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시인하여 축복의 문을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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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32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창 세 기 28:16-22 하나님을 시인하여 축복의 문을 열자
어떤 기사에 올해의 키워드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2월에 한 사람의 어이없는 방화로 발생한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는 192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특히 생활고를 비관한 가장의 가족 동반 자살은 사회의 공동선인 가족을 붕괴시키는 사회 병리 현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죽음과 더불어 2003년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두 번째 키워드는 ‘외도(外道)’다. 하루 평균 130건 이혼의 주된 이유가 바로 배우자의 외도 때문이다 는 것입니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 <바람난 가족>을 비롯해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와 <앞집 여자>는 젊은이들에게 혼전 동거를, 기혼 남녀에게 불륜에 대한 로맨스를 꿈꾸도록 자극했다는 것입니다. 세계 이혼 1위 국가 이제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라 동방예외지국이다. 윤리와 예의범절이 살아있는 나라가 아니라, 반대로 윤리와 예의범절이 지켜지지 않는 예외의 나라인 셈이다. 바야흐로 우리 사회는 바람을 권하는 불륜 공화국이란 또 하나의 딱지를 얻은 셈이다. 서구의 성 해방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가치관이 붕괴되고, 이것은 가정 해체의 주범으로 등장하고 있다. 가족 붕괴 현상은 바로 ‘바르게 사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등한시한 채, 오직 ‘잘 살아 보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물질과 육체적 쾌락에만 매달러 온 우리의 자화상이다. 가족이 무너지면 사회도 무너지게 된다.
올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어 1위를 찾는다면 단연 ‘로또 복권’이다. ‘인생 역전’이란 분명히 구미가 당기는 말이다. 우리는 현실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로또 복권은 그 꿈을 일순간에 이뤄준다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대가가 정당하지 않은 ‘로또 복권’ 사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약속을 믿고 있고, 특히 350만 명의 신용 불량자와 청년 실업자들은 일주일 인생, 즉 복권 추첨 일까지 ‘혹시나’의 기대 심리로 당첨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토요일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심한 좌절감을 맛보는 ‘로또 신드롬’을 앓고 있다. 이런 현상은 최초의 도박 드라마 <올인>의 시청률 상승으로 이어졌다.
복권 열풍을 야기한 원인을 찾아 척결해야 한다. 정당한 노동에 대해 정당한 몫이 주어지지 않는 사회 풍토가 바로 그 주범이다. 그러니까 복권 자체가 아니라 ‘복권 공화국’이 문제이다.
절차의 공정성이 없는 ‘갈등’ 사회 올해 우리 사회의 네 번째 키워드는 ‘갈등’이다. 물론 사회에는 언제나 진보와 보수 세대, 노사 그리고 빈부간의 갈등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올해의 갈등은 그 양상이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특히 정부는 언론과의 관계에서 갈등의 도를 넘어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청년 실업, 부동산 투기, 교육 문제 등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말았다.
핵폐기장 부지 선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부안 군민과 정부의 갈등 역시 협상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골이 깊어졌다. 부안은 지금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NEIS를 둘러싼 정부와 전교조의 갈등도 서로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분신자살로 이어지는 노사간의 갈등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하지면 이제는 막가자는 것이지요.
막가파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가 그렇고 아니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팽배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을 하고 있지만 신앙의 위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막연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 왔습니다.
전혀 하나님이 힘을 쓰시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는 것 같은데 아무런 역사가 없으니 안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루는 그 집 남편이 저녁에 집에 돌아오자, 부부간에 이런 대화가 벌어졌습니다.
부인이 “여보, 오늘 우리 집에 교회에 새로 오신 목사님이 찾아와서 내가 대답 못할 말씀을 하고 갔습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사시느냐고요.”남편: “그래 뭐라고 대답했소?” 부인: “뭐라 할 지 모르겠어서······.”
남편: “우리는 점잖은 사람들이라고 하지 왜······.”부인: “아이쿠 참, 그 말이 아닌 걸······.”
남편: “우리도 생각이 날 때면 예배당엘 간다 하지······.” 부인: “그 말도 아니라니까요.”
남편: “그럼 우리도 이따금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 그래.” 부인: “글쎄, 그런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여기 사시느냐고 하시더라니까요······.”
종교적인 행위는 있지만 예수님은 계시지 않는다면
축복은 보이기는 하지만 인간적으로 이루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파괴요 혼란이요 분리요 정욕과 욕심이요 그 결국은 거의 죽음입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사냥하는 방법 가운데 이러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원숭이들이 다니는 길목의 나뭇가지에 원수이가 좋아하는 열매를 넣은 조롱박을 매달아 놓습니다. 그 조롱박에는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 놓습니다. 원숭이는 조롱박 안에 맛있는 열매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속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열매를 움켜쥔 원숭이는 조롱박의 구멍이 너무 작아 손을 빼지 못합니다. 사냥꾼들이 몰려오면 자신이 쥐고 있는 열매를 놓고 손을 빼 도망을 가야하지만 원숭이에게는 그런 지각이 없습니다. 결국 원숭이는 한 손에 조롱박을 넣은 채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이러한 현상이 원숭이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사람들에게도 이 원숭이와 같은 신세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글이 또 하나 있습니다.
“물고기의 기억력은 3초라고 합니다. 다른 물고기들이 낚시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또 입질을 한다. 그리고 또 끌려가는 동료의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서도 여전히 입질을 계속한다. 3초만 지나면 금방 일어났던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정치인의 기억력은 얼마나 될까? 역시 3초라고 한다. 동료정치인이 뇌물을 먹고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또 뇌물을 먹는다. 그래서 10년 전에도 작년도, 지금도 끌려가는 정치인은 여전히 발생한다. 그 일은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의 기억력은 얼마나 될까? 역시 3초를 넘지 못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탄의 미혹에 끌려 탐심에 끌려 죽은 자리에 처하는 줄을 알면서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했습니다.
이 탐심은 사탄이 사람들을 미혹하면서 6천년동안 사용하는 낡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 도구는 지금도 전혀 낡지 않은 새로운 도구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마치 물고기를 낚는 미끼와 같습니다.
오늘 분문에 역시 그 이름이 간사하고 사기꾼이라는 뜻을 가진 야곱이라는 사람이 탐심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다가 살기가 등등한 형이 동생의 가증한 행동을 가만히 두지 않고서 살해를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동생을 찾아 나서서니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피신의 길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 가운데는 참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더 이상 할 수없어 그 생활을 피하여만 하고 부인해야만 하고 급기야는 죽을 것 같은 경지에 이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야곱이라는 자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러 한 줄로 압니다.
물질로 인하여 부부 관계로 인하여 그 외 가정 문제 직장 문제 정상적으로 할 수 없어 피신을 떠나야만 하는 그렇지 않고는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처지에 처한 자들이 저와 여러분이 아니고 그 누구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다 사정을 알아보니 모두가 한결 같습니다.
이대로 또 한해를 시작한다면 새해가 된 들 더 나빠지면 졌지 무슨 소망을 더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대로 또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고 여기 있는 김 목사도 그렇게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어요.
아휴 저 사람 어떡하겠나? 하는 자들 한둘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살길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괴로워 도피하는 이곳에 창피한 이곳에서 외롭고 고독한 이곳에서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곳에서 저 사망의 자락에 떨어 질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저녁은 이러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니 이런 시간입니다.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가 처한 그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시고 내 일평생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만나는 시간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자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의 변화는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는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차라리 10분간 기도하는 편히 좋다\\고 했고, 레날드 레보넬은 \\천만 명의 군중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단 한사람이 더 위대하다\\고 했고 발튼 버쳐는 \\슬픔과 고통으로 엎드려 있느냐? 기도할 것밖에 없고 핍박 을 당하고 욕을 먹고 미움을 받느냐 ? 기도할 것 밖에 없고. 죽음이 너회 집안에 찾아왔느냐? 기도할 것 밖에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 몬테큐는 \\우리는 일어나서도. 걸어가면서도, 누워 서도 기도할 것 밖에 없다\\고 말하였습니다.할렐루야!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기도 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축복은 아직 나에게 배달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면 그 축복의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로 믿음은 능력이 있어 역사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이 얼마든지 기뻐 받으시지만 기도하지 않는 것은 큰 죄요 망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바로 그 곁에 강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아주 가까이에 있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니 얼마나 좋은 기회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조차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놀라운 일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기억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는 구원 받았습니다. 한편 한 사람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그분께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구원을 거절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합왕 시대에는 그 땅에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알에게 팔려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행동이 서운하였을 것입니다. 평소에 목이 곧아서 자존심을 세우고 결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슥10:1)
그 때에 이스라엘 엘리야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 비를 구했습니다. 하늘에서 이윽고 큰 비가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때에도 그분에게 무관심했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경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신을 부탁하며 구원을 청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을 못 받았습니다. 그 구별은 바로 지나가는 예수님께 부르짖어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어떤 기사에 올해의 키워드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2월에 한 사람의 어이없는 방화로 발생한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는 192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특히 생활고를 비관한 가장의 가족 동반 자살은 사회의 공동선인 가족을 붕괴시키는 사회 병리 현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죽음과 더불어 2003년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두 번째 키워드는 ‘외도(外道)’다. 하루 평균 130건 이혼의 주된 이유가 바로 배우자의 외도 때문이다 는 것입니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 <바람난 가족>을 비롯해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와 <앞집 여자>는 젊은이들에게 혼전 동거를, 기혼 남녀에게 불륜에 대한 로맨스를 꿈꾸도록 자극했다는 것입니다. 세계 이혼 1위 국가 이제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라 동방예외지국이다. 윤리와 예의범절이 살아있는 나라가 아니라, 반대로 윤리와 예의범절이 지켜지지 않는 예외의 나라인 셈이다. 바야흐로 우리 사회는 바람을 권하는 불륜 공화국이란 또 하나의 딱지를 얻은 셈이다. 서구의 성 해방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가치관이 붕괴되고, 이것은 가정 해체의 주범으로 등장하고 있다. 가족 붕괴 현상은 바로 ‘바르게 사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등한시한 채, 오직 ‘잘 살아 보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물질과 육체적 쾌락에만 매달러 온 우리의 자화상이다. 가족이 무너지면 사회도 무너지게 된다.
올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어 1위를 찾는다면 단연 ‘로또 복권’이다. ‘인생 역전’이란 분명히 구미가 당기는 말이다. 우리는 현실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로또 복권은 그 꿈을 일순간에 이뤄준다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대가가 정당하지 않은 ‘로또 복권’ 사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약속을 믿고 있고, 특히 350만 명의 신용 불량자와 청년 실업자들은 일주일 인생, 즉 복권 추첨 일까지 ‘혹시나’의 기대 심리로 당첨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토요일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심한 좌절감을 맛보는 ‘로또 신드롬’을 앓고 있다. 이런 현상은 최초의 도박 드라마 <올인>의 시청률 상승으로 이어졌다.
복권 열풍을 야기한 원인을 찾아 척결해야 한다. 정당한 노동에 대해 정당한 몫이 주어지지 않는 사회 풍토가 바로 그 주범이다. 그러니까 복권 자체가 아니라 ‘복권 공화국’이 문제이다.
절차의 공정성이 없는 ‘갈등’ 사회 올해 우리 사회의 네 번째 키워드는 ‘갈등’이다. 물론 사회에는 언제나 진보와 보수 세대, 노사 그리고 빈부간의 갈등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올해의 갈등은 그 양상이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특히 정부는 언론과의 관계에서 갈등의 도를 넘어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청년 실업, 부동산 투기, 교육 문제 등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말았다.
핵폐기장 부지 선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부안 군민과 정부의 갈등 역시 협상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골이 깊어졌다. 부안은 지금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NEIS를 둘러싼 정부와 전교조의 갈등도 서로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분신자살로 이어지는 노사간의 갈등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하지면 이제는 막가자는 것이지요.
막가파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가 그렇고 아니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팽배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을 하고 있지만 신앙의 위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막연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 왔습니다.
전혀 하나님이 힘을 쓰시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는 것 같은데 아무런 역사가 없으니 안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루는 그 집 남편이 저녁에 집에 돌아오자, 부부간에 이런 대화가 벌어졌습니다.
부인이 “여보, 오늘 우리 집에 교회에 새로 오신 목사님이 찾아와서 내가 대답 못할 말씀을 하고 갔습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사시느냐고요.”남편: “그래 뭐라고 대답했소?” 부인: “뭐라 할 지 모르겠어서······.”
남편: “우리는 점잖은 사람들이라고 하지 왜······.”부인: “아이쿠 참, 그 말이 아닌 걸······.”
남편: “우리도 생각이 날 때면 예배당엘 간다 하지······.” 부인: “그 말도 아니라니까요.”
남편: “그럼 우리도 이따금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 그래.” 부인: “글쎄, 그런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여기 사시느냐고 하시더라니까요······.”
종교적인 행위는 있지만 예수님은 계시지 않는다면
축복은 보이기는 하지만 인간적으로 이루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파괴요 혼란이요 분리요 정욕과 욕심이요 그 결국은 거의 죽음입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사냥하는 방법 가운데 이러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원숭이들이 다니는 길목의 나뭇가지에 원수이가 좋아하는 열매를 넣은 조롱박을 매달아 놓습니다. 그 조롱박에는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 놓습니다. 원숭이는 조롱박 안에 맛있는 열매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속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열매를 움켜쥔 원숭이는 조롱박의 구멍이 너무 작아 손을 빼지 못합니다. 사냥꾼들이 몰려오면 자신이 쥐고 있는 열매를 놓고 손을 빼 도망을 가야하지만 원숭이에게는 그런 지각이 없습니다. 결국 원숭이는 한 손에 조롱박을 넣은 채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이러한 현상이 원숭이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사람들에게도 이 원숭이와 같은 신세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글이 또 하나 있습니다.
“물고기의 기억력은 3초라고 합니다. 다른 물고기들이 낚시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또 입질을 한다. 그리고 또 끌려가는 동료의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서도 여전히 입질을 계속한다. 3초만 지나면 금방 일어났던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정치인의 기억력은 얼마나 될까? 역시 3초라고 한다. 동료정치인이 뇌물을 먹고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또 뇌물을 먹는다. 그래서 10년 전에도 작년도, 지금도 끌려가는 정치인은 여전히 발생한다. 그 일은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의 기억력은 얼마나 될까? 역시 3초를 넘지 못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탄의 미혹에 끌려 탐심에 끌려 죽은 자리에 처하는 줄을 알면서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했습니다.
이 탐심은 사탄이 사람들을 미혹하면서 6천년동안 사용하는 낡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 도구는 지금도 전혀 낡지 않은 새로운 도구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마치 물고기를 낚는 미끼와 같습니다.
오늘 분문에 역시 그 이름이 간사하고 사기꾼이라는 뜻을 가진 야곱이라는 사람이 탐심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다가 살기가 등등한 형이 동생의 가증한 행동을 가만히 두지 않고서 살해를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동생을 찾아 나서서니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피신의 길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 가운데는 참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더 이상 할 수없어 그 생활을 피하여만 하고 부인해야만 하고 급기야는 죽을 것 같은 경지에 이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야곱이라는 자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러 한 줄로 압니다.
물질로 인하여 부부 관계로 인하여 그 외 가정 문제 직장 문제 정상적으로 할 수 없어 피신을 떠나야만 하는 그렇지 않고는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처지에 처한 자들이 저와 여러분이 아니고 그 누구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다 사정을 알아보니 모두가 한결 같습니다.
이대로 또 한해를 시작한다면 새해가 된 들 더 나빠지면 졌지 무슨 소망을 더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대로 또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고 여기 있는 김 목사도 그렇게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어요.
아휴 저 사람 어떡하겠나? 하는 자들 한둘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살길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괴로워 도피하는 이곳에 창피한 이곳에서 외롭고 고독한 이곳에서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곳에서 저 사망의 자락에 떨어 질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저녁은 이러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니 이런 시간입니다.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가 처한 그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시고 내 일평생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만나는 시간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자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의 변화는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는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차라리 10분간 기도하는 편히 좋다\\고 했고, 레날드 레보넬은 \\천만 명의 군중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단 한사람이 더 위대하다\\고 했고 발튼 버쳐는 \\슬픔과 고통으로 엎드려 있느냐? 기도할 것밖에 없고 핍박 을 당하고 욕을 먹고 미움을 받느냐 ? 기도할 것 밖에 없고. 죽음이 너회 집안에 찾아왔느냐? 기도할 것 밖에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 몬테큐는 \\우리는 일어나서도. 걸어가면서도, 누워 서도 기도할 것 밖에 없다\\고 말하였습니다.할렐루야!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기도 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축복은 아직 나에게 배달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면 그 축복의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로 믿음은 능력이 있어 역사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이 얼마든지 기뻐 받으시지만 기도하지 않는 것은 큰 죄요 망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바로 그 곁에 강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아주 가까이에 있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니 얼마나 좋은 기회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조차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놀라운 일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기억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는 구원 받았습니다. 한편 한 사람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그분께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구원을 거절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합왕 시대에는 그 땅에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알에게 팔려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행동이 서운하였을 것입니다. 평소에 목이 곧아서 자존심을 세우고 결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슥10:1)
그 때에 이스라엘 엘리야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 비를 구했습니다. 하늘에서 이윽고 큰 비가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때에도 그분에게 무관심했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경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신을 부탁하며 구원을 청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을 못 받았습니다. 그 구별은 바로 지나가는 예수님께 부르짖어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