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목회자가 됩시다(노회 목회자 수양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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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61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시32:1-6 행복한 목회자가 됩시다.
할렐루야!
목회전선에서 수고하시는 여러 목사님들 참으로 귀하고 존경스럽습니다.
부임을 하셨든지 개척을 하셨든지 이미 어느 정도 성장을 가져오신 분들은 능력이 있어서 성장을 가져 올 수 있도록 하셨으니 존경스럽고요더 존경스러운 분들은 얼마 되지 않는 성도를 두고 언젠가는 나도 쨍하고 볕들 날 있겠지 하면서 10년을 견디고 20년을 견디고 지금까지 잘 견디어 참아 내시며 작은 교회를 감당하시는 목사님들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이니 그러면 제 자신이 존경스럽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를 못합니다.
저는 잘 견디고 잘 참아온 자가 아니라 교회의 문을 마음으로 여러 번 닫았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다가 어쩔 수없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제 심정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닫았다가 열었다가 마음으로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자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본성적으로 인간적인 능력도 인정도 없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매일 저를 보면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면서 욕심대로 안 되니 열었다가 닫았다가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요 내년이면 한 교회에서 목사로 만 20년을 섬겼기 때문에 곧 원로 목사가 됩니다.
목사 안수 받기전 대학원 1년 때부터 멋모르고 개척을 시작했으니 단독 목회로 한 교회에서 25년 가까이나 되고 보니 골동품이 다된 목사입니다.
그러면 여태까지 뭐하고 남들 다 부흥을 했는데 뭐했느냐? 무슨 목회를 했느냐?하면 저도 제 나름대로 하노라고 했는데 이 정도 밖에 안 되는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보통 다른 목회자들이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습니다.
구하라고 그리하면 주시리라
네 입을 크게 벌려라 그러면 채우리라
젊은 시절에는 집회를 한번 했더니 여호수아와 같이 365일 성전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여 교회에 잠을 자며 하여도 조금은 주셨지만 기도한 것만큼은 안 되더라고요.
어떤 이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선교를 많이해 보라 , 무슨 선을 구하라, 방법이 잘 못되었다 등등……. 세미나에 좇아가면 은 이렇게 하여서 되었다 저렀게 하여서 되었다 이래 해라 저래 하라 스트레스 많이 받지만 제 마음에 드는 것을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힘이 참 들었습니다.
이제 목회 추세는 영성에서 가정 교회로 가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를 않습니다.
구해도 참으로 만족 할 만큼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의 소원을 구하면 구할수록 이루어지지 않는 제 자신이 초라하기만 하였습니다.
제가 복을 받지 못한 자 같이 여겨지고요 목회가 짐이 되니 별로 은혜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제가 하나님 앞에서 아주 잘못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네 자신을 알라 누기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들었는데 사실 제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자신을 바로보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제가 잘못되어 있는데 무엇이든지 바로 보이겠습니까?
때로는 하나님도 바로 인식을 못하고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1.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 대왕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된 후에 드린 기도요 찬송이 아닙니까?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요 기도로 성공한 자이지 않습니까?
시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일사천리로 하나님으로 그는 크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어찌 그의 입술에는 찬송의 시와 노래가 끊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나의 왕 나의 주시여 나의 구원의 산성이시여 전능자 하나님을 찬송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이 그에게는 큰 구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
원수를 향하여 입을 열정도요 원수의 앞에서 상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은혜를 구하면 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구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 내 어려움에 인도자가 되시고, 내 길에 보호자가 되심을 노래를 하였습니다.
정말 신이 날 정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경험을 했지만은 실상은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인가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 앞에 할 수 없는 죄인임을 생각 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만 전심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직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만 향하여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그러했습니다. 다윗과 같이 성공을 한 것도 아니면서 다윗의 심정으로 무엇인가 이루려고만 했고 원하는 것을 향하여 달리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교회 성장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선이 되어서 말입니다. 꿩잡는 것이 매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성장도 못시키면서 아니 그릇도 제대로 되지도 못하면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자 같이 기도하면 다 되고 나름대로 선을 한다고 나서니 다른 이는 모두가 내 앞에는 정죄의 대상이 되고 판단의 대상이 되어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이제 알고 보니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부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이 글을 쓰기까지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깨닫지 못한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본문의 글이 쓰기까지의 배경은 시편 51편이 아니겠습니까?
시51:16-17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제사는 무슨 큰일을 이루고 남이 하지 못하는 선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아닙니까?
시51편을 가지고 이번 총회 목사 장로 기도회때 총회장 서기행 목사님의 새롭게 하소서 라는 개회 설교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라고 하시는데 어찌 그 연세에 그런 목소리가 나오시는지…….
아마 혼신을 다해 한국교회를 향해 한번 외치고 싶었던 설교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자신을 향해 하시는 말씀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목사 은퇴 4개월, 총회장 임기 3개월 남겨 두시고, 암이 뼈 골수에 전이되었느냐? 아니 되었느냐? 염려하는 이 시점에 그가 외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이었습니다.
아직도 내 자신을 표현 할 수 있을 때에, 내 정신이 혼미하여 왔다 갔다 하기 전에, 더 이상 그 무엇을 할 수없다는 때가 오기 전에 외치고 싶고 공포하고 싶은 것입니다.
51:3절 주여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스스로 나의 죄과는 잊어 버린지 오래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거스틴은 어린 때에 어머니의 젓꼭지를 물은 것도 생각이 나서 회개를 하였다고 그의 참회록에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여태까지 내가 무슨 잘 못한 것이 있다고 교회 성장을 위하여 노회나 목회지의 모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달려오기만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4절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범사에 내 위치에서 행한 모든 것이 아니 나로 인한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다 하나님께 죄가 됨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하였으니 밧세바와 연애한 사실만이 죄가 아니라 이제 생각해 보니 내가 조성되기부터 내가 죄악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나와 관계된 것은 죄악 투성이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이것도 모르고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분 아래 가장 의로운 채, 가장 잘난 채, 내가 행한 것은 다 이해되고 다 선하고 괜찮고 사실 내가 하나님이 되어 온 죄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는 사도라기보다는 성도라기보다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나에게 지금 가장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에게는 이런 고백이 너무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자
지금 한국 교회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회개의 기도를 공중 앞에서 한국의 원로 목사님들이 앞장을 서서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봐야 하느냐? 긍정적으로 봐야 하느냐? 하는 시각차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은 그렇게 논할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도 회개의 기회를 하나님 앞에서 갖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 않습니까?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모아 놓고 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귀한 일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가 있는 동네에는 모 교단의 총회장을 하시고 사회적으로 혹은 선교적으로 교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하였다고 할 수 있는 한분의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정년은퇴을 하시고 후임자에게 교회를 위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위임하고 위임받을 때는 서로가 좋았는데 그 후 몇 개월이 가지 못해서 두 분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후임 목사가 잘 못이 들어나자 급기야 수습하느라고 교인들 앞에서 제가 잘 못하였습니다 라고 수요 기도회에 사죄를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제가 중국에 15차례 선교 방문을 하였는데 7-8차례는 술을 마셨지만 인사불성하게는 안 마셨습니다.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아내 외에 한 여자를 제가 사랑을 했습니다.
이혼의 문제로 상담하러온 여 성도와 여러 차례 상담을 하다가 서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했는데 회개가 잘못되었는지 용서가 제대로 되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용서가 무엇일까요?
사실 다른 사람에 의하여 더 이상 숨길 수없어서 죄가 들어나 용서를 받지 않을 수 없어서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만 진정한 근본적인 회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 양심에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3절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고백하지 않고는 거의 뼈가 부셔줘 주저앉을 것 같아 거의 죽을 것 같아, 아니 죽음뿐이구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죄 때문에 죽겠구나를 실감하는 것입니다.
마치 요나가 고깃배 속에서 들어가서야 비로소 회개가 제대로 나왔을 것입니다.
욘2:2-3 큰물이 나를 둘렀고 내 위에 넘쳤나이다. 완전히 분위기가 지옥 ,스올, 죽음입니다.
이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의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만 보기만 봐도 죄인은 죽는 것입니다.
어찌 죄악을 품고, 아니 죄를 알지도 못하고서 하나님과 동행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4절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죄어 들어오는데 어찌 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異) 물질이 내 속에 들어가서 내 위장이 역겨워 비위가 상하여 견디지 못하여 토하여 버리듯이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자들은 언제든지 이(異) 물질을 먹고 마시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주워 먹었다고 다 소화가 되고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나를 더 망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애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4절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으니……. 가뭄에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 심어 논 벼가 자라지 못하여 누렇게 타 가는 장면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바라보는 자마다 갈증을 느끼고 그 바닥은 생명이 살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속에 정한 마음이 창조되고 깨끗이 죄악이 도말되기까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저 무엇인가 이루기만을 바라면서 이것저것 다 주워 먹었던 것 이제 토하여 내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괜찮고 참을 만 하고 결딜만 하다고 여기십니까?
계속 그렇게 가다가는 주의 성령님이 떠날지도 모릅니다.
삼상 16:14 주의 부리시는 악신이 성령님을 대신 할지도 모릅니다.
다윗이 아름다운 업(業)은 그가 이루어 놓은 일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일이 그를 더 아름답게 하였으며 그의 이루어 놓은 일이 더욱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것입니다.
3. 죄에서의 자유함은 진정한 행복 자가 되게 합니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적으로 사람들이 다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이루었을 때에 행복 할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원하는 큰 목회도 그러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윤모 목사님은 만 몇 천 평의 대지위에 만 몇 천 평의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 한 것을 지상(紙上)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분이 너무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이루어도 하나님과 가리움이 있는 자라면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한 자는 하나님과 가리움이 없이 그와 함께 하는 삶인 줄 압니다.
한국 교회의 거목 고 한경직 목사님은 그가 한국의 최고의 교회를 섬긴 자로 최고의 겸손 한자로 자리 매김을 하였지만 진작 본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앞에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템플턴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그는 드디어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했거든요 그 고백이야 말로 그 분을 참으로 행복한 자로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가장 큰 목회가, 사람들이 일컫는 겸손한 자가, 그를 행복하게 한 것의 전부가 아니었고 그의 죄인 됨의 고백이 그분을 진정 행복하게 했을 것입니다.
1-2 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진정한 행복한 목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목회자의 기회를 지금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6절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회개의 기도를 드립시다.
세상적으로만 성공하여 행복한 자가 되려다가 불행한 자로 스스로 전락하지 마시고 하나님과가리움이 없는 목회자로서의 행복을 이제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목회전선에서 수고하시는 여러 목사님들 참으로 귀하고 존경스럽습니다.
부임을 하셨든지 개척을 하셨든지 이미 어느 정도 성장을 가져오신 분들은 능력이 있어서 성장을 가져 올 수 있도록 하셨으니 존경스럽고요더 존경스러운 분들은 얼마 되지 않는 성도를 두고 언젠가는 나도 쨍하고 볕들 날 있겠지 하면서 10년을 견디고 20년을 견디고 지금까지 잘 견디어 참아 내시며 작은 교회를 감당하시는 목사님들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이니 그러면 제 자신이 존경스럽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를 못합니다.
저는 잘 견디고 잘 참아온 자가 아니라 교회의 문을 마음으로 여러 번 닫았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다가 어쩔 수없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제 심정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닫았다가 열었다가 마음으로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자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본성적으로 인간적인 능력도 인정도 없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매일 저를 보면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면서 욕심대로 안 되니 열었다가 닫았다가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요 내년이면 한 교회에서 목사로 만 20년을 섬겼기 때문에 곧 원로 목사가 됩니다.
목사 안수 받기전 대학원 1년 때부터 멋모르고 개척을 시작했으니 단독 목회로 한 교회에서 25년 가까이나 되고 보니 골동품이 다된 목사입니다.
그러면 여태까지 뭐하고 남들 다 부흥을 했는데 뭐했느냐? 무슨 목회를 했느냐?하면 저도 제 나름대로 하노라고 했는데 이 정도 밖에 안 되는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보통 다른 목회자들이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습니다.
구하라고 그리하면 주시리라
네 입을 크게 벌려라 그러면 채우리라
젊은 시절에는 집회를 한번 했더니 여호수아와 같이 365일 성전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여 교회에 잠을 자며 하여도 조금은 주셨지만 기도한 것만큼은 안 되더라고요.
어떤 이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선교를 많이해 보라 , 무슨 선을 구하라, 방법이 잘 못되었다 등등……. 세미나에 좇아가면 은 이렇게 하여서 되었다 저렀게 하여서 되었다 이래 해라 저래 하라 스트레스 많이 받지만 제 마음에 드는 것을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힘이 참 들었습니다.
이제 목회 추세는 영성에서 가정 교회로 가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를 않습니다.
구해도 참으로 만족 할 만큼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의 소원을 구하면 구할수록 이루어지지 않는 제 자신이 초라하기만 하였습니다.
제가 복을 받지 못한 자 같이 여겨지고요 목회가 짐이 되니 별로 은혜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제가 하나님 앞에서 아주 잘못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네 자신을 알라 누기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들었는데 사실 제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자신을 바로보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제가 잘못되어 있는데 무엇이든지 바로 보이겠습니까?
때로는 하나님도 바로 인식을 못하고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1.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 대왕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된 후에 드린 기도요 찬송이 아닙니까?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요 기도로 성공한 자이지 않습니까?
시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일사천리로 하나님으로 그는 크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어찌 그의 입술에는 찬송의 시와 노래가 끊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나의 왕 나의 주시여 나의 구원의 산성이시여 전능자 하나님을 찬송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이 그에게는 큰 구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
원수를 향하여 입을 열정도요 원수의 앞에서 상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은혜를 구하면 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구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 내 어려움에 인도자가 되시고, 내 길에 보호자가 되심을 노래를 하였습니다.
정말 신이 날 정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경험을 했지만은 실상은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인가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 앞에 할 수 없는 죄인임을 생각 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만 전심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직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만 향하여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그러했습니다. 다윗과 같이 성공을 한 것도 아니면서 다윗의 심정으로 무엇인가 이루려고만 했고 원하는 것을 향하여 달리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교회 성장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선이 되어서 말입니다. 꿩잡는 것이 매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성장도 못시키면서 아니 그릇도 제대로 되지도 못하면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자 같이 기도하면 다 되고 나름대로 선을 한다고 나서니 다른 이는 모두가 내 앞에는 정죄의 대상이 되고 판단의 대상이 되어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이제 알고 보니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부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이 글을 쓰기까지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깨닫지 못한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본문의 글이 쓰기까지의 배경은 시편 51편이 아니겠습니까?
시51:16-17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제사는 무슨 큰일을 이루고 남이 하지 못하는 선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아닙니까?
시51편을 가지고 이번 총회 목사 장로 기도회때 총회장 서기행 목사님의 새롭게 하소서 라는 개회 설교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라고 하시는데 어찌 그 연세에 그런 목소리가 나오시는지…….
아마 혼신을 다해 한국교회를 향해 한번 외치고 싶었던 설교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자신을 향해 하시는 말씀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목사 은퇴 4개월, 총회장 임기 3개월 남겨 두시고, 암이 뼈 골수에 전이되었느냐? 아니 되었느냐? 염려하는 이 시점에 그가 외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이었습니다.
아직도 내 자신을 표현 할 수 있을 때에, 내 정신이 혼미하여 왔다 갔다 하기 전에, 더 이상 그 무엇을 할 수없다는 때가 오기 전에 외치고 싶고 공포하고 싶은 것입니다.
51:3절 주여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스스로 나의 죄과는 잊어 버린지 오래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거스틴은 어린 때에 어머니의 젓꼭지를 물은 것도 생각이 나서 회개를 하였다고 그의 참회록에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여태까지 내가 무슨 잘 못한 것이 있다고 교회 성장을 위하여 노회나 목회지의 모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달려오기만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4절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범사에 내 위치에서 행한 모든 것이 아니 나로 인한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다 하나님께 죄가 됨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하였으니 밧세바와 연애한 사실만이 죄가 아니라 이제 생각해 보니 내가 조성되기부터 내가 죄악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나와 관계된 것은 죄악 투성이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이것도 모르고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분 아래 가장 의로운 채, 가장 잘난 채, 내가 행한 것은 다 이해되고 다 선하고 괜찮고 사실 내가 하나님이 되어 온 죄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는 사도라기보다는 성도라기보다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나에게 지금 가장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에게는 이런 고백이 너무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자
지금 한국 교회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회개의 기도를 공중 앞에서 한국의 원로 목사님들이 앞장을 서서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봐야 하느냐? 긍정적으로 봐야 하느냐? 하는 시각차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은 그렇게 논할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도 회개의 기회를 하나님 앞에서 갖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 않습니까?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모아 놓고 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귀한 일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가 있는 동네에는 모 교단의 총회장을 하시고 사회적으로 혹은 선교적으로 교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하였다고 할 수 있는 한분의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정년은퇴을 하시고 후임자에게 교회를 위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위임하고 위임받을 때는 서로가 좋았는데 그 후 몇 개월이 가지 못해서 두 분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후임 목사가 잘 못이 들어나자 급기야 수습하느라고 교인들 앞에서 제가 잘 못하였습니다 라고 수요 기도회에 사죄를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제가 중국에 15차례 선교 방문을 하였는데 7-8차례는 술을 마셨지만 인사불성하게는 안 마셨습니다.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아내 외에 한 여자를 제가 사랑을 했습니다.
이혼의 문제로 상담하러온 여 성도와 여러 차례 상담을 하다가 서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했는데 회개가 잘못되었는지 용서가 제대로 되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용서가 무엇일까요?
사실 다른 사람에 의하여 더 이상 숨길 수없어서 죄가 들어나 용서를 받지 않을 수 없어서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만 진정한 근본적인 회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 양심에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3절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고백하지 않고는 거의 뼈가 부셔줘 주저앉을 것 같아 거의 죽을 것 같아, 아니 죽음뿐이구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죄 때문에 죽겠구나를 실감하는 것입니다.
마치 요나가 고깃배 속에서 들어가서야 비로소 회개가 제대로 나왔을 것입니다.
욘2:2-3 큰물이 나를 둘렀고 내 위에 넘쳤나이다. 완전히 분위기가 지옥 ,스올, 죽음입니다.
이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의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만 보기만 봐도 죄인은 죽는 것입니다.
어찌 죄악을 품고, 아니 죄를 알지도 못하고서 하나님과 동행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4절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죄어 들어오는데 어찌 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異) 물질이 내 속에 들어가서 내 위장이 역겨워 비위가 상하여 견디지 못하여 토하여 버리듯이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자들은 언제든지 이(異) 물질을 먹고 마시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주워 먹었다고 다 소화가 되고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나를 더 망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애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4절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으니……. 가뭄에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 심어 논 벼가 자라지 못하여 누렇게 타 가는 장면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바라보는 자마다 갈증을 느끼고 그 바닥은 생명이 살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속에 정한 마음이 창조되고 깨끗이 죄악이 도말되기까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저 무엇인가 이루기만을 바라면서 이것저것 다 주워 먹었던 것 이제 토하여 내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괜찮고 참을 만 하고 결딜만 하다고 여기십니까?
계속 그렇게 가다가는 주의 성령님이 떠날지도 모릅니다.
삼상 16:14 주의 부리시는 악신이 성령님을 대신 할지도 모릅니다.
다윗이 아름다운 업(業)은 그가 이루어 놓은 일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일이 그를 더 아름답게 하였으며 그의 이루어 놓은 일이 더욱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것입니다.
3. 죄에서의 자유함은 진정한 행복 자가 되게 합니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적으로 사람들이 다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이루었을 때에 행복 할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원하는 큰 목회도 그러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윤모 목사님은 만 몇 천 평의 대지위에 만 몇 천 평의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 한 것을 지상(紙上)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분이 너무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이루어도 하나님과 가리움이 있는 자라면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한 자는 하나님과 가리움이 없이 그와 함께 하는 삶인 줄 압니다.
한국 교회의 거목 고 한경직 목사님은 그가 한국의 최고의 교회를 섬긴 자로 최고의 겸손 한자로 자리 매김을 하였지만 진작 본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앞에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템플턴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그는 드디어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했거든요 그 고백이야 말로 그 분을 참으로 행복한 자로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가장 큰 목회가, 사람들이 일컫는 겸손한 자가, 그를 행복하게 한 것의 전부가 아니었고 그의 죄인 됨의 고백이 그분을 진정 행복하게 했을 것입니다.
1-2 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진정한 행복한 목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목회자의 기회를 지금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6절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회개의 기도를 드립시다.
세상적으로만 성공하여 행복한 자가 되려다가 불행한 자로 스스로 전락하지 마시고 하나님과가리움이 없는 목회자로서의 행복을 이제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