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으로 하나님께 더가까이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44회 작성일 2009-05-27 09:41

본문

요한복음 12:1-11 헌신으로 하나님께 더가까이
이제 2004년도 한 해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벌써 18일이라는 시간이 흘려 갔습니다. 저도 놀랬습니다.
이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고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일초 순간에 역사는 바뀌고 사람의 생사가 왔다 갔다 합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는 그냥 또 시간을 가는구나? 하면서 가는 세월 그 누가 막을 수가 있나요? 하며 보내시는 분이 계시지만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그냥 보내지 않고 무엇인가? 내 인생의 새로운 큰 획을 긋은 자들도 있습니다.
올 한 해에 내가 무엇을 붙잡아야 하겠다는 계획이 설 뿐 만아니라 실제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가능성이 보여 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코 막연한 삶이 올 한해도 또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실제적이요 구체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뜻하신 바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놀라우신 일들을 막연히 기대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일러 주시거나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하고 사모하고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일러 주시고 보여 주시고 그리고 그 놀라운 일을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그러한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실제적이요 구체적으로 길을 일러 주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니 기껏 보고 느끼는 것이 인간적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말에 감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산을 만드시고 물을 만드시는 하나님은 모르며 왜 산이 거기에 있고 물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가 없느냐? 는 말입니다.
만물이 왜 존재하는지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의 가치는 그 존재의 의미에 합당하게 사용되어 질 때에 가장 값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십니까?
내 존재의 의미를 상실 했을 때에 방황하게 되며 낙심이 되며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확신이 서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혹시 나의 삶이 방황하고 낙심이 되고 그리고 불안하고 초조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내 인생은 언제 좌초를 만나 파선을 할지 모릅니다.
빠른 시일 내에 내 존재의 의미를 바로 찾아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나를 이 땅에 내어 놓으신 하나님에게 가서 물어 봐야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봐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할렐루야!
올 한 해의 표어는 그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입니다.
아니 지금보다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길이 무엇보다 내 삶의 제일 우선 입니다. 아멘 이십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기도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좋은 길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나아가야 할 생명의 길을 내게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다가 올 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는 길을 그들에게 보여 주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은사를 체험하고 신령한 것을 보게 하시고 그리고 말하게 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도하는데 참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듣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그들을 살리고 축복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더가까이 나아 갈 수가 있습니다.
모르면 시키는 대로 따라오면 됩니다.
모르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빨간 신호, 파란 신호를 지키는 것이 귀찮게 느껴집니까? 누구를 위한 신호입니까? 법이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말입니다.
신호등이 없는 차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위험하신 줄 아십니까? 그것을 따르는 것이 귀찮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입니다.
내 마음대로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 자랑감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일임을 이제는 아셔야 합니다.
30여명의 사상자를 낸 열차 충돌 사고가 뉴욕 교외에서 발생했습니다. 역 구내에 서 있는 다른 화물차를 들이받는 순간에 기관사는 온 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사고 조사 결과 이 지역의 신호등은 모두 제대로 작동되고 있었고 사고지점에 이르기 전 3/4마일 정도의 거리에서부터 속도를 줄이라고 경고하는 신호등들도 약 반 마일 전부터 작동되고 있었다는 사실도 수사관들은 밝혀내었습니다. 문제의 발생은 기관사가 방심하다가신호 등을 무시하고 달렸던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일러 주심을 무시함은 그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만 실제적으로 그 기도는 순종이라는 결실을 가져오게 합니다.
순종이 없는 일방통행을 하다가 거의 죽을 뻔 했던 자들이 순종을 함으로서 사는 역사가 많이 일어 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한 성도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시원한 은혜를 받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순종을 하지 못하는 그 분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 분의 해결점은 기도의 응답이기 전에 순종이 선결해야만 했습니다.
따지고 판단하다가 축복의 기회를 다 놓치고 따지고 판단하는 데로 자신의 인생은 힘들게 만들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들의 삶이 만들어져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즐겨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꿔야 하는데 즐겨 고집 피우는 자로 만들어져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링컨은 나이 40이면 제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얼굴은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축복된 사람으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헌신입니다.
기도와 순종은 소극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는 것은 헌신입니다.
기도 순종은 안 하면은 벌 받을 지도 몰라 기도해야 순종해야 복을 받지 하는 기도해야만 하는 순종해야만 하는 짐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기도하라 순종하라는 소리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죽으라고 기도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기도와 순종은 내 생활에 잘 적응이 되어 헌신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헌신은 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가 아니라 복을 받겠다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잘 받으시기 것이 기도 순종보다 더 기분 좋게 받으시는 것은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이지 분별하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할렐루야!
왜 이렇게 헌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잘 받아 주시는 것입니까?
기도와 순종은 모두가 자신들의 무엇을 위한 것에 그치는 반면에 헌신은 주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자원 적이요 자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 당신이 나를 기쁘시게 해 보십시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 당신은 나를 기쁘시게 해 주시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런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로 있는 나를 생각하는 것은 감히 상상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여러분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의 가치의 참된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실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 볼 때에 무엇이 남보다 못합니까?
그런데도 내가 그렇게도 가치가 없고 아니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절대로 여러분들이 실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복이 없어 재수 없는 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창조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받으심은 인간을 만드신 목적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43:21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할렐루야!
나는 참으로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 왔습니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내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을 위한 내 자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3형제자매와 가륫유다등 4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믿음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자매 마르다는 세상에 마음이 빼앗겨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주께 무엇인가를 받을 줄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라비 나사로는 주님께 말씀하시면 순종을 하겠습니다. 라는 보통 평범한 신앙의 자세로 있었습니다.
가륫인 유다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도록 아예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꼭 이런 사람 있습니다.
그러나 자매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으로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구경꾼으로 모함하기 위하여 모의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유익만을 챙기려고만 하십니까?
아니면 내 자신을 드리기를 기뻐하는 자이십니까?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은 무엇인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잘 받은 방법이 무엇인줄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고 좋은 것을 주를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나드 향유는 동방의 향유로서 유대 국내에서 조달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므로 부득이 수입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 가격이 매우 비쌌습니다. 또 차지하는 공간이 적기 때문에 투자가치가 높아 가격이 높았는데 1근 340g 정도에 약 300데나리온 이었다. 이것은 노동자의 1년 치 임금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수천만 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사실 이것을 주를 위해 드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십일조를 드리는 일에도 쩔쩔매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마리아의 헌신은 대단한 것입니다.
준비되어 있었고 가장 소중히 여기던 것을주님께 드린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어떠한가? 모든 것을 다 떼고 쓰다 남은 것을 주님께 드리는 그런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성도의 환경이 핑계가 될 수가 없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면 보통 초대한 손님의 손을 물로 씻게 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오늘 마리아는 예수의 발을 향유로 씻고 있는 것이다. 손님의 발을 씻는 일은 지극히 드문 일이었으며, 특별히 손님의 발을 씻는 일은 최하급의 노예가 하는 일이었다. 즉 마리아는 예수에게 최하급의 노예가 되어서 주님의 발을 씻어준 것이다. 그것도 손으로 씻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은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물질을 드렸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철저히 낮아져서 주님께 드리는 헌신의 본을 보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헌신을 칭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이런 칭찬을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이 그녀의 행위를 기념하라고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칭찬을 듣는 헌신을 하였습니다.
기도는 왜 하고 말씀은 왜 듣습니까?
기도와 말씀에 순종은 주를 위한 희생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헌신은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음입니다.
마리아의 헌신하는 신앙의 기초는말씀을 듣기를 좋아하며, 사모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녹10:38-42)
마리아는 기도하는 여인이었습니다.(요11장)
그러므로 신앙은 \\must be\\가 아니라 \\will be\\인 것입니다. 이것은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아니라 스스로 우러나와서 의지로서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헌신하지 않는 이유는, 못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자꾸만 멀어지는 이유가 무엇인 줄을 아십니까?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받으려고만 하였지 하나님을 위하여 내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힘껏 헌신하는 올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모이는 곳마다 그 이름이 기억되는 간증하는 축복이 따를 것입니다.
Total 914 건 | 1 / 92 page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