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도우심은 마침내 나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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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28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로마서 8:26-30 성령님의 도우심은 마침내 나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설교 준비를 하루 종일 다하고 이제 뿌듯한 마음으로 준비된 원고를 저장을 해야 하는데 저장할까요? 라는 질문에 당연히 예라고 해야 하는데 제 의지와 상관이 없이 아니오를 눌러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제 또 이런 실수가 저질러진 것입니다. 이 실수는 나를 얼마나 황당하게 하고 낭패가 되는지 너무나도 허탈하기 그지없습니다. 만약에 다른 이로 인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큰 소리를 치고 화도 낼 수가 있는데 전적으로 나 혼자 저질은 일이니 나를 원망하기도 그렇고 짜증을 내기도 그렇고 하는 수없이 또 설교를 작성해야만 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설교는 원고 설교입니다.
어떻게 하였습니다까지 문장에 맞춰서 하나하나 다 기록하는 것이지요
목사가 원고 없이 성경 본문만가지고 설교를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심을 기우려 기도하면서 원고 설교를 하려고 의도적으로 애를 쓰지요
설교 준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준비된 설교가 날아가 버렸으니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며 곰곰이 한번 다시 생각을 해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마귀의 방해하는 일일까? 아니면 내 실수일까? 아니면 성령님의 역사하심일까?
이래저래 생각을 해 봤지만 정신을 바르게 차리지 못한 내 실수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내가 잘못을 했더라도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그 동안 성령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전적인 마귀의 역사일까?성령님도 마귀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에 정신을 차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였다면 분명히 성령님이 도와주셨을 것입니다.
설교 준비 중에 설교를 날라 버리는 이런 일이 가끔 있습니다.
성령에 관하여 준비하던 중 과거에 저의 설교 중에서 성령에 관한 것을 어떤 내용인가를 살피는 중 021020 날 주일 설교 준비 때에 설교가 날아가 버린 이런 일이 또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내용이 참고가 될 만한 하여 그 때의 기록된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본문, 로마서 8:26-28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어제 아침시간부터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간까지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와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컴퓨터를 켜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기록한 모든 내용이 다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한지 참으로 속이 무지무지하게 상하였습니다. 컴퓨터 속에서 여기 저기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냥 컴퓨터가 꺼져도 저장되어 있기 마련인데 어찌 이렇게 감쪽같이 날아가 버리고 설교 제목만 덩그러니 남아 있느냐? 말입니다. 다시 설교를 준비하느라고 얼마나 분주했는지 모릅니다.
이게 우리 사람이 하는 일인가보다 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나라는 인생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요 또한 완전하지도 못한 자임을 실감이 갑니다.
우리 성도 중에 누가 핸드폰을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고 하지를 않았습니까?
무엇인가? 사람은 신이 아니요 완전하지 못한 인간임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한 예를 들었습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한 언론가 이요 골동품을 수집하는 이가 유럽의 한 왕가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구입하려고 유럽으로 가서 그 그릇을 찾는데 오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수년의 세월을 보내고 많은 수고 끝에 그 도자기의 정보를 알아내었습니다. 미국의 한 언론인이 수집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허탕을 치고 돌아와서 그 언론인이 누군가 하고 찾아보니 그 언론인이 다른 이가 아닌 본인이었고 오래 전에 자신이 그것을 구입해서 창고에다가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수고 그 시간이 너무 아까운 것이 아닙니까?
진작 기억을 하고 있었다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오늘 우리 신앙인들도 그러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지만은 헛된 세월만 보내었지 참으로 그 믿음으로 무엇인가 자신의 삶에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성령님에 관한 내용을 준비하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여 모든 일을 행하지 않는 나 자신을 나무라시는 듯합니다.
이런 일은 설교 저장하는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생활의 전반적인 모든 일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갈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인생의 감정만을 가지고 살았다가는 여태까지 수고한 모든 일들을 아니 내 인생을 망치고 헛되이 보낼 수도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5-6절 육신을 쫒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쫒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가장 보람이 있고 존귀한 귀한 자리에 서게 되고 성공을 기약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내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나에게 왜 함께 역사하십니까?
인간은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요사이 같은 더위가 계속된다면 정말로 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 온도가 올라가도 아니 일도만 더 올라가도 죽을 것만 같습니다.
요나는 햇볕을 가리는 박 넝쿨의 줄기를 벌레가 갉아 먹어 시들어버리니 그 일로 인하여 죽겠다고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습니까? 이게 인간 나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성령님은 이런 약한 나를 도우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도우시는 분으로 계시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영국의 스펄젼 목사님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이렇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물가에 사는 사람은 10살 남짓 되면 아버지에게 노 젓는 것을 배우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노를 저어 보라고 시킵니다. 보기는 쉬워도 노를 잡으면 잘 안됩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 흉내를 내 가면서 저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자기보다 큰 노를 잘 다루지를 못합니다. 노 하나만 다루기만 하자고 해도 힘이 드는데 센물살을 갈라가면서 배를 나가게 하려니까 자기의 힘으로는 부치는 일입니다. 잘안됩니다. 낑낑거리고 땀을 뻘뻘 흘리지만 배는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아들에게로닥아 와서는아들 등에 자기 몸을 딱 붙이고는 아들의 오른손 위에 아버지의 오른손을 얹고, 아들의 왼손에는 아버지의 왼손을 얹고는 노를 저어 줍니다. 그러면 아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편합니까? 아버지가젓는 대로따라 움직여 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노 젓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성령은 아들을 위해 배의 노를 함께 저어 주시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런의미에서돕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얘야, 그래 가지고 어디 되겠느냐? 너는 저기 가서앉아쉬고 있어, 내가 저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노를 저을때에도우시는 것입니다. 하고자 하는 자를 돕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고자 하는 자를 도운 다는 서양 속담이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의 연약함이 사라지고 강한 자가 되는 것이아닙니다.
갑자기 영적인 거인이 되는 것도 아니요,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때, 순종할 때 성령님은 나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자 할 때에 도움을 두는 자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려고 하는 충성심을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세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은 적극적이지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성령은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오셨고, 내가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에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내가 연약하지 않다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실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연약은 성령이 머물게 하는 필요조건이 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조건이라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나의연약은성령님을 머물게 하기 때문에 나의 연약은 감사의 조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보통 그 반대로 이 연약에 대해서과민 반응을보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거기에서 벗어나려고만 몸부림을 칩니다.
연약함을 가지고 탄식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비관을 합니다.
이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다고 자주 푸념을 합니다.
나의 연약은 탄식할 것도 아니요,실패하는 조건도 아니요,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연약이 나로 하여금 성공하게 하고,성력의 능력을체험하게 하는 비결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연약함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이성령을머물게 하는 조건이라고 하면, 오히려 바울처럼 감사해야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또한 성령님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감동시키십니다.
27절을 봅니다.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누구의 마음을 감찰한다는 말입니까? 나의 마음을 감독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마음을 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보십니다.
희미하고 침침한 눈으로 보시는 것 아닙니다.
성령께서 나의 마음을 보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를 하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우왕좌왕 하며,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합니다.
이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신 성령님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아십니다.
성령님은 나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이 본문에서 성령이 직접 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은 나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뜻에 따라서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도우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내가 드리는 기도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원하시는 기도 보다는 대체로 내 욕심에 가득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중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의 기도 제목은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면 내 아들중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하시고,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때에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구하는구나, 하나님의 뜻도 전혀 모르고 자기의 욕심대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오른편에 앉는 것과 왼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정해 놓았다. 다만 너희가 구할 것은 나의 마시는 잔과 나의 세례를 받는 것을 구하여야 한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자주하지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요구하는 것을 받았다고 해서 만사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정욕대로 구하는 기도가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그들을 복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만나를 먹고, 또 고기가 먹고 싶어서 고기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울면서 아이도 울고, 어른도 울면서 소리쳤어요. 하나님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실컷 먹었는지 죽은 사람의 잇 틀 사이에도 고깃점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106편 15절 보면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 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라고 하셨으니 인간의 요구가 나를 살리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나의 요구 충족을 위한 신앙이 되어서 안 되고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드리는 믿음이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의 기도를 드리도록 성령님은 역사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 할 수 없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은 나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시고, 뿐만 아니라 자주 자주 나의 마음을 열어서 탄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탄식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부르짖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님이 알려 주십니다.
이제 아셔야 합니다. 성령님은 내가 골방으로 들어가면, 함께 들어가시고, 내가 무릎 꿇으면, 함께 무릎 꿇으시고, 내가 입을 열면, 함께 여시고, 내가 탄식하면, 함께 탄식하시며, 내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면 함께 일서서시고 나의 삶의 현장으로 가면 그 현장 속에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모습 그대로 대하여 주실 것입니다.
한없이 겸손해 보십시오
성령님은 한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과 사랑과 구원과 축복 등으로 말 힐 수없는은혜로 내 곁에 와 계십니다.
지금 이런 성령님의 이와같은 은혜를 받는 자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한없이 교만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눈곱만큼도 없을 것입니다.
주신 것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하는 것 마다 하나님이 대적하시고 넘어지게 하시고 화나게 하시고 절망되게 하시고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무능하신 분으로 스스로 만드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비록 내가 연약 한 것 많아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습니다.
이 연약함을 통하여 나의 뜻을 구하고 성령님이나에게 역사하는 귀한 조건이 될 것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 성령님은 강하십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나의 성령님은 풍성하십니다.
나의 연약함을 이제 내어 놓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연약함이 성령님의 도움으로 기도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나의 기도가 항상 드려지는 아니 올리는능력 있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침내 나를 아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설교 준비를 하루 종일 다하고 이제 뿌듯한 마음으로 준비된 원고를 저장을 해야 하는데 저장할까요? 라는 질문에 당연히 예라고 해야 하는데 제 의지와 상관이 없이 아니오를 눌러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제 또 이런 실수가 저질러진 것입니다. 이 실수는 나를 얼마나 황당하게 하고 낭패가 되는지 너무나도 허탈하기 그지없습니다. 만약에 다른 이로 인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큰 소리를 치고 화도 낼 수가 있는데 전적으로 나 혼자 저질은 일이니 나를 원망하기도 그렇고 짜증을 내기도 그렇고 하는 수없이 또 설교를 작성해야만 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설교는 원고 설교입니다.
어떻게 하였습니다까지 문장에 맞춰서 하나하나 다 기록하는 것이지요
목사가 원고 없이 성경 본문만가지고 설교를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심을 기우려 기도하면서 원고 설교를 하려고 의도적으로 애를 쓰지요
설교 준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준비된 설교가 날아가 버렸으니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며 곰곰이 한번 다시 생각을 해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마귀의 방해하는 일일까? 아니면 내 실수일까? 아니면 성령님의 역사하심일까?
이래저래 생각을 해 봤지만 정신을 바르게 차리지 못한 내 실수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내가 잘못을 했더라도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그 동안 성령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전적인 마귀의 역사일까?성령님도 마귀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에 정신을 차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였다면 분명히 성령님이 도와주셨을 것입니다.
설교 준비 중에 설교를 날라 버리는 이런 일이 가끔 있습니다.
성령에 관하여 준비하던 중 과거에 저의 설교 중에서 성령에 관한 것을 어떤 내용인가를 살피는 중 021020 날 주일 설교 준비 때에 설교가 날아가 버린 이런 일이 또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내용이 참고가 될 만한 하여 그 때의 기록된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본문, 로마서 8:26-28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어제 아침시간부터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간까지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와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컴퓨터를 켜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기록한 모든 내용이 다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한지 참으로 속이 무지무지하게 상하였습니다. 컴퓨터 속에서 여기 저기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냥 컴퓨터가 꺼져도 저장되어 있기 마련인데 어찌 이렇게 감쪽같이 날아가 버리고 설교 제목만 덩그러니 남아 있느냐? 말입니다. 다시 설교를 준비하느라고 얼마나 분주했는지 모릅니다.
이게 우리 사람이 하는 일인가보다 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나라는 인생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요 또한 완전하지도 못한 자임을 실감이 갑니다.
우리 성도 중에 누가 핸드폰을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고 하지를 않았습니까?
무엇인가? 사람은 신이 아니요 완전하지 못한 인간임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한 예를 들었습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한 언론가 이요 골동품을 수집하는 이가 유럽의 한 왕가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구입하려고 유럽으로 가서 그 그릇을 찾는데 오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수년의 세월을 보내고 많은 수고 끝에 그 도자기의 정보를 알아내었습니다. 미국의 한 언론인이 수집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허탕을 치고 돌아와서 그 언론인이 누군가 하고 찾아보니 그 언론인이 다른 이가 아닌 본인이었고 오래 전에 자신이 그것을 구입해서 창고에다가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수고 그 시간이 너무 아까운 것이 아닙니까?
진작 기억을 하고 있었다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오늘 우리 신앙인들도 그러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지만은 헛된 세월만 보내었지 참으로 그 믿음으로 무엇인가 자신의 삶에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성령님에 관한 내용을 준비하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여 모든 일을 행하지 않는 나 자신을 나무라시는 듯합니다.
이런 일은 설교 저장하는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생활의 전반적인 모든 일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갈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인생의 감정만을 가지고 살았다가는 여태까지 수고한 모든 일들을 아니 내 인생을 망치고 헛되이 보낼 수도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5-6절 육신을 쫒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쫒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가장 보람이 있고 존귀한 귀한 자리에 서게 되고 성공을 기약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내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나에게 왜 함께 역사하십니까?
인간은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요사이 같은 더위가 계속된다면 정말로 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 온도가 올라가도 아니 일도만 더 올라가도 죽을 것만 같습니다.
요나는 햇볕을 가리는 박 넝쿨의 줄기를 벌레가 갉아 먹어 시들어버리니 그 일로 인하여 죽겠다고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습니까? 이게 인간 나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성령님은 이런 약한 나를 도우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도우시는 분으로 계시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영국의 스펄젼 목사님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이렇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물가에 사는 사람은 10살 남짓 되면 아버지에게 노 젓는 것을 배우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노를 저어 보라고 시킵니다. 보기는 쉬워도 노를 잡으면 잘 안됩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 흉내를 내 가면서 저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자기보다 큰 노를 잘 다루지를 못합니다. 노 하나만 다루기만 하자고 해도 힘이 드는데 센물살을 갈라가면서 배를 나가게 하려니까 자기의 힘으로는 부치는 일입니다. 잘안됩니다. 낑낑거리고 땀을 뻘뻘 흘리지만 배는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아들에게로닥아 와서는아들 등에 자기 몸을 딱 붙이고는 아들의 오른손 위에 아버지의 오른손을 얹고, 아들의 왼손에는 아버지의 왼손을 얹고는 노를 저어 줍니다. 그러면 아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편합니까? 아버지가젓는 대로따라 움직여 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노 젓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성령은 아들을 위해 배의 노를 함께 저어 주시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런의미에서돕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얘야, 그래 가지고 어디 되겠느냐? 너는 저기 가서앉아쉬고 있어, 내가 저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노를 저을때에도우시는 것입니다. 하고자 하는 자를 돕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고자 하는 자를 도운 다는 서양 속담이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의 연약함이 사라지고 강한 자가 되는 것이아닙니다.
갑자기 영적인 거인이 되는 것도 아니요,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때, 순종할 때 성령님은 나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자 할 때에 도움을 두는 자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려고 하는 충성심을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세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은 적극적이지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성령은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오셨고, 내가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에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내가 연약하지 않다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실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연약은 성령이 머물게 하는 필요조건이 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조건이라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나의연약은성령님을 머물게 하기 때문에 나의 연약은 감사의 조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보통 그 반대로 이 연약에 대해서과민 반응을보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거기에서 벗어나려고만 몸부림을 칩니다.
연약함을 가지고 탄식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비관을 합니다.
이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다고 자주 푸념을 합니다.
나의 연약은 탄식할 것도 아니요,실패하는 조건도 아니요,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연약이 나로 하여금 성공하게 하고,성력의 능력을체험하게 하는 비결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연약함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이성령을머물게 하는 조건이라고 하면, 오히려 바울처럼 감사해야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또한 성령님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감동시키십니다.
27절을 봅니다.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누구의 마음을 감찰한다는 말입니까? 나의 마음을 감독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마음을 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보십니다.
희미하고 침침한 눈으로 보시는 것 아닙니다.
성령께서 나의 마음을 보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를 하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우왕좌왕 하며,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합니다.
이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신 성령님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아십니다.
성령님은 나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이 본문에서 성령이 직접 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은 나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뜻에 따라서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도우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내가 드리는 기도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원하시는 기도 보다는 대체로 내 욕심에 가득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중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의 기도 제목은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면 내 아들중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하시고,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때에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구하는구나, 하나님의 뜻도 전혀 모르고 자기의 욕심대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오른편에 앉는 것과 왼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정해 놓았다. 다만 너희가 구할 것은 나의 마시는 잔과 나의 세례를 받는 것을 구하여야 한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자주하지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요구하는 것을 받았다고 해서 만사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정욕대로 구하는 기도가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그들을 복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만나를 먹고, 또 고기가 먹고 싶어서 고기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울면서 아이도 울고, 어른도 울면서 소리쳤어요. 하나님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실컷 먹었는지 죽은 사람의 잇 틀 사이에도 고깃점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106편 15절 보면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 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라고 하셨으니 인간의 요구가 나를 살리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나의 요구 충족을 위한 신앙이 되어서 안 되고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드리는 믿음이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의 기도를 드리도록 성령님은 역사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 할 수 없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은 나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시고, 뿐만 아니라 자주 자주 나의 마음을 열어서 탄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탄식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부르짖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님이 알려 주십니다.
이제 아셔야 합니다. 성령님은 내가 골방으로 들어가면, 함께 들어가시고, 내가 무릎 꿇으면, 함께 무릎 꿇으시고, 내가 입을 열면, 함께 여시고, 내가 탄식하면, 함께 탄식하시며, 내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면 함께 일서서시고 나의 삶의 현장으로 가면 그 현장 속에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모습 그대로 대하여 주실 것입니다.
한없이 겸손해 보십시오
성령님은 한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과 사랑과 구원과 축복 등으로 말 힐 수없는은혜로 내 곁에 와 계십니다.
지금 이런 성령님의 이와같은 은혜를 받는 자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한없이 교만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눈곱만큼도 없을 것입니다.
주신 것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하는 것 마다 하나님이 대적하시고 넘어지게 하시고 화나게 하시고 절망되게 하시고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무능하신 분으로 스스로 만드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비록 내가 연약 한 것 많아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습니다.
이 연약함을 통하여 나의 뜻을 구하고 성령님이나에게 역사하는 귀한 조건이 될 것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 성령님은 강하십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나의 성령님은 풍성하십니다.
나의 연약함을 이제 내어 놓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연약함이 성령님의 도움으로 기도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나의 기도가 항상 드려지는 아니 올리는능력 있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침내 나를 아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