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증거에는 생명을 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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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375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사도행전 20:22-24복음 증거에는 생명을 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탈리아 토리노에서는 동계 올림픽 경기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쇼트트랙 스피드 경기에서 금메달 6개를 따지 않았습니까?
멋진 승부가 매 경기마다 펼쳐지고 있는데 그 중에 한 경기를 제가 보게 되었는데 감동적이었습니다.
크로스컨트리 여자 30킬로미터 경기입니다.
스키보드를 신고 높이 200미터나 되는 언덕을 오르내리며 달리는 경기입니다.
이 경기에 37세 된 주부가 아이를 낳게 되어 2년간 쉬고 출전을 하여 우승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도 출전을 하였는데 20여 킬로를 오십 몇 위로 뛰다가 기권을 하였습니다.
이 경기가 얼마나 힘이든 경기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심전력을 다하고 1, 2, 3위가 뛰어 오는데 결승점을 통과하고는 모두가 일제히 쓰려져 숨을 헐떡이고 있더니 우승한 선수가 벌떡 일어나드니 자신의 2살 된 아이를 안고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기쁨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기에 자신의 온 힘을 다 기우리고 달리다가 그리고 쓰려지는 것입니다.
마라톤 경기의 효시가 42.195킬로를 달려온 병사가 아테네가 전쟁에서 승리를 알리고 쓰려졌다는 것 아닙니까?
사람은 원래가 죽고 싶은 본능과 살고 싶은 본능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극단적 감정 표현은 죽음과 관련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행복에 대해서 죽어도 좋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한이 없다.또 죽어도 행복하다. 죽음과 관련해서 연관해서표현하기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극치(極値)적 표현이라는 것은 이대로 죽어도 만족하다는 바로 거기에 행복의 절정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온 힘을 기우려야 할 것이 있고 온 힘을 다 기우림으로 오히려 만족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다하여도 아까운 것이 없고 오히려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여겨지십니까?
당연히 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집사님 한분과 돈 관계가 있으신 한분이 어그저께 빌려 준 돈도 못 받고 그 사람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답니다.
나이는 45세입니다.
50이 벌써 넘어선 저로서는 생각이 다시 듭니다.
나도 갈 수 있는데......
그런데 그분이 죽고 난 뒤에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는데 여기 저기 돈을 꾸고는 가지고 가면 함흥차사가 되니 더욱이 모 이름 있는 교회 집사라고 하고 믿음을 자랑하고 다녔는데 돈 만을 위하는 사람으로 전락이 되고 말았으니 마치 그 사람은 돈을 위하여 살다간 인생같이 비쳐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나는 이 시간에 딱 쓰려진다고 한다면 무엇을 위하다가 갔다고 주위에서 말 하겠습니까?
본문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일이 복음 증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는 자라고 자신은 입버릇처럼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복음 증거하는 일에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하고 많은 일에 한번 뿐인 인생을 걸만 한 일이 많을 텐데 왜 복음에 하나 뿐인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보니 삶의 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구나 는 사명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이 세상에서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내 인생의 여정이 복음을 위하여 달려가야 할 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에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자신의 가문이 좋다고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그 말은 그의 인생은 가문을 위하여 살았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가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여자 아이들을 그냥 죽여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또 그의 많은 학문을 자랑하였습니다. 철학 박사 법학 박사 등등입니다.
요사이로 말하면 공부 공부 제일주의입니다.
공부를 못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안 되고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시대입니다.
꼭 시험의 계절이 오면 젊은 아이들이 공부를 비관하고 자살을 하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의 능력을 드러내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습니다.
관료 판 검사 등을 인생 목표를 삼는 일이겠지요
요사이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마는 저도 판검사가 되려고 법대에 갔다가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민족주의 자였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은 최고의 국민임을 지칭하는 표입니다.
지금도 민족사상의 혼령이 되 살아나고 있지 않습니까?
독일의 히틀러 정신이 베를린에서 나타나 이민족 학생들이 테러를 당하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호주의 백호 사상등
그리고 종교사상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핍박하고 옥에 넣고 죽이는 일을 한 사람입니다.
이슬람이 이렇게도 과격 한지 모르겠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런데 자신의 종교 안에서도 죽이고 살해하고 이락크 안에서도 수니파 시아파 회교도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살육 전쟁이 끓어지지 않아요
어저께는 세계 최대 정유시설을(세계의 11% 시설) 빈 라덴 소속의 알카이다의 자살테러 범들이 차량으로 돌진하여 폭파시키려다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 외에도 그는 인간적으로 자신을 위하는 삶이 뚜렷하였습니다.
아마 우리 모두도 이런 한계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이 모든 것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 배설물과 같은 것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러한 것들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고 싶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포악 자와 훼방자로 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들어내고 싶고 예수를 위하여 사는 것만큼 고상하고도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할렐루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 영광을 들어내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담대하게 드릴 수 있음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 곧 성령님이 감화 감동을 주어 구원의 예수님을 만난 그 사실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열정적으로 복음에 나 설 수 있음은 성령님이 그에게 떠나지 않고 감화 감동하심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은 복음이 전부였습니다.
왜 나에게는 복음의 열정이 없나?
그것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어찌 말하지 않으리오.
지금도 내 가운데 계신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복을 전하지 않으면 화 받을까? 두려울 정도라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의 빚진 자요
이방인의 전도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모습이라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귀한 자라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만난 성도들의 삶의 초점은 모두가 복음에 초점을 맞춰져야 합니다.
교회에 여러 직분들이 있고, 여러 기관들이 있습니다.
이 기관들이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기관들인 것입니다.
모여서 교제나 하고 모여 밥이나 먹자는 기관이 아닙니다.
물론 런 일들도 다 복음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 역시 복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목적을 잃어버린 선교 기관이라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복음을 위하고 우리 선교회등 각 기관에서 이 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 전도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토론하고 힘을 합하여 전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선교회가 각 기관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선교지요,전도할 땅이요, 나는 내가 일하고 있는 그곳에 보냄 받은 전도사요, 선교사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생명을 걸 수밖에 없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이 무엇보다 우선적임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선적이어야 하는가?
이것이야 말로 내 삶을 평안하게하고 또한 가치 있게 만드는 일입니다.
우선적이라고 하면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이 총 동원되고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왜 성도들이 생활에 결실을 보지 못하느냐?
복음적인 일에 우선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로 돌아 보는 자는 복음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소알 땅이라는 곳에 롯의 처가 소금 기둥이 되어 있었는데 과연 그곳의 땅 모두가 소금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롯의 처는 한 없이 슬프게 서 있었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복음의 장애를 만든 다 면은 나로 하여금 가장 슬픈 자로 만들고 잇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업 때문에 핑계를 된다면 자식 때문에 핑계를 된다면 결코 그 사업은 성공이 되지 못할 것이며 그 자녀 역시 출세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 최선을 다 한다면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 일어 날 것입니다.
성탄이 될 때마다 듣게 되는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은 원래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였다고 합니다.
언젠가 그가 오르간을 연주하였을 때많은 사람들이 기립박수를하고 크게 환호를 하고, 큰 칭찬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의 연주는 두 다리와 열 손가락만 가지고는 모자라는 연주 같은데 이렇게 연주를 잘하게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이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을 때 내 마음과 생각과 힘과 목숨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 여기서 죽어도 좋다하는 마음으로 연주합니다.그래서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사노라고 하지만 너무나도 복음에는 인색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 혼자만의 종교 생활이 최고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전하지 않는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팔을 볼지 않는데 어찌 전쟁을 준비하겠으며 나팔을 불지 않는데 어찌 전쟁에 나아가리요
이제 나에게는 복음을 최우선으로 하여 살아야 하는 삶이 나를 가장 복되게 하고 사나 죽으나 나를 가장 복되게 할 것입니다.
왜 나의 삶에 박수가 없습니까?
복음에 너무 인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말과 같이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자기를 위해 죽는자도 없다.아무리 자기를 위해살려고 해도 살길이 없어요. 부득불 남을 위해 살고 남을위해 죽게 되어 있어요.
이런 사실을 안다면 복음에 열정적이지 않을 수없는 것입니다.
왜 복음에 생명을 드려야 합니까?
이 복음으로 모든 이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누가 이런 선언을 한 분이 있습니까!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담배를 무서워하지 않고 술 마시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라도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의사 선생님이\\당신! 술 담배 끊지 않으면 얼마 살지 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살 수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한마디에 충격을 받고 그렇게 좋아하는 술과 담배를 끊습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더 확실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모시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반드시 살 수 없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여러분! 몸속에 암 세포가 생기면없어지는 것은 육체뿐입니다. 잃어버리는 것도 육체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다른 것 다 가지고있고, 다 잘해도 예수 믿지 않으면 육체도 망하고 영혼도 망하여 처절한 지옥이 그 사람을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대상이 여러분의 부모일 수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일 수 있고, 사랑하는 연인일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라도 내 생명을 걸고 복음의 프로그램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지 내 인생이 불행하지 않고 내가 살고 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사는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
지금 이탈리아 토리노에서는 동계 올림픽 경기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쇼트트랙 스피드 경기에서 금메달 6개를 따지 않았습니까?
멋진 승부가 매 경기마다 펼쳐지고 있는데 그 중에 한 경기를 제가 보게 되었는데 감동적이었습니다.
크로스컨트리 여자 30킬로미터 경기입니다.
스키보드를 신고 높이 200미터나 되는 언덕을 오르내리며 달리는 경기입니다.
이 경기에 37세 된 주부가 아이를 낳게 되어 2년간 쉬고 출전을 하여 우승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도 출전을 하였는데 20여 킬로를 오십 몇 위로 뛰다가 기권을 하였습니다.
이 경기가 얼마나 힘이든 경기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심전력을 다하고 1, 2, 3위가 뛰어 오는데 결승점을 통과하고는 모두가 일제히 쓰려져 숨을 헐떡이고 있더니 우승한 선수가 벌떡 일어나드니 자신의 2살 된 아이를 안고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기쁨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기에 자신의 온 힘을 다 기우리고 달리다가 그리고 쓰려지는 것입니다.
마라톤 경기의 효시가 42.195킬로를 달려온 병사가 아테네가 전쟁에서 승리를 알리고 쓰려졌다는 것 아닙니까?
사람은 원래가 죽고 싶은 본능과 살고 싶은 본능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극단적 감정 표현은 죽음과 관련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행복에 대해서 죽어도 좋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한이 없다.또 죽어도 행복하다. 죽음과 관련해서 연관해서표현하기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극치(極値)적 표현이라는 것은 이대로 죽어도 만족하다는 바로 거기에 행복의 절정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온 힘을 기우려야 할 것이 있고 온 힘을 다 기우림으로 오히려 만족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다하여도 아까운 것이 없고 오히려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여겨지십니까?
당연히 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집사님 한분과 돈 관계가 있으신 한분이 어그저께 빌려 준 돈도 못 받고 그 사람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답니다.
나이는 45세입니다.
50이 벌써 넘어선 저로서는 생각이 다시 듭니다.
나도 갈 수 있는데......
그런데 그분이 죽고 난 뒤에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는데 여기 저기 돈을 꾸고는 가지고 가면 함흥차사가 되니 더욱이 모 이름 있는 교회 집사라고 하고 믿음을 자랑하고 다녔는데 돈 만을 위하는 사람으로 전락이 되고 말았으니 마치 그 사람은 돈을 위하여 살다간 인생같이 비쳐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나는 이 시간에 딱 쓰려진다고 한다면 무엇을 위하다가 갔다고 주위에서 말 하겠습니까?
본문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일이 복음 증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는 자라고 자신은 입버릇처럼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복음 증거하는 일에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하고 많은 일에 한번 뿐인 인생을 걸만 한 일이 많을 텐데 왜 복음에 하나 뿐인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보니 삶의 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구나 는 사명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이 세상에서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내 인생의 여정이 복음을 위하여 달려가야 할 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에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자신의 가문이 좋다고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그 말은 그의 인생은 가문을 위하여 살았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가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여자 아이들을 그냥 죽여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또 그의 많은 학문을 자랑하였습니다. 철학 박사 법학 박사 등등입니다.
요사이로 말하면 공부 공부 제일주의입니다.
공부를 못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안 되고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시대입니다.
꼭 시험의 계절이 오면 젊은 아이들이 공부를 비관하고 자살을 하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의 능력을 드러내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습니다.
관료 판 검사 등을 인생 목표를 삼는 일이겠지요
요사이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마는 저도 판검사가 되려고 법대에 갔다가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민족주의 자였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은 최고의 국민임을 지칭하는 표입니다.
지금도 민족사상의 혼령이 되 살아나고 있지 않습니까?
독일의 히틀러 정신이 베를린에서 나타나 이민족 학생들이 테러를 당하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호주의 백호 사상등
그리고 종교사상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핍박하고 옥에 넣고 죽이는 일을 한 사람입니다.
이슬람이 이렇게도 과격 한지 모르겠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런데 자신의 종교 안에서도 죽이고 살해하고 이락크 안에서도 수니파 시아파 회교도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살육 전쟁이 끓어지지 않아요
어저께는 세계 최대 정유시설을(세계의 11% 시설) 빈 라덴 소속의 알카이다의 자살테러 범들이 차량으로 돌진하여 폭파시키려다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 외에도 그는 인간적으로 자신을 위하는 삶이 뚜렷하였습니다.
아마 우리 모두도 이런 한계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이 모든 것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 배설물과 같은 것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러한 것들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고 싶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포악 자와 훼방자로 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들어내고 싶고 예수를 위하여 사는 것만큼 고상하고도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할렐루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 영광을 들어내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담대하게 드릴 수 있음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 곧 성령님이 감화 감동을 주어 구원의 예수님을 만난 그 사실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열정적으로 복음에 나 설 수 있음은 성령님이 그에게 떠나지 않고 감화 감동하심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은 복음이 전부였습니다.
왜 나에게는 복음의 열정이 없나?
그것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어찌 말하지 않으리오.
지금도 내 가운데 계신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복을 전하지 않으면 화 받을까? 두려울 정도라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의 빚진 자요
이방인의 전도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모습이라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귀한 자라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만난 성도들의 삶의 초점은 모두가 복음에 초점을 맞춰져야 합니다.
교회에 여러 직분들이 있고, 여러 기관들이 있습니다.
이 기관들이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기관들인 것입니다.
모여서 교제나 하고 모여 밥이나 먹자는 기관이 아닙니다.
물론 런 일들도 다 복음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 역시 복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목적을 잃어버린 선교 기관이라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복음을 위하고 우리 선교회등 각 기관에서 이 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 전도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토론하고 힘을 합하여 전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선교회가 각 기관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선교지요,전도할 땅이요, 나는 내가 일하고 있는 그곳에 보냄 받은 전도사요, 선교사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생명을 걸 수밖에 없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이 무엇보다 우선적임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선적이어야 하는가?
이것이야 말로 내 삶을 평안하게하고 또한 가치 있게 만드는 일입니다.
우선적이라고 하면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이 총 동원되고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왜 성도들이 생활에 결실을 보지 못하느냐?
복음적인 일에 우선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로 돌아 보는 자는 복음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소알 땅이라는 곳에 롯의 처가 소금 기둥이 되어 있었는데 과연 그곳의 땅 모두가 소금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롯의 처는 한 없이 슬프게 서 있었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복음의 장애를 만든 다 면은 나로 하여금 가장 슬픈 자로 만들고 잇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업 때문에 핑계를 된다면 자식 때문에 핑계를 된다면 결코 그 사업은 성공이 되지 못할 것이며 그 자녀 역시 출세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 최선을 다 한다면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 일어 날 것입니다.
성탄이 될 때마다 듣게 되는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은 원래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였다고 합니다.
언젠가 그가 오르간을 연주하였을 때많은 사람들이 기립박수를하고 크게 환호를 하고, 큰 칭찬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의 연주는 두 다리와 열 손가락만 가지고는 모자라는 연주 같은데 이렇게 연주를 잘하게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이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을 때 내 마음과 생각과 힘과 목숨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 여기서 죽어도 좋다하는 마음으로 연주합니다.그래서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사노라고 하지만 너무나도 복음에는 인색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 혼자만의 종교 생활이 최고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전하지 않는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팔을 볼지 않는데 어찌 전쟁을 준비하겠으며 나팔을 불지 않는데 어찌 전쟁에 나아가리요
이제 나에게는 복음을 최우선으로 하여 살아야 하는 삶이 나를 가장 복되게 하고 사나 죽으나 나를 가장 복되게 할 것입니다.
왜 나의 삶에 박수가 없습니까?
복음에 너무 인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말과 같이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자기를 위해 죽는자도 없다.아무리 자기를 위해살려고 해도 살길이 없어요. 부득불 남을 위해 살고 남을위해 죽게 되어 있어요.
이런 사실을 안다면 복음에 열정적이지 않을 수없는 것입니다.
왜 복음에 생명을 드려야 합니까?
이 복음으로 모든 이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누가 이런 선언을 한 분이 있습니까!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담배를 무서워하지 않고 술 마시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라도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의사 선생님이\\당신! 술 담배 끊지 않으면 얼마 살지 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살 수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한마디에 충격을 받고 그렇게 좋아하는 술과 담배를 끊습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더 확실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모시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반드시 살 수 없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여러분! 몸속에 암 세포가 생기면없어지는 것은 육체뿐입니다. 잃어버리는 것도 육체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다른 것 다 가지고있고, 다 잘해도 예수 믿지 않으면 육체도 망하고 영혼도 망하여 처절한 지옥이 그 사람을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대상이 여러분의 부모일 수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일 수 있고, 사랑하는 연인일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라도 내 생명을 걸고 복음의 프로그램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지 내 인생이 불행하지 않고 내가 살고 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사는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