로 빈 배가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배에 영생의 소망을 싣고 가지를 못했습니다.
이제 한 해를 보내는 마당에서 무엇을 자신 있게 내어 놓겠습니까?
아무리 살펴도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것뿐입니다.
아니 아무리 살펴도 은혜만 받은 것뿐입니다.
허주는 빈 배로 가버렸지만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붙잡아 두심은 빈 배로 보내시지 않으시려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도 애타하시고 열망을 가지고 계시고 기대를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직분을 주실 때에 잘 했기 보다는 앞으로 잘 할 것으로 여겨서 주시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간청을 하시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그냥가면 너무나도 헛되고 너무나도 가치 없고 그리고 영원히 망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 년에는 틀림없이 기대를 하여도 좋겠다는 희망적인 투로 말씀하십니다.
아니 죄인인 우리 자신보다 예수님이 최선을 다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삶의 성공의 여부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니 예수 안에서 나의 인생은 새롭게 전개 될 것입니다.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하나님은 참여한 모든 이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가 아닌 예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복된 삶을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에게는 더 이상 혈육적인 것을 가지고서는 성공을 이야기 할 수가 없고 오히려 그 혈육의 관계가 도리어 큰 짐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하게 복된 생업을 기대 하려면 혈육을 자랑하지 말고 예수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에 참으로 그 사업을 통하여 축복을 하시려고 하셨습니다.
또한 어떤 이는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방편으로 기도에 최선을 하고 예배에 최선을 다 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마 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전도의 사역을 감당하시기를 원하셨고요 어찌 일년을 가도 한 명의 영혼을 인도하지 못해서 되겠습니까?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계획을 세우고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이삭이 한 해 100배의 축복을 받았듯이 100배의 축복을 허락 하실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나에게 선을 행할 기회가 무진장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밤에도 우리는 부르시면 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이번 이 말씀을 듣는 이시간이 기회입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러나 한 가지 확신 할 수 있음은 받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여기까지 온 것을 아는 자는 아니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아는 자는 받듯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의 열매를 맺을 줄로 믿습니다.
아직도 나는 아니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때가 아니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꾸만 지간이 마냥 남아 있는 자같이 내일 내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선을 위한 기회만 내게 주어졌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선을 행함이 나를 살리는 길이요
내가 가장 잘 되는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남은 삶을 헛되이 보낼 이유도 없고 선을 위하여 달려 갈 길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