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육의 정보다 더 뜨거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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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54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누가복음 9:57-62 혈육의 정보다 더 뜨거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자
이번 설 연휴 3-4일에 이동하는 인구가 6,3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대략 한 사람이 네 번 정도 움직이는 것으로 계산하면 이런 수치가 나온 다고 합니다.
중국의 20-30억 명이 20여 일간 움직이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부모 형제를 찾아 나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 미국 같은 사회에서는 같은 한국 민족이라도 이 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맞추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지난 1월 1일에 설이 다 끝났는데 이제 또무슨 설이야 는 식으로 시큰둥 하는 것 같아요 이 설은 중국과 우리나라만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설”이라는 문구 자체는 새해 첫날을 말하는 것이지 양력 음력으로 기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이미 양력을 기준으로 하는 생활로 완전히 바뀐 지 오래되어 양력1월1일이 지나면 누구나 예외 없이 새해가 됐다고 생각하지, 음력 1월1일이 되어서야 이제는 2006년의 새해가 밝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이 서구문명을 따라 간다는 것을 떠나서, 어차피 태양력을 기준으로 계절이 변하고, 거기에 적응해서 살수 밖에 없으므로, 양력을 기준으로 생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인의 정서에 음력에 대한 고집이 있는 것은, 양력을 일본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고 하여, 양력에 대한 반발심이 강하고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하듯이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 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만일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쓰지 않고, 일본의 명치유신 같은 것을 하여, 그때부터 양력을 쓰기 시작하고 일본점령하에 들어가지 않아서, 일본 것에 대한 반발심만 없었다면, 벌서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그 불편한 음력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도 정해진 양력이 아니라 수시로 변하는 음력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헷갈리고 불평한지 모릅니다.
요사이 태어나는 아이들에게도 아직 음력으로 생일을 정하십니까?
정부에서 한번 주관을 해서 음력을 다 양력으로 바꿔버리면 좋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양력설을 쉬도록 한적이 있지 않습니까?
하여튼 민족의 설 명절은 음력으로 지내왔으니 설날은 쉬고 가족들이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하니 참 좋은 날입니다. 선물 보따리를 싸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을 찾아 가니 말입니다.
저는 어제 배터리를 하나 살려고 테크노마트에 갔더니 벌써 문을 다 닫아 버렸더라고요 명절을 쉰다고 황당했습니다.
이제 고향에서 오는 이들을 맞이하는 분들이나 찾아가는 이들이 한결같이 인간 혈육의 정을 나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혈육의 정을 가리켜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하지만 과연 진한가 할 정도로 의심이 가고 불완전 한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누가 말하기를 우리 민족은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대단히 자랑을 하는데 어디에다가 그런 기준을 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세계 모든 민족이 우리 민족만큼 정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인간이 살아가는 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가정이 유지가 되고 종족이 펴지는 것 아닙니까?
정이란 사랑이 바탕이 되어 화해 화목하고 용서하고 피차 돕고 도와주는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세대는 세계의 민족들이 서로 화해를 외치고 자유 왕래를 하는데 어찌 정이 많은 이 민족은 해방이후 50-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외세 때문이라고 하지만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다른 사람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가정은 문제가 많습니다.
이거하나만 봐도 이 민족이 지독해도 이렇게 지독 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 자식을 만나지 못하게 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이용이나 하고 수가 틀리면 조금씩 만나게 했든 일을 그나마 못 만난다고 하고 말입니다.
정을 말하지만 정보다 물질적 유물론 사상이 더 지배적입니다.
공산주의 앞에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물질 앞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코 우리 민족이라고 다른 민족보다 정이 많다는 말은 이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약소민족일수록 정이 더 많은 것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저 아프리카에 빈민들이나 난민들 보십시오
워낙 우리 민족은 외세의 침입도 많이 받아 왔고 먹을 것이 없어 가난하였습니다.
산천에 나는 풀이란 풀은 못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다 뜯어 먹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인사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
사람이란 어디를 가나 어떤 피부색을 가진 민족이라도 다 똑같습니다.
다만 어떤 영향을 받았느냐? 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정이 외국인들에게 더 많이 있다고 생각 됩니다.
우리나라 어느 정이 많다는 가정이 피부 색깔이 다른 외국인 아이를 양자 삼아 제 친 자녀 이상으로 양육하는 집을 한 집이라도 보았습니까? 특히 저능아나 신체 불구한 아이를 잘 돌보아 줍니까?
갖다 버리거나 아니면 집안에 가둬 놓고 키웁니다.
절대로 우리 민족의 정신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살아온 생활 방식이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 민족의 정신을 좌우한 두 가지 사상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유교 하나는 무속 샤머니즘이라고 합니다. 유교가 무엇입니까?
종족 혈육의 보존 가치를 높이는 사상입니다.
유교 사상은 여인들의 잔혹상이라고 합니다. 여자분들 제대로 대접 못 받습니다.
나이 따지고 집안 따지고 양반 상놈 따지고 아들 따지고 다 유교의 소산입니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합니까?
또 자신들에게 잘 되는 일이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상이 무속 신앙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민족은 낮에는 유교로 포장이 되어 있고 밤에는 무속적이다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유교요 속으로는 샤마니즘적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우리 민족의 혈육의 정에 묻어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세계에서 한국 아이들이 제일 많이 입양이 되고 있습니다.
설을 맞이하여 수천만 명이 정을 그리워하며 정을 찾아 이동하는데 이런 혈육의 정만을 가지고 있다면 매일 매일 이동하고 같이 살아간다고 한들 어떻다는 것입니까?
무슨 큰 변화가 있고 무슨 큰 보람이 있고 의미가 있습니까?
종족 번식과 자신들의 번영과 이익을 위함에서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가서 조상 찾아보고 후손 찾아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한국인의 혈육의 정이랑 자신의 부모 자식간의 협소한 관계이지 더 이상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고 발전 할 수가 없는 한계를 드러내는 아주 폐쇄적인 정입니다.
성경에는 혈육의 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5:50 혈육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창6:12 땅에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敗壞)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건설적이지 못하고 파괴적이다 라는 말입니다.
혈육적인 것만으로는 말 그대로 파괴적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은 되지 못합니다
지금도 저는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를 혈육의 정을 생각하면 즐겁고 기쁘고 희망적이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괜히 슬퍼지고 안타깝고 후회적이고 과거의 추억에 매여 있게만 하는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 때에 어머니의 노래를 예배시 몇 해를 불러 보았는데 그게 별로 은혜롭지 못하더라고요
그 곡조가 슬픔을 더 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괜히 눈물만 나게 하고 더 이상 더 이하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도 혈육의 형제자매가 있지만 혈육이라는 이유만 가지고서 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혈육이라는 이유로 더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물나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하고 화를 나게 하고 드디어 죄를 짓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최초의 살인은 혈육 간의 형제인 형과 동생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혈육의 정이 자신들의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정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불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닙니까?
부모 자식의 정이라는 그것이 참으로 그 사람을 새롭게 하거나 죄악에서 구원 시키는 힘이 되지를 못하고 그렇지 못하는 슬픔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부모가 자식에게 인간적인 정만을 많이 쏟아 놓으면 그 자녀 참으로 잘 될 것 같지만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로 만들어 놓고 맙니다.
그리고 그 정은 역시 자신들의 욕구 충족이 안 될 때에는 무서운 죄악으로 변하게 됩니다.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은 다른 형제에게 왕의 자리를 주지 않기 위하여 형제도 죽이고 급기야는 아버지까지도 죽이려는 폭군이 되지 않았습니까?
야곱은 타향살이 수십 년 만에 형에서를 만났을 때에 혈육의 정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그 정을 나누었지만 그 정은 혈육의 정으로 끝나버렸지 더 이상 그들의 관계를 새롭게 하거나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보면 부모 자식간에 참으로 눈물겨운 정을 나누는 모습들을 봅니다.
백세가 넘은 노모를 칠십이 넘은 아들이 지극 정성으로 돌보고 하지만 그 혈육의 정이 더 이상 무슨 희망을 가져온다든지 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인가 안 되다 하는 슬픔을 자아내는 안타까움 밖에 아니었습니다.
이 설날의 계절에 혈육의 정으로만 나누는 시간이 되지 말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정을 나누는 계기를 만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은 어떠한 것입니까?
부모 자식간의 혈육의 정보다 생명적인 것입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혈육의 정으로 부모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내 부모를 바라봅니다. 그랬더니 어떠하신 줄 아십니까?
과거에 서로가 서로에게 잘해주지 못하여 후회스럽고 안타까운 슬픔의 부모님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장차 천국에서 기쁨으로 만나 뵐 수 있는 소망의 분으로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는 만나 뵐 텐데 아니 곧 만나 뵐 터인데 얼마나 내 삶에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더 용기 있게 더 뜻뜻하게 살아 갈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의 정에 매여 평생을 죄인같이 살아가고 과거에 매여 슬퍼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이 망령에서 자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무덤에 가서 애곡 할 분도 아니요 더욱이 무덤에 절을 하는 일도 없는 것이지요
또한 기일을 챙겨 음식 장만하여 제사를 드릴 일도 없는 것입니다.
왜 죽은 조상에 관심을 유난히 드리고 있느냐?
그 조상에게 잘하면 잘되고 못하면 못되고 합니까?
세상에서의 인간 최고의 정점이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자신도 대접해야 잘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 잘 대접 받아 보자는 일입니다.
더 이상 이런 어리석음에 매여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먼저 돌아가신 분이 이 곳에 오실 수도 없지만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들려 줄 기회가 있다면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내가 죽어 보니깐 지옥과 천국이 있는데 너희들은 지옥에 오지 말고 예수 믿고 천국에 가거라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 안 믿고 죽은 부자가 죽고 보니 정말로 그러하거든요
그래서 그의 소원은 이 복음을 살아 있는 부모 형제에게 전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 설날에 혈육의 정에만 매여 있지 마시고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관여하게 하고 나는 복음에 나서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세상의 혈육의 정만의 나눔보다도 그리스도와 교제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한번은 예수님에게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 왔습니다.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으신다는 말에 예수님은 누가 내 부모요 내 형제입니까? 라고 반문하며
내 부모와 내 형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혈육의 정의 교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이웃을 사랑하는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아직 풀리지 않는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아직도 혈육의 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이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오늘 새벽 기도 시간에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혈육에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다 쓰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이 그 사람에게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전북 김제 백구산성교회 유수방(64) 목사는 수년간 병원에서 신장투석으로 고통을 받던 송인철(36)씨에게 지난 달 28일 자신의 신장을 떼 주었습니다.
그는 전주 예수 병원에 찾아가서 자신의 조건과 맞는 송씨에게 아무런 조건이 없이 이 일을 하였습니다.
유 목사는 \\주님이 건강을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면서 \\조그만 사랑으로 한 생명의 영혼을 구원하게 돼 더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로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가 생명을 버리심으로 사랑을 알고 이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내 가족의 인사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인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민족의 이 혈육의 정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기적이 일어 날 것이며 이 민족에게는 틀림없이 기적이 일어 날 것입니다
이제 혈육의 정을 찾아 헤매어 대이동을 하는 민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는 민족의 대 이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일에 내가 서고 우리 교회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이번 설 연휴 3-4일에 이동하는 인구가 6,3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대략 한 사람이 네 번 정도 움직이는 것으로 계산하면 이런 수치가 나온 다고 합니다.
중국의 20-30억 명이 20여 일간 움직이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부모 형제를 찾아 나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 미국 같은 사회에서는 같은 한국 민족이라도 이 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맞추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지난 1월 1일에 설이 다 끝났는데 이제 또무슨 설이야 는 식으로 시큰둥 하는 것 같아요 이 설은 중국과 우리나라만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설”이라는 문구 자체는 새해 첫날을 말하는 것이지 양력 음력으로 기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이미 양력을 기준으로 하는 생활로 완전히 바뀐 지 오래되어 양력1월1일이 지나면 누구나 예외 없이 새해가 됐다고 생각하지, 음력 1월1일이 되어서야 이제는 2006년의 새해가 밝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이 서구문명을 따라 간다는 것을 떠나서, 어차피 태양력을 기준으로 계절이 변하고, 거기에 적응해서 살수 밖에 없으므로, 양력을 기준으로 생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인의 정서에 음력에 대한 고집이 있는 것은, 양력을 일본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고 하여, 양력에 대한 반발심이 강하고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하듯이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 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만일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쓰지 않고, 일본의 명치유신 같은 것을 하여, 그때부터 양력을 쓰기 시작하고 일본점령하에 들어가지 않아서, 일본 것에 대한 반발심만 없었다면, 벌서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그 불편한 음력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도 정해진 양력이 아니라 수시로 변하는 음력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헷갈리고 불평한지 모릅니다.
요사이 태어나는 아이들에게도 아직 음력으로 생일을 정하십니까?
정부에서 한번 주관을 해서 음력을 다 양력으로 바꿔버리면 좋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양력설을 쉬도록 한적이 있지 않습니까?
하여튼 민족의 설 명절은 음력으로 지내왔으니 설날은 쉬고 가족들이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하니 참 좋은 날입니다. 선물 보따리를 싸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을 찾아 가니 말입니다.
저는 어제 배터리를 하나 살려고 테크노마트에 갔더니 벌써 문을 다 닫아 버렸더라고요 명절을 쉰다고 황당했습니다.
이제 고향에서 오는 이들을 맞이하는 분들이나 찾아가는 이들이 한결같이 인간 혈육의 정을 나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혈육의 정을 가리켜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하지만 과연 진한가 할 정도로 의심이 가고 불완전 한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누가 말하기를 우리 민족은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대단히 자랑을 하는데 어디에다가 그런 기준을 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세계 모든 민족이 우리 민족만큼 정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인간이 살아가는 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가정이 유지가 되고 종족이 펴지는 것 아닙니까?
정이란 사랑이 바탕이 되어 화해 화목하고 용서하고 피차 돕고 도와주는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세대는 세계의 민족들이 서로 화해를 외치고 자유 왕래를 하는데 어찌 정이 많은 이 민족은 해방이후 50-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외세 때문이라고 하지만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다른 사람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가정은 문제가 많습니다.
이거하나만 봐도 이 민족이 지독해도 이렇게 지독 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 자식을 만나지 못하게 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이용이나 하고 수가 틀리면 조금씩 만나게 했든 일을 그나마 못 만난다고 하고 말입니다.
정을 말하지만 정보다 물질적 유물론 사상이 더 지배적입니다.
공산주의 앞에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물질 앞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코 우리 민족이라고 다른 민족보다 정이 많다는 말은 이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약소민족일수록 정이 더 많은 것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저 아프리카에 빈민들이나 난민들 보십시오
워낙 우리 민족은 외세의 침입도 많이 받아 왔고 먹을 것이 없어 가난하였습니다.
산천에 나는 풀이란 풀은 못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다 뜯어 먹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인사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
사람이란 어디를 가나 어떤 피부색을 가진 민족이라도 다 똑같습니다.
다만 어떤 영향을 받았느냐? 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정이 외국인들에게 더 많이 있다고 생각 됩니다.
우리나라 어느 정이 많다는 가정이 피부 색깔이 다른 외국인 아이를 양자 삼아 제 친 자녀 이상으로 양육하는 집을 한 집이라도 보았습니까? 특히 저능아나 신체 불구한 아이를 잘 돌보아 줍니까?
갖다 버리거나 아니면 집안에 가둬 놓고 키웁니다.
절대로 우리 민족의 정신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살아온 생활 방식이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 민족의 정신을 좌우한 두 가지 사상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유교 하나는 무속 샤머니즘이라고 합니다. 유교가 무엇입니까?
종족 혈육의 보존 가치를 높이는 사상입니다.
유교 사상은 여인들의 잔혹상이라고 합니다. 여자분들 제대로 대접 못 받습니다.
나이 따지고 집안 따지고 양반 상놈 따지고 아들 따지고 다 유교의 소산입니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합니까?
또 자신들에게 잘 되는 일이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상이 무속 신앙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민족은 낮에는 유교로 포장이 되어 있고 밤에는 무속적이다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유교요 속으로는 샤마니즘적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우리 민족의 혈육의 정에 묻어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세계에서 한국 아이들이 제일 많이 입양이 되고 있습니다.
설을 맞이하여 수천만 명이 정을 그리워하며 정을 찾아 이동하는데 이런 혈육의 정만을 가지고 있다면 매일 매일 이동하고 같이 살아간다고 한들 어떻다는 것입니까?
무슨 큰 변화가 있고 무슨 큰 보람이 있고 의미가 있습니까?
종족 번식과 자신들의 번영과 이익을 위함에서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가서 조상 찾아보고 후손 찾아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한국인의 혈육의 정이랑 자신의 부모 자식간의 협소한 관계이지 더 이상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고 발전 할 수가 없는 한계를 드러내는 아주 폐쇄적인 정입니다.
성경에는 혈육의 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5:50 혈육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창6:12 땅에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敗壞)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건설적이지 못하고 파괴적이다 라는 말입니다.
혈육적인 것만으로는 말 그대로 파괴적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은 되지 못합니다
지금도 저는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를 혈육의 정을 생각하면 즐겁고 기쁘고 희망적이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괜히 슬퍼지고 안타깝고 후회적이고 과거의 추억에 매여 있게만 하는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 때에 어머니의 노래를 예배시 몇 해를 불러 보았는데 그게 별로 은혜롭지 못하더라고요
그 곡조가 슬픔을 더 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괜히 눈물만 나게 하고 더 이상 더 이하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도 혈육의 형제자매가 있지만 혈육이라는 이유만 가지고서 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혈육이라는 이유로 더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물나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하고 화를 나게 하고 드디어 죄를 짓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최초의 살인은 혈육 간의 형제인 형과 동생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혈육의 정이 자신들의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정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불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닙니까?
부모 자식의 정이라는 그것이 참으로 그 사람을 새롭게 하거나 죄악에서 구원 시키는 힘이 되지를 못하고 그렇지 못하는 슬픔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부모가 자식에게 인간적인 정만을 많이 쏟아 놓으면 그 자녀 참으로 잘 될 것 같지만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로 만들어 놓고 맙니다.
그리고 그 정은 역시 자신들의 욕구 충족이 안 될 때에는 무서운 죄악으로 변하게 됩니다.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은 다른 형제에게 왕의 자리를 주지 않기 위하여 형제도 죽이고 급기야는 아버지까지도 죽이려는 폭군이 되지 않았습니까?
야곱은 타향살이 수십 년 만에 형에서를 만났을 때에 혈육의 정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그 정을 나누었지만 그 정은 혈육의 정으로 끝나버렸지 더 이상 그들의 관계를 새롭게 하거나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보면 부모 자식간에 참으로 눈물겨운 정을 나누는 모습들을 봅니다.
백세가 넘은 노모를 칠십이 넘은 아들이 지극 정성으로 돌보고 하지만 그 혈육의 정이 더 이상 무슨 희망을 가져온다든지 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인가 안 되다 하는 슬픔을 자아내는 안타까움 밖에 아니었습니다.
이 설날의 계절에 혈육의 정으로만 나누는 시간이 되지 말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정을 나누는 계기를 만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은 어떠한 것입니까?
부모 자식간의 혈육의 정보다 생명적인 것입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혈육의 정으로 부모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내 부모를 바라봅니다. 그랬더니 어떠하신 줄 아십니까?
과거에 서로가 서로에게 잘해주지 못하여 후회스럽고 안타까운 슬픔의 부모님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장차 천국에서 기쁨으로 만나 뵐 수 있는 소망의 분으로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는 만나 뵐 텐데 아니 곧 만나 뵐 터인데 얼마나 내 삶에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더 용기 있게 더 뜻뜻하게 살아 갈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의 정에 매여 평생을 죄인같이 살아가고 과거에 매여 슬퍼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이 망령에서 자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무덤에 가서 애곡 할 분도 아니요 더욱이 무덤에 절을 하는 일도 없는 것이지요
또한 기일을 챙겨 음식 장만하여 제사를 드릴 일도 없는 것입니다.
왜 죽은 조상에 관심을 유난히 드리고 있느냐?
그 조상에게 잘하면 잘되고 못하면 못되고 합니까?
세상에서의 인간 최고의 정점이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자신도 대접해야 잘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 잘 대접 받아 보자는 일입니다.
더 이상 이런 어리석음에 매여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먼저 돌아가신 분이 이 곳에 오실 수도 없지만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들려 줄 기회가 있다면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내가 죽어 보니깐 지옥과 천국이 있는데 너희들은 지옥에 오지 말고 예수 믿고 천국에 가거라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 안 믿고 죽은 부자가 죽고 보니 정말로 그러하거든요
그래서 그의 소원은 이 복음을 살아 있는 부모 형제에게 전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 설날에 혈육의 정에만 매여 있지 마시고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관여하게 하고 나는 복음에 나서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세상의 혈육의 정만의 나눔보다도 그리스도와 교제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한번은 예수님에게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 왔습니다.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으신다는 말에 예수님은 누가 내 부모요 내 형제입니까? 라고 반문하며
내 부모와 내 형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혈육의 정의 교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이웃을 사랑하는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아직 풀리지 않는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아직도 혈육의 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이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오늘 새벽 기도 시간에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혈육에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다 쓰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이 그 사람에게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전북 김제 백구산성교회 유수방(64) 목사는 수년간 병원에서 신장투석으로 고통을 받던 송인철(36)씨에게 지난 달 28일 자신의 신장을 떼 주었습니다.
그는 전주 예수 병원에 찾아가서 자신의 조건과 맞는 송씨에게 아무런 조건이 없이 이 일을 하였습니다.
유 목사는 \\주님이 건강을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면서 \\조그만 사랑으로 한 생명의 영혼을 구원하게 돼 더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로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가 생명을 버리심으로 사랑을 알고 이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내 가족의 인사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인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민족의 이 혈육의 정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기적이 일어 날 것이며 이 민족에게는 틀림없이 기적이 일어 날 것입니다
이제 혈육의 정을 찾아 헤매어 대이동을 하는 민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는 민족의 대 이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일에 내가 서고 우리 교회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